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관계를 졸업하고 새로운 관계 시작…더 애틋해졌어요”

  • 김수영 이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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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6-09   |  발행일 2017-06-09 제34면   |  수정 2017-06-09
■ 결혼생활의 신풍속도 ‘졸혼’
양향옥 화가의 ‘졸혼 생활’
20170609
졸혼한 뒤 더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는 양향옥 화가가 그의 작품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했다. 이지용기자 sajahu@yeongnam.com

“졸혼을 이혼이나 별거의 차선책이라고 생각하는데 저에게 졸혼은 인생의 후반부에 새롭고 충만한 부부관계를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학생들이 교과과정을 잘 마치고 기분 좋게 졸업을 하는 것처럼 졸혼도 이런 의미가 있는 것이지요. 낡은 부부관계를 졸업하고 서로에게 좀 더 도움을 주는 새로운 결혼관계라고 할 수 있지요. 졸혼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사랑하는 사람끼리 만나 자녀들을 잘 키우고 난 뒤 얼마 남지 않은 인생을 각자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도록 배려해주는 따뜻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니까 긍정적인 면이 많다고 봅니다.”

매일 경산 작업실∼대구 동구 집 오가다
올해초 남편·딸부부와 살던 집서 독립
한 달에 며칠은 가족들과 즐거운 시간
남편은 車 없는 아내 위해 매주 장 봐 방문

“여전히 가장 소중한 건 내 가족과 그림
결혼후 뒤늦게 시작한 미술공부인데다
집에 할 일 두고 나오기 미안하던 차에
새벽마다 남편이 태워주는 것도 맘쓰여
큰 전시 앞두고 작업에 집중하려 결정”



졸혼에 관해 취재를 한다고 하니 양향옥 화가가 가장 먼저 던진 말이었다. 그는 올해 초 남편, 딸부부와 함께 살던 집을 나왔다. 2년 전 경산쪽에 작업실을 얻은 뒤 매일 동구에 있는 집을 오가며 출퇴근을 하다가 올해 6월 대형전시(20~25일 수성아트피아)가 잡혀 작업에 몰입하기 위해 이런 결정을 내렸다. 한 달에 한두 번 집에 들어가 가족들과 1~2일 정도 지내면서 즐거운 시간도 가진다.

“처음에는 집을 나올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큰 전시가 잡히다 보니 작업시간이 부족했고 작업실에서 하루이틀 자던 것이 익숙해지면서 남편에게 그냥 작업실에서 살고 집에 가끔 들르면 안되겠느냐고 물었더니 남편이 며칠 고민한 뒤 허락을 해주더군요. 남편이 늘 제가 작업하는 것을 지지해준 만큼 제가 작업에 몰입할 수 있도록 배려를 해준 것입니다.”

양 작가는 새벽에 작업하는 것을 좋아한다. 조용한 시간에 더 깊이 몰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평소 새벽 1~2시까지 작업하고 오전 5~6시에 일어나 다시 캔버스 앞에 선다.

“제가 운전을 못하기 때문에 경산에 작업실을 마련한 뒤에는 남편이 매일 저를 출퇴근시켜 주었는데 그게 늘 마음이 쓰였습니다. 그리고 매일 집과 작업실을 오가다 보니 집중도도 떨어졌지요. 집에 할 일이 산더미처럼 있는데 그것을 딸에게 모두 떠넘기고 작업실에 나오는 것도 미안했고요. 그래서 그런 결정을 내렸는데 남편이나 딸부부가 잘 이해해 주었습니다.”

양 작가가 작업실로 완전히 거처를 옮긴 뒤 남편이 일주일에 1~2번 작업실에 들른단다. 간단한 장을 봐서 가지고 오는 것이다. 차가 없는 아내를 위한 남편의 배려다. 이번 인터뷰에서 그는 남편과 자녀의 이름은 밝히길 꺼렸다. 자신은 졸혼이라는 것에 대해 긍정적 생각을 가지지만 아직 사회의 시선이 그리 달갑지만은 않은 것 같아 가족에게 부담을 주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다. 가족과 따로 떨어져 살고 있지만 그에게는 그림과 가족이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다.

결혼한 뒤 뒤늦게 미술공부를 시작한 양 작가는 늘 작업에 목말라 있었다. 그런데 집에 있으니 살림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딸이 손주 둘을 보느라 고생하는데 작업하겠다고 매일 새벽에 작업실로 향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이런 것을 이해한 남편과 딸이 순순히 작업실로 이사가는 것을 허락했고 가족 모두가 각자의 공간에서 행복한 생활을 하고 있다.

“제가 남편과 결혼한 이유 중 하나는 나만의 방을 가지고 싶어서였습니다. 미술을 하고 나니 나만의 공간에 대한 필요성을 더욱 절감했지요. 딸이 어릴 때는 양육을 위해 어쩔 수 없이 같이 살았지만 이제는 서로 각자의 공간을 가지고 독립적 생활, 즉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사는 것이 서로에게 더욱 행복한 생활이지요.”

그는 이런 측면에서 남편을 ‘자신을 구해준 은인’이라고 했다. 그의 간절한 소원을 풀어준 게 남편이었던 것이다. 그런 남편이 올해 초 다시 그의 소원을 풀어주었다. 그는 “남편이 너무 고맙다. 수성아트피아 등 큰 전시장에서 초대전을 열 수 있는 것도 남편의 후원 덕분”이라고 했다.

양 작가의 남편은 지난해 신학대학에 들어갔다. 이를 기념해 양 작가는 지난해 남편을 위한 괜찮은 이벤트를 하나 열었다. 신입생환영회 뒤풀이를 양 작가의 작업실에서 열어준 것이다. “남편이 다니는 대학의 같은 과 학생과 교수들을 초대했지요. 제가 직접 장을 보고 테이블세팅을 해서 분위기 있는 뒤풀이를 해주었더니 초대받은 분들은 물론 남편도 고마워했습니다.” 작업 때문에 늘 바쁜 양 작가가 이런 일을 흔쾌히 해준 것은 남편에 대한 깊은 사랑 때문이다. 서로에 대한 사랑과 배려가 바탕이 되어있어 각자가 그동안 가정생활로 인해 하지 못했던 일들을 시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양 작가는 졸혼 후 좋은 점에 대해서도 일일이 열거했다. “남편과 같이 살 때는 몰랐습니다. 40년 가까이 살다 보니 남편이 저에게 잘해주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지요. 하지만 요즘 작업실에 들러서 제가 필요한 것을 가져다주고 작업실에서 여러 일을 도와주는 것을 보면 굉장히 멋있어 보입니다. 같이 살 때는 잘 느끼지 못했던 감정이지요. 가끔 만나니 더 애틋하고 서로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는 작업실에서 있는 시간이 너무 행복하다고 말한다. “거짓말 좀 보태어 이런 호사를 내가 누려도 되나 싶어 눈물이 날 정도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물건만으로 꾸민 나만의 이 공간은 천국이나 다름없습니다. 작업실에 있는 탁자와 의자, 이젤 등을 모두 사위가 직접 만들어줘 더 애정이 갑니다. 이렇게 내 공간이 주는 만족감이 크다 보니 세상을 보는 눈도 너그러워지고 저절로 흥이 넘치는 듯합니다.”

이렇게 각자 생활하는 것에 대해 남편이 아쉬워하는 부분은 없느냐고 묻자 “농담으로 하는 말이겠지만 한 사람이 없으니 숟가락 하나라도 덜 씻으니 좋다고 합니다. 남편도 자신이 좋아하는 공부를 아내의 눈치 보지 않고 할 수 있는 데서 만족스러워합니다”고 답했다.

인터뷰 말미에 그는 이런 제안을 했다. “저처럼 좋은 부부관계를 가지면서도 졸혼을 할 수 있습니다. 같이 사는 것이 행복한 분은 그대로 같이 집에 살더라도 집안에 각자의 공간을 만들어두고 서로 독립적인 생활을 인정해주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여건이 된다면 작지만 각자의 공간을 집 밖에 만들어두고 그동안 하고 싶었지만 못했던 일을 마음껏 하는 것도 행복한 여생을 보내는 한 방법 아니겠습니까.”

김수영기자 sykim@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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