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 2015] 김천 고대국가 감문국의 흔적을 찾아서<13> 장부인릉

  • 임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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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5-07-29   |  발행일 2015-07-29 제13면   |  수정 2021-06-16 18:04
‘금효왕의 부인·어머니’라는 구전과 달리 학계선 司祭·巫女에 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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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부인릉이 위치한 김천시 개령면 서부리의 포도밭에서 바라본 개령면 일원의 전경. 사진 중앙부의 탑은 경북도 문화재자료 제122호인 서부리 석탑이며, 왼쪽의 작은 산 아래가 감문국 궁궐터인 동부연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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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향토사연구회가 제작 중인 장부인릉 표지석 안내문.


<스토리 브리핑>

김천시 개령면 서부리의 한 언덕에는 삼한시대(三韓時代) 감문국(甘文國) 왕비의 무덤으로 알려진 장부인릉(獐夫人陵)이 있다. ‘장릉(獐陵)’으로도 불린다.

장부인릉은 현재 포도밭으로 변해 그 흔적조차 찾기 힘들지만, 장부인에 관한 구전은 김천지역에서 매우 유명하다. 장부인이 감문국의 마지막 왕, 금효왕(金孝王)의 부인이었다는 설과, 금효왕의 어머니라는 이야기가 전해내려온다. 장부인과 금효왕이 애틋한 러브스토리의 주인공이었을 것만 같은 뉘앙스의 시(詩)도 전해진다.

반면, 학계는 장부인릉의 진위 여부에 대해 다소 부정적이지만 사료적 가치에는 주목하고 있다. 감문국 장부인릉의 사례를 통해 고대사회 여성의 정치적 역할을 추정할 수 있다는 것이 그 이유다. 학계는 장부인이 나라의 제사를 주관한 사제(司祭)나 풍년을 빌었던 무녀(巫女)였을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감문국의 흔적을 찾아서 13편은 감문국 왕비의 무덤으로 알려진 장부인릉에 관한 이야기다.




신라때 창건된 사자사 터에 위치
조선환여승람 등‘왕비 무덤’기록
왕과 러브스토리 담은 詩도 전해

인근 고분 상당수 6∼7세기 추정
학계 “삼한때 조성으로 보긴 곤란”
고대여성의 정치적 역할 등 주목
풍요·다산 비는 제의 주관 추정

 

 

 

# 장부인릉에 대한 역사적 기록

장부인릉은 김천시 개령면 서부리 웅현 도로변의 사자사(獅子寺) 터에 있다. 사자사는 신라시대에 창건된 사찰로 훗날(1473년) 개령현감 정난원(鄭蘭元)에 의해 허물어졌지만, 그 자재는 개령향교를 세우는 데 쓰였다.

현재 장부인릉과 그 주변은 포도밭으로 변해 고분의 존재를 가늠할 수 없지만, 감문국과의 연관성은 충분해 보인다. 장부인릉이 위치한 포도밭에서 동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감문국 궁궐터인 동부연당이 저 멀리 보인다. 이어 동북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감문국의 진산인 감문산이 손에 잡힐 듯이 가까이 솟아 있다. 장부인릉이 감문국 왕비의 무덤이라는 구전이 설득력을 갖는 대목이다. 왕비의 무덤으로 알려진 구릉지에서 감문국 백성들의 터전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었다.


장부인릉에 관한 기록은 여러 문헌에서 발견할 수 있다. 조선시대 인문지리서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장릉현의 서쪽 웅현리에 있는데, 속칭 감문국 때의 장부인릉이라고 한다”면서 그 위치를 설명하고 있다. 지리서 조선환여승람과 교남지에도 각각 ‘장부인릉이 감문국 왕비의 무덤’이라고 밝히고 있다.


1934년, 김천 개령면의 선비 우준식 선생이 간행한 감문국개령지에는 장부인릉에 대한 기록이 비교적 자세하게 나와 있다. 감문국개령지에는 ‘일명 장부인릉이라 하고 일명은 장희릉이라고 하나니 현재 서부동 서변 웅현에 있으니(중략)’라고 적혀 있다.


또한 감문국개령지에 수록된 우준식의 시를 통해 장부인에 대한 김천사람들의 애틋한 정서를 엿볼 수 있다.



사랑하는 獐姬(장희)가 어이가단 말가/ 한번 가면 못올 길을 어이가단 말가

宮闕(궁궐)에 계옵신 임금님의 옷깃에/ 구슬같은 눈물 떠러트리고

千百年(천백년) 잘있으라 祝願(축원) 드리였거든/ 어인일가 오늘의 메여진 무덤우에/ 無心(무심)한 까마귀 앉았다 날너더라


조선 후기 실학자이자 역사가인 유득공(柳得恭, 1748~1807) 또한 그의 시집 이십일고회고시에서 ‘장부인은 간 지 오래인데 들꽃은 향기롭다’는 표현으로 장부인에 대해 다루었다.


이처럼 여러 문헌이 장부인릉을 언급하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정확히 밝혀진 것은 없다. 김천문화원 발행 향토사료집의 경우에도 ‘장부인릉이 삼한시대에 조성됐다’면서도 ‘정확한 조성 시기는 알 수 없다’고 덧붙였다.



# 일본인의 눈에 비친 장부인릉

장부인릉에 대한 최초 유적조사는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에 의해 진행됐다. 1917년, 경상도 일대 유적조사에 나선 일본인 동양역사학자 이마니시 류(西金龍, 1875~1932)가 김천에 들러 장부인릉을 조사했다.


당시 이마니시는 감문국 관련 유적에 대해 집중 조사했는데, 장부인릉의 경우 직접 실측했다. 그러나 무덤의 훼손이 심해 고분이라는 것 이외에는 아무런 단서를 찾지 못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일제강점기까지만 해도 장부인릉은 버려진 채 방치되어 있었다. 고분은 파헤쳐져 있었고, 석실을 덮었던 덮개돌은 깨진 채 나뒹굴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마니시는 김천 방문 3년 뒤인 1920년 조선총독부 보고서에서 장부인릉에 대해 언급했다. 이마니시는 “‘장릉’은 ‘장부인릉’의 약자인데, 조선시대 일대에서 구전된 감문소국의 장부인릉이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것이다. ‘장(獐)’은 크다는 의미가 있고 거기에 연유를 알 수 없는 전설이 깃든 것으로 추정되었다”라고 밝혔다.


이마니시는 장부인릉 남쪽에 위치한 폐사지인 사자사터와 장부인릉의 관련성을 의심했지만 별다른 수확은 없었다. 실제로 장부인릉이 위치한 사자사터에는 삼층석탑이 있는데, 그 모습에 꽤 단아하면서도 웅장한 면이 있다. 경북도 문화재자료 제122호인 이 석탑은 통일신라시대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무너져 있던 것을 최근 새로 다듬어 조성했다.



# 장부인은 과연 왕비였을까

김천지역의 구전에 따르면 장부인은 금효왕의 부인 또는 금효왕의 어머니다. 하지만 학계는 이미 알려진 장부인의 이미지에 대해 다소 부정적이다. 장부인릉의 조성 시기가 감문국 시대의 것으로 보기 어렵고(장부인 인근 고분 상당수가 6~7세기 것으로 추정), 상당수 문헌이 구전을 기반으로 쓰였기 때문이다.


오히려 학계는 장부인릉의 존재를 고대 여성의 역할과 연계시켜 주목하고 있다. 특히 계명대 사학과 발행 계명사학 제23집에 수록된 ‘고대 김천지방의 역사와 문화’라는 논문은 고대 여성의 역할에 주목하고 있다. 이 논문은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수로왕의 부인 허황후나 성덕왕대의 수로부인, 금오신화의 재매부인 등 고대사회 여성의 역할이 제사를 주관하는 사제의 역할에 가깝다”는 의견을 밝히고 있다.


또한 이 논문은 장부인의 이름을 바탕으로 고대 여성의 정치적 역할을 추정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장부인의 ‘장’ 자는 노루 ‘장(獐)’ 자, 즉 노루부인이라는 명칭인데, 국문학자 양주동 박사(1903~77)의 해석에 따르면 ‘노루’는 산골짜기를 의미한다. 이는 고대 농업의 기반이 산골짜기 사이의 땅이었다는 주장이다. 즉, 산골짜기에서 풍요와 다산을 비는 의식이 행해졌고, 여성 사제들이 이런 역할을 담당했을 것이란 추측이다. 따라서 장부인 또한 생산과 관련한 제의를 주관하는 사제나 무녀였을 가능성이 높다는 의견이다.


한편, 오랜 세월 유적이 방치된 탓인지 한동안 장부인릉의 위치가 잘못 소개된 적도 있었다. 실제로 최근까지 언론에 소개된 장부인릉의 위치와 사진이 엉터리로 표기되어 있다. 1980년대부터 최근까지 조선시대 청백리 학암 강석구(姜碩龜, 1726~1810) 선생의 부인과 그 며느리의 묘가 장부인릉으로 잘못 알려진 것이다. 문재원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은 “장부인릉은 강석구 선생 부인묘 뒤편에 있지만 포도밭을 경작하면서 그 흔적을 웬만해서는 찾을 수 없게 돼 이런 일이 벌어진 듯하다”고 말했다. 이에 김천향토사연구회는 장부인릉의 정확한 위치를 알리기 위해 표지석을 제작 중이다. 장부인릉의 표지석에는 ‘속전감문국시 장부인릉지(俗傳甘文國時 獐婦人陵址, 감문국 때의 장부인릉터)’라는 문구가 들어갈 예정이다.

글·사진=임훈기자 hoony@yeongnam.com
박현주기자 hjpark@yeongnam.com

▨ 참고문헌= ‘유적으로 고찰한 감문국’ ‘(진·변한사 연구) 진·변한의 성립과 전개’ ‘계명사학 제23집’ ‘국역 김천역사지리서’ ‘디지털김천문화대전’ ‘대구·경북 신석기 문화 그 시작과 끝’ ‘신라문화 제38집 별쇄본. 삼국사기 열전에 보이는 4~5세기 신라인의 활약상’ ‘김천시사’ ‘감문국 유적정비를 위한 정밀지표조사’
▨ 자문단 △문재원 국사편찬위원회 김천사료조사위원 △이석호 김천향토사연구회 회장 △송기동 김천문화원 사무국장 △주보돈 경북대 사학과 교수 △강종훈 대구가톨릭대 역사교육과 교수 △권태을 경북대 명예교수
공동기획:김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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