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칼럼] 쓰죽회

  • 원도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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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8-28   |  발행일 2017-08-28 제31면   |  수정 2017-08-28
[월요칼럼] 쓰죽회
원도혁 논설위원

‘쓰죽회’, 생선회 이름도 아니고 무슨 모임인 것 같은데 도무지 짐작이 안가는 말이다. 그런데 알고 보면 별것 아니다. ‘쓰고 죽자, 자식에게 재산을 물려주지 말고’라는 비장한 결의를 한 사람들의 모임이다. 오래전 울릉도 현포리에 이사 가서 잘 산다는 가수 이장희가 대표적인 ‘쓰고 죽자 주의’ 인사로 거론된다. 일찍이 그는 주변의 지인들에게 ‘잘 나갈 때 번 많은 돈을 전부 다 쓰고 죽겠다’고 선언, 지인 부부를 초청해 크루즈 여행까지 시켜주면서 멋지게 산다는 소식이 방송에 나오기도 했다.

근래 언론에서 주목받은 유산관련 사건들을 보면 이해가 간다. 어떤 부자는 자식에게 일찍 다 물려줬다가 말년에 경제적 어려움으로 엄청난 고생을 했다. 또 어떤 이는 빨리 안물려 준다고 자녀들에게 달달 볶여 죽을 뻔 했다. 다 물려주면 굶어죽고, 안물려 주면 빨리 물려달라고 채근하는 자녀들에 시달려 죽을 지경이다. 이래저래 죽을 바엔 아예 물려줄 재산을 남기지 않는 게 현명한 처사라는 생각을 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쓰죽회 신봉자들이다. 그런데 다 쓰고 갈 대상이 돈뿐만이 아니다. 경북의 어떤 쓰죽회는 회원 각자의 재능과 사랑까지 다 물려주고 간다는 원칙을 실천하고 있다고 하니 존경스럽다.

얼마전 서울의 50억원대 자산가 노인의 재산 강탈 사건이 주목을 끌었다. 서초구 양재동 빌딩숲 한가운데 시가 35억원대의 알짜배기 땅 100평을 주차장으로 활용해 살던 노인이다. 67세의 이 노인은 건물 임대업을 하라는 주변의 조언을 마다하고 주차비 수입으로 그냥 컨테이너에서 지냈다. 다른 곳에도 15억원대의 땅이 있지만 빵 따위나 먹으며 빈궁하게 살았다. 그러다 사악한 양재동 토박이 사기범의 사기에 휘말려 인생을 망치고 말았다. 이 노인은 평소 안기부와 같은 정보기관에 대한 피해 망상증과 조현병 증세가 있었다. 그러자 사기범들은 권력기관을 사칭해 노인을 납치·폭행한 뒤 위장결혼한 가짜 아내의 이름으로 지방의 한 정신병원에 집어 넣어버린 것이다. 가짜 아내를 통해 사기범들은 동시에 노인의 재산을 팔아치웠다. 사기 납치범들은 ‘50억원대 자산가 노인이 갑자기 사라졌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이를 두달간 추적한 경찰에 의해 잡혔고, 어처구니없는 사건의 전모가 드러났다. 하지만 노인이 뺏긴 두곳 땅에는 이미 고층 다세대 빌라가 들어서 있었고, 노인은 당장 치료비와 생계비도 없는 딱한 정신병자 신세가 돼 있었다.

내 고향마을 주변에도 자식 대에 한순간 망한 부자들이 적지 않다. 어르신 한 분은 자린고비·수전노 소리까지 들어가면서 재산을 모아 벽촌에서는 드물게 논 50여마지기 밭 3천평, 산 3만평의 부를 이뤘다. 딸 여섯에도 마지막에 아들을 얻었다. 딸들은 초·중학교만 시켰고 부산·마산 등 대처로 일찌감치 시집을 보냈다. 아들도 중학교 졸업 후 집 농사일을 물려받았다. 어른은 소·돼지·닭 등 가축과 논밭을 철저히 관리해 야무진 부자로 인정받았다. 고등어 뼈를 다 씹어 드실 정도로 건강관리에도 철두철미했다. 칠순을 넘기고도 치아가 멀쩡해 주변으로부터 ‘백수를 누릴 분’이라는 덕담을 듣곤 했다. 하지만 어느 여름밤 골짜기논에서 풀을 베고 내려오다가 그만 독사에 물리면서 운명이 달라졌다. 돈이 아까워 병원에 가지 않고 민간요법으로 퉁퉁 부은 다리를 몇 달에 걸쳐 치료했다. 그러나 그 뱀독은 간에 치명타를 입혔고 몇년 뒤 어르신은 간암에 걸려 85세를 일기로 타계하셨다. 악착같이 모은 재산도 막내 아들에게 다 물려주니 말짱 도루묵이 돼버렸다. 아들은 물려받은 산·논·밭을 차례로 팔아 주색잡기로 흥청망청 다 써 버린 뒤 고향마을을 떠나 버렸다. 그렇게 허무하게 그 부잣집은 끝장이 나버렸다. 돈 한 번 시원하게 써 보지도 못하고 고생만 하다 돌아가신 그 고향 어르신이 오래도록 눈에 밟혔다. 이런 사례들을 보면 쓰죽회의 기치가 더욱 돋보인다. 내 주변의 지인들도 나처럼 쓰죽회의 기치에 공감하는 분위기다. 재산을 기부하는 게 옳은지, 가족에게 물려주는 게 옳은지, 쓰죽회처럼 다 써 버리는 게 옳은지 판단은 개개인의 몫이다. 세태가 급변하고 있다.

원도혁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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