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 칼럼] 명분과 현실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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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4-25   |  발행일 2017-04-25 제31면   |  수정 2017-04-25
[CEO 칼럼] 명분과 현실사이

병자호란이 일어난 1636년 12월, 차가운 겨울 추위 속에 남한산성으로 피신한 인조를 가운데 두고 신하들 사이에서 격론이 벌어졌다. 어떻게 이 난국을 헤쳐나갈 것인가. 주전파는 주장한다. “오랑캐인 청에 항복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므로 임금 이하 백성이 죽음을 각오하고 일치단결하여 항쟁해야 한다”고. 이에 대해 주화파는 말한다. “우리의 힘이 저들의 상대가 안 되는 현실을 무시하고 항쟁한다는 것은 백성들을 죽이고 강산은 유린당할 것이니 우선 항복하고 훗날을 도모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당시에는 주화파의 현실론이 채택되어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항복함으로써 전쟁은 끝이 나고 나라는 보존되었다. 그러나 역사의 승자는 주전파였다. 눈앞의 어려움이 사라지자 주전파와 그 후손들은 숭명대의의 명분을 앞세워 현실과 타협한 주화파를 누르고 권력을 잡았다.

명분에 바탕을 둔 논리는 무엇보다 명쾌하다. 이해가 쉬우므로 설득력이 있다. 멋있기까지 하다. 많은 경우 조리있는 목소리가 필요할 뿐 이를 현실에 옮기는 데 들어가는 노고도 적다. 남한산성에서 주화파는 밤 새우며 항복문서의 내용을 다듬고 써야했지만 주전파는 한번 크게 꾸짖으면서 문서를 찢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명분이 득세하면 구체적 정책대안이 백성들의 삶과 동떨어지기가 쉽다. 이는 마치 복잡한 수학을 동원하여 정교하게 꾸며진 계량경제학이 그 자체로서 훌륭한 논문이 될 수는 있지만 경제현실을 풀어내는 데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 것과 같다.

명쾌한 명분론에 비해 현실론은 밋밋하다. 논쟁이 벌어지면 대개 ‘이론적으로야 당신들의 말이 맞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지 않느냐’고 한 자락 깔고 이야기를 시작해야 한다. 조선후기 대동법과 같이 백성들의 어려움을 덜어주는 개혁입법을 둘러싸고 산당과 한당이 대립했던 때를 보더라도 성리학 이론에 입각해 논리정연하게 전개된 산당의 정치적 주장에 비해 백성들의 형편을 살펴 현실을 강조한 한당은 밀리기 마련이었다. 대안을 제시하면서 ‘한편으로는 이러이러하고 또 다른 측면을 감안하면 저러저러하다’는 주장은 듣는 사람을 짜증나게 만든다. 일을 싫어하는 사람들의 핑계처럼 들리기 쉽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은 복잡함 그 자체다. 흑백의 명쾌한 논리로 재단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색깔이 뒤섞여 있다. 난마처럼 얽혀있는 것이 세상사다. 알렉산더가 아무도 풀지 못했던 고르디오스의 매듭을 단칼에 베어버린 행위는 쾌도난마의 영웅담으로서는 훌륭한 소재다. 그러나 칼에 잘려나간 매듭은 다시 주워 쓸 수가 없다. 비록 힘들고 시간이 걸리더라도 헝클어진 실타래를 잘 정리하여 온전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다.

지금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어려움들은 모두 고르디오스의 매듭 이상이다. 북핵문제를 비롯한 외교안보문제가 그렇고 성장잠재력이 떨어지고 있는 경제를 복원하여 일자리를 만들고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념, 세대, 지역, 계층 간의 이해관계를 조정하여 국민의 힘을 한 방향으로 모아가는 일은 아주 복잡한 방정식을 푸는 일이다.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명쾌한 대안은 없어 보인다. 언뜻 보기에 약간은 흐리멍덩하고 지지부진하여 속을 답답하게 하는 해법이 오히려 바른 방향이요, 더 빠른 길일 수도 있다.

수많은 이해관계자의 이해를 조정하면서 설득해 나가는 일은 미리 결론을 내려놓고 명분만으로 밀어붙여서 될 일이 아니다. 명분과 이론이 바탕이 되어야 하지만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결과를 만들기 위해 자기 손에 물과 흙을 묻히며 길을 개척해 가는 노력이 필요한 일이다. 더욱이 시대는 국가경영의 여러 분야에서 정책의 틀을 다시 짤 것을 요구하고 있다. 과거의 정책을 답습하는 경우와는 차원이 다른 상황이다. 당장은 욕을 먹더라도 백성의 삶을 먼저 생각하고 굴욕을 참으며 대안을 제시한 주화파나 한당의 정신이 아쉬운 때다.

박봉규 (서울테크노파크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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