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들의 사랑이야기 .7] 그리움 사무쳐도 서로 못 보니- 유희경과 이매창(下)

  • 김봉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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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6-08-25   |  발행일 2016-08-25 제22면   |  수정 2016-08-25
다정이 病 된 이매창…유희경을 그리다 서른여덟 청춘 쓸쓸히 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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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매창, 유희경과 함께 ‘부안삼절’로 불린 변산 직소폭포. 직소폭포는 변산8경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힌다.

촌은 유희경
조선시대 중기 천민출신 시인
효자로 소문나 사대부와 인연
문인들과 교우하며 한시 지어
임란 의병 공적으로 벼슬살이

기생 이매창
부안현 아전의 딸…字는 천향
여류시인으로 詩 70여수 전해
死後 작품 모아 ‘매창집’ 발간
고을서 비석 세우고 무덤 돌봐

◆거문고와 함께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긴 매창

유희경이 서울로 가버린 후 매창은 다정이 병이 되어 몸져 눕는다. 매창의 ‘병중(病中)’이라는 시다.

‘이것은 봄을 슬퍼하는 병이 아니요(不是傷春病)/ 다만 임을 그리는 탓일 뿐이네(只因憶玉郞)/ 티끌 같은 세상 괴로움 하도 많아(塵多苦累)/ 외로운 학이 못 떠나는 심정이네(孤鶴未歸情)// 어쩌다 그릇된 소문이 돌아(誤被浮虛說)/ 도리어 여러 입에 오르내리네(還爲衆口喧)/ 부질없는 시름과 한으로(空將愁與恨)/ 병을 안고 사립문 닫네(抱病掩紫門)’

유희경도 매창과 헤어져 한양으로 간 뒤 매창에게 시 ‘계랑에게(寄癸娘)’를 지어 보낸다.

‘헤어진 뒤로 다시 만날 기약 아직 없으니(別後重逢未有期)/ 멀리 있는 그대 꿈에서나 그리워할 뿐(楚雲秦樹夢想思)/ 어느 때 우리 함께 동쪽 누각에 기대어 달 보며(何當共倚東樓月)/ 전주에서 술 취해 시 읊던 일 이야기하려나(却話完山醉賦詩)’

유희경과 헤어지고 3년 뒤인 1610년 여름, 그녀는 38세로 쓸쓸히 죽는다. 그녀는 애지중지하던 거문고를 함께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매창이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남긴 시다.

‘도원에서 맹세할 땐 신선 같던 이 몸이(結約桃園洞裏仙)/ 이다지도 처량할 줄 그 누가 알았으랴(豈知今日事凄然)/ 애달픈 이 심정을 거문고에 실어볼까(坐懷暗恨五絃曲)/ 가닥가닥 얽힌 사연 시로나 달래볼까(萬意千事賦一篇)// 풍진 세상 시비 많은 괴로움의 바다인가(塵世是非多苦海)/ 깊은 규방 밤은 길어 몇 해인 듯하구나(深閨永夜苦如年)/ 덧없이 지는 해에 머리를 돌려 보니(藍橋欲暮重回首)/ 구름 덮인 첩첩 청산 눈앞을 가리네(靑疊雲山隔眼前)’

뒤늦게 매창의 죽음을 안 유희경은 슬퍼하며 만시(輓詩)를 남긴다.

‘맑은 눈 하얀 이 푸른 눈썹의 계랑아(明眸皓齒翠眉娘)/ 홀연히 구름 따라 간 곳이 묘연하구나(忽然浮雲入鄕茫)/ 꽃다운 혼 죽어 저승으로 돌아가는가(終是芳魂歸浿邑)/ 그 누가 너의 옥골 고향 땅에 묻어주리(誰將玉骨葬家鄕)// 마지막 저승길에 슬픔이 새로운데(更無旅新交呂)/ 쓰다 남은 화장품에 옛 향기 그윽하다(只有粧瞼舊日香)/ 정미년에 다행히 서로 만나 즐겼건만(丁未年間行相遇)/ 이제는 애달픈 눈물 옷깃만 적시네(不勘哀淚混衣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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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창집(梅窓集)’ 복제본 표지(위)와 내부. 부안문화원이 미국 하버드대 도서관에 소장된 매창집 목판본을 전통 한지에 담아 지난 3월에 발간한 것이다.

◆촌은 유희경

유희경(1545~1636)은 조선 중기의 시인이다. 호는 촌은(村隱)이고, 천민 출신이다. 유몽인(1559~1623)이 지은 ‘유희경전(柳希慶傳)’에 따르면 그를 정확히 노비라고 지칭하지는 않지만 ‘미천(微賤)한 신분’이라는 단어를 썼다. 그의 아버지 이름이 ‘업동(業仝)’인 것으로 보아 노비 혹은 천민 신분임을 알 수 있다.

유희경은 한양에서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효자로 이름이 났다. 13세에 아버지의 상을 당하자 예(禮)를 다했는데, 이 소문을 들은 사대부 남언경(南彦經)이 유희경을 돌보고 가르치면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

유희경의 벼슬살이는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나가 싸운 공으로 선조 임금으로부터 포상과 교지를 받으면서 시작되었다. 이때 사신들의 잦은 왕래로 호조의 비용이 고갈되자 그가 계책을 내놓았고, 그 공로로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를 받았다. 광해군 때에는 이이첨이 모후인 인목왕후를 폐하기 위한 상소를 올리라고 협박하였지만 거절하였다. 인조반정 이후 절의를 인정받아 가선대부(嘉善大夫)의 품계를 받았고, 80세가 되면서 가의대부(嘉義大夫)를 받았다.

유희경은 문인들과 교유하면서 한시를 잘 지었다. 자신의 집 뒤쪽 시냇가에 돌을 쌓아 대를 만들어 ‘침류대(枕流臺)’라고 하고 그곳에서 차천로, 이수광, 신흠, 김현성, 홍경신, 임숙영, 조우인, 성여학 등의 문인들과 시로써 화답하며 어울렸다. 이 시들을 모아 ‘침류대시첩(枕流臺詩帖)’을 만들었다.

그는 당시 같은 천민 신분으로 시에 능하였던 백대붕과 함께 ‘풍월향도(風月香徒)’라는 모임을 만들어 주도했다. 이 모임에는 박계강(朴繼姜), 정치(鄭致), 최기남(崔奇男) 등 중인 신분을 가진 시인들이 참여했다.

허균의 시비평집 ‘성수시화’에서는 그를 ‘천인으로 한시에 능통한 사람’으로 꼽고 있다. 그의 시는 한가롭고 담담하여 당시(唐詩)에 가깝다는 평을 들었다.

또한 서경덕의 문인이던 남언경에게 문공가례(文公家禮)를 배워 상례에 특히 밝았으므로, 국상이나 사대부가의 상(喪)에 집례하는 것으로 이름이 났다. 저서로 ‘촌은집(村隱集)’과 ‘상례초(喪禮抄)’가 전한다.

◆기생 이매창

이매창(李梅窓·1573~1610)은 조선 선조 때의 기생이며 여류시인이다. 한시 70여 수와 시조 1수가 전하고 있다. 시와 가무에도 능했을 뿐 아니라 정절의 여인으로도 부안 지방에서 400여년 동안 사랑을 받아오고 있다. ‘매창집(梅窓集)’의 발문을 보면, 그녀의 출생에 관한 정보를 찾을 수 있다.

‘계생(桂生)의 자(字)는 천향(天香)이다. 스스로 매창이라고 했다. 부안현의 아전 이탕종(李湯從)의 딸이다. 만력(萬曆) 계유년(1573)에 나서 경술년(1610)에 죽었으니, 사망 당시 나이가 서른여덟이었다. 평생토록 노래를 잘했다. 지은 시 수백 편이 그 당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지만, 지금은 거의 흩어져 사라졌다. 숭정(崇禎) 후 무신년(1668) 10월에 아전들이 읊으면서 전하던 여러 형태의 시 58수를 구해 개암사(開巖寺)에서 목판본으로 간행했다.’

매창은 부안읍 남쪽에 있는 봉덕리 공동묘지에 그녀가 아끼던 거문고와 함께 묻혔다. 매창이 묻힌 뒤 사람들은 이 공동묘지를 ‘매창이뜸’이라고 불렀다. 그가 죽은 지 45년 후인 1655년 무덤 앞에 비석이 세워졌고, 그 후 13년이 흐른 뒤 그녀의 시집 ‘매창집’이 나왔다. 그녀가 지은 수백 편의 시 중 고을 사람에 의해 전해 오던 시 58수를 부안 고을 아전들이 모아 개암사에서 목판에 새겨 찍은 것이다.

비석은 300년 가까이 세월이 흐르면서 풍우에 시달려 글자가 마멸돼 알아볼 수 없게 되자, 1917년 부안의 시인 모임인 ‘부풍시사(扶風詩社)’에서 ‘명원이매창지묘(名媛李梅窓之墓)’라고 새긴 비석을 다시 만들어 세웠다. 이 비석을 세우기 전까지는 고을 사람들이 후손도 없는 매창의 무덤을 돌보아 주었다. 남사당패와 가극단, 유랑극당도 이 고을을 찾으면 매창의 무덤부터 찾아 한바탕 굿판을 벌이며 추모의 술잔을 올린 뒤에 공연을 했다.

글·사진=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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