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성] 블랙

  • 박규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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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1-18   |  발행일 2017-01-18 제31면   |  수정 2017-01-18

많은 낱말 중에서도 ‘블랙(black)’처럼 양극단의 뜻을 함께 담고 있는 단어는 흔치 않다. 블랙은 권위·품격·고급을 상징하면서도 죽음·어둠·저급함의 의미가 내재돼 있다. 초고가 승용차 대부분이 검은 색상이고 프리미엄 가전품과 남성 결혼예복이 주로 블랙으로 만들어지는 이유는 검은색이 풍기는 품위와 고급 이미지 때문일 게다. 신라면의 프리미엄 제품을 ‘신라면 블랙’으로 명명한 것도 같은 이치다. 미국의 블랙 플라이데이(Black Friday)는 연중 처음 흑자(black ink)를 기록한다는 데서 유래된 만큼 여기서의 블랙도 긍정적 의미가 강하다.

죽음 말고도 블랙이 부정적으로 쓰이는 예는 허다하다. 코미디 중에서도 막장 드라마 성향이 짙거나 아주 저급한 내용을 다룬 것을 블랙 코미디라고 한다. ‘속이 시커멓다’의 블랙은 음흉하다는 뜻이고, ‘블랙 스완(black swan)’의 블랙엔 예상치 못한 충격의 의미가 담겨져 있다. ‘흑역사’에서의 블랙은 어두운 과거사를 상징하며, ‘검정보다 더 어두운 색은 없다’는 고대 페르시아 속담은 절망의 블랙을 은유한다.

문화예술계의 블랙리스트(black list) 파문으로 온 나라가 시끄럽다. 블랙리스트의 개략적 의미는 ‘감시가 필요한 위험인물들의 명단’이다. 이때 사용되는 블랙에선 범죄·테러 냄새가 스멀거린다. 가장 나쁜 뜻의 블랙이다. 하지만 블랙리스트에 이름을 올린 문화예술인 중 범죄·감시·위험 따위의 이미지를 덧씌울 수 있는 인물은 없다. 간명한 글귀로 인생의 영롱한 아름다움을 오롯이 담아내는 서정(抒情)의 마법사 정호승 시인도 블랙리스트에 포함돼 있다고 한다. 필자도 정호승의 시를 좋아하지만 그의 작품은 정치색이 전혀 없다. 그런데도 노무현 시민학교에서 강의했다는 이유만으로 블랙리스트에 올랐다니 어이가 없다.

블랙리스트로 헌법에 보장된 사상 및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겠다는 건 군사독재 시대에나 가능한 발상이다. 블랙리스트 작성은 건전한 영혼을 가진 문화예술인을 대상으로 할 일이 아니다. 정작 블랙리스트를 만들어야 할 곳은 국가권력을 사유화한 최순실 부역자 집단이다. 저들은 최순실의 권력농단을 공모하거나 방조하며 공조직과 국정 시스템을 파괴했다. 부역자들을 솎아내기 위해서라도 명단 작성이 필요하다. 박규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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