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중·고 100주년] 근대교육 자주적 출발…항일투쟁·산업화·민주화운동 주도적 역할

  • 백경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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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6-04-30 07:26  |  수정 2016-04-30 07:41  |  발행일 2016-04-30 제2면
경북중·고 100주년(1899년으로 계산땐 117주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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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년, 그리고 100년.

둘 사이에는 17년이란 시간의 차이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중요한 가치가 숨어있다. 근대 교육의 시작이 일제에 의한 것인지, 민족 정신에 뿌리를 둔 것인지에 대한 차이가 있는 것이다. 우리가 경북중·고 역사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곳 역사의 재발견은 지역 교육의 태동이 자주적이었다는 것을 고증하고 선언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

◆ 1899년 봄, 대구·경북 근대교육의 싹이 움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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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 대구고보 재학생들이 경주로 수학여행을 간 가운데 학생들이 첨성대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경북중·고 총동창회 제공>

그간 경북중·고등학교의 전신은 일제강점기 관립학교인 ‘대구고등보통학교’(이하 대구고보)로 전해져 왔다. 대구고보는 서울(한성고보)과 평양(평양고보)에 이어 1916년, 전국에서 셋째로 문을 열었다. 영남지방 교육의 산실로 자리매김했던 대구고보는 올해로 설립 100주년을 맞는다. 이에 학교 탄생 100주년 기념 사업을 준비하던 경북중·고 총동창회는 최근 ‘잃어버린 17년’의 존재를 알게 된다. 지역 근대교육이 시작된 ‘달성학교’의 역사와 맞닿아 있다는 사실을 파악했던 것이다.


총동창회, 학교 역사 바로잡기
동문들이 벌인 투쟁·역사 부각
경북고 후배로 자부심 느끼게



달성학교의 존재는 익히 알려져 왔지만, 실체를 상세히 알 수 있는 자료는 지난해에서야 세상에 공개(영남일보 2015년 7월10일자 위클리포유 1~3면 보도)됐다. 이곳 설립발기인 중 한 명이며 교장을 역임했던 윤필오의 손부 허귀진 여사(94)가 대한제국 광무 3년(1899) 7월에 작성된 ‘사립 달성학교 창설취지급교칙(私立達城學敎創設趣旨及校則)’을 내놓았고, 달성학교가 경북중·고의 뿌리였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화제가 됐다. 달성학교는 1899년 최극창, 박윤상, 윤필오 등 10명의 발기인과 김영호, 신경균 등 찬성원 12명이 동참해 만들어진 사립학교다. 그해 4월 대한제국이 제정 공포한 중학교관제에 따라 경상감영 북문 안 무너진 관아터에 자리를 잡았던 대구·경북 최초의 근대학교다.

사연은 이렇다. 달성학교는 심상과(尋常科)와 고등과(高等科)를 학제로 뒀는데, 심상과가 오늘날의 초등교육과정에 해당된다면 고등과는 중등교육과정에 속했다. 달성학교의 교과과정은 신문화 또는 개화를 목적으로 편성됐다.

하지만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일제통감부는 학교운영상에 여러 제재를 가했다. 이에 심상과는 대구공립소학교(현 대구초등)로 인계(1905년)됐고, 고등과는 협성학교(1909년 개교)로 흡수된다. 사실상 달성학교가 둘로 쪼개진 셈이다.

1916년 조선총독부는 고등보통학교관제를 제정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일제는 향교 안에 있던 협성학교를 대구고등보통학교(약칭 대구고보·현 경북고 전신)에 병합시킨다. 즉, 대구고보의 뿌리를 협성학교, 더 거슬러 올라가 지역의 뜻있는 유림들이 세운 사립 달성학교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다.

◆ 항일투쟁과 6·25 학도의용병, 그리고 경맥정신

1919년, 대구고보 학생들은 서울에서의 3·1 만세운동 이후 들불처럼 번진 항일운동에 가장 적극적으로 나섰다. 대구 서문시장에서 열린 만세운동(3월8일)에 전교생 239명 대부분이 참가했으며, 이 중 48명이 투옥되었다가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이후 윤장혁, 백대윤 등 대구고보 재학생이 주축이 된 가운데 46명이 항일 비밀결사 단체를 조직(비밀결사 사건·1927~1928년)하기도 해 이 중 26명이 실형을 받고 투옥되기도 했다.

광복 후 6·25전쟁에서는 상급반 학생들을 중심으로 학도의용병이 조직됐다. 당시 경북중은 전국 중·고등학교에서 두번째로 많은 53명의 전몰 학도의용병이 나왔다(1955, 문교부 및 중앙학도호국단). 반공 구국전선에 가장 앞장서서 자신의 목숨을 바쳐 가족과 조국을 지켰던 것이다.

2·28 대구민주의거(1960년)에서는 이승만 정권에 저항하는 데 경북고 학생들이 앞장섰다. 당시 2학년 이대우(42회 졸업·학생회 부위원장)와 안효영을 중심으로 학원의 참된 자유를 보장하라며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2·28 대구민주의거는 후에 3·15 마산의거와 4·19 민주혁명의 도화선이 된다. 이승만 정권의 독재를 무너뜨리는 역사의 시작점에서 경북고 학생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셈이다.

이준복 경북중·고 총동창회 사무처장은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겪으면서 동문들이 벌인 투쟁의 역사와 정신이 부각되지 않아 안타까웠다. 이를 알리고 싶다”며 “선배 동문들의 이러한 움직임이 오늘날 ‘경맥정신’을 탄생하게 만들었다”고 밝혔다.

백경열기자 bky@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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