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창원의 ‘영남일보로 보는 인물열전’ .1] 영남일보 초대사장 김의균

  • 인터넷뉴스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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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5-17   |  발행일 2018-05-17 제29면   |  수정 2018-06-15
변호사·언론사 사장·도지사…반평생 대구경북 위해 헌신

영남일보는 광복기 전후 언론에 보도된 이야깃거리를 중심으로 지역의 인물(지역에서 활동한 인물 포함)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인물에 대한 연구나 생애사가 아닌 대중의 시각으로 되짚어 봅니다. 그럼으로써 오늘의 의미를 가늠해 보려는 것입니다. 신문 인용은 가능한 한 현재 표기로 고쳐 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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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일보 김의균 사장(왼쪽)은 취임 닷새 만에 ‘건국사업에 몰두하고 국가건설에 합동 노력하자’는 뜻을 담은 ‘우리의 급무’라는 칼럼을 썼다.(영남일보 1945년 12월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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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도지사 김의균씨는 지난 이십오일 서울 돈암정 자택에서 별세하였는데 고별식은 이십구일 하오 영시 십오 분 자택에서 거행한다고 한다.’

1947년 1월28일자 부녀일보에 난 부고기사다. 서울 돈암정 집에서 세상을 떠났다면 십중팔구 서울사람이다. 그런데 부음기사가 대구의 일간신문에까지 났다.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경북(대구)사람으로 여겨졌기에 그랬을 것이다. 뒤이은 추도사 기사는 김의균(金宜均)이 서울 출신이지만 반평생 경북을 위해 헌신했음을 알리고 있다. 추도식 장소는 제일예배당으로 지금의 제일교회다. 기독교계의 명망가였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는 1908년 대한제국시절 법무 문서과의 번역관으로 첫 관직생활을 시작했다. 이태 뒤 대한제국이 멸망하자 조선총독부 경성지방재판소 판사로 그 직을 이어갔다. 1913년에는 대구지방법원 판사로 부임한다. 이때부터 대구로 삶터가 바뀌었다. 이듬해 판사를 그만두고 변호사로 개업했다. 개업 후 조선인과 중국인이 난투극을 벌인 사건, 이혼소송 등 다양한 사건을 맡으며 민초들을 위한 변호사로서 이름을 날린다. 그는 또 대구여자고등보통학교 건립 기성 회원과 기독교계 학교인 희도(喜道)보통학교 교장으로도 재직했다.

‘우리는 만천하 독자와 함께 지혜를 모으고 힘을 합하여 독립완성의 유일한 희망을 속히 달성하고자 미력이나마 불초의 정성을 다하고자 공약하오니 일대목표를 바라고 전진하는 영남일보를 위하여 많은 성원을 베풀어주시기를 바라 마지않는바입니다.’


대한제국의 지식인으로
세상과 어우러지려 노력
영남일보 사장으로는
20여일 짧은 기간 재임
“삼천만 우리동포 합심
건국 사업만 몰두해야”
직접 우리의 급무 칼럼
독립국가에 대한 포부



광복 후 영남일보 초대사장이 된 그의 취임사 끝부분이다. 신문사의 사장으로서 ‘노예로부터 해방’과 ‘암흑으로부터 광명’이라는 건국사업 목표를 제시했다. 그가 사장으로 취임한 날은 창간 두 달이 다 돼가는 1945년 12월1일이다. 그때까지 언론계와 눈에 띄는 인연은 없었다.

애초 영남일보는 13명의 동인이 창간했다. 동인제 신문은 나름의 장점에도 불구하고 자금조달에 어려움이 있었다. 출범 두 달도 안 돼 동인제를 해체하고 주식회사로 출범한 이유다. 그러면서 새로운 회사의 대표자로 그를 영입한 것이다. 영남일보는 그를 ‘대구의 교육·법조·종교계의 원로’로 소개하고 있다. 이른바 엘리트 원로(元老)를 모셔온 것이다.

하지만 그의 언론계 생활은 아쉽게도 금방 끝났다. ‘만천하 독자와 함께 지혜를 모으고 힘을 합해 독립완성의 희망을 속히 달성하겠다’는 일대목표(一大目標)의 공약을 뒤로한 채 바로 경북지사 대리로 자리를 옮겼기 때문이다. 사장이 된 지 20여 일 만이다. 미군정은 경북도의 리더 자리에 그를 적임자로 본 것이다. 그는 1년 남짓 경북도지사를 지냈다. 사학자로 이름을 떨친 그의 셋째아들 석형이 월북한 것도 이즈음이다.

‘~삼천만 우리 동포는 일심합력하여 건국사업에만 몰두할 것이다. 천신만고로 획득한 이 천재일우의 기회를 우리가 이심과 시기와 분쟁으로 놓친다면 이가 실로 민족반역자요 국가의 역적이라 할 것이다.’

영남일보 사장에 취임한 지 닷새 만에 쓴 ‘우리의 급무’라는 칼럼이다. 삼천만 동포의 독립국가 건설은 그의 생애에서 가슴에 담은 끝자락 포부였을지 모른다. 그는 대한제국의 계몽주의 지식인으로서 법부에 발을 들여놓은 이후 늘 세상과 어우러지려 애썼다. 변호사로, 도지사로, 언론사 사장으로서….

박창원(톡톡지역문화연구소장/언론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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