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급했던 日, 영양·경산서 대규모 징집…인간방패·일꾼으로 내몰아

  • 최보규
  • |
  • 입력 2017-08-15 07:26  |  수정 2017-08-15 07:27  |  발행일 2017-08-15 제3면
오키나와 전투에 대구·경북민 최다 징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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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기씨의 형 순기씨(앞줄 왼쪽 넷째)는 일제강점기 파푸아뉴기니에 군인으로 강제동원돼 그곳에서 목숨을 잃었다. 형의 사진 3장 중 한 장. 형이 징집돼 용산에서 훈련받을 때 집으로 보내온 사진이다. <박상기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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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군 영양읍 서부리에 세워진 ‘한의비’. 눈을 가린 채 일본에 의해 끌려가는 청년과 울부짖는 어머니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영양군 제공>

최근 개봉한 영화 ‘군함도’에는 일본 하시마에 징집돼 간 한국인들이 나온다. 영화 속 인물들은 일본의 산업화와 전쟁승리를 위한 소모품으로 쓰였다. 당시 한국인들이 끌려가 희생당한 곳은 비단 하시마뿐만이 아니었다. 일본 오키나와도 그런 지역 중 하나다. 당시 일본은 긴박한 전쟁 상황으로 인해 특정 지역에서 대규모 인력을 징집해 갔다. 그 중에서도 지리적으로 가까운 대구·경북민이 많았다. 그들은 전장에서 인간방패가 되거나 일본인의 일꾼이 됐다. 최근 일본 정부는 오키나와 전몰자 유해 발굴 작업에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우리 정부도 이에 발맞출 방안을 고심 중이다. 과연 오키나와에 묻혀있는 대구·경북민의 유골은 고향땅에 묻힐 수 있을까.

전라도·충청도보다 많이 징용
생존자 모임인‘태평양동지회’
영양·경산 등에 위령비도 세워

“70년 넘도록 돌아오지 못한 兄
남은 사진 3장이 유일한 유품”


◆10명 중 6명…대구·경북 피해신고자

‘태평양 최대의 전투’. 오키나와전투의 또 다른 이름이다. 1940년대 초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의 전세는 급격히 기울고 있었다. 44년 미군은 사이판에 상륙한 뒤 다음 전쟁터로 일본의 최남단 섬 오키나와를 지목했고, 일본은 대규모 병력을 오키나와에 배치해 본토의 피해를 최소화하려고 했다. 이에 끌려간 것이 한국인들. 상황이 위급했던 만큼 일본은 한국의 특정 지역 주민들을 집중 동원했다. 그 결과 오키나와에 끌려간 한국인 상당수는 대구·경북민이었다.

행정안전부 과거사관련업무지원단은 오키나와 징집 피해 신고자 10명 중 6명 꼴로 대구·경북 출신이었다고 밝혔다. 피해자나 유족들이 자발적으로 신청한 집계이기 때문에 정확하지는 않지만, 이를 통해 대략적인 대구·경북 지역 출신자의 징집 규모를 가늠해 볼 수 있다.

대구·경북 지역민들이 오키나와에 집중적으로 동원돼 갔다는 흔적은 지역사회에도 일부 남아있다.

경산에는 오키나와에 강제징용된 후 고국에 돌아온 이들이 조직한 ‘태평양동지회’가 있다. 태평양동지회는 과거 생존자들 간에 정기적인 모임을 가졌을 정도로 활발히 운영돼 왔다. 지금은 대부분이 고령으로 세상을 떠나 그 후손들이 이끌어 가고 있다. 이들은 영남대, 경산시 등과 뜻을 모아 지역에 위령비를 세웠고 매년 위령비 앞에서 위령제를 지내기도 한다.

또 다른 집단 징집이 일어난 영양군에는 ‘한의비’가 세워져 있다. 오키나와전투에 강제 동원돼 억울하게 희생된 지역민을 기리는 위령비다. 영양 출신의 오키나와 징용피해자 고(故) 강인창옹이 1997년부터 추진해 세웠다.

경산의 오키나와 징용을 연구했던 권병탁 전 영남대 교수는 “오키나와에 징용된 한국인들은 끌려가는 순간부터 노예생활을 했다. 전라도·충청도 등에 비해 경상도의 비중이 특히 높았는데 영양·경산 등 특정 지역에서 끌려간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이들 중 고국으로 돌아온 사람들은 얼마 없었다”고 말했다.

◆속도내는 오키나와 유해 수습

이들의 유골 발굴 작업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을까. 다른 동원지에 비해 오키나와는 유해 수습 전망이 밝은 편이다.

일본 정부는 지난해 ‘전몰자의 유골수집 추진에 관한 법률’을 제정했고 오키나와 지역을 중심으로 전몰자 유해 발굴·수습 작업에 속도를 내고 있다.

한국 정부도 일본의 유해 발굴 작업에 발맞추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지난해 행안부는 피해자 유족의 유전자은행 구축을 위해 3억원의 예산을 편성해 제출했다. 한인 징집자 유족의 유전자를 기록해 놓으면 일본이 유해를 발굴했을 때 보다 간편하게 유전자를 대조할 수 있다는 취지였다. 하지만 지난해 예산안은 기획재정부의 예산 심의를 통과하지 못했고 현재 행안부는 내년도 예산 반영을 재시도하고 있다.

행안부 과거사관련업무지원단 관계자는 “국내로 봉환하지 못한 유골이 많기 때문에 유족들로부터 유전자검사를 해 달라는 요구가 꾸준히 있었다. 지난해 유전자 검사 예산안이 통과되지 못해 올해 다시 시도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유전자를 채취하고 검사하는 데 드는 시간은 이미 정해져 있다. 시간을 단축할 수 있는 관건은 예산이 속히 편성되는 것”이라고 했다.

오키나와를 두고 한일 양국 정부가 유골 수습 의지를 표하면서 오키나와가 일제강점기 징용자 유골 발굴의 선사례가 될 것이라는 의견도 나온다.

이희자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대표는 “일본이 오키나와를 중심으로 유골을 발굴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 정부도 유전자 검사 등을 진행하면서 오키나와를 최우선시 할 수밖에 없다”며 “대구·경북민이 주로 끌려간 오키나와가 유해 발굴의 시범사례가 되면 일제강점기 다른 지역으로 동원된 한인 유골을 찾는 것도 활발히 전개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고 설명했다.

문제는 예산 편성과 유전자 검사 완료까지 걸리는 시간이다. 유족 상당수가 70~80대를 넘긴 상황을 고려하면 유전자 채취를 서둘러야 추후에라도 유골 봉환 작업을 순조롭게 진행할 수 있다.

양순임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 회장은 “유족의 상당수가 고령으로 돌아가시거나 몸 상태가 안 좋다. 자칫 늦어지면 조상의 유골을 찾더라도 돌아갈 곳이 없어질 수 있다. 정부가 서둘러야 평생을 안고 살아온 유족의 응어리진 마음이 풀릴 수 있다”고 말했다.

최보규기자 choi@yeongnam.com


  “70년 넘도록 돌아오지 못한 兄
  남은 사진 3장이 유일한 유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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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족 박상기씨

◆파푸아뉴기니 강제징용 피해자 유족 박상기씨

“많이 간 지역은 비석도 세우고 연구도 활발하죠. 파푸아뉴기니는 간 사람이 비교적 적어서 그런가 별 노력도 안 하는 것 같아요.”

대구 남구 대명동 1736에 살던 박상기씨(80)는 일제강점기에 친형을 잃었다. 중앙로에서 상점을 하던 형은 1940년쯤 파푸아뉴기니에 군인으로 강제 동원돼 갔다. 기록상 1945년 4월21일 현지에서 목숨을 잃은 걸로 확인된다. 하지만 유골은 광복 70년이 넘도록 찾지 못했다.

광복 후 마을에서는 일본 관련 물품을 다 태우라고 해 형이 입던 옷과 쓰던 책은 흔적도 없이 불 속으로 사라졌다. 다른 책 사이에 끼어있다가 남은 형의 사진 3장만이 유일한 유품이다.

박씨는 “일본 영토도 아니고 흔히 알려진 국가도 아니라서 징용자에 대한 관심이 적어요. 제대로 된 보상이라도 해주나, 유골 찾으려고 노력을 제대로 기울이나, 이 답답함을 어디가서 말해요.”


 “태어나기도 전 끌려간 아버지
  정부, 사망보상금 30만원 지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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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족 김기동씨

 ◆오키나와 강제징용 피해자 유족 김기동씨

 “나는 아버지를 마음속으로만 떠올릴 수 있는 사람입니다.”
김기동씨(74)는 1944년 음력 7월 경산군 와촌면 신한리 480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김씨가 태어나기 불과 두 달 전 일본 오키나와에 군속으로 끌려갔다.

아버지는 당시 경산군에 모인 뒤 대구사범학교에서 3일가량 훈련 받았다.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1945년 미군 공습 때 전사했다. 1970년대 정부는 김씨의 아버지에 대해 ‘확인된 사망자’라며 30만원을 줬다. 당시 화폐 가치로 송아지 한 마리 값이었다. 아버지 유골을 아직까지 모셔 오지 못한 건 평생의 한으로 맺혀 있다.

“일본땅 어디엔가는 있겠지. 어머니가 아버지 찾으면 옆에 묻어달라캤는데…. 내가 죽고 나면 데려올 수 있을랑가 모르지.”
최보규기자 choi@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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