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40칼럼] 지름길을 돌아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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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1-16   |  발행일 2018-01-16 제30면   |  수정 2018-01-16
지름길을 선택하는 사람은
사랑에 쉽게 빠지는 유형
겨울밤 추위를 피하기 위해
바로 귀가하지 않는 것은
쉽게 유혹당하지 않기 연습
20180116
이재은 시인

최근 심리를 알아보는 질문을 받은 적 있다. 집으로 가는 길에 두 개의 길이 있다. 한 길은 집으로 최대한 빨리 가는 길이다. 다른 길은 돌아가는 길인데 그 길은 좋은 경치를 구경하며 가는 길이다. 당신은 어느 길로 집에 가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좋은 경치를 구경하며 집으로 가는 길을 상상했다. 섬에 산다면 육지에서 배를 타고 날마다 바다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섬 생활은 말도 안 된다고 도리질을 한다. 캐나다 빅토리아에 있는 부차드 가든 같은 정원 옆에 집이 있다면 날마다 동화 같은 길을 따라 집으로 들어갈 것이다. 그러나 19만8천여㎡(6만여평)가 모두 꽃밭이니 반나절은 지나야 집에 들어갈 것이다. 나는 아름다운 상상을 접고 지름길을 택했다.

최강 한파에 밤거리가 한산해졌다. 상점이 들어선 거리에는 일찍 조명이 꺼져간다. 차가운 바람 속으로 겨울이 깊어가고 있다. 꽁꽁 강물이 얼고 보도 위는 녹지 않은 얼음투성이다. 주변은 감기에 안 걸린 사람을 찾기 힘들 정도다. 한파의 거리는 패딩의 거리이기도 하다. 어린 아이서부터 어른까지 라쿤 털이 달린 롱패딩을 입고 있다. 모자 끝에 달린 털은 멋스럽기도 하지만 때론 모진 바람을 피하게 할 수 있어 실용적이다. 사람들은 마스크에 귀마개를 하고 패딩 모자를 푹 눌러쓴 채 어딘가를 향해 바쁘게 걸어가고 있다.

차도 사람도 한파를 피할 곳을 찾고 있다. 손님이 들어오지 않으니 상점들도 평소보다 일찍 문을 닫는다. 서울 강남에서 목동까지 차를 몰고 온다는 사람은 두 시간이 지나도 아직 오지 않는다. 퇴근 시간도 아닌데 차가 막히나 보다. 이 한파에 모두들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길게 늘어선 차들은 모두 지름길로 몰려 있다. 내비게이션은 더 빠른 길을 찾기 위해 실시간 업그레이드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최강 한파가 온다고 따뜻한 데를 찾을 것이다. 집으로 가는 길이라면 아무리 경치가 좋은 길이라도 빠른 길을 선택한다. 추위를 피하기 위한 길을 찾을 수 있다면 밤의 약속도 거부하는 것이다.

그날 밤 나는 한 곳이 문을 닫으면 다른 장소로 이동하며 추운 밤을 보냈다. 상점 안에 틀어놓은 히터가 가열되면 패딩을 벗고, 열감이 떨어지면 다시 패딩을 입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바깥 추위 속에서 어떤 기시감 같은 익숙함을 안에서 느꼈다. 그 익숙함은 여름날 시원한 해변에서 느낀 낭만과 흡사했다. 투명한 유리문만 열면 창밖은 한파의 거리였다. 그 차이에 대한 반등하는 감정이었을지 모른다. 그것은 아슬아슬한 불안감이었고 한편 ‘아, 겨울이 이렇게 따뜻할 수도 있구나’ 일찍 집으로 들어가 버린 사람들은 결코 한파의 낭만을 느낄 수 없었다. 나는 오래오래 숟가락으로 찌개를 떠먹으며 깊어가는 겨울밤의 정서를 느꼈다. 보일러 온도부터 높여 놓고 수면바지를 입은 채 TV를 보며 아직도 거리에 있는 사람들을 어리석다고 생각했던 나였다. 이제 새해부터는 돌아가더라도 좋은 경치를 보며 집에 들어가야겠다.

심리의 속뜻은 알고보니 싱거웠다. 두 개의 길은 사랑에 빠지는 속도였다. 지름길로 가는 사람은 빨리 사랑에 빠지는 유형이었고, 좋은 경치를 보며 돌아가는 사람은 사랑에 천천히 빠지는 유형이었다. 결과는 ‘에이 그거였어’하며 실망했지만 사랑에 빨리 빠지는 성향을 들킨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렇지만 지름길의 역행은 마음의 거부에서 싹이 튼다. 이제부터 지름길을 거부하고 돌아가는 길을 택하자고 생각한 것은 그 때문이다. 섬에 산다면, 부차드 가든 옆에 산다면, 날마다 좋은 경치를 볼 수 있다. 그것은 의미 있는 인생이 될 수 있다. 겨울밤 추위를 피해 집으로 빨리 들어가지 않는 이유는 쉽게 유혹에 빠지지 않기 위한 연습이다.이재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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