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재근의 시대공감] 예술의 특별함이라는 신화가 무너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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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3-16   |  발행일 2018-03-16 제22면   |  수정 2018-03-16
사회에선 성폭력일 사안
예술계선 기행으로 치부
공공연한 관행으로 심화
예술가는 특별시민 아냐
법·인권 뛰어넘을 수 없어
[하재근의 시대공감] 예술의 특별함이라는 신화가 무너지다
문화평론가

고은, 이윤택, 오태석, 김기덕 등 거장들이 잇따라 성추문에 휩싸이면서 문화예술계가 충격에 빠졌다. 일각에선 과거엔 편하게 가졌던 모임도 자제하면서 몸을 사린다고 한다. 앞에서 언급한 거장들은 모두 교과서에 소개됐을 정도로 한국 문화예술계를 대표하는 인물들이다. 교과서에 실릴 정도면 범사회적 인정을 받았다는 뜻인데, 그동안 이들의 문제 행동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단 말인가?

류근 시인은 “1960~70년대부터 공공연했던 고은 시인의 손버릇, 몸버릇을 이제야 마치 처음 듣는 일이라는 듯 소스라치는 척하는 문인과 언론의 반응이 놀랍다”며 “소위 ‘문단’ 근처에라도 기웃거린 내 또래 이상의 문인 가운데 고은 시인의 기행과 비행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이 얼마나 되나”라고 했다. 고은 시인의 문제행동을 봤거나 들은 문단 관련자가 줄잡아 수백여 명은 될 것이라는 주장도 나왔다. 이윤택 연출가나 오태석 연출가도 연극계에서 수많은 사람의 주목을 받는 거장이다. 안마를 비롯한 이들의 행태를 직접 접했거나 들은 연극인들이 당연히 많을 것이다. 김기덕 감독도 그동안 여러 작품을 만들면서 김기덕 사단이라고 할 정도로 영화인들을 거느렸기 때문에 현장에 있었다는 성폭력적 분위기를 인지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을 것이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그동안 한국사회에서 이 거장들의 문제행동이 불거지지 않았다. 주변인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는 이야기다. 이제야 깜짝 놀라며 모임을 삼가는 등 몸가짐을 단속하는 예술계 인사들의 모습이 기이하게 느껴진다.

누구보다도 거장들 스스로가 자신의 행동 실상을 잘 알았을 것이다. 이들은 미성년자도, 심신미약자도 아니다. 사회적 가치에 대한 인식은 물론, 심지어 정치적 목소리를 낼 정도로 비판적 지성인의 모습까지 보였었다. 이윤택 연출가는 여성차별의 문제를 표현한 극본을 쓰기도 했다. 이들 거장은 사회적 문제에 대해서라면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판단했을 것이다. 여성차별, 약자에 대한 성폭력, 강자의 갑질, 수직적 위계관계 속에서 군림하는 ‘꼰대’ 등 사회문제엔 일반인보다 더 예민한 문제의식을 가졌을 수 있다.

그런데 정말 이상하게도 타인에 대해선 잘 판단하는 이 거장들이 자기 자신의 문제에 대해선 완전히 둔감했던 것으로 보인다. 자신의 행동이 잘못이라고 여겼다면 문제행동을 몰래 했을 텐데, 이 거장들은 희롱이나 추행 정도의 행위를 공공연히 했다고 전해진다. 바로 이 ‘공공연함’이 문화예술계 성추문이 다른 분야와 다른 점이다. 다른 분야에선 성폭력이 은밀하게 이루어지는 데에 반해 문화예술계에선 공공연히 이루어졌고, 지금까지 침묵이 유지됐다.

예술계는 일반 사회와 다른 특별한 영역이라는 인식이 여기에 한몫했다. 일반 사회라면 금기를 깼을 경우 처벌받지만 예술에선 금기를 깨야 자유로워진다는 인식이다. 가장 강한 금기가 성적인 것이기 때문에 성적인 욕망 드러내기로 억압에서 벗어나려는 생각도 있다. 고은 시인은 추행하고 자기 주요 부위를 보여주면서 “너희들 이런 용기 있어”라고 하고, 여성이 뛰쳐나가자 “이런 것도 못 보면서 무슨 시를 쓴다고”라며 오히려 여성을 탓했다고 한다. 이런 사고방식 속에서 사회에선 성폭력일 사안이 예술계에선 ‘예술가의 기행’으로 치부됐고, 관행으로 심화됐다. 거기에 더해 ‘이 바닥이 원래 그렇지 뭐’라는 생각이 퍼진 것도 문제다. 김기덕 감독에게 피해를 당했다는 여배우도 선배에게 상담했더니 “원래 영화판이 그래”라는 답을 듣고 체념해 침묵했다고 한다. 이런 생각을 예술계 가해자, 피해자, 목격자들이 모두 공유했기 때문에 성폭력이 공공연히 저질러지고 아무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던 것이다.

미투 운동은 바로 이런 ‘예술의 특별함’이란 신화를 깨고 있다. 예술계건 일반 사회건 성폭력은 성폭력일 뿐이다. 이제 현대사회에서 법과 인권을 뛰어넘는 예술가의 기행은 인정받을 수 없다. 예술가는 결코 ‘특별 시민’이 아니라 남과 ‘똑같은 시민’이라는 인식이 확립돼야 한다.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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