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영철 칼럼] 독립운동가 후손의 출마와 대구의 자존심

  • 유영철 언론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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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4-03-27 06:56  |  수정 2024-03-27 06:57  |  발행일 2024-03-27 제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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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영철 언론학 박사

64년 전인 1960년 2월28일은 일요일이었다. 그런데 그날은 수성천변에서 야당인 민주당 부통령 후보인 장면 박사의 선거연설이 있는 날이었다. 이승만 자유당 정권은 학생들이 민주당의 유세장에 가지 못하도록 일요일 등교를 지시했다. 교육당국은 임시시험, 영화관람, 토끼사냥 등을 구실로 삼았다. 의분(義憤)한 학생들은 전날 모여 시위를 기획했다. 경북고 등 시내 고교 학생대표 8명은 자유당의 불의와 부정을 규탄하는 시위를 갖기로 하고 전국 백만학도의 궐기를 호소하는 결의문도 작성했다. 다음 날 대구의 고교생 1천200여 명이 시내로 몰려나와 시위를 벌였다. 대구2·28 이후 학생시위는 전국으로 확산됐다.

그해 3·15는 전국적인 부정선거였다. 당일 마산에서 대규모 규탄시위가 일어났다. 경찰은 발포했다. 사망자와 부상자가 속출했다. 27일 만인 4월11일 시위 도중 실종된 마산상고 김주열 학생이 경찰이 쏜 최루탄이 눈에 박힌 채 변사체로 마산 앞바다에서 떠올랐다. 학생과 시민들은 더욱 격분했다. 전국에서 정권 타도에 돌입했다. 4·19혁명으로 이승만정권은 붕괴했다. 대구의 2·28의거와 마산의 3·15의거는 4·19혁명의 기폭제가 됐다. 그 이전 1946년 대구10·1사건, 전국으로 확산된 민중봉기가 일어난 곳이기도 한 대구는 민주화운동의 시발지이자 성지라고 할 수 있다. 1950년대에는 야당 성향이 매우 강한 도시였다.

과거 대선을 보면 뒷받침된다. 1956년 제3대 대선에서 대구는 무소속 조봉암(1898~1959)에게 72%라는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다. 반면 자유당 이승만은 27%에 그쳤다.(당시 민주당 후보 신익희는 유세 가던 중 열차 안에서 뇌일혈로 급서했다.) 그러하다 1967년 제6대 대선부터 대구는 달라졌다. 박정희에게 71.86%의 몰표를 던졌다.

다가온 4·10총선, 보수여당 일색인 대구, 잘하면 몰라도 못해도 몰표를 던지는 양상. 어디를 봐도 같은 색깔, 그래서 대구의 총선에 누가 나오는지 관심 없는 사람도 많다. 이상(李箱)이 보면 권태를 느낄 것 같다. 그런데 관심이 없던 나도 그 안에 독립운동가 집안의 손자가 야당 후보로 출마한 사실을 알게 됐다. 유명한 왕산(旺山) 허위(許蔿) 선생(1855~1908)의 5대손이 대구에 출마한 것이다.

허위 선생은 구미 출신으로 학자이면서 한말 의병대장이었다. 일제의 침략으로 나라가 위태로울 때 막대한 재산을 팔아 의병을 결성했다. 거병하여 10여 년간 활동하다 일제에 체포돼 서대문형무소에서 54세에 생을 마감했다. 왕산뿐 아니라 왕산의 형 허훈 허겸, 아들 허학 허영 허준, 사촌 허형, 허형의 동생 허필, 허필의 아들 허보 허형식 허규식, 6촌인 허국, 삼종 간인 허담, 허형의 아들 허민 허발 허규, 사위인 이기상 이기영도 독립운동가였다. 허형의 따님 허길은 진성이씨 이가호와 결혼해 독립운동가 이원기 항일시인 이원록(이육사)을 낳았다.

삼대가 망한다는 독립운동가를 수도 없이 배출한 집안의 손자가 대구에서 입후보한 사실, 우리가 왕산 5대손을 외면할 수 있는가. 후손은 부일 친일 매국이 아닌 민족독립정신을 이어받아 올곧게 성장했을 게 아닌가. 선생은 물론 손자도 대우받아 마땅한 일 아닌가.

4·10총선에서 보수여당은 대구에서는 안심하는 모양이다. 야당이 될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독립운동가 집안의 후손이 출마한 것을 인지하고 당선은 아니더라도 공경은 해야 되지 않겠는가. 독립운동 민주화운동의 대구의 자존심! 한번 생각하는 계기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언론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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