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의 역사가 녹아있는 근대건축 .4] 조양회관

  • 이지용 김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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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5-09-02   |  발행일 2015-09-02 제5면   |  수정 2015-09-02
외국인 선교사 아닌 한국인 건축가(윤학기)가 설계한 ‘근대교육 산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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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 10월에 준공한 조양회관은 동암 서상일 선생이 대구지역 청소년과 민중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 정신적 계몽을 펼치기 위해 건설한 근대교육의 산실이다.

아침 해가 비치는 곳 혹은 조선의 빛을 본다는 뜻으로 조양회관이란 이름으로 지어진 이 건물은 항일 민족주의자였던 동암(東庵) 서상일(徐相日) 선생(1886~1962)이 대구지역 청소년과 민중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 정신적 계몽을 펼치기 위해 건설한 근대교육의 산실이다.

1922년 4월 착공하여 10월 준공한 지하 1층, 지상 2층의 전체 연면적 837.1㎡ 건물로 등록문화재 제4호다. 설계는 한국인 건축가 윤학기가 하고, 공사는 당시 벽돌공장을 경영하던 백남채의 감독 하에 중국인 기술자들이 했다고 한다.

설계를 담당한 윤학기는 그 당시 이미 설계자로서 지역에 상당히 알려진 사람으로 추측된다. 1939년에 현재의 건축사와 같은 자격인 건축대서사 시험제도가 처음 시행되었는데 당시 대구에서 일본인을 포함하여 7명이 합격하였다. 그때 윤학기도 합격자 명단에 있었으니, 조양회관 설계 시에는 건축사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당시 건축대서사에 함께 합격했던 대구의 원로 건축사 이해성씨가 일본에서 공부한 뒤 귀국하여 설계를 배우기 위해 그에게 찾아갔다는 증언으로 미루어 볼 때, 이미 설계자로서의 능력을 인정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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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에 찍은 조양회관. <원화여고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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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조양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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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양회관의 내·외부 모습.

공사비는 4만3천80원 정도로 개인이 건설한 건물로는 매우 큰 규모였으리라 짐작된다. 또 당시 대구의 근대건축물 대부분이 건설은 중국인들이 하고 설계는 외국인 선교사나 신부들이 한 것과 비교하면 한국인에 의해 설계된 사실은 특이하고 의미가 있는 점이라 볼 수 있다.

전체적으로 건물의 평면은 T자형의 장방형으로 정면 출입구 현관홀을 중심으로 복도를 사이에 두고 사무기능과 부속기능의 작은 방과 전시·집회 기능의 큰 방으로 구분하여 배치하였으며 좌우 양 측면 끝에 계단실을 설치하였다.

외관은 전체적으로는 화강석 기초 위에 붉은 벽돌벽을 쌓고, 지붕은 박공의 경사지붕으로 기와를 얹었다. 원래 이 건물은 달성공원 앞 진입로 변(대구시 중구 대신동 1번지)에 있었기 때문에 현재처럼 부지가 높지 않고 도로에서 바로 건물 전면을 볼 수 있는 상태였다. 그래서 전체 건물에서 상대적으로 전면의 형태가 매우 아기자기한 인간적인 스케일감을 가진다.


항일민족주의자 서상일 선생 주도
1922년 달성공원 앞 진입로변 건립

화강석 기초·붉은 벽돌·기와 지붕
좌우 대칭형…현관은 독립문 연상

야학·청년회·시국 강연 장소 활용
해방 후에는 원화여중·고에서 사용

1984년 망우공원에 원형대로 이전
대구 유일의 이전·복원 근대건축물


근대건축의 공통적인 특징은 대칭적인 형태를 띤다는 점이다. 이 건물 역시 완벽한 좌우 대칭으로 되어 있다. 특히 독립문을 연상케 하는 정면 중앙의 주 현관은 비나 눈을 맞지 않게 포치 형식으로 네 개의 사각형 기둥과 아치를 사용하여 출입구임을 강조하고, 상부는 베란다로 쓰면서 그 위에 아치창이 있는 뾰족지붕을 설치하고 화강석으로 전체를 마무리하여 형태나 재료 면에 있어 중심성을 강조하고 있다.

각 방에는 동일한 형태의 목재 오르내리창을 방의 크기와 기능에 맞게 간격을 적절히 배치하고 창문의 상·하부에는 화강석 평 인방을 설치함으로써 소위 서양풍 건물의 전형을 보여준다. 원래 건물의 바닥과 계단, 그리고 창호에 사용된 목재는 압록강에서 가져온 낙엽송이라는 말도 있으나 확실치는 않다. 현재는 목재창틀의 외부에 알루미늄 창틀을 덧대어 비바람 등으로부터 보호하고 있다.

근대건축물은 수십 년 동안의 세월을 견디어온 만큼 역사의 흐름에 따라 다양하게 사용되기도 했다. 이 건물도 인쇄공장, 대구구락부, 대구운동협회, 대구여자청년회, 동아일보 지국 등의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어 왔으며, 100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강당에서는 시국 강연, 국산품 애용, 상공업 진흥 등에 대한 강연회를 개최하였다고 한다. 그뿐만 아니라 한때는 야간에 야학청소년을 가르치고, 농촌(農村)이라는 잡지를 발간하는 장소로도 쓰였다고 하니 근대시대에 이 건물이 가진 건축적 가치가 상당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광복 후에는 한민당 사무실에 이어 원화여자중·고등학교에서 사용하다가 학교가 외곽으로 이전되면서 대구시에서 1984년 6월 현 위치인 망우공원 내에 원형 그대로 복원하고 현재는 대구경북광복회 연합지부에서 관리하고 있다. 이 건축물은 회의실, 사무실 외에 안중근·윤봉길 의사와 도산 안창호 선생 등의 애국지사 영정과 어록 등을 포함한 많은 독립운동과 항일투쟁에 관한 사진 및 유품 전시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조양회관은 대구에서 유일하게 이전 복원한 근대건축이란 사실로도 큰 의의가 있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장소나 건물을 보존하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건축 역시 다른 유물처럼 항상 시대의 상황에 맞는 고유한 양식적 특징을 지니고 있다는 건축적 가치와 함께 우리 선조들의 생활과 시대정신이 그 공간 속에 고스란히 배어있는 역사성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건물 내부를 걸을 때 목재바닥의 삐걱이는 소리를 듣는 것이나 회의실에 있는 아치로 된 목재출입문과 양옆 보조문의 귀여운 형태를 보는 것, 그리고 계단과 난간의 목재에서 느껴지는 감촉 등은 시대를 거슬러 근대로 되돌아보게 해 준다.

건축은 그 속에 담긴 역사가 좋은 것이든 치욕적인 것이든 하나의 건물로 보존되어야 한다. 건물은 유물이고 역사는 지워버릴 수 없는 기록으로서 우리에게 교훈을 준다. 이러한 사례는 다른 나라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데, 프랑스 파리의 외곽에 세계적인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가 설계한 사보아 주택은 2차 대전 당시 독일군이 사용한 적이 있었다. 그 후 도시계획으로 도로가 개설되면서 건물이 철거될 상황에서 당시 문화부장관이자 유명한 문학가 앙드레 말로가 나서서 도로의 선형을 변경하면서까지 보전하였다. 또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의 옛 스페인 왕궁 앞에서 1929년 세계 만국박람회가 열렸을 때 독일관이 건축가 미스 반 데 로헤에 의해 건설되었으나 박람회 종료 후에 철거되었는데, 그 건축의 역사적 가치와 작품성 때문에 56년 후인 1985년에 원래의 자리에 그대로 복원하여 세계적으로 유명한 관광명소로 사랑받고 있다. 미국의 대표 건축가인 프랑크 로이드 라이트가 설계한 시카고의 로비 저택 역시 도시계획으로 철거될 위기에서 시카고대학 캠퍼스 내로 이전 복원하여 지금까지 그 아름다운 형태를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최근에 지역에서도 근대건축의 가치를 인식하여 재생의 개념으로서 보존하는 사업이 중구 북성로를 중심으로 일어나고 있는 사실은 매우 고무적이다.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으로 우리는 근대사에 대한 정립이 제대로 되지 못한 듯하다. 이러한 사실은 건축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건축은 그 자체로는 무생물과 같지만 인간과 함께하면서 의미를 갖고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이다.

공동취재= 이정호 경북대 건축학부 교수, 이지용기자 sajahu@yeongnam.com, 김수영기자 sykim@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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