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경북 여성사를 빛낸 인물들

  • 김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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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3-03   |  발행일 2017-03-03 제34면   |  수정 2017-03-03
대구·경북의 딸로 태어나…‘禁女’의 벽을 허물다
■ 3·8 세계여성의 날 맞아
20170303
①‘최고 훈장을 받은 여성독립운동가’ 남자현 ② ‘국채보상운동 남일동패물폐지부인회 리더’ 정경주 ③ ‘하와이 이민1세 독립운동가’ 이희경 ④ 궁중무용과 민속무용의 맥을 이어온 정소산 ⑤ ‘독립투쟁에 앞장선 의열단의 여전사’ 현계옥 ⑥ ‘남녀평등을 꿈꿨던 여성운동가’ 정칠성 ⑦ ‘김천고등보통학교를 설립한 육영사업의 어머니’ 최송설당 ⑧ 대구 최초의 초등학교인 희도초등을 설립한 김울산 ⑨ ‘사회의 스승이 된 기생’ 염농산 ⑩ ‘영남지역 최초의 여성성악가’ 추애경 ⑪ ‘경북 첫 신춘문예 등단 작가’ 백신애 ⑫ ‘최초의 종군 여기자이자 여성 역사소설가’ 장덕조 ⑬ ‘대구가 배출한 최초의 대중가수’ 장옥조 ⑭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영화감독’ 박남옥 ⑮ ‘대구여자경찰서 초대서장’ 정복향 (16)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여성비행사’ 박경원.

지역의 여성사를 빛낸 인물들은 과연 어떤 삶을 살았을까. 대구여성가족재단 정일선 대표는 “대구여성은 강하다. 여성이라는 제약과 시대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누구의 딸로, 누구의 아내로, 누구의 며느리로 살아야 했던 시대에 치열하게 자신의 삶을 살아냈고 도전적인 자세로 새로운 길을 개척했다”고 설명했다.

때로는 희생과 헌신으로
때로는 선구자적 행보로
시대적 한계와 편견 맞서
독립운동·문화예술 두각

남일동패물폐지부인회 등
‘혼자 또는 같이’ 愛國 활동
정칠성과 염농산·현계옥
기생 출신 다방면서 활약


◆독립운동

#남자현(1873~1933)

‘만주독립군의 어머니’로 불리며 의열투쟁으로 독립운동사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긴 인물이다. 남자현은 전통적 규범 속에 성장한 구여성이었으나 당당히 그 틀을 깨고 46세에 아들을 데리고 만주로 떠났으며 그 후 14년 동안 만주에서 조국광복에 헌신했다. 독립군단 서로군정서에서 활동했으며 청산리전투에 참여해 독립군을 간호하기도 했다. 그는 교회를 중심으로 여성운동에도 나섰다. 교회를 설립해 여자교육회를 조직했으며 순회강연을 통해 여성들에게 민족의식을 불어넣는 데도 힘을 쏟았다. 독립운동사에서 보기 드문 열혈투쟁가였던 그는 1962년 건국공로훈장 복장(건국훈장 대통령장)을 받았다. 정부는 이때 독립유공자 58명에게 건국공로훈장 복장을 수여했는데 이봉창, 신채호 등 걸출한 운동가들이 포함됐다. 이들과 함께 최고의 훈장을 받은 여성은 남자현이 유일했다.

#정경주(1866~1945)

국채보상운동 남일동패물폐지부인회 취지문에는 “나라 위하는 마음과 백성의 도리에야 어찌 남녀가 다르리오. 유지하신 부인동포들은 다소를 물구하고 혈심의연하와 국채를 청장하심이 천만행심”이라고 적혀있다. 정경주는 남일동패물폐지부인회의 실질적인 리더였다. 자발적 국채보상운동조직으로 근대여성운동의 효시가 된 남일동패물폐지부인회의 7인은 그동안 누구의 처, 누구의 모 등으로만 불리다가 대구여성가족재단에 의해 그중 6명이 이름을 드러냈다. 정경주를 비롯해 서채봉 김달준 정말경 최실경 이덕수이다.

#이희경(1894~1947)

하와이에서 독립운동을 펼친 해외독립운동가이다. 그는 신명여학교 1회 졸업생으로 졸업 후 여자도 마음껏 공부할 수 있다는 말에 사진신부가 되어 하와이로 떠났다. 예상치 못한 어려움이 닥쳤으나 이를 슬기롭게 이겨내고 한인사회의 발전을 위해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또 조국의 독립을 위해 남편 권도인과 함께 가구와 커튼사업을 하며 평생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독립운동 자금을 보냈다.

#현계옥(1897~?)

기생이었던 현계옥은 연인 현정건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를 애인으로 혹은 한 여자로만 보지 말고 같은 동지로 생각해 달라.” 일찍 부모를 잃은 그는 17세에 대구에서 기생이 되었다. 3·1만세운동 후 만주로 건너가 김원봉, 김좌진 등을 만나 의열단 단원이 됐다. 심금을 울리는 가야금 연주에 뛰어난 노래 실력까지 갖췄다. 여기에 영어, 일어, 중국어를 자유롭게 구사했다. 춤과 가야금은 대적할 이가 없다 할 정도로 당대의 명기였던 현계옥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총과 폭탄을 든 채 말을 타고 벌판을 내달린 진정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정칠성(1897~1958)

정칠성은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인해 7세 어린 나이에 기생이 됐다. 17세에 승마를 배우는 파격적인 행보를 보였고 쪽 찐 머리가 아닌 단발미인으로 장안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는 일찍부터 남다른 자의식과 존재감을 드러냈으며 1924년에는 ‘조선여성동우회’를 조직하고 집행위원이 된 것을 시작으로 전국적인 여성통일기관인 근우회를 이끌며 여성해방운동, 나아가 식민지해방운동을 펼쳤다.

◆교육

#최송설당(1855~1939)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인 영친왕의 보모였던 최송설당은 인재육성을 위해 전 재산을 쾌척해 경북 김천에 인문계 고등학교인 김천고등보통학교를 설립한 한국육영사업의 어머니였다. 영친왕의 보모로 지내고 고종 등과 친분을 맺으며 궁궐생활을 했던 그는 역적으로 몰렸던 가문의 신원을 이루었고 부를 일구었다. 여생을 마무리하기 위해 고향 김천으로 되돌아온 그는 약 10년간 한국 육영사업에 큰 획을 그었다. 빼앗긴 나라를 되찾으려면 무엇보다 인재를 키워야 한다고 판단한 그는 김천에 30만2천원이라는 엄청난 규모의 재산을 쾌척해 학교를 지었다. 동아일보는 1931년 4월25일자에 “최송설당의 김천고보 개교는 적막의 김천을 활기의 김천으로, 초야의 김천을 이상의 김천으로 만들었다”고 썼다.

#김울산(1858~1944)

김울산은 순종의 대구 방문 때 받은 하사금과 지방 유지의 기부금을 비롯해 자신의 재산으로 복명보통학교의 전신인 명신여학교의 창립을 도왔다. 1925년 재정난으로 어려움을 겪던 명신여학교를 인수해 복명학교로 개칭했다. 복명(復明)은 조국광복의 염원을 담은 뜻으로 이때부터 자신의 이름도 복명으로 고쳤다. 또 대구 최초의 초등학교인 희도국민학교를 세우고 1천원을 기부했으며 대남학교 유치원 설립에도 동참했다.

#염농산(1860~1946)

염농산의 기명은 ‘앵무’였으며 한때는 경상감영 교방의 관기였다. 국채보상운동이 펼쳐지자 가장 먼저 100원을 내놓으며 “누구라도 1천원, 1만원을 출연하면 죽기를 작정하고 따라 한다”고 했다. 고향에서 물난리가 나자 사재를 털어 둑을 쌓았으며 후세들의 교육을 위해 거금을 아낌없이 기부했다. 특히 대구지역의 여성교육에 혼신의 힘을 쏟았다. “기생은 돈 많은 사람만 섬겨서는 안된다. 만신창이가 된 나라를 위해 한 몸 바칠 수도 있어야 한다”는 그의 말에서도 그의 고귀한 삶이 드러난다.

◆문화예술

#추애경(1900~1973)

추애경은 영남지역 최초의 여성 성악가이다. 대구 신명여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이화학당에서 성악을 전공했다. 신명여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며 음악활동을 했다. 이후 일본과 미국에 유학해 피아노와 성악을 전공했다. 보스턴 뉴잉글랜드음악원에서 성악을 전공한 그는 보스턴 추기음악대회에 참가해 언론에서 ‘리릭소프라노로 조선의 천재’라는 격찬을 받았다.

#정소산(1904~1978)

본명은 유색(柳色), 호는 소산(小山)이었다. 5세 때 대구기생조합 김수희 조합장의 문하생으로 들어가 춤을 배우기 시작해 부산의 봉래권번, 수원의 화인청, 대정권번 등에서 지냈다. 그는 대정권번에서 당대의 명인으로 손꼽힌 인물 하규일을 만나 궁중춤을 배웠고, 대정권번이 조선권번으로 이름이 바뀐 뒤에는 선생으로 직접 기녀들을 가르쳤다. 23세 때에는 대가 한성준으로부터 승무를 배웠다. 1920년대 고향 대구로 돌아온 정소산은 42세에 처음으로 발표회를 연 데 이어 하서동에 ‘정소산고전무용연구소’를 설립하여 궁중춤 포구락, 무고, 검무 등의 전승과 보급에 힘썼다. 그의 대표적인 춤인 ‘수건춤(정소산류)’은 대구무형문화재 18호(예능보유자 백년욱)로 지정돼 있다.

#백신애(1908~1939)

32세로 요절한 여성 항일운동가이자 신춘문예출신의 여류작가 1호이다. 1929년 조선일보에 하룻밤 만에 쓴 단편 ‘나의 어머니’를 응모한 것이 1등으로 당선되면서 신춘문예 첫 여류작가라는 기록을 세웠다. 여성계몽운동가이자 경북도 공립학교 여교사 1호이기도 한 그녀는 1930년대 저항문학의 정수를 보여줬다. 부잣집의 외동딸로 태어났지만 호사를 누리기보다 일제의 핍박으로 짓눌리고 힘든 이들을 따뜻하게 감싸주는 문학에 매진했고 여성들의 지위 향상에도 헌신했다.

#장덕조(1914~2003)

장덕조는 ‘경북 출신 여기자 1호’로, 휴전협정을 취재한 유일한 종군여기자다. 250여 편이 넘는 장편 및 단편, 희곡을 남겼으며 장편역사소설 분야를 본격적으로 개척한 선구자이다. 개벽사 여기자 생활을 시작으로 영남일보, 매일신문 등에서 일해 언론사에도 큰 족적을 남겼다. 그는 1930년대부터 작품활동을 했으며 백신애와 함께 지역을 대표하는 여류작가였다.

#장옥조(1917~?)

장옥조는 대구가 배출한 최초의 대중가수이다. 일부러 눈을 안대로 가려 대중의 호기심을 자극하며 일명 ‘미스 리갈’로 큰 인기를 모았다. 1935년 ‘고향아 잘 있거라’로 데뷔했고 ‘신접살이 풍경’ 등 25곡 분량의 가요작품을 발표하며 식민지시대의 중심가수로 의욕적인 활동을 펼쳤다.

#박남옥(1923~ )

한국 최초의 여성영화감독이다. 여성영화인사전(2001)에 따르면 그는 1955년 단 한 편의 영화 ‘미망인’을 남겼다. 이 영화는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50년대 영화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당시 사회적으로 문제가 됐던 전쟁과부 문제를 다루면서도 전통과 근대의 갈림길에 선 여성들의 성적 욕망을 첨예하게 다루고 있다. 서울여성영화제에서는 한국 최초의 여성영화감독인 박남옥을 기리기 위해 박남옥영화상을 제정해 상을 수여하고 있다.

◆기타

#박경원(1897~1933)

박경원은 우리나라 민간 여류비행사 1호였다. 일제강점기를 살다 간 그는 당시 여성에게 주어진 순종적인 삶을 거부하고 남성의 영역으로 간주되었던 비행사가 되기 위해 남성들과 경쟁하는 한편 조선의 여성으로 일본의 여성비행사와 승부를 다투기도 했다. 딸, 여성, 식민지 백성이라는 이중삼중의 억압 속에서 ‘처음, 으뜸(元)’이라는 뜻의 이름처럼 여류비행사가 된 점은 한국여성사에서 큰 의미를 가진다.

#정복향(1910~1998)

대구여자경찰서 초대서장이었던 정복향은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새 길을 향해 나아가길 겁내지 않았던 일제강점기의 교육인이었다. 대한민국 경찰과 정치인으로서도 다양한 족적을 남겼다. 그는 1947년 새롭게 만들어진 대구여자경찰서 간부모집 공고에 기혼자로 응모했다. 정복향은 시험을 치렀고 필기시험에 수석합격했으나 자녀가 있다는 이유로 면접에서 불합격됐다. 그는 경찰당국에 강력항의했고 결국 채용됐다. 1950년에 발족된 대한여자청년단 경북도단장을 맡고 지역에서 첫 여성도의원으로 당선돼 왕성한 의정활동도 벌였다. 9대 국회에서는 전국구 의원으로 당선돼 국회에 진출했다.

#김미희(1920~1981)

“우리의 전통문화가 이렇게 아름답고 품위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 바로 우리의 국격을 높이는 것”이라고 말한 김미희는 한국 다도의 선구자였다. 우리 민족이 일제강점기와 광복, 6·25전쟁을 겪던 어려운 시기에 전통 차문화에 관심을 가지고 전통다구와 다실 등을 연구, 복원해 한국다도계에 큰 획을 그었다. 1980년 그는 복원된 자료를 통해 의식다례와 생활다례를 재구성해 대중 앞에서 발표했다. 여성들에게 생활다례를 가르치고 대학생들에게는 전통다례를 배우게 했다. 그는 차문화만이 아니라 다른 전통문화에도 깊은 애정을 가지고 새로운 문화도 넓은 가슴으로 끌어안은 문화인이었다.

김수영기자 sykim@yeongnam.com

▨도움말= 대구여성가족재단, 경북여성정책개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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