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에세이] 마지막인 것처럼, 그리고 항상 시작인 것처럼

  • 입력 2012-12-17   |  발행일 2012-12-17 제29면   |  수정 2012-12-17
[월요에세이] 마지막인 것처럼, 그리고 항상 시작인 것처럼
일러스트/그래픽디자인팀

우주의 시간 속으로 이제 2012년 한 해가 사라지려 합니다. 어젯밤에는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 날씨가 쌀쌀했음에도 불구하고, 부랴부랴 코트를 껴입고 눈 덮인 겨울 거리를 홀로 걸으며 애써 흘러가는 시간들을 망각하려 했습니다. 제가 걸어 다니는 지상 어디에선가 시간을 팔고 있는 가게가 있다면, 곧장 달려가 전 재산을 몽탕 털어 시간을 구입하고 싶은 마음이었습니다.

그러나 길 건너 빵집의 크리스마스 전구 장식물은 저의 이런 마음을 아는 것일까요? 깜깜한 밤, 화살처럼 흘러가는 시간을 온몸으로 저항하는 저의 태도를 꾸짖기라도 하듯이 현란한 크리스마스 네온사인은 유난히 차갑게 저의 시선에 다가옵니다. 그리고 빨리 집으로 되돌아가서 다사다난했던 2012년을 잘 정리하고, 2013년을 새롭게 맞이하라고 성급히 불빛을 반짝이며 손짓을 합니다. 이윽고 저의 발걸음은 거리를 미친 듯이 쏘다녀 보았댔자 부질없는 짓이라는 것을 알고서 집으로 가는 길을 재촉합니다.

한 시간 전만 하더라도 제18대 대통령선거 유세차량에서 각 후보들을 응원하는 노랫소리가 거리에 즐비하게 울려 퍼졌는데, 지금은 크리스마스 캐럴이 거리에 가득합니다. 캐럴의 리듬에 한편으로는 신이 나고, 또 한편으로는 슬프고 우울해지는 저의 걷잡을 수 없는 마음은 아마 12월이라는 시기가 마지막과 시작의 경계선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특히 올해는 박빙(薄氷)의 대선이 코앞에 다가온 탓이라 마무리와 시작을 어떻게 해야 될지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더욱 더 긴장되고 초조한 것 같습니다.

저는 시작과 끝의 경계선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망설여지고, 혹은 하는 일이 손에 잡히지 않을 때 무작정 제 자신의 주변을 청소하기 시작합니다. 청소를 한다는 것은 솔직히 말해 귀찮고 힘든 일이지만, 청소를 하다보면 저를 둘러싼 주변만이 정리되는 것이 아니라 욕망과 집착으로 똘똘 뭉친 저의 마음도 차츰 정화됨을 알게 되어 기분이 흡족해집니다. 그러므로 청소를 한다는 것은 자신의 내면세계로 침잠(沈潛)하는 기회를 주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이 순간만큼은 ‘성자가 된 청소부’에 나오는 주인공 자반처럼 청소를 통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존재가 잠시라도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자반처럼 성자(聖子)가 아니고서 평범한 일상인으로서 속세를 살아가는 동안 욕망과 집착을 버린다는 것은 아마 삶과 생명을 포기한다는 의미일 수도 있습니다. 저에게 있어 인생은 욕망과 집착으로 점철되어 있는 고철덩어리이기 때문입니다.

[월요에세이] 마지막인 것처럼, 그리고 항상 시작인 것처럼

한 해의 마지막 달인 12월에 하는 청소는 지나온 자취와 흔적을 더듬고 되돌아보게 하는 반성의 기회를 주기도 합니다. 청소를 하면서 나오는 산더미 같은 쓰레기에 저의 욕심과 욕망이 자리잡고 있음을 알고, 그 쓰레기를 미리 재빠르게 버리지 못함에 저의 게으름과 집착이 똬리를 틀고 있음을 압니다. 저는 지금 청소를 하는 이 순간만이라도 욕망과 집착에서 해방되어 그것들은 그저 바라보고 싶습니다. 물건이나 정신적인 마음이나 쓸데없이 지나치게 집착하는 대상이 있다면 버리고 비워야 할 것 같습니다. 이러한 반성과 비움의 과정이 있어야 2013년을 다시 활기찬 채움으로 준비할 것 같아서입니다. 어쩌면 우리들의 삶은 비움과 채움의 무한한 순환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한 해가 마무리되고 새해가 시작되려는 12월 끝자락에서 알프레드 디 수자(Alfred D. Suja)가 말한 ‘살아라,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이라는 명언이 갑자기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어찌된 까닭일까요? 저는 한때 삶이 주는 무한한 반복성 때문에 답답함과 지루함을, 또 그러한 반복적인 삶이지만 확실하기는커녕 예측할 수 없다는 불안감 때문에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낸 적이 있습니다.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삶의 방향이 정해지지 않을 때 알프레드 디 수자가 말한 ‘현재 이 순간을 마지막인 것처럼 살아가자’는 구절은 가슴깊이 와닿았고, 제 인생의 정신적인 버팀목이 되어 하고 있는 일에 더욱 몰입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우리의 삶은 직시하는 순간마다 항상 마지막이며, 그리고 항상 새로운 시작이 될 것입니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반복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동일한 반복이 아닌, 늘 새롭고 다른 시작의 반복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그러므로 로버트 브라우닝이 말한 것처럼 인생은 오직 단 한 번만 주어지는 것이기에 그 짧은 한계 속에 뜨거운 열정으로 우리의 삶을 채워야만 하는지도 모릅니다.

지금 창을 통해 보이는 거리는 낮 동안 많은 사람들이 북적거렸지만, 밤이 되면서 인파가 사라진 탓인지 적막감이 흐릅니다. 저는 2년 전 봄 어느 날 월요에세이를 통해 독자 여러분과 만났고, 오늘 저의 월요에세이로 여러분께 슬픈 작별인사를 드리고 헤어져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헤어짐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 또 다른 만남을 태동할 것이라 믿습니다. 밤이 지나면 낮이 다가오듯 말라빠진 겨울나무는 내년 봄에 새롭게 돋아나는 잎을 약속하고, 항상 마지막은 또 다른 시작이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여현숙 <영문학박사·대학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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