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칼럼] 한 송이의 꽃이 결국 봄을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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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3-15   |  발행일 2018-03-15 제30면   |  수정 2018-03-15
3월 눈, 겨울 부르지 못 하듯
대한민국 휩쓰는 미투운동
돌이킬 수 없는 변화의 흐름
공고한 성차별의 벽을
부술 수 있다는 희망 생긴다
[여성칼럼] 한 송이의 꽃이 결국 봄을 부른다
정일선 (대구여성가족재단 대표)

솔직히 ‘이러다 말겠지’라고 생각했다. 현직 검사가 자신의 얼굴을 드러낸 채 검찰 조직 내 성추행 경험을 폭로했을 때만 해도 뉴스의 충격과 놀라움도 잠시. 잘못하면 역량 있는 여성인재 하나를 마녀사냥으로 또 잃는 건 아닌가라는 우려부터 든 것이 사실이다. 미투(#Me Too) 이야기다. 그로부터 한 달 반이 지났다. 지금 대한민국은 여전히 미투운동이 들불처럼 타오르고 있고, 이를 응원하고 지지하는 위드유(#With you)의 목소리 또한 점점 더 커져가고 있다.

이미 여러 매체가 다루었고 각종 기사나 칼럼마다 넘쳐나고 있는 미투운동에 대해 오늘 또 하나의 글을 보태는 이유는 ‘안희정 사건’에 대한 심상치 않은 반응 때문이다. 여성정책분야에서 충남도는 여러 모로 놀라운 사례로 꼽힌다. 충남은 여성가족부가 매년 발표하고 있는 ‘시도별 지역성평등지수’에서 연속 최하위를 차지한 지역이다. 안희정 전 도지사는 만년 하위권을 벗어나지 못하는 충남의 성평등 지수를 2030년까지 상위수준으로 끌어올린다는 목표를 세우고 양성평등 정책을 의욕적으로 추진해왔다. 지난해 7월 양성평등주간에는 “대한민국의 성평등 정책을 충남이 선도할 것”이라고 천명한 바 있는데, 단순히 구호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실제 도청 전 공무원의 책상에 성평등 도정 수칙을 붙이도록 하고 업무에 앞서 항상 점검토록 지시했다고 한다. 또 여성주의를 공부한다며 읽고 있는 책을 SNS에 올리기도 했다. 그런 사람이 권력을 이용해 자신의 수행비서에게 성폭력을 가했다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았다. 그간 보여 왔던 언행과 도무지 일치하지 않는 이율배반적 행동이기 때문이다. 지지 여부와 상관없이 유력한 대권주자였기 때문에 국민이 느낀 충격과 배반감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처음 사건이 터졌을 때와 달리 시간이 지나면서 여론의 반응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반복되는 성폭력에도 불구하고 왜 싫다고 강력하게 저항하지 않았느냐?” “부른다고 제 발로 가놓고 미투에 편승해 딴소리하는 게 아니냐”는 등 피해자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여론이 조성되고 있는 것이다. 미투운동의 핵심은 성별의 문제가 아니라 권력의 문제다. 피해자가 적극적으로 거부하지 않았다는 점을 비난하는 것은 권력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성폭력의 속성을 간과한 것이다. 사건의 시시비비는 법을 통해 다뤄질 것이다. 그 이전에 피해자를 예단해 비난하거나 음모론 운운하는 것은 미투운동의 본질을 흐리는 일이라는 점을 명심했으면 좋겠다.

또 하나 우려되는 점은 “아내 아닌 여자와는 밥도 먹지 않는다”는 미국 부통령의 이름을 딴 ‘펜스룰’이 남성들의 대처법으로 공공연히 거론된다는 점이다. ‘안희정 사건’에서도 “왜 하필 여자를 수행비서로 두었느냐”를 문제 삼는 사람이 많았다. 안 그래도 여성을 배제하는 조직문화가 공공연한 현실에서 여자랑은 같이 일 못하겠다는 식의 대응이 나온다면 여성이 설 자리가 더욱 좁아질 수밖에 없다. 나아가 이것이 빌미가 되어 여성 채용 자체를 꺼리는 새로운 내부기준이 생길까봐 걱정된다. 여성을 이성이 아닌 동료로 인정하는 문화가 필요하다.

겨울을 지나 봄으로 옮겨가는 계절, 반갑게도 이른 꽃 한 송이를 만난다면 따뜻한 봄날이 머지않았음을 예감할 수 있다. 아무리 3월에 눈이 내린다 해도 다시 겨울로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자연의 순리는 ‘불가역적’이기 때문이다. 지금 대한민국을 휩쓸고 있는 미투열풍은 이제 돌이킬 수 없는 변화의 흐름이 되었다. 이전에도 직장 내 성폭력, 성차별에 대한 문제제기가 끊임없이 있어왔지만 조직문화나 관행이란 이름으로 덮이기 일쑤였다. 이제는 다르다. 금조차 내기 어려웠던 공고한 성차별의 벽을 어쩌면 이번에는 부술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희망이 생긴다. 점점이 피어난 용기 있는 고백이 지지와 연대의 힘으로 성평등의 꽃무리를 이루어내 ‘봄날’을 부를 것이다. 정일선 (대구여성가족재단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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