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타워] 혐오를 혐오하다

  • 이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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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6-01   |  발행일 2017-06-01 제31면   |  수정 2017-06-01
[영남타워] 혐오를 혐오하다
이 은 경 경제부장

지난 주말 KTX를 타고 서울을 다녀올 일이 있었다. 처음엔 서울까지 가는 동안 음악을 들으며 책이나 읽을 요량이었다. 책과 신문, 커피를 주섬주섬 손에 쥐고 기차에 올랐다.

알고보니 내가 탄 기차칸은 유아·어린이 동반석이었다. 책을 읽지도, 음악을 듣지도, 잠을 자지도 못했다. 울음소리는 이어폰을 뚫고 들려왔고 아이들은 잠시도 가만히 앉아 있지 않았다. 소란스러운 공간 속에서 마음은 무거워지고 몸은 피곤했다. 무엇보다 두 시간은 생각보다 길었다.

그 와중에 펴든 신문에 ‘노키즈존’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찬성과 반대의 의견이 엇갈리는 가운데 노키즈존이 늘어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아이를 키워본 사람은 안다. 아이들은 어른의 뜻대로 되지 않는다. 논리적인 설득은 애당초 불가능하고, 혼을 내 봤자 잠시뿐이다. 사정하고 달래보고 관심을 돌려보기도 하고 야단도 치고 그러다 지쳐 그냥 내버려두기도 하는 것이다. 원래부터 무개념하고 무감각한 ‘맘충’이어서가 아니다. 아이였던 우리 모두도 그렇게 어른이 됐다.

아이와 함께 기차를 탄다는 것이 얼마나 곤혹스러운 일인지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그래서 유아·어린이 동반석을 선택했을 것이다. 그러려고 골라 탄 기차칸에서 아이가 운다고, 뛰어다닌다고, 성가시다고 불편해 한 것이다. 나는 반성했다.

현실에서 ‘불편’의 대상은 쉽게 ‘차별과 금지’의 대상으로 전환된다. 삶이 팍팍해질수록 인내는 어렵고 부정을 통한 배제는 쉬워지기 마련이다. 여유가 없는 만큼 거슬리는 것들이 많아지고 불안한 사회는 그것들을 용인하지 못하게 된다. 확산되는 노키즈존에 없는 것은 ‘아이들’뿐만이 아니다. 공존하려는 여유가 없으며,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배려가 없다. 존재에 대한 부정과 특정 집단에 대한 원천적인 배제가 차별이 될 수도 있다는 문제 의식은 더더욱 없다.

그러므로 노키즈존의 문제는 천방지축인 아이도, 그걸 나 몰라라 내버려두는 ‘맘충’에 있지도 않다. 당연한 듯 대놓고 이뤄지는 차별과 혐오에 진짜 문제가 있다.

‘키즈’를 ‘노인’ ‘여성’ ‘장애인’ ‘성소수자’ ‘이주민’ 등의 단어로 바꿔보면 문제는 명확해진다. 자신의 목소리와 언어를 가지지 못한 약자와 소수자는 이처럼 당연하게 혐오의 대상이 된다. 노키즈존이 늘어가는 이 불안한 사회가 두려운 이유다.

서울을 다녀온 다음 날 신문에는 대구 중부경찰서 앞에서 밤을 새우고 있는 성소수자들의 뉴스가 실렸다. 이들이 경찰서 앞에서 밤을 새우는 까닭은 성 소수자 축제인 ‘대구퀴어문화축제’의 집회신고를 하기 위해서였다. 축제를 반대하는 ‘혐오 세력’이 선착순으로 결정되는 해당 날짜의 집회 신고를 선점하겠다며 방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누구에겐 당연한 권리가 다른 누군가에겐 투쟁해 쟁취해야 하는 어떤 것이 된다.

누군가를, 무언가를 혐오한다는 건 어쩌면 개인적이고 감정적인 문제일 수 있다. 마음과 생각으로 이뤄지는 혐오를 된다 안된다 허락할 수 없고, 좋다 나쁘다 평가할 수 없다. 하지만 그 혐오를 배제와 차별이라는 행동으로 옮기는 건 전혀 다른 차원의 일이다. 따라서 혐오하는 대상과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존재하지 않겠다는 의지와 표현은 가능할 수도 좋을 수도 없다.

사회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차별받지 않을 권리는 누구에게나 있다. 타인을 차별하지 않고 함께 살아야 하는 의무가 우리에게 있듯. 우리는 그것을 인권이라 부른다. 인간으로서 가지는 보편적인 불가침의 권리. 그들의 마땅한 권리가 어찌하여 당신들의 합의 대상이 되는가. 혐오가 팽배한 사회는 불안하고, 차별과 배제를 용인하는 사회는 위험하다. 이은경 경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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