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창원의 ‘영남일보로 보는 인물열전’ .15] 구왕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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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9-06 00:00  |  수정 2018-09-06
사진 비평의 개척자…영남일보 글 게재로 데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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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왕삼은 ‘농악대회 연주를 듣고’라는 제목의 비평에서 농악은 평민굛서민굛노동계급을 위한 음악으로 귀족계급의 궁중음악과는 구별된다고 했다.(영남일보 1947년 6월2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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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30일부터 3일간 달성공원에서 개최된 농악대회와 6월2일부터 3일간 키네마 구락부에서 개최된 아악연주를 들었다. 이 두 개의 공연이 각각 고유의 전통음악으로, 전자는 타악기로 구성된 리듬악이고 후자는 관현 타악기로 구성된 선율악이다. 전자는 평민.서민.노동계급을 위한 악이고 후자는 귀족계급 특권계급을 위한 궁중악이다.’
 

영남일보 1947년 6월27일자 ‘농악대회 연주를 듣고’라는 제목의 음악비평문이다. 글을 쓴 이는 구왕삼이다. 그는 농악의 성격을 뚜렷하게 규정하고 있다. 농악은 농민과 같이 동무가 되어 안위와 쾌락을 주는 노동음악이라는 것이다. 또 행진조의 율동악인 농악과 특권계급이 즐기는 궁중음악을 대비시키고 있다.
 

그의 음악평론 이력은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간다. 그는 한일병합 한 해 전인 1909년 경남 김해에서 태어났다. 기독교 집안의 영향으로 청년시절에 찬송가 편집위원을 지내기도 했다. 그 시절에 이미 서양음악의 무분별한 수용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드러냈다. 무조건적인 모방과 번역에 문제 제기를 한 것이다. 교회음악을 예로 들며 조선의 음악적 현실을 무시하고 있다며 비판했다.
 

그는 음악적인 재능 또한 뛰어났다. 동요 작곡을 할 정도로 어린이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조선의 꽃’이나 ‘물 긷는 처녀’ 등이 그의 작품이다. 라디오 드라마의 음악효과에 대해 손을 뻗칠 정도로 비평의 폭도 넓었다. 악단이나 유행가에 대해서도 비평이나 논쟁을 벌일 정도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의 관심은 음악을 넘어서기 시작했다.
 

‘일본인 중심으로 된 단체란 조선의 자연미 풍속미를 조선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수박 겉핥기로 일본적 해석 밑에서 조선의 하층계급의 추모를 캐치하여 자기 나라 간행물 혹은 풍경전에 발표하여 조선을 욕되게 하고 조선을 곡해하여 그릇된 소개를 해왔던 것이다. 예를 들면 시정에서 판매하는 조선풍속 사진첩 중 부녀들의 젖가슴을 그냥 노출시킨 사진~.’
 

영남일보 1947년 5월27일자에 실린 ‘대구 사진계를 논함’이다. 그는 이 글로 사진비평가로 데뷔했다. 그의 비평이 음악에서 사진으로 옮아 온 것이다. 일본적 화풍에 기대어 기형적으로 발전해온 일제의 잔재에 대해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일본 사진계의 이론과 작품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결과라는 것이다. 부녀들의 젖가슴을 노출시킨 사진의 악용 사례를 들고 있다.


 

광복후 경북사진문화연맹 창립
 사진작가로 활동하며 공모전 입상

 대구사진계 ‘日잔재’강하게 비판
“이론과 작품 무조건 수용해 문제”


1940년대 이후 그는 대구에서 사진작가로 활동을 시작했다. 광복 직후인 1945년 9월에 대구에서는 경북사진문화연맹이 창립됐다. 그의 작품 ‘군동’이 특선을 차지한 것도 같은 해에 열린 사진 공모전이었다. 이태 뒤인 1947년 남조선예술사진연구회가 주최한 공모전에서도 그의 출품작이 준특선으로 뽑혔다. 그해의 대구사연회 성적 발표회에서는 대회강평을 할 정도로 지역 사진계의 중심인물이 됐다.
 

그는 사진작가와 비평을 함께한 때문인지 작품심사의 공정성에 의문을 품었다. ‘사진예술에 문외한들이 모여 (사진을) 채점한다는 것은 대구 사진계를 위하여 불미한 행위’라고 할 정도였다. 사진의 예술적 가치를 평가할 줄 모르면서 작품을 심사하는 것은 자기무식을 드러내는 행위라는 것이다. 작품을 비평하고 심사하는 일이 결코 제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 눈의 티끌만 봐서는 안 된다는 일침이다. 
 

그는 한참이나 시간이 흐른 뒤 최계복의 살롱 사진에 대해 일단의 생각을 드러낸 적이 있다. 일찍이 일본 것을 모방하거나 그 아류에 만족하고 있는 사진계를 질타한 것과 맥을 같이한다. 광복이 되었지만 변하지 않는 사진가들의 현실 도피나 장식적 여가를 즐기는 사진 활동에 나름 일침을 가한 것이었다.
 

그는 일찍이 동요를 작곡하고 음악평론을 했다. 하지만 리얼리즘 사진론을 펼치며 사진작가와 사진비평의 개척자로 더 이름을 떨쳤다. 그는 대구를 뛰어넘어 오랜 기간 사진비평가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실력과 정체성이 뒷받침됐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박창원(톡톡지역문화연구소장/언론학 박사)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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