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로 살고 싶어”

  • 김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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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6-09   |  발행일 2017-06-09 제33면   |  수정 2017-06-09
■ 결혼생활의 신풍속도 ‘졸혼’
졸혼, 2004년 日소설 ‘졸혼을 권하다’서 첫 사용
이혼과 달리 혼인관계는 유지하되 독립적인 삶
‘따로 또 같이’…중장년 부부라이프로 관심 급증
20170609
결혼을 졸업한다는 ‘졸혼’이 화제다. 일본에서 시작된 졸혼은 혼인관계는 유지하면서도 부부가 서로의 삶에 간섭하지 않고 각자 자유롭게 사는 것이다.

최근 중장년 사이에 화제가 되고 있는 단어 중 하나가 ‘졸혼’이다. 지난 2월 첫 방송된 ‘살림하는 남자들 시즌2’에 배우 백일섭이 졸혼대표로 출연해 졸혼 후의 삶을 가감없이 보여줌으로써 이에 대한 관심이 급증했다.

‘졸혼(卒婚)’은 학교로 비유하자면 일정한 교육과정을 다 마치고 졸업하듯이 ‘결혼생활을 명예롭게 졸업한다’는 뜻이다. 한국에서는 졸혼이 최근 사회문제화되고 있는 황혼이혼이나 별거를 막고 부부 갈등을 해소할 수 있는 방안으로 주목받고 있다. 졸혼은 이혼하는 것이 아니라 오랜 결혼기간 중 짊어졌던 서로 간의 의무에서 해방되어 기본적인 결혼생활은 유지하면서 서로 간섭하지 않고 좀 더 독립적이고 자유롭게 사는 것을 의미한다. 결혼의 의무에서는 벗어나지만 부부관계는 과거처럼 유지된다는 점에서 이혼과는 다르다.

결혼 40여년 만에 졸혼 선언을 한 백일섭은 같이 살던 집을 아내에게 주고 따로 나와 혼자 살고 있지만 한 달에 200만원이나 되는 쌍둥이 손자의 보모비까지 책임지며 가장의 역할은 그대로 하고 있다.

행복한가족만들기연구소 송유미 소장은 “졸혼을 해혼(解婚)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는 2004년 일본의 작가 스기야마 유미코가 그의 소설 ‘졸혼을 권하다’에서 처음 사용한 말”이라며 “이 부부관계의 방식은 서구의 LAT족(따로 또 같이)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졸혼을 권하다’는 졸혼으로 결혼관계를 이어가는 6쌍의 부부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책에서 졸혼은 결혼관계는 유지하지만 따로 살면서 각자의 직장생활을 충실히 하고 꿈을 좇아가는 모습을 응원하는 것으로 그려지는데 이는 졸혼이 “오랜기간 함께 산 부부가 혼인관계를 정리하지 않고 인생을 즐기는 것”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에게 얽매이지 않고 각자의 삶에 충실한 인생 후반기를 담아낸 것이다.

이와 유사한 LAT(Living Apart Together)족은 연인 또는 부부관계이지만 동거하지 않고 서로 다른 집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1980년대 이후에 나타난 새로운 커플의 형태다. 가까운 곳에 살면서 어려운 일이 있으면 언제라도 달려가 도움을 주거나 위로하고 사랑을 나누는 등 특별한 관계를 유지한다. 졸혼을 LAT족의 동아시아버전으로 바라보는 시각도 있다.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은 책 ‘위험사회’에서 “오늘날 사회는 위험사회이므로 ‘성찰적 근대화’를 요구한다”고 주장했다. 성찰적 근대화는 사회적 규범이나 제도에 의해 개인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사회적 정체성이 아니라 개인의 자율성과 역량을 향상시켜 자아실현을 이루고자 하는 개인의 정체성을 중시한다. 개인은 성찰적 근대화를 통해 가족과 같은 전통적 제도에서 벗어나 개인의 자율성과 책임을 중시하는 독립적인 삶을 추구한다. 전통적으로 가족에게 의존했던 여성도 결혼, 출산행위를 가족(남성)에게 의존하기보다는 스스로 결정하고 책임지려 한다.

사회적으로 ‘낭만적 사랑’에서 ‘합류적 사랑’으로 바뀐 것도 졸혼이 나온 한 요인으로 분석된다. 낭만적 사랑은 남녀가 하나가 되고 서로 종속시키려는 특성이 있는 반면, 합류적 사랑은 두 사람의 서로 상이한 정체성을 인정하고 각자의 자아 발전을 최우선으로 하는 평등관계라는 특성을 가진다.

대구여성가족재단 정일선 대표는 “졸혼이란 단어는 서구에는 없는 일본과 우리 사회에서만 쓰이는 단어”라며 “굳이 졸혼이라는 말을 쓰지 않아도 가족의 주기별로 볼 때 자녀들이 성장해서 독립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자신의 취미, 사생활 존중, 속박받지 않는 부부관계를 추구하는 형태의 부부가 늘어난다”고 설명했다.

졸혼은 100세 시대 인생의 절반을 가족과 함께하는 데 의무를 다했다면 나머지 절반은 여기에서 해방되어 자신의 독립적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이 증가하고 있는 데서 오는 자연적 현상으로 볼 수 있다. 졸혼이 이 시대의 사회적 현상이 되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한데, 황혼이혼의 부작용은 피하면서 서로 독립하고 싶은 마음은 크기 때문이란 분석이 힘을 얻고 있다.

졸혼은 남성보다 여성이 더욱 선호한다는 점도 눈여겨볼 만하다. 정 대표는 “이러한 현상은 한 번 결혼하면 죽을 때까지 참고 살았던 과거와 달리 남성 위주의 가부장적 결혼생활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여성들의 인식이 커졌음을 의미한다. 결혼으로 인해 많은 부분 자기를 포기하고 살았던 여성들이 일정 연령이 되면서 가사나 가족수발에서 벗어나 자신을 찾고 자신에게 집중하려는 욕구를 표출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김수영기자 sykim@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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