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단상] 남북정상회담의 뒷맛과 악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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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5-12   |  발행일 2018-05-12 제23면   |  수정 2018-05-12
[토요단상] 남북정상회담의 뒷맛과 악마
박재열 시인·경북대 명예교수

지난 4·27 남북정상회담은 역사적으로도 기념비적인 사건이었지만, 그 기획도 산뜻해 한 편의 드라마를 본 것처럼 뒷맛이 개운하다. 그것은 서정적이면서 인정이 넘치는, 오래 못 만난 한 가족상봉의 다큐멘터리 같아 보였다. 주인공 두 사람은 국가원수라기보다는 오랫동안 못 본 평범한 두 형제 같았다. 그들은 처음 만나면서도 전혀 격의가 없었다. 자연스럽게 농담하고 천연덕스럽게 웃었다. 형이 동생을 보고 “난 언제 북으로 갈 수 있나요?” 하니, 북측은 금방 그의 손을 이끌어 군사분계선을 넘겨주었다. 그리곤 다시 내려오니 소녀들이 고무줄넘기 하는 것 같았다. 그 한 맺힌 군사분계선을 그리 쉽게 후딱 넘으니 지켜보던 수천만 동포는 다들 가슴이 찡했다. 그들은 순수한 인간의 본성에 따라 행동했으니 모든 행사가 다 순조롭게 풀렸다. 형제는 그 순수한 만남을 잊지 말자고 민족 허리에 난 깊은 칼금 위에, 그 칼금을 깁기나 하듯이 나무 한 그루를 심었다. 백두산 흙과 한라산 흙을 섞어 뿌리고도 못 미더워 그 위에 또 한강 물과 대동강 물도 섞어 뿌렸다.

형제가 산책에 나선 것도 한 편의 시였다. 산책로는 동네를 벗어나는 호젓한 백토길. 벚꽃 같은 하얀 햇살이 뿌려져 있는 언덕 너머 길. 형제는 속사정을 털어놓았다. 주위를 물리치고 형제 둘만 벤치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 얼굴은 긴장되었다가 금방 풀리고 심각해졌다가 함께 웃었다. 많은 사람이 귀 기울였지만 들려오는 것은 청아한 새소리뿐이었다. 그래, 인간적인 이해관계를 아름다운 자연의 빛과 소리로 감쌌으니 그것이 곧 시가 아니겠는가. 형제 중에 누구라도 마음의 앙금이 있었다면 그 맑은 새소리와 신록, 그리고 봄날의 동남풍으로 말끔히 씻어냈으리라. 그러나 동생은 앞으로 닥칠 걱정거리를 연신 형님에게 털어놓았고, 형님은 동생에게 모든 지혜를 다 쏟아부었다. 그런 것이 멀리서도, 누가 보아도 다 보였다.

저녁 만찬 시간에 맞춰 북측의 리설주가 차에서 내리자 남측의 김정숙 여사가 버선발로 뛰어나왔다. 꼭 친정 오는 그리운 딸을 맞이할 때 모습이다. 둘은 나이로나 모양새로나 모녀지간이다. 어머니는 딸의 가는 허리에 손을 얹고 안으로 인도했다. “설주야, 이제라도 와서 반갑다. 방에는 이미 올 손님들이 다 모여 있단다.” 방에 모인 손님에게 평양 옥류관에서 가져온 냉면이 나왔다. “형님, 형님이 가져오라고 말씀하지 않았으면 깜빡 잊을 뻔했습니다. 제가 옥류관 냉면 조금 싸가지고 왔거든요. 한번 맛이나 보시라고.” 한반도엔 또 다른 봄이 성큼 다가와 있었다.

이런 드라마가 보여주는 뒷맛은 우리 민족에만 그치지 않는다. 미국인들에게 판문점은 도끼만행사건이나 푸에블로호 피랍사건 같은 것으로 역시 아픔이 묻어 있는 곳이다. 그런 아픔의 장소에서 그 형제처럼 시적 분위기에 젖어보고 싶어 샘을 낸 사람이 바로 트럼프 미 대통령이다. 우리 남북이 밟아간 프로그램이 멋졌기 때문이 아닌가. 그가 그 현장의 주인공이 되어 세계인의 주목을 받고 싶다는 것이다.

그러나 민족의 비극은 그런 축제 분위기만으로 치유되지 않는다. ‘악마는 디테일 속에 숨어 있다’고 한다. 그보다는 ‘악마는 실천 속에 숨어 있다’는 말이 더 적절할 것이다. ‘판문점 선언’은 사실 착하고 순진한 마음 위에서 만든 것이다. 사람의 마음은 유리그릇 같아서 언제 깨질지 모른다. 또 한 가지는 ‘관습의 악마’다. 우리는 광복 후 한 번도 남북 대결과 적대시의 모드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다. 우리는 반공을 국시(國是)로 삼은 나라에서 태어나 그 문화를 섬기며 살아왔다. 그것만이 우리가 생존하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정부는 그것을 털어버린 다른 모드에서 일을 도모하고 있고, 홍준표 같은 야당 지도자는 그 새 모드가 위험하다고 느낀다. 홍 대표가 바로 그 ‘실천의 악마’ ‘관습의 악마’의 뿔을 달고 있다. 이것이 바로 ‘판문점 선언’이 다시 고민해야 할 문제가 아닌가.
박재열 시인·경북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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