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가의 술과 음식 이야기 .29] 함양 일두종가 ‘개평육회’

  • 김봉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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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5-07-30   |  발행일 2015-07-30 제22면   |  수정 2015-07-30
부드럽고 구수한 맛 일품…하동정씨 일두종가 내림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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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의 일두 정여창 종가 내림음식인 개평육회(왼쪽)와 동태불고기. <두레씽크푸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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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의 대표적 선비 마을인 함양 개평마을의 중심 고택인 일두고택의 사랑채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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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의 식재료 시장이던 함양
수라상에 올리는 특산물 거쳐간 곳
우시장 형성돼 쇠고기 음식도 발달

◇개평육회·동태불고기의 부활
정소혜씨, 종가음식에 각별한 관심
가문의 전통 조리법 활용해 만들어

◇‘동방5현’ 일두 정여창 고택
선비의 마을 개평리 대표 양반가옥
조선 중·후기 주택연구 귀중한 자료

함양은 덕유산과 지리산의 두 산줄기가 잦아드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산간분지인 함양은 병풍처럼 둘러싼 높은 산에서 흘러나오는 맑은 물이 많아 산천이 아름답다. 북동부를 흐르는 푸른 남계천은 위천, 임천강 등과 합류하여 경호강이라는 큰 물줄기를 만들어 산청 쪽으로 흘러나간다.

함양군 지곡면 개평리의 ‘개평’이라는 지명은 두 개울이 하나로 합쳐지는 지점에 마을이 위치해 ‘낄 개(介)’자 형상을 하고 있는 데서 유래되었다. 14세기 경주김씨와 하동정씨가 이곳으로 이주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이후 15세기에 풍천노씨가 들어와 살기 시작하였고, 현재 마을에는 대부분 풍천노씨와 하동정씨가 거주하고 있다. 60여 채의 전통 한옥이 있다.

함양은 신라 때 최치원이 함양의 태수를 지냈고 조선시대에는 김종직, 정여창, 박지원 등이 지방관리로서 함양을 거쳐간 곳이기도 해서 오래 전부터 선비의 고장으로도 유명하다. 특히 함양은 안동과 더불어 영남 사림을 대표하는 선비의 고장으로 명성이 높았다. 그래서 흔히 ‘뼈대 있는’ 고장으로, 대표적 영남 사림의 근거지를 말할 때 ‘좌 안동 우 함양’이라는 말이 회자되었다. 이 ‘우 함양’의 주인공이 일두 정여창(1450~1504)이다. ‘좌 안동’의 주인공은 물론 퇴계 이황이다. 안동에 견줄 만큼 학문과 문벌이 번성했던 고장이 바로 함양이고, 그런 함양의 기틀을 잡은 이가 조선 성종 때 함양현감을 지낸 정여창이다. ‘좌 안동 우 함양’이라는 말은 서울에서 볼 때 안동이 낙동강의 왼쪽에 자리하고, 함양은 낙동강의 오른쪽에 위치하고 있어서다.

정여창이 살았던 개평리는 한옥 고택들이 아직도 즐비한 마을인데, 그 중에서도 가장 규모가 크고 화려한 고택이 ‘일두 정여창 고택’이다. 일두고택은 현재 일두종가의 종손 가족이 살고 있지는 않다. 종손 가족은 서울에서 살고 있다. 하지만 일두종가에도 당연히 오래 전부터 내려오는 종가음식이 있다. 환경 변화로 지금은 전통 종가음식이 대부분 사라질 위기에 처해있긴 하지만, 함양의 지리적 환경이 가져다준 독특한 종가음식들이 지금도 후손에 의해 이어지고 있다. 개평육회, 동태불고기 등이 대표적 종가음식이다.


◆일두종가에서 즐겨먹던 ‘개평육회’ ‘동태불고기’

함양은 임금의 수라상에 오르는 음식재료로 사용되는 영남지역의 여러 특산물이 거쳐가는 곳이기도 해서 음식재료 시장이 형성되던 지역이었다. 또한 우시장도 형성돼 다양한 쇠고기 음식문화도 발달했다. 함양의 대표적 양반마을인 개평마을의 하동정씨 집안은 특히 쇠고기 육회를 즐겨 먹었다고 한다.

정씨 집안의 육회는 가족이 즐겨 먹던 요리인데다 특히 맛이 좋아서 ‘개평육회’라 불릴 정도였다고 한다. 마을에서 소를 잡을 때나 잔치 때 주로 육회를 먹었다. 또한 손님들이 많이 찾는 종가였기에 손님 상에도 쇠고기 육회를 가능한 한 자주 올렸음은 물론이다.

일두종가의 종가음식에 각별히 관심을 가지고 하동정씨 집안 며느리들과 함께 종가음식을 되살리려는 데 적극 나서고 있는, 일두종가 후손인 정소혜씨는 자신도 어릴 때 육회를 자주 먹었다고 들려주었다.

정소혜씨가 가문의 전통 조리법을 활용해 만든 요즘 개평육회 조리법이다. 먼저 쇠고기를 채썬 뒤 키친 타월로 피를 뺀다. 양념장은 간장, 설탕, 매실액, 다진 마늘, 생강가루, 잣가루, 참기름, 다진 파를 사용한다. 그리고 배를 같은 길이로 채를 썬 다음, 잠시 설탕물에 넣어 변색되지 않도록 한다. 채 썬 쇠고기에 양념장을 넣고 잘 주무른다. 접시에 배를 깔고 이 육회를 담은 뒤 메추리알 노른자를 올려 낸다.

육회와 함께 눈길을 끄는 음식은 동태불고기다. 함양은 내륙에 위치한 탓에 민물생선을 제외하고는 신선한 생선이 귀했기 때문에 오래 전부터 황태와 같은 말린 생선이나 동태를 이용한 음식이 발달했다. 일두종가도 동태불고기를 오래 전부터 즐겨 먹었다.

동태의 머리를 자르고 길게 반으로 잘라 뼈를 발라낸다. 적당한 크기로 토막을 내 씻은 뒤 햇볕에 널어 꾸들꾸들해질 때까지 말린다. 양념한 맛간장에 하루 정도 재워두었다가 팬에 기름을 두르고 구우면 된다. 부드러우면서도 구수한 맛을 즐길 수 있는 동태불고기다.



◆정여창과 일두고택

정여창은 본관은 하동이나 그의 증조부가 처가인 함양에 와서 살면서 함양 개평마을에서 나고 자라게 되었다. 8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혼자서 독서하다가 김굉필과 함께 함양군수로 있던 김종직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다. 여러 차례 천거되어 벼슬을 받았지만 매번 사양하다가 1490년 과거에 급제해 당시 동궁이었던 연산군을 보필하지만 강직한 성품 때문에 연산군의 총애를 받지 못했다. 1495년(연산군 1) 함양현감에 임명되었고, 일 처리가 공명정대해 백성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1498년 무오사화 때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되고 1504년에 유배지에서 사망했다. 얼마 후 갑자사화(1504)에 연루되어 부관참시(무덤을 파고 관을 쪼개어 송장의 목을 자르는 형벌)되었다.

김굉필, 조광조, 이언적, 이황과 함께 동방 5현으로 인정받고 있다.

현재 남아있는 함양의 일두 정여창 고택 건물은 대부분 정여창의 사후인 1570년대에 후손들이 중건한 것이 바탕이 되고 있다. 중심 건물인 사랑채는 현 소유자의 고조부가 중건했다. 안채는 사랑채보다 건축연대가 더 올라가는데 청하현감을 지낸 가문의 선조가 300년 전에 지었다고 전한다.

1만여㎡(3천여평)의 대지에 12동(棟)의 건물이 배치된 남도지방의 대표적 양반 고택이다. 솟을대문에는 가문의 효자, 충신을 기리는 정려(旌閭) 편액이 5개나 걸려있어 눈길을 끈다.

대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보이는 사랑채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ㄱ’자형 건물이고 누각이 달려있다. 사랑채 벽면에는 대형 붓글씨로 된 ‘문헌세가(文獻世家)’ ‘충효절의(忠孝節義)’ ‘백세청풍(白世淸風)’ 편액(종이)이 걸려있어 종가의 가풍을 말해주고 있다. ‘문헌(文獻)’은 정여창의 시호다. 사랑채 누각에서 내려다보며 즐길 수 있는 조산(造山·인공산)을 꾸며놓은 것도 특징이다.

사랑채 측면을 통과하고 다시 문을 지나면 안채에 들어서게 되는데, 중문을 들어서면 ‘一’자형의 큼직한 안채가 있다. 왼쪽에 아랫방채가 있고 안채의 뒤편으로 별당과 안사랑채가 있다. 이와 별도로 일곽을 이룬 가묘(家廟)가 또 있다.

조선 중·후기 주택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는 고택이다.
글·사진=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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