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의 神, 천재들의 요람 선산 壯元坊 .4] ‘과거급제 2관왕’ 하늘이 내린 인재 정지담(鄭之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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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6-06-30   |  발행일 2016-06-30 제13면   |  수정 2016-06-30
[문과] 태종 16년(1416) 친시(親試) 을과1등(乙科一等) 1위
[문과] 세종 18년(1436) 중시(重試) 을과3등(乙科三等) 5위
大學者 장인 밑에서 修學…두번이나 급제한 ‘공부의 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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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가 있는 고향을 다녀오는 바람에 과거를 보지 못할 뻔했는데, 신문고를 울려 시험을 보게 된 정지담의 일화가 상세하게 기록된 태종실록. 정지담은 이 시험에서 당당히 장원을 차지했고, 훗날 안동대도호부사까지 오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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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담이 친시 제1등을 차지해 우정언을 제수받았다는 기록이 적혀있는 태종실록.
장원방(15명의 과거급제자가 나온 마을 옛 영봉리. 지금의 선산읍 이문리·노상리·완전리 일대)이 배출한 인재 중 한 명인 정지담(鄭之澹)은 김해부사를 지낸 김치(金峙)의 사위다. 김치 역시 장원방 출신으로 고려문과에 급제한 인재다(영남일보 6월23일자 13면 보도). 정지담은 특히 태종 16년 친시에서 장원을 하고, 세종 18년 중시에서 5위를 차지하는 등 두번의 시험에서 급제한 ‘공부의 달인’이다. 부모가 있는 고향을 다녀오는 바람에 과거를 보지 못할 뻔했는데, 신문고를 울려 시험을 보게 되었고 더욱이 장원을 차지하게 된 일화가 실록에 전해진다. 정지담의 ‘신문고 일화’는 훗날 조선의 과거시험 규정을 바꾸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관직에 진출해서는 안동대도호부사(安東大都護府使)까지 올랐고, 시문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부모님 뵈러갔다 과거 못보게 되자
신문고 울려 응시…忠孝 주제 壯元
훗날 불합리한 과거규정 개선 계기

10년에 한번 보는 重試 당당히 합격
정6품서 시작 안동대도호부사 올라

#1. 태산 같은 장인 김치(金峙)

정지담은 날이 갈수록 영봉리(迎鳳里, 일명 장원방)가 좋았다. 이름이 품고 있는 ‘봉황을 맞이한다’는 뜻도 썩 마음에 들었다. 풍수를 논하기에는 아직 어리고 식견이 짧아, 마을 자리가 정말 봉황이 집을 찾아드는 형국의 봉황귀소형(鳳凰歸巢形)인지, 다섯 마리의 봉황이 집을 다투는 모양의 오봉쟁소형(五鳳爭巢形)인지 알아보기는 어려웠으나, 그렇다고 마을의 영험한 기운까지 느끼지 못할 만큼 우둔한 심장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정지담에게 영봉리는 곧 전(前) 김해부사(金海府使) 김치(金峙)를 의미했다. 김치 전 부사는 정지담의 태산 같은 장인이었다. 장인은 일찍이 고려 창왕 즉위년(1388)에 문과에 급제한 영봉리의 이름난 인재였다.

남귀여가(男歸女家), 즉 남자가 여자의 집에서 혼례를 거행하고 그대로 처가에서 살다가, 자녀가 성장하고 나서야 본가로 돌아가던 시절이어서, 정지담의 영봉리 생활은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었다. 정지담의 일거수일투족이 장인 김치의 시야를 벗어날 수 없음 또한 물론이었다. 하지만 정지담은 진심으로 괜찮았다. 외려 장인의 그늘이 편안하고 든든했다.

대학자인 장인 곁에서 정지담의 학문은 착실하게 성장했다. 김치가 사위의 공부에 들인 공력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정지담 또한 열심을 다한 덕분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차곡차곡 쌓이면서, 정지담은 소과(小科) 초시(初試)에 합격해 생원(生員)이 되었다. 말이 ‘소(小)’지, 수많은 유생들로 하여금 절망을 맛보게 하는 대단히 어려운 시험이었다.

합격의식인 방방의(放榜儀)가 있던 날, 정지담은 장인으로부터 별다른 인사를 받지 못했다. 김치는 본디 일희일비가 없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정지담은 늙어가는 장인의 푸석한 얼굴에서 숨어있는 미소를 알아차렸다. 정지담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당시 방방의의 절차는 이러했다. 근정전(勤政殿)의 계단 아래로 동쪽에는 생원방방관(放榜官)이, 서쪽에는 진사방방관이 각각 자리를 잡고 서서 합격자를 호명하면, 합격자는 각각 엎드려 네 번 절하는 사배(四拜)의 예를 마친 다음, 예조정랑(禮曹正郞)으로부터 합격증서인 백패(白牌)를 받음과 아울러 임금이 내린 술과 음식도 전해 받았다. 그 모든 영광 안에서 정지담이 속엣말을 했다.

‘이제 시작이지. 더 큰 산이 남은 것을.’

바로 대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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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담의 과거급제 이력이 기록된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오른쪽은 태종 16년(1416) 친시 을과1등 1위를 차지한 기록, 왼쪽은 세종 18년(1436) 중시 을과3등 5위로 합격한 기록이다.

#2. 두 번의 과거, 두 번의 영광

1416년(태종 16) 8월, 여름밤의 거침없는 달빛이 과장(科場)을 훑어가기 시작했다. 이름하여 ‘병신16년친시방(丙申十六年親試榜)’이라 해서 임금이 친히 주관하는 과거시험이 치러지는 중이었다. 날이 어두워졌으니 속히 시험을 마무리지으라며 삼관(三館, 성균관·예문관·교서관)이 재촉했다. 하지만 예조판서 조용(趙庸)은 수험생들을 다그치지 않았다. 결국 시험은 늦은 밤 10시를 넘기고서야 어느 정도 갈무리되었다. 500장이 넘는 답안지가 시험관들에게 넘겨졌으나,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다음날 아침이 되어서야 간신히 답지를 내놓은 이가 서른이 넘었고, 어쩌지 못하고 백지를 내버린 이도 스물을 넘었다. 그런데 그 북새에 정작 정지담은 없었다. 부모가 있는 고향 본가에 들렀다가 날을 놓친 탓이었다. 길이 험한 시절이었다.

정지담이 과장에 당도한 때는 사흘 후였다. 그런데 과장 주변에 같은 처지의 수험생들이 무려 쉰이나 넘게 몰려 있었다. 억울하거나 안타깝거나 하는 사연들이 들끓고 갖은 궁리들이 오고간 끝에, 모두의 발걸음이 신문고(申聞鼓)로 향했다. 정상을 참작해 시험을 보게해 달라는 탄원을 위해서였다.

정지담이 신문고를 울리자 조정의 관리가 나왔다. 비록 신문고의 효용이 점점 떨어져가는 형편이긴 했으나, 왕이 신문고를 세우도록 지시한 바로 그 당사자였던 만큼 아직은 반응이 빠른 편이었다. 자초지종이 전해지고 그리 오래지 않아 시험을 허한다는 명이 떨어졌다. 하지만 엄선된 열다섯 명에게만 그리 해주겠다는 조건이 따라왔다. 다행히 정지담도 해당되었다.

추가시험이라고 해서 다를 것은 없었다. 장소는 똑같이 경복궁의 경회루였고, 모든 과정 또한 예에 맞게 엄격하고 진지하게 진행되었다. 말로만 듣던 뜨르르한 인물들이 시험관으로 나왔다. 개국공신인 진산부원군(晋山府院君) 하륜(河崙)을 비롯해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 변계량(卞季良), 지신사(知申事, 도승지) 조말생(趙末生), 판통례문사(判通禮門事) 이적(李迹), 그리고 예조판서 조용 등이었다.

시험문제인 책문(策問, 논술)의 주제로는 ‘충효’가 출제되었다. 정지담은 고민할 것도 없이 폭풍처럼 써내려갔다. 그리고 이틀 뒤, 결과가 발표되었다. 수백의 응시생들 중 문·무과 각 9명씩이 합격한 가운데, 정지담이 장원(壯元, 1등)이었다.

이번에도 방방의가 치러졌다. 물론 생원 때와는 사뭇 달라서, 왕과 문무백관들이 참석해 지엄한 분위기가 연출됐으며, 예조정랑이 아닌 이조정랑(吏曹正郞)으로부터, 백패가 아닌 홍패(紅牌)를 받았다. 그리고 정지담은 바로 우정언(右正言, 정6품)에 제수되었다. 왕의 옳지 못한 처사나 잘못을 비판하여 바로잡게 하는, 이른바 ‘간쟁(諫諍)’이 그의 소임이었다. 2등을 한 김자돈(金自敦)이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 정9품)가 되었으니, 1등과 2등의 품계 차이가 퍽 넓었음을 알 수 있다.

정지담이 신문고를 울려 시험을 보게 된 일화는 훗날 과거 규정을 바꾸는 데까지 영향을 미쳤다. 31년 후인 1447년(세종 29), 성균관 유생들이 상소를 올렸다. 유생들은 정지담의 ‘신문고 일화’를 들어 “왕이 법을 운용하는 권도가 지극하고 선비를 뽑는 방법이 옳아 뛰어난 인물을 얻었다”고 언급하면서, 성균관 유생들이 과거 자격을 얻으려면 원점(圓點)이라는 출석일수 점수를 채워야 하는데, 이에 상관없이 시험을 보게 해달라고 청했다. 왜냐하면 정지담 또한 고향에 다녀오느라 원점이 부족한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신문고를 울려 시험을 통과한 때문이었다. 그것도 장원이었으니, 시험을 못 보게 했더라면 어쩔 뻔했겠느냐는 의미였다. 결국 임금은 유생들의 상소를 받아들여 과거 규정을 바꾸었다. 모두가 정지담의 일화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병신년 과거 이후 스무 해가 지난 1436년(세종 18), 정지담은 또 한 번의 과거인 중시(重試)에서 5등을 차지했다. 중시란 당하관 이하의 문무관에게 10년마다 한 번씩 보게 하던 일종의 승진시험이었다. 합격하면 성적에 따라 관직의 품계를 올려주었기 때문에, 참하관(參下官, 정7품 이하)은 참상관(參上官, 종6품 이상)으로, 당하관(堂下官, 정3품 이하)은 당상관(堂上官)이 될 수 있는 기회였다. 그런데 그 기회를 정지담이 확실하게 잡은 것이었다.

봄의 한복판에, 경복궁 근정전에서 치러진 ‘병진18년중시방(丙辰十八年重試榜)’에는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 영의정) 황희(黃喜)를 비롯한 8명의 시험관이 감독관으로 나선 가운데, 문무과에서 각 12명의 합격자를 배출했다. 통과한 인원도 적은 데다, 5등이라면 그 중에서도 최상위권이었다. 정지담의 천재성은 나이가 들었어도 여전했던 것이다. 이 때문인지 몰라도, 정지담은 이후 별다른 문제없이 안동대도호부사(安東大都護府使)까지 오를 수 있었다.

#3. 목민관으로서의 올바른 삶…시문도 탁월

“봄에는 밤이 제일이고, 여름은 한낮이 으뜸이며, 가을은 저녁이 제격이고, 겨울은 아침이 그만이라 했던가. 허나 운산(雲山)의 봄날 새벽도 둘째가라면 서러울 형국이구나.”

고산현(高山縣, 현 전북 완주군 고산면)에서 동쪽 위쪽으로 5리 여. 조그마한 산등성이와 연결된 가파른 낭떠러지 위로 안개가 얼기설기 짜놓은 피륙마냥 띄엄띄엄 흘렀다. 그 속에 서서 정지담은 모처럼 편안함에 빠져들었다. 추정컨대 당시 고산현감이었을 그는, 자신이 책임지고 있는 마을의 안녕과 자신을 향한 주민들의 신뢰가 느껍기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시가 절로 읊어져 나왔다.

境靜民風厚 雲深洞府幽(경정민풍후 운심동부유)
지경이 고요하니 백성 풍속 고요하고 / 구름 깊으니 동네의 관아 그윽하네.

기록으로 남아있는 것은 거의 없으나, 정지담은 지방의 수령으로 다니는 동안 최선을 다한 것으로 보인다. 목민관의 삶에 막중한 책임의식을 가졌던 때문이리라. 또한 그것이 곧 충이라고 믿었던 때문이기도 하리라.

실제로 그는 밀양의 영남루(嶺南樓)를 지나면서 ‘소루(召樓)’라는 시를 통해 자신의 가치관을 내비치기도 했다.

‘영남 천리 길에 가을이 또 돌아오고/ 북녘을 바라보니 대궐로 가는 길 열렸는데/ 작은 힘이나마 산하 같은 성덕을 도와야 하지/ 쉽사리 귀거래를 읊을 것은 아닐세’

즉 지방의 작은 마을이라고 해서 가벼이 노닥거리다가 말 일이 아니라, 성심을 다함으로써 임금이 덕을 이루는 데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의지였다. 바로 그것이야말로 하늘이 내린 천재가 정치를 통해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글=김진규<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초빙연구원>
▨ 도움말=박은호 전 구미문화원장
▨ 참고문헌=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조선왕조실록, 선산군지, 성리학의 본향 구미의 역사와 인물

공동기획 : 구미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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