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전에 ‘대충’이란 없었다…독도 편 제작땐 7차례 다녀와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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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4-04-18   |  발행일 2014-04-18 제34면   |  수정 2014-04-18
‘향토와 문화’ 통권 70호 기념 좌담회…제작 산증인 대구銀 김용식 팀장·‘올댓플랜 창’ 엄명숙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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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식 대구은행 영상제작팀장과 창간부터 지금까지 기획·편집·필자 섭외 전반을 총괄했던 문화기획사 ‘올댓플랜 창’의 대표 엄명숙씨가 과월호를 살펴보며 힘들었던 지난 시절을 떠올리며 환하게 웃고 있다. 조만간 1996년 창간 당시 한국 문화예술계의 지형도를 입체적으로 다룬 70호가 출간될 예정이다.



김용식 대구은행 홍보부 영상제작팀장(54)과 엄명숙 올댓플랜 창(窓) 대표(52). 누가 뭐래도 ‘향토와 문화’의 산증인이다. 그동안 서덕규, 김긍년, 이화언, 하춘수 등 4명의 행장이 지나갔고 현재 박인규 11대 행장이 발행인을 맡고 있다. 9명의 홍보부장이 스쳐갔지만 둘은 요지부동. 꼭 이 사보를 위해 태어난 사람 같다.

경일대 사진학과를 나온 김 팀장은 1979년 은행에 들어와 대신동·평리동·중앙동 지점을 거쳐 대구은행 사사 20·30·35·40·45년사 편찬에 주도적 역할을 해 왔다. 향토와 문화 사진촬영을 진두지휘했다. 엄 대표는 20여년간 주제를 정하고 편집을 진두지휘한 총괄편집기획자이다.

엄 대표는 대구에서 자랐고 영남대 대학원에서 미학미술사학과를 졸업했다. 대구 페이지원에서 일을 했고 2006년 서울로 올라가 자기 이름을 건 기획사를 차린다. 한때 대한항공 기내지 ‘모닝캄’도 만들었다.

사보 제작이란 워낙 입김이 센 일이라서 중간에 다른 편집진과 실무자간 의견이 배치될 수도 있다. 하지만 둘은 마치 동의보감과 대동여지도 제작과 같은 열정으로 임했기 때문에 오늘에 이를 수 있었다. 이들이 가장 경멸하는 단어는 바로 ‘대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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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식 팀장

◆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동행… 향토와 문화

경주 남산 25차례나 올라가
촬영한 한달 분량 필름 분실
어쩔 수 없이 재촬영하기도
환란땐 일부 직원 폐간 운운
발행횟수 축소도 결사 반대

△김 팀장= 1996년 향토와 문화를 론칭할 당시 전국적으로 사외보 붐이 일었습니다. 우리도 그런 걸 한번 만들어 보자는 분위기가 일었습니다. 홍보실의 모 과장이 제안한 ‘향토와 문화’가 채택됐는데 다른 사외보와 확연히 다른 점이 있었습니다. 한 호마다 한 가지 주제를 택해 심도 있는 글과 사진을 싣는다는 형식부터 파격적이었습니다. 매 호의 주제를 선정할 때 지역문화, 역사, 예술에 포커스를 맞춘 점도 특별했습니다. 당시 그런 포맷을 가진 사외보는 저희 말고는 전혀 없었습니다. 사내에서도 찬반양론이 일었죠. ‘너무 학술적이다, 그렇게 무겁게 가면 고리타분하다’는 평가를 받는다고 반대하는 이도 있었지만 일단 일을 저질러 보기로 했습니다. 많은 이들이 왜 펴냈는가를 자주 묻습니다. 이유는 명확합니다. 지역사랑입니다. 저희 은행의 경영이념이 ‘꿈과 풍요로움을 지역과 함께’, 그리고 메인 슬로건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동행’입니다.

△ 엄 대표= 많은 생각이 머리를 스칩니다. 어느새 이렇게 됐나. 정말 이렇게 오래 이 일을 할 줄은 몰랐습니다. 사보를 전문으로 하는 편집업계에서 일한 것만 해도 25년이 넘는 저는 사실 기획이나 편집에 대해 누구한테 제대로 배워 본 적이 없습니다. 향토와 문화를 만들기 전까지 가지 못한 길에 대한 미련, 이루지 못한 꿈에 대한 회한 때문에 ‘늘 이 자리가 내 자리가 아닌데’ 하는 생각을 하면서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제게 향토와 문화는 처음으로 이 일을 하는 재미와 보람을 갖게 해 준 매체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것, 제가 공부하고 싶고, 알고 싶은 것을 모두 다 이 책에 쏟아부을 수 있었습니다.

△ 김 팀장= 다른 파트도 다 그렇겠지만 사진은 정말 지긋지긋하게 힘든 여건의 연속이었습니다. 1회 촬영 시 평균 10통 이상의 필름이 필요합니다. 회당 150~180컷이 실리게 되는데, 그러려면 평균 100컷 중에 겨우 한두 장 건져낼 수 있습니다. 경주 남산 편 찍을 때 가장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남산에 스물다섯 번 올라갔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촬영 한 달 분량의 필름을 사무실 책상에 올려놓았는데 갑자기 분실되고 말았습니다. 하늘이 캄캄해지더군요.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툴툴 털고 재촬영에 나섰습니다. 그해 12월31일까지 사진과 씨름했습니다. 원래 그해 말에 책이 나와야 되는데 그 무렵 사진촬영이 끝났으니…. 중화왕환록 촬영 때도 골머리를 엄청 앓았습니다. 중국 단둥으로 떠나기 전 사진 백업용 디스크가 바이러스에 감염됐는지 2일간 찍은 분량이 복원이 되지 않아 결국 빌려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독도 편 촬영 때도 무려 일곱 번이나 독도를 다녀왔습니다. 당시 접안이 되지 않아 선플라워 선상에서 촬영을 해야 했는데 관광객이 너무 북적대는 바람에 좋은 시야를 확보할 수 없었으나 안면 있는 선장의 도움으로 선장실 옆에서 촬영을 할 수 있었습니다.

◆ 기억에 남는 일들

낙동강 삼강주막 유옥연 주모
독점발굴, 민속자료 지정 기여
미술·음악·문학 분야 모두 다뤄
이문열·김주영 등 문단 거목도
잡지 높은 관심 인터뷰 응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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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명숙 대표

△ 엄 대표= 자료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제가 실은 책에 파묻혀 죽을 지경이거든요. 저는 주기적으로 박물관을 돌면서 도록류를 사 옵니다. 독자에게 더 많은 도판을 보여드리고 싶기 때문이죠. 이미지의 중요성이 날로 커지는 추세잖아요. 그래서 더 신경을 씁니다. 예를 들자면 작년에 ‘문명의 교류’ 편을 만들 때는 책값만 200여만원 들어갔을 걸요. 파지리크 고분에서 출토된 카펫에 나오는 그림의 말 장식에 곡옥(曲玉)이 달려 있어요. 이 도판 때문에 아마존을 뒤져서 70년대에 러시아 학자가 쓴 보고서를 주문하고, 누에 모양으로 생긴 옥을 찾기 위해 영국 대학에서 나온 책자를 주문하고, 이러다 보니 작업할 때마다 책상 하나는 책이 산같이 쌓이죠. 손익계산서로 따지자면 이건 바보나 할 짓이죠.

△ 김 팀장= 기획과 편집도 중요하지만 저로서는 어떤 사람에게 어떤 포인트에 이 책을 비치해놓는가도 숙제입니다. 96년 3월에 나온 창간호는 팔공산이 주제였는데 반응이 좋아 처음에 3만부를 발행했고 4월에 5천부를 추가로 발행했습니다. 은행 사정에 따라 발행부수도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연 4회 계간지 형식인데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연 3회로 줄어들었고, 나중에는 연 2회로 하자고 했을 때 저는 ‘그럼 계간지 의미가 없어진다’고 결사반대를 해서 결국 연간 3회 발간으로 조정되기도 했습니다. 98년에는 1만부, 99년에는 8천부로 줄었다가 2001년 1만부로 갔다가 2006년부터 다시 2만부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1만5천부는 전국 각처는 물론 일본 등 해외로도 우송됩니다. 나머지 5천부는 대구은행 전 지점과 지정배부처 등에 비치를 해둡니다. IMF 외환위기 직후 구조조정 바람이 불 때 향토와 문화도 위기를 맞았습니다. 일부 직원은 ‘이렇게 어려운 판에 대구은행 소식도 한 점 안 나가는 향토와 문화가 회사에 무슨 도움이 되느냐’면서 폐간을 운운하기도 했습니다.

△ 엄 대표= 3호 시장 편은 대구경북의 시장을 다 훑은 것입니다. 쇠락해가는 시장의 아픔을 담았습니다. 지금 전통시장 살리기가 붐이 되어 몇 군데는 되살아나고 있어 다행이란 생각이 듭니다. 그때의 기억을 더듬으며 64호에서는 장터에서 반백 년 인생을 보낸 분들의 삶을 담기도 했죠. 5호는 ‘대구경북의 항일운동사’를 담았습니다. 소리 소문 없이 반응이 컸던 책이고요. 저도 공부를 많이 했죠.



◆ 고비

△ 엄 대표= 고비가 몇 번 있었죠. 혹독한 IMF 외환위기 때의 기억은 씁쓸하죠. 95∼97년, 이때는 정말 경기가 호황이었고, 우리나라 기업 중에 사보를 내지 않는 기업이 거의 없었죠. 사보 전성시대였습니다. 대구에서도 사보업체가 꽤 있었죠. 대구와 동아 양대 백화점에 대구은행, 대동은행, 동양투신 등 금융계, 청구와 우방의 양대 대형 건설사에 보성까지 합세했고 논공공단, 구미, 포항까지 사보 열기에 휩싸였죠. 사보의 수준도 높았습니다. 일이 너무 많아 이러다 죽을 것 같다고 징징대다가 느닷없이 외환위기가 찾아와 업계에 북풍한설이 몰아쳤죠. 96년에 사보 창간 1년 만에 당시로서는 최고상인 문화공보부 장관이 주는 사보대상을 받았는데 제대로 기뻐하지도 못했어요. 그 상 덕분에 그래도 잘리지 않고 사보는 살아남았지만, 그후 3년 동안 1년에 세 번 나오는 불행을 겪었답니다. 대구에서 나오던 그 많던 사보가 다 사라졌어요. 정말 아쉽습니다.



◆ 향토와 문화로 유명해진 사람들

△ 엄 대표= 15호 나의 20세기는 99년 12월31일 발간됐는데, 부제를 ‘열두 권 소설로도 못 풀어낼 그 세월’이라 붙일 정도로 시종 가슴 먹먹한 사연이었습니다. 일제강점기, 광복, 6·25전쟁 등 20세기 현대사의 격랑을 헤쳐 온 봉화의 산림처사 동애 권헌조 옹, 독립투사 김창숙의 자부 손응교, 사할린 강제징용자 김상배, 예천 낙동강 삼강나루 주막지기 유옥연 할머니 등 여덟 분 어르신의 생애를 담았어요. 글이 아니라 모두 구어체로 정리했는데 잡지에선 드문 시도였고 사외보로선 첫 시도였습니다. 특히 유옥연 주모는 우리가 독점발굴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녀를 통해 낙동강 소금배가 거기까지 올라왔다는 얘기를 전해 들을 수 있었어요. 제대로 된 사진도 우리가 거의 독점하고 있죠. 발간 이후 많은 이들의 관심 속에 삼강주막이 경북도 민속자료 304호로 지정됐죠.

△ 김 팀장= 종가는 다른 호에 비하면 더 많은 자료 조사와 취재 노력을 기울였죠. 당시 언론도 제대로 경북 종가의 속내를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했습니다. 종가를 다룬 책부터 지역의 여러 자료를 찾아 미리 공부를 했어요. 자칫 종가로부터 본배없는 사람이라고 책잡히게 되면 취재가 어려우니까요. 가장 힘든 일은 바깥 나들이를 거의 하지 않고 반가 사람하고만 내왕하는 종손과 종부를 만나 사진을 찍는 것이었습니다. 저희들의 열정 때문인지 퇴계 종가의 차종손이자 16대 종손인 이근필씨, 안동 충효당 하회류씨 종손인 류영하씨, 안동 양진당 종부 김명규 할머니, 안동 충효당 종부 박필순 할머니의 기품 있는 모습도 사진으로 담을 수 있었습니다.



◆ 이 사람이 있어 우리가 견뎠다

△ 김 팀장= 향토와 문화를 거쳐간 분은 다 출중한 구석이 있었어요. 특히 지금은 고인이 됐지만 이필동 대구뮤지컬페스티벌 집행위원장 겸 경주세계문화엑스포 사무총장의 향토와 문화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잊을 수가 없어요. 창간 11주년 특별호를 만들 때 그 열정의 일단을 확인할 수 있었어요. “웬만한 잡지류는 한두 번 보고 폐기하기 십상이지만 향토와 문화는 단행본처럼 소장한다. 은행이란 그냥 돈장사를 해서 이윤을 챙기는 곳이지 이런 문화사업, 특히 돈이 안 되는 출판사업을 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는 그의 술회가 힘든 시기를 견디게 만들었습니다. 영남대 천마아트센터 총감독을 거쳐 현재 서울 국악방송에서 일하고 있는 김정학씨는 ‘더 이상 이 책은 사보가 아니라 귀하디 귀한 책이다. 가장 향토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국수적 통념도 이 책을 보면서 사실임을 느끼게 되었다’고 힘을 주었습니다. 이런 분 때문에 그만둘 수 없죠.

△ 엄 대표= 향토와 문화의 모토가 지역사랑인 만큼 지역에 큰 행사가 있을 때 관련 기획을 잡아 드러나지 않게 기여했습니다. 유니버시아드 때는 지역의 근대 체육사를 정리했고요. 또 세계육상선수권대회 때는 육상특집을 마련했죠. 또 작년에는 경주세계문화엑스포 행사가 이스탄불에서 열리는 것을 기념해 실크로드 특집을 마련했습니다. 걷기 열풍에 발맞춰 영남의 길을 다루고, 우리 옷과 음식사를 다루기도 했고요. 우리 문화에 대한 관심을 고취하기 위해 삼국유사를, 또 초조대장경 봉안 천년을 기념해 초조대장경 특집을 마련하기도 했습니다. 아 참, 초조대장경은 대구 부인사에 봉안되었는데, 초조대장경 축제는 합천에서 했죠. 사실 대구 부인사도 좀 부각이 됐어야 하는데 그냥 조용히 지나간 것 같아 아쉽습니다. 대구는 우리 근대문화사를 놓고 보자면 근대 음악, 미술, 문학의 발상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저희는 그동안 그 분야를 다 다루었습니다. 문학에서도 지역 출신 문단의 거물인 김주영, 김원일, 이문열, 이 세 분의 인터뷰를 두 번이나 했죠. 사실 이 분들이 사보 인터뷰를 하는 분이 아닌데, 출신지에 대한 애정으로 기꺼이 허락해 주셨죠.


●좌담 후기

숱한 전문가가 음으로 양으로 도움을 주었다.

소설가 겸 전 죽순문학회장 윤장근씨, 고지도 전문가 이우형씨, 독도박물관 초대관장을 지내신 서지학자 이종학씨, 창간호 때부터 인연을 맺은 남명학 전문가인 정우락 경북대 국문학과 교수, 한문 고전 번역을 도와주는 권혁화씨, 경주와 관련한 일에서 많은 도움을 준 김덕수씨, 경주남산연구소 김구석 소장, 국악방송 김정학 제작부장, 프리랜서 손영학과 이송미, 대구를 떠나 인터넷 고서점을 운영하는 이한용씨, 김인기씨, 북디자이너 정병규씨 등이다.

사진의 경우 사진가 석재현 대구미래대 교수, 대구 MBC에 있는 황석문씨, 한국외국어대에 있는 신선호씨 등이다. 신씨는 외국어대 홍보팀에 있으면서 향토와 문화의 콘셉트를 딴 ‘ Frontier Spirit’을 만들었다. 한때 중국에서 억류됐던 사진가 석씨는‘신농가월령가’나 ‘고향을 지키는 소나무’에 참여해 좋은 작품을 많이 건졌다. 김 부장과 단짝인 대구은행 영상제작팀 허진우 과장도 사진 때문에 거의 매일 야전군처럼 살아간다.

향토와 문화가 부디 100호, 1천호로 웅비(雄飛)하길 고대해 본다.
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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