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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국의 성지 상주 .8] 무장투쟁 펼친 항일의사 채기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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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관영기자
  • 2019-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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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조직 대한광복회 만들어 친일부호 장승원·박용하 처단

상주 이안면 소암리에 복원된 소몽 채기중 선생의 생가. 상주 출신인 채기중은 ‘대한광복회’ 결성을 주도하고, 군자금 모금과 함께 친일부호를 처단하는 등 일제에 맞서다 순국했다.
채기중 생가에 걸려있는 현판.
상주 이안면 만세동산에 세워져 있는 채기중 추모비. 추모비 아랫돌에는 그가 옥에 갇혀있을 당시에 쓴 한시가 새겨져 있다.
‘살았으면서 의리가 없다면 그것은 산 것이 아니며 하늘의 뜻에 따라 죽는다면 죽음이 곧 삶이로다.’일제에 맞서 치열한 독립운동을 실천했던 소몽(素夢) 채기중(蔡基中) 선생이 옥중에서 남긴 글귀다. 당시 그가 어떤 의지를 갖고 항일투쟁에 임했는지 쉬이 짐작하게 한다. 상주 출신인 그는 독립운동에 투신한 이래 일관되게 무장투쟁을 실천에 옮겼다. 끊임없이 단원을 확보하고, 군자금 모금에 있어서도 누구보다 열성적이었다. 특히 그는 대한광복회 창설을 주도하고 ‘친일부호 처단’이라는 의협투쟁을 벌였다. 비록 그의 육신은 일제에 의해 스러졌지만 정신만은 여전히 살아있다.

생가 내부에는 채기중의 초상화가 걸려있다. 그는 5척4촌 정도의 키에 얼굴이 둥글고 검은 편이었으며, 눈이 컸다고 한다.
40세때 ‘풍기광복단’조직해 항일투쟁
1915년엔 박상진과 함께 광복회 결성
경상도지부 맡아 군자금 모금 등 열성
의병장 허위 밀고한 장승원 등 사살도
동지들과 체포 1921년 형무소서 순국


#1. 의협심 강한 사나이, 채기중

고종과 흥선 대원군의 대립이 극을 향해 달리던 1873년(고종 10) 7월7일, 상주 이안면(利安面) 소암리(小岩里)의 채헌락(蔡獻洛)과 곡부공씨(曲阜孔氏) 사이에 막내아들이 태어났다. 소몽 채기중이었다.

채기중의 집안은 본디 입향조가 봉군(封君, 종친과 공신 등을 군으로 봉하던 일)의 군호를 받은 양반이었다. 하지만 8대조 이후로 관로가 막힌 탓에 지역에서만 명목을 유지하는 형편이었다. 경제상황도 좋지 않았다. 가진 땅이 조금 있기는 했으나 식량을 겨우 자족할 수준이었다.

채기중은 어려서부터 의협심이 남달랐다. 순박한 성품임에도 부당한 처사나 억울한 일을 당하면 가만히 있지 않았고, 다른 사람이 그런 일을 당해도 결코 참지 않았다. 특히 서당에서 한학(漢學)을 배우는 동안 익힌 옛 충신과 열사를 진심으로 존경하고 숭배했다.

어느덧 33세가 된 채기중은 1906년(고종 43), 풍기(豊基, 영주의 옛 이름)로 터전을 옮겼다. 당시 풍기는 타지에서 이주해온 사람들이 유난히 많은 곳이었다. 채기중은 그곳에서 유창순(庾昌淳)·유장렬(柳璋烈)·한훈(韓焄)·장두환(張斗煥)·강병수(姜柄洙)·김병렬(金炳烈)·정만교(鄭萬敎)·김상오(金相五)·정운홍(鄭雲洪)·정진화(鄭鎭華)·황상규(黃相圭)·이각(李覺) 등 의로움이 남다른 이들과 교우했다. 그리고 이들과 함께 ‘풍기광복단(豊基光復團)’이라는 비밀독립단체를 조직했다. 1913년(순종 6)의 일이었다.

풍기광복단은 독립군 양성을 위한 군자금 모금에 주력했다. 그 과정에서 채기중이 고향 벗인 강순필(姜順弼)과 머리를 맞댔다.

“강원도에 일본인이 운영하는 광산이 있다 하네. 광부로 가장해 잠입한 후 틈을 노려보세.”

두 사람은 곧 영월의 중석(텅스텐)광산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한동안 자금 탈취를 목표로 활동했다. 동시에 만주의 독립군과도 긴밀히 연락하며 풍기광복단의 활동 반경을 넓혀나갔다.

#2. 풍기광복단에서 대한광복회로

그러던 1915년(순종 8)이었다. 풍기광복단의 지도자로 동분서주하던 채기중은 대구의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조선국권회복단은 상덕태상회(尙德泰商會)의 주인인 박상진(朴尙鎭)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독립운동단체였다.

“서간도(西間島)를 중심으로 해외 각지에 독립운동기지들이 속속 건설되고 있는 이 시점에서 우리가 그들을 어떻게든 지원해야만 하오.”

“옳소. 그러기 위해선 군자금부터 모아야 하오. 아울러 이를 바탕으로 국내 인재들을 독립군으로 양성해야 하오. 그래야만 독립을 이룰 수 있소.”

힘을 한데 모으기로 결정한 두 사람은 회원들의 중지를 모아 7월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를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의병기질의 인사들로 이루어진 채기중 중심의 풍기광복단과 계몽운동계열의 인사들로 구성된 박상진 중심의 조선국권회복단의 합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했다.

박상진을 총사령으로 세운 대한광복회는 비밀·폭동·암살·명령 등을 4대 행동강령으로 채택했다. 그리고 군자금 모금, 혁명기지 건설, 친일부호 처단, 무기 구입, 독립군 양성 등을 목표로 경상·전라·충청 등 국내 각지에 비밀지부를 조직했다. 이 중에서 경상도지부의 책임자가 된 채기중은 경상도 북부지방을 중심으로 회원과 군자금을 모으는 데 전념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의치 않았고, 채기중의 고민은 날이 갈수록 깊어졌다. 그리고 고민의 결과를 동지들과 공유했다.

“각 부호들에게 포고문을 보내 군자금 모금에 대해 설명하는 것이 좋겠소. 아울러 포고문은 중국에서 부치는 것이 안전할게요.”

모두가 찬성한 가운데 포고문 발송에 대한 제반 사항을 우이견(禹利見)에게 일임한 데 이어, 그를 위해 중국행 여비 270여원을 사비로 마련해주었다.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채기중이 유창순과 더불어 경상도에 거주하는 자산가들의 주소·성명·재산 정도를 조사한 뒤, 이 명단과 포고문을 들고 우이견이 중국 서간도로 향했다. 그리고 한문으로 된 내용을 언문으로 고쳐 등사한 후 자산가들에게 발송했다.

“우리 천년의 종사가 잿더미가 되고 2천만 민족은 노예가 된 터에 섬 오랑캐의 악정과 폭행이 날로 증가하니 피눈물이 솟구치고 조국을 회복하고자 하는 마음을 금할 수 없다. 이것이 본회가 성립된 이유이니, 각 동포는 그 지닌 능력을 다해 도움으로써 본회의 정의로운 깃발이 동쪽에 오를 것을 기대하라. 그리고 각 자산가는 자금을 미리 준비해 본회의 요구에 따라 출금하기 바란다. 만일 기밀을 누설하거나 그 요구에 불응한다면 자체 규정에 따라 조처할 것이다. 광복회지령원 감독장(光復會指令員監督章)”

하지만 일제에 빌붙은 일부 부호들은 군자금 모금을 외면했다.

“포고문의 효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친일부호 처단 등 의협투쟁을 전개해야만 하오.”

“지당하오. 의협투쟁이 비단 군자금 모금에 대한 문제만은 아니오. 식민지 권력에 안주하려는 친일세력을 응징함으로써 경각심을 고취시키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오.”

이로써 대한광복회는 경상도 칠곡(漆谷)의 장승원과 충청도 도고(道高)의 박용하를 목표로 삼았다. 경상도를 책임지고 있던 채기중은 장승원을 잡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3. 만 가지 형벌인들 몸을 사리겠는가

장승원은 경상도관찰사를 지낸 인물로 의정부참찬(議政府參贊) 허위(許葦)의 지인이었다. 구체적으로 허위의 형인 허훈과 이우준(李羽峻) 문하에서 동문수학한 친구사이였다. 그런데 경상도관찰사 벼슬이 바로 그 허위에게 의병자금 20만원을 헌금하겠다고 약속한 후, 그의 추천으로 얻어낸 자리라는 사실이었다.

20만원은 소 1만 마리, 5말들이 쌀 10만 가마니에 해당하는 거금이었다.

하지만 장승원은 원하는 것을 얻자 안면을 몰수했다. 벼슬에서 물러난 허위를 모욕한 것도 모자라 의병부대의 군사장이던 허위가 부족한 군자금을 메우기 위해 1만원을 요구하자 즉시로 밀고해 일제에 체포되게 만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적극적인 친일행각에, 일본인 지주보다 심한 소작인 착취에, 심히 목불인견이었다. 심지어는 자신의 유혹에 넘어오지 않는다고 남의 아내를 살해하고는 일경과 입을 맞춰 병사로 처리해버리는 등 장승원이 저지른 극악무도한 짓이 한둘이 아니었다.

이에 채기중은 강순필, 유창순 등과 함께 장승원을 암살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손기찬(孫基瓚)으로부터 권총 두 자루를 건네받은 후 강순필과 한 자루씩 가슴에 품고 칠곡으로 향했다. 이윽고 칠곡에 도착한 일행은 일단 근처의 주막에 자리를 잡았다. 여기서 채기중은 두 사람을 남겨둔 채 홀로 장승원의 집을 찾아가 문을 두드렸다.

“나는 공(孔)아무개란 사람인데 하룻밤 묵게 해주시오.”

그리고 하룻밤 묵으면서 집안의 동태를 살핀 후 다음날 날이 밝자 석유를 사서 주막으로 돌아갔다.

“강순필 동지와 내가 총을 쏘면 유창순 동지는 불을 지르시오.”

해가 떨어지자 세 사람은 장승원의 집으로 향했다. 채기중과 강순필은 바로 장승원의 거실로 가고 유창순은 오른쪽 객실로 들어가 대기했다. 곧이어 탕, 탕, 탕 총성이 울렸다. 장승원의 머리와 목, 왼쪽 무릎을 명중한 것이다. 유창순이 바로 석유병을 마룻바닥에 내던졌다. 하지만 병이 깨지지 않으면서 방화는 실패로 돌아갔다. 몰려오는 사람들을 피해 세 사람은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기고 탈출했다.

“日維光復 天人是符 聲此大罪 戒我同抱 聲戒人 光復會 員(일유광복 천인시부 성차대죄 계아동포 성계인 광복회 원) 조국의 광복을 이루자는 것은 하늘과 사람의 같은 뜻이니, 이 큰 죄를 성토하여 우리 동포를 경계하노라. 경계하는 사람 광복회 원”

11월9일(음력 9월25일)의 일이었다. 이어서 충청도지부에서도 박용하 처단에 성공하자 대한광복회는 일제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결국 채기중은 강순필을 비롯해 박상진·김한종(金漢鐘)·김경태(金敬泰)·장두환(張斗煥) 등과 함께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다. 3년 동안 진행된 고통스러운 재판 끝에 사형을 선고받은 채기중은 1921년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이를 기리는 뜻에서 정부에서는 1963년에 건국훈장독립장을 추서했다.

옥에 갇혀있던 당시 채기중은 이러한 시를 남겼다.

“爲復先王國(위복선왕국) 옛 왕국을 회복하기 위해/ 交來有義人(교래유의인) 의로운 사람들과 사귀어 왔네/ 誓死貫天日(서사관천일) 죽음을 각오한 맹세가 하늘의 해를 뚫나니/ 萬形不讓身(만형불양신) 만 가지 형벌인들 몸을 사리겠는가”

글=김진규<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참고= 광복70주년 상주의 항일독립운동, 상주문화원,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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