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단상] 블룸즈데이와 ‘蘆溪(노계)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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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6-09   |  발행일 2018-06-09 제23면   |  수정 2018-06-09
[토요단상] 블룸즈데이와 ‘蘆溪(노계)의 날’
박재열 시인·경북대 명예교수

세계적인 문학축제로는 아일랜드의 블룸즈데이(Bloomsday)만 한 것도 없을 것이다. 더블린에서는 6월16일을 ‘블룸즈데이’라고 명명하고 매년 세계적인 대문호인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의 문학을 기리는 행사를 벌인다. 왜 그날일까? 조이스의 대표작인 ‘율리시스(Ulysses)’를 보면 이 소설의 주인공 블룸이 1904년 6월16일 하루 동안 더블린시를 돌아다니는 이야기로 되어 있다. 조이스 개인적으로는 바로 이날 자신의 아내가 된 노라와 첫 데이트를 하였고, 그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그 소설의 사건을 모두 이날 일어난 것처럼 꾸미고 있다. 이 축제의 날에 방송에서는 그의 소설을 극적으로 낭송하며, 많은 사람들은 소설의 주인공 블룸처럼 소설에 나오는 여러 곳을 직접 순례를 해 보기도 한다. 전 세계의 조이스 애호가들은 이날 더블린을 찾아 그 소설의 장면을 소설의 주인공처럼 체험해 보기도 한다.

오는 6월26일은 조선 중기 때 최고의 가사(歌辭) 시인이었던 노계(蘆溪) 박인로(朴仁老)의 457회 탄신일이다. 영천시는 이날에 맞춰 최근에 지어서 단장한 노계문학관을 개관한다. 지금까지 노계의 문학을 기념하는 문학관은 없었다. 요새는 살아 있는 사람을 기념하는 문학관까지 짓는 마당에, 노계문학관을 이제야 개관한다는 것은 만시지탄이고, 영천시나 노계를 사랑하는 사람들조차 참으로 무심했다는 생각이 든다.

이날 저녁에는 국악인 장사익·오정혜씨를 초청하여 개관 축하공연을 한다. 노계 가사를 실제 노래로 부른다니 뜻깊은 시간이 될 듯하다. 노계의 가사를 시험적으로 노래로 부른 적은 있었으나 이렇게 대규모 청중 앞에서 부르는 일은 처음이리라. 앞으로 이날을 ‘노계의 날’로 정해 노계의 문학을 감상하고 계승하는 날로 발전시켜 나가면 좋으리라.

새로 개관하는 노계문학관은 영천시 북안면 도천1리 도계서원 아래에 있다. 도계서원은 1970년에 노계의 후손들이 지은 작고 아담한 건물이다. 이 서원 앞에는 원두평저수지가 있고, 이 서원을 저수지 건너에서 보면 거꾸로 잠긴 서원은 마치 신선들이 드나드는 누각처럼 아름답다.

서원에서 가까운 곳에 노계의 무덤이 있다. 그 무덤 앞에 서면 소나무의 바람 소리와 새소리밖에 들리지 않는다. 이른 봄에는 할미꽃이 수줍게 핀다. 그 할미꽃이 고개를 떨구고 하얀 털로 추위를 견디는 것을 보면 노계의 겸손과 가난을 보는 듯하다. 저수지 안쪽엔 갈대가 일렁거리고 자주 백로가 찾아온다. 또 그 안 골짜기에 복사꽃이 가득 핀다. 노계가 다시 “한 잔 또 한 잔 취토록 먹은 후에/ 복숭아꽃은 붉은 비 되어 취한 얼굴에 뿌리는데/ 이끼 낀 넓은 돌에 높이 베고 누었으니”라고 읊을 것 같다. 노계문학관이 바로 그런 곳에 들어섰으니 그 일대는 이제 노계의 시혼(詩魂)이 홀로 낚시하며 소요하는 장소가 될 것이다. 노계문학관에 온 손님은 그 문학관의 내부보다는 그 밖에 소요하는 노계의 시혼을 만나야 하리라.

‘누항사’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얼마만큼 받은 밥에 누덕누덕 기운 옷의 어린 아이들이/ 장기판에서 졸(卒)을 밀고 올라오듯 밥상 앞에 밀려 나오니/ 인정상 도리상 차마 어찌 혼자 먹을런가.” 거지처럼 굶주린 아이들 앞에서 민망하여 식사를 제대로 할 수 없었던 난감한 상황을 제시한 것이다. 이런 가난한 삶을 살았던 곳이 또 도천1리로 노계문학관에서는 반 마장 정도로 가깝다. 노계는 수군(水軍) 만호(萬戶)라는 결코 낮지 않는 벼슬까지 했지만 이처럼 가난하여 끼니를 걱정할 때가 많았다. 송강(松江) 정철(鄭澈)이나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가 결코 경험하지 못한 궁핍한 사람들의 애환을 그는 눈물겹고도 유머러스하게 그렸다.

이처럼 노계는 우리 어려운 민초들의 애환을 절절하게 읊었다. 그를 기리는 ‘노계의 날’을 만들어 그의 시적 감수성과 감흥을 새로이 즐기고 더불어 그의 지극했던 성(誠)·경(敬)·충(忠)·효(孝) 사상을 배우는 일은 우리 세대가 더는 미뤄서는 안 될 일이다.
박재열 시인·경북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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