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詩에 감금된’시인 ‘신라’에 사로잡히다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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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5-08-28   |  발행일 2015-08-28 제33면   |  수정 2015-08-28
■ 시인 이성복을 경주에서 만나다
‘절망에서 절정을 낚고 싶은’시인
20150828
사람의 편이 아니라 기꺼이 ‘사물’의 편에 선 이성복 시인. 1977년 계간 문예지 ‘문학과 지성’을 통해 ‘정든 유곽에서’란 시로 등단한 이성복 시인. 의미보다 대상에 감춰진 이미지를 바람처럼 펼쳐가는 그의 혼령스러운 눈매는 독일의 소설가 카프카를 빼닮았다.

40년을 개미처럼 살아온 소시민 K. 그의 말에는 ‘형용사’가 없다. 표정은 늘 영수증 같다. 9시뉴스 보고 나면 하품 연발하며 안방 침대 위로 올라간다. 계절이 어떻게 오가는지도 세상사에도 통 관심이 없다. 오직 일이 ‘구원’이다. 객기·치기도 없다. ‘하나 더하기 하나는 둘’의 나날이다. 사랑도 모른 채 결혼했다. 독서도 영화도, 좋아하는 노래도 없다. 가족이 유일한 삶의 목적이다.

그런 K가 생애 첫 효도관광에 나섰다. 미국 그랜드캐니언의 단애(斷崖) 앞에 섰을 때였다. K가 아내 몰래 울먹거린다. ‘사는 게 참 허망하네!’그가 왜 ‘허망’이란 단어를 토해냈을까? 혹시 K의 가슴에 ‘시(詩)’란 바이러스가 침투한 걸까.

누가 안토니오 스카르메타가 쓴 소설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를 K에게 선물해주었다. 그 대목에서 칠레 출신으로 20세기 가장 위대한 시인 중 한 명이자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파블로 네루다의 시 ‘시가 내게로 왔다’의 한 구절도 낭송해주었다.

‘그러니까 그 나이였어 시가/ 나를 찾아왔어 몰라 그게 어디서 왔는지/ 모르겠어 겨울에서인지 강에서인지/ 언제 어떻게 왔는지 모르겠어/ 아냐 그건 목소리도 아니었고 말도/ 아니었으며, 침묵도 아니었어/ 하여간 어떤 길거리에서 나를 부르더군’(하략)

그 소설을 영화로 만든 마이클 래드포드 감독의 ‘일 포스티노’까지 보여주었다. K는 ‘허망’의 실체를 알았고 귀국하자마자 곧장 시집을 사기 위해 서점으로 갔다. 그는 훗날 시인이 됐을까?



이성복 시인(64). 상주에서 태어난 그는 현재 국내 시인이 가장 인정하는 시인이다. 유명한 게 아니라 진정성의 깊이를 말하는 것이다. 시 이외의 다른 전리품에 별 욕심이 없는 탓인지도 모른다.

1982년 대구로 내려왔다. 33년째 대구에서 살고 있지만 여전히 그는 지역 시인에게조차 가장 ‘먼 존재’다.

서울대 불문과 출신으로 당시 문학청년에게 꿈의 문예지였던 ‘문학과 지성’을 통해 등단했다. 한국 최고의 문학평론가로 불렸던 김현의 지원사격을 받으며 ‘계관시인’처럼 등장했다. 다들 서울에서 살 줄 알았는데 1980년 첫시집이 나오고 2년 뒤 대구로 내려와버렸다. 계명대 불문과·문예창작과 교수를 거치면서 33년간 지역 문단에 일절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교수생활에만 충실했다. ‘지역을 너무 얕보고 너무 폼잡는다’는 소리도 들었다. 하지만 ‘시에 감금된’ 그가 굳이 사람에 연연해 할 이유도 없었다. 사람한테 바랄 게 없었다.

이성복은 대구의 시인도 한국의 시인도 아니다. 그냥 이성복 시인이다. 스스로 ‘시를 낳는 우주’라고 생각한 탓이다. 강호(江湖)가 아니라 고작 ‘강단’에서 제자에게 시 잘 적는 법이나 가르치고 있는 자신이 영 성에 차지 않았다. 2012년 이게 아니다 싶어 모든 강의를 내려놓는다.

그는 요즘 ‘유배생활’을 한다. 유배지는 팔공산 한티재 올라가는 초입, 고시촌처럼 생긴 원룸이다. 방에는 별다른 장식물이 없다. 책과 독서대밖에 없다. 종일 어둑하다. 길 없는 시의 길을 기다린다. 가끔 제자들과 만나 점심을 먹으며 ‘농담따먹기’를 한다.

요즘 그의 절친은 ‘운동’이다. 2003년 10년 만에 5번째 시집이 나올 때까지 시가 노크를 하지 않아 테니스장과 골프연습장에서 ‘운동삼매경’과 밀애를 나눈다.

그는 대략난감한 인터뷰이(Interviewee).

혼돈·광기 때문도 아니다. 그의 언행이 참 ‘혼령(魂靈)’스러운 탓이다. 일상을 ‘초월’로 변주하면서 산다. 낭만·자유·평등주의자·운동가한테도 관심이 없다.

몽상가·연금술사의 포스다. 사람의 편이 아니라 ‘사물의 편’이기 때문이다. 취향도 독특하다. 돌아가신 장인의 혁대도 사용한다. 교수 시절, 중고 프라이드 승용차를 쿨하게 몰았다. 거리에서 산 몇천원짜리 싸구려 선글라스에 더 관심을 둔다. 식탐도 없어 그냥 잔치국수 한 그릇으로 만족한다. 웬만하면 밥 안 먹고 살자는 주의다. 밑바닥 절망에서 ‘절정’을 낚고 싶은 탓이다. 시인의 기본 에너지가 비극과 비장임을 얘기하려는 것이다.

지난 광복절 어름 99세의 노모가 타계했다. 그 어떤 지인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평소 경조사를 챙기지 않은 그였기 때문에 그게 ‘허세’로 보이지 않았다. 노모의 죽음을 슬퍼하지도 않았다. 타계를 ‘저승으로의 외출’ 정도로 정리해버렸다.

그런 그가 2013년 제7시집 ‘래여애반다라(來如哀反多羅)’ 출간 직후부터 신라정신에 침잠했다. 향가(鄕歌)를 21세기 버전으로 부화하기 시작했다. 임종 때까지 그의 화두가 될 것 같다. 미당 서정주와 다른 새로운 ‘신라연가(新羅戀歌)’가 기대된다.

지난 20일 경주시청 영상회의실에서 열린 2015 경주엑스포 초청 문학특강에 그가 나왔다. 경주가 순간 ‘신라’로 변해버렸다.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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