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들의 사랑이야기 .9] 만중운산에 어느 임 오리마는- 서경덕과 황진이(上)

  • 김봉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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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6-10-06   |  발행일 2016-10-06 제22면   |  수정 2016-10-06
밤비에 새입나거든
‘온몸으로 작심 유혹’ 비에 젖은 송도의 꽃, 花潭에 지다
20161006

‘마음이 어린 후니 하는 일이 다 어리다/ 만중운산(萬重雲山)에 어느 임 오리마는/ 지는 잎 부는 바람에 행여 그인가 하노라’

‘어리다’는 ‘어리석다’는 의미다. 도학자 화담(花潭) 서경덕(1489~1546)의 시조다. 이 시조에서 임은 기생 황진이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야담(野談)에 따르면 황진이는 생불(生佛)이라 불리던 지족선사를 유혹하여 파계시켰으며, 서경덕도 유혹하였지만 그는 황진이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다. 이후 황진이는 서경덕을 스승으로 평생 모시며 스승과 제자의 정을 나누었다. 이런 이야기를 근거로 하여 서경덕이 사제의 정을 나누던 황진이를 그리워하며 쓴 것으로 추정한다. 야사에 전하는 서경덕과 황진이의 사랑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본다.

비내리는 여름밤 유혹
실패후 다시찾은 초당
황진이와 서경덕은
사제의 인연을 맺었다

연민과 흠모의 마음뿐
운우지락 기록은 없어

박연폭포와 ‘송도삼절’


◆서경덕을 유혹하러 간 황진이

송도(개성의 옛 이름)는 ‘송도삼절(松都三絶)’로 유명했다. 송도에서 빼어난 것 세 가지를 말하는 송도삼절은 바로 박연폭포, 서경덕, 황진이다. 이 송도삼절은 황진이가 서경덕의 존재를 알고 난 후 스스로 선정한 것이다.

박연폭포는 개성의 성거산과 천마산 사이에 걸쳐 있다. 박연폭포에서 멀지 않은 성거산에 서경덕이 은거하고 있을 때 일이다.

비가 내리는 어느 여름날, 이 성거산 기슭을 홑저고리와 홑치마만 입고 내리는 비를 맞으며 걷고 있는 여인이 있었다. 비를 흠뻑 맞은 몸은 옷이 달라붙어 육감적인 몸매를 나체 못지않게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여인은 그런 모습으로 누군가 은거하고 있는 한 초당으로 들어갔다. 거기엔 한 선비가 홀로 기거하고 있었다. 조용히 글을 읽고 있던 선비는 아리따운 반라의 여인을 보자 말했다.

“웬 비를 이리도 맞았는가? 어서 들어오시게!"

선비는 여인을 스스럼없이 맞아 주었다. 그러면서 비에 젖은 몸을 말려야 한다며 손수 여인이 옷을 벗게 도와주었다. 알몸이 되도록 옷을 벗기고 직접 물기까지 닦아주는 선비를 보고 여인은 속으로 일단 쾌재를 불렀다. 그리고 선비의 반응을 기대하며 아름다운 전라의 몸으로 요염한 자세를 취했다.

그런데 여인의 몸에서 물기를 다 닦아낸 선비는 차분히 이부자리를 펼 뿐이었다. 그래도 여인은 ‘도가 높은 학자라 해도 똑같은 남자이니 별 수 없겠지’라고 생각하며 알몸으로 이부자리에 누웠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선비는 눈도 깜짝 안 하며 마른 이불을 덮어주고 몸을 말리라고 한 뒤, 옆에 있는 책상에 꼿꼿한 자세로 앉아 글을 읽기 시작했다.

‘참고 있겠지. 얼마 안 있다가 나한테로 올 거야.’

하지만 시간이 한참 지나도 선비는 책상 앞에서 여전히 책을 보고 있었다. 여인은 자존심도 상하고 오기가 발동했다. 이불을 걷어치우고 벌거벗은 몸을 무기로 노골적인 유혹을 했지만 변화가 없었다. 한밤중인 자시(子時)가 되자 선비는 책상에서 물러났다. 여인은 ‘이제야 본색을 드러내겠지’ 하고 기다렸다. 하지만 옆에 누운 선비는 곧 가볍게 코를 골며 잠들어 버렸다.

여인은 포기하고 ‘이 선비는 역시 소문대로 도가 높은 사람인가’ 생각하며 이런저런 상념으로 뒤척이다가 새벽녘에 혹 남성 구실을 못하는 사람이 아닌가 싶어 선비의 양물을 훔쳐 보았다. 크고 우람했다.

그러다 잠든 여인이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선비는 먼저 일어나 아침밥까지 차려놓고 있었다. 여인은 자신의 행동과 생각을 부끄러워하며 선비가 차려준 아침을 먹고 초당을 떠났다. 선비를 진심으로 존경하고 연모하게 되었음은 물론이다.

여인은 황진이, 선비는 서경덕이었다.



◆서경덕의 제자가 된 황진이

며칠 후 황진이는 서경덕이 머물던 성거산 초당을 다시 찾았다. 이번에는 조촐한 모습으로 정성 들여 장만한 음식을 들고서였다. 서경덕은 이번에도 반갑게 맞았다. 방안에 들어선 황진이는 서경덕에게 큰절을 올리며 제자로 삼아달라고 요청했다.

이렇게 해서 스승과 제자 관계이면서 사랑하는 연인으로서의 삶이 시작되었다. 연인이었지만 어느 야사에도 두 사람이 운우지락을 나누었다는 기록은 없다. 애틋한 연민의 정과 흠모하는 마음만 오갔을 뿐이었다.

어느 날 황진이가 서경덕에게 말했다.

“송도에는 꺾을 수 없는, 빼어난 것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서경덕이 황진이를 쳐다보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첫째가 박연폭포요, 둘째가 선생님입니다."

서경덕이 미소를 지으며 셋째를 물었다.

“셋째는 바로 접니다."

이렇게 해서 송도삼절(松都三絶)이라는 말이 만들어졌다.

서경덕은 과거시험에 합격하고도 부패한 조정에 염증을 느껴 벼슬을 마다하며 일생을 학문만 벗 삼았던 대학자였다. 집이 극히 가난했던 그는 며칠 동안 굶주려도 태연자약하게 도학에만 전념하며 제자들을 가르치는 것을 큰 낙으로 여겼다. 평생을 산속에 은거하고 살았지만 정치가 타락하거나 정도에 어긋나면 개탄을 금치 못하고 임금에게 상소를 올려 잘못된 정치를 비판하곤 했다.

이런 서경덕이 바로 송도 부근의 성거산(聖居山)에 은둔하고 있을 때 황진이가 찾아간 것이다.

서경덕은 그 인물됨이 인근에 자자하게 소문이 났고, 그 소문을 황진이도 들었다. 벽계수와 지족선사를 무너뜨린 황진이는 칭송이 자자한 서경덕에게도 도전을 하기로 마음먹고, 기생으로서 여러 선비에게 썼던 수법을 그대로 써 보았던 것이다.

황진이는 용모가 출중했고 뛰어난 총명성과 민감한 예술적 재능을 두루 갖추고 있었다. 노래뿐만 아니라 학문에도 식견이 높았고 시에도 능했다. 당시 잘나가던 선비들은 이런 황진이를 만나 하룻밤 보내는 것을 대단한 자랑거리로 여겼다.

황진이는 당시 생불이라 불리던 지족선사를 하루아침에 파계시켜 ‘십년공부 도로 아미타불’로 만드는가 하면, 호기로 이름을 떨치던 벽계수(碧溪守)라는 왕족의 콧대를 보기 좋게 꺾어 놓기도 했다.

황진이가 벽계수를 유혹하며 지은 시조다.

‘청산리(靑山裏) 벽계수(碧溪水)야 수이 감을 자랑 마라/ 일도창해(一到蒼海)하면 돌아오기 어려우니/ 명월(明月)이 만공산(滿空山)하니 쉬어간들 어떠리’ 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겸재 정선의 ‘박연폭포’. 개성(송도)에 있는 박연폭포는 서경덕, 황진이와 함께 ‘송도삼절(松都三絶)’로 불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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