[종가의 술과 음식 이야기 .24] 밀양 손성증 종가 ‘문어수란채국’

  • 김봉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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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5-05-21   |  발행일 2015-05-21 제22면   |  수정 2015-05-21
뽀얀 국물에 잣기름 둥둥…낯설지만 숟가락 못놓는 ‘반전의 궁중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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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묵재 손성증 종가의 대표적 내림음식인 문어수란채국(왼쪽은 국물을 붓기 전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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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성증 종가의 가양주 ‘교동 방문주’가 발효되고 있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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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손성증 종가 종택의 사랑채인 몽맹헌(夢孟軒). 1900년경 근대공법을 함께 사용해 지은 건물이다.


경남 밀양의 밀양향교 아래에 멋진 한옥 고택이 수십 채 모여 있어 눈길을 끈다. 오랫동안 밀양의 터줏대감 역할을 해온 밀성(밀양)손씨 집성촌이다. 이곳에는 현재 20여 가구가 남아있지만, 예전에는 100가구가 넘는 손씨들이 세를 과시하며 살았다. 이곳 한옥 중에서도 밀양향교 바로 앞에 있는 인묵재(忍默齋) 손성증(1776~?) 종가의 고택이 중심 건물이다. 문화재(경남문화재자료 161호)로 지정된 이 고택은 100칸이 넘는 화려한 대저택이다. 예전에는 대문 수만 12개나 되어 ‘열두대문 고대광실’로 소문났던 만석꾼 집이었다. 최근 조사해보니 실제 102칸 저택으로 확인됐다는 이 종택은 ‘배 부르면 손 부잣집 부럽지 않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의 세도가 주인공이 살던 공간이다. 이 손성증 종가에도 오래 전부터 전해내려오는 음식과 술이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문어수란채국과 교동 방문주다. 이 종가의 종택에는 인묵재의 11대 강정희 종부(90)와 종부의 차남 손중배씨가 살면서 한정식집 ‘열두대문 한정식’을 운영하고 있다.


‘왕손’ 전주이씨 5대 종부가 전수
수란·문어 들어간 여름나기 음식
새콤달콤·고소함에 씹는 맛 조화
제맛 내는 11대 老종부만 만들어

100일 정성 들인 ‘황금빛 발효주’
찹쌀로 빚어 점도 높고 단맛 돌아

밀성손씨 집성촌 ‘열두대문 종택’
왕가 덕에 둥근 기둥 사용해 눈길

◆왕족 며느리가 전수한 궁중음식 ‘문어수란채국’

손성증 종가의 문어수란채국은 왕족이던 전주이씨 가문에서 시집 온 5대 종부가 전수한 궁중요리라고 한다. 수란과 문어가 들어간 찬 전채요리다.

수란(水卵)이란 달걀을 물속에서 살짝 익힌 것이다. 달걀 흰자에 얇게 막이 형성되고 안의 노른자는 부드러운 반숙으로 익혀진 수란은 차가운 물에 담가 식혀둔다. 문어는 삶아서 얇게 썰어 설탕, 식초, 간장, 깨소금, 참기름, 다진 잣과 함께 넣고 섞어 30분 이상 담가둔다. 문어에 간이 배면 냉수를 부어 간을 맞춘 뒤 차가워진 수란을 넣고 실고추, 석이버섯, 다진 쇠고기 볶은 것을 고명으로 얹는다. 국물은 잣즙으로 낸다.

문어수란채국은 시원하게 먹는 여름 음식으로 식초의 시큼함과 약간의 단맛, 부드러운 달걀 맛과 문어의 씹는 맛이 어우러진 밀성손씨 집안의 대표적인 입맛 돋음 음식이다.

뽀얀 국물이 낯설어 보이지만 먹어보면 새콤달콤하면서도 잣국물의 고소한 뒷맛이 현대인들의 입맛에도 잘 맞다. 처음에는 잣기름이 둥둥 떠있어 썩 내키지 않아 하다가, 맛을 보면 맛이 좋아 계속 숟가락이 가게 된다는 것이 손중배씨의 설명이다.

많은 음식 중에서 이 문어수란채국만은 아직도 강정희 노종부가 직접 만든다고 한다. 시간이 많이 드는 음식이지만, 다른 사람이 하면 제 맛이 나지 않아 노종부가 직접 요리한다는 설명이다. 다른 곳에서는 접하기 어려운 별미 음식이다.

손성증 종가는 9년 전 강정희 노종부가 홀로 종택을 지켜야 되는 상황이 되면서, 당시 서울에서 살던 차남 손중배씨 부부가 종택으로 내려와 한정식 식당으로 개업해 종택을 경영하기 시작했다.

부인은 4년 정도 하다가 다시 서울로 가고, 현재는 노종부와 손중배씨가 한정식 식당을 운영하며 고택을 지키고 있다. 반가의 칠첩반상 등 종가의 특별한 음식에 현대인들이 좋아할 만한 요리를 곁들여 코스요리를 내놓고 있다. 문어수란채국, 황태보푸라기, 약장 등이 칠첩반상에 오르는 종가 음식들이다. 약장은 다진 쇠고기에 불고기 양념을 얹어 얇게 펴서 간장으로 조린 음식으로, 명절이나 특별한 날 소를 잡아 장만하던 반찬이다.



◆찹쌀과 누룩만으로 빚는 가양주 ‘교동 방문주’

손성증 종가에서 빚어온 가양주는 ‘교동 방문주(方文酒)’다. 이 교동 방문주는 손성증 종가뿐만 아니라 밀양 교동의 다른 손씨 집안에서도 빚어온 술이지만, 이 종가의 방문주가 대표적이다.

교동 방문주는 찹쌀과 밀 누룩, 그리고 물만으로 빚는다. 추석이 지난 다음 담근다. 찹쌀 1가마에 누룩 6포대를 사용해 술을 담그면 술 120병 정도가 나온다고 한다. 특히 10대 종부의 술 빚는 솜씨가 좋아 당시 이 종가의 방문주는 인기가 높았다고 한다. 한때 방문주를 상품화해 보라는 주위의 권유도 있고 해서 시도를 해봤으나, 발효주로 장기 보관·유통이 어려운 점 등 때문에 포기했다고 한다.

이 교동 방문주는 찹쌀죽을 끓여 누룩가루와 버무리고, 고슬하게 지은 찹쌀밥을 섞어 발효시킨다. 16℃를 유지하면서 한 달 정도 발효시켜서 거른 다음 다시 냉장 상태에서 두 달 정도 숙성시킨다. 이렇게 해서 100일 정도 후면 맛있고 탐스러운 황금빛깔의 교동 방문주가 완성된다.

밀양시 교동의 밀성손씨 가문에서 전수했다 하여 교동 방문주라 하며, 색깔이 황금빛과 같다 하여 황금주라고도 불린다.

찹쌀로 빚어 점도가 높고 단맛도 돈다. 알코올 도수는 10~12도 정도가 보통이지만, 16도까지 올라갈 수도 있다고 한다.



◆인묵재 손성증 종가 종택 ‘몽맹헌’

오랜 역사의 큰 마을을 가보면 대개 교동이라는 동네 이름을 만날 수 있다. 교동은 마을 향교가 있던 곳을 가리키는 지명이다. 향교 주변에는 대체로 반가가 모여 살기 마련이다. 주변에 좋은 한옥들이 많이 남아있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인묵재 종택도 밀양 교동의 밀양향교 바로 아래 자리하고 있다. 이곳에서 가장 큰 규모인 이 고택은 인묵재 손성증(孫聖曾)이 처음 지은 한옥이다.

인묵재 종택은 예전에는 대문이 12개나 됐는데, 지금은 9개가 보존되고 있다. 솟을대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면 다시 중문이 나오고 그 중문 너머 사랑채가 있다. 사랑채는 큰 사랑과 작은 사랑으로 구성돼 있다. 사랑채가 이렇게 나뉘어 있는 경우도 드물다.

중심 건물이라 할 수 있는 큰 사랑채는 ‘몽맹헌(夢孟軒)’이라는 당호의 현판이 걸려 있다. 이 당호는 손중배씨의 고조부(손창민)가 꿈에서 맹자를 보았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고조부는 안동 도산서원장을 지냈다.

정면 6칸 규모이고 누마루가 있는 구조인 큰 사랑채는 1900년경에 손영돈이 지은 것으로, 미국과 일본 등 6개국 건축가들이 모여 근대공법을 사용해 지은 건물이다. 매우 독특하고 이색적이다.

바깥문에 유리창을 댄 것, 화장실과 목욕탕을 건물 안에 둔 것, 당시 사가에서는 허용되지 않던 둥근 기둥을 사용한 것 등이 눈길을 끈다. 둥근 원주를 세울 수 있었던 것은 왕가의 며느리를 둔 덕분이었다고 한다. 사랑채 기둥에는 석촌 윤용구의 글씨로 된 주련이 걸려 있어 건물을 품격을 더한다.

넓은 사랑채 마당을 지나면 또 하나의 중문이 나온다. 이 문을 들어서면 안채를 비롯해 창고와 행랑채, 찬간 등이 자리한 ‘ㅁ’자 건물이 있다. 안채 왼쪽에 사당이 있다.

안채의 옛 부엌은 지난날 가문의 부엌살림 규모를 대변하듯 규모가 상당하다. 외벽에는 부엌의 온도와 습도를 조절하기 위해 낸 창살과 작은 창이 멋스럽다. 부엌 옆에는 찬방이 달려 있다. 안채 뒤쪽으로는 옛 장독대 자리가 남아있다.

이 집 사랑채와 안채에는 큰 곳간이 여러 개 있어 만석꾼이라는 말이 실감나게 한다.

조선 후기 건축을 잘 보여주는 건물인 인묵재 종택은 1935년 불이 나 정침과 사랑채를 제외한 모든 건물이 불에 탔으며 여러 해를 두고 지금과 같이 재건하였다.

글·사진=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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