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시론] 베이비붐 세대의 추석

  • 이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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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9-04   |  발행일 2019-09-04 제31면   |  수정 2020-09-08
[영남시론] 베이비붐 세대의 추석

폭염도 조금 숙지면서, 올해도 어김없이 지속가능성이라고는 0%도 없는 일을 해야 했다. 벌초다. 도회지에서 태어나고 자란 먹물들에게는 꽤나 위험하고 힘든 작업이긴 하지만, 거칠게 자라난 잡풀들을 걷어내고 봉분 주변의 새파란 잔디를 가지런히 고르고 난 뒤 맑은 술 한잔 올리고 나면 살아생전 부모님께 내가 지은 죄를 조금은 씻어낸 것 같은 개운한 느낌이 든다. 부모님이 주신 한 삶을 허물없이 오롯이 살아내기가 정말 버거운 세상에, 올 한해 또 무탈하게 견딜 수 있게 해준 조상의 음덕에 대한 고마움을 땀 몇 방울과 술 한잔으로 대신하게 하는 것, 그것이 벌초의 미덕이기도 하다.

하지만 땀을 식힌 뒤 산을 내려오는 길에서는 ‘이 일을 언제까지 할 수 있을 지’에 대한 깊고도 깊은 회의에 걸음마저 흐느적거리게 된다. 그리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는 ‘이 일은 내 당대에서 끝내고 말리라’라는 결심을 굳게 다진다. 해마다 되풀이되는 회의와 결심이지만, 정작 나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벌초는 몇 년 안에 끝날 것이다. 조카들은 물론 아들놈마저 벌초는 자신들과는 무관한 남의 일로 여기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몇 년 안에 곧 소멸되고 말 고향마을은 결국 멧돼지를 비롯한 짐승들의 천국이 될 터. 뒷산의 봉분들이 온전하기를 바라는 것은 망상에 가깝다.

베이비붐 세대들은 추석날 보름달을 바라보면서 소원을 빌고, 별을 헤아리며 꿈과 상상력을 키웠던 마지막 세대라고도 할 수 있다. 그렇게 꿈을 키우고 소원을 빌었던 탓인지 베이비붐 세대는 단군 이래 가장 풍족한 삶을 산 세대라 평가를 받는다. 반면에 베이비붐 세대의 자녀들은 달과 별 대신 ‘영어로 놀고’ 컴퓨터로 공부하던 첫 세대이기에, 사람을 마주 대하기보다 사이버공간의 대화를 더 친근하게 여기고, 대부분의 일상을 ‘온라인’으로 해결하는 세대이다. 하여 “키아조씨마 지 알아서 하겠지 머”라는 아버지의 낙관적 자녀관에 화답하듯, 스마트폰 하나 들고 ‘지 알아서’ 놀고 있는 세대들이고, 앞으로도 계속 놀고 있을 확률이 높다. 이들이 성인이 되어 맞닥뜨릴 세상은 사람이 필요 없는 무인전산자동화 체제로 돌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은 단군 이래 최초로 아버지보다 가난하게 살게 될 첫 세대이다.

언제부터인가 추석은 서로 소통하기 어려운 이 두 세대가 불편한 동거를 강요받는 연휴가 되어가고 있다. “결혼해야지” “취업해야지” 와 같은 윗세대의 지극히 평범한, 오래된 덕담들이 악담으로 변해 버린 세상이다. 침묵만 흐르던 저녁상을 물리고 나면 아버지는 고개를 들어 아파트 숲 사이로 보름달이 떴는지를 살피고, 아들딸은 고개를 숙인 채 스마트폰만 들여다본다. 그리고 어머니는 부엌에 갇혀 있고, 상석에 앉아 집안의 병풍노릇을 해야 할 할아버지 할머니는 요양병원에 위리안치되어 있다. 추석이 언제인지, 아들 손자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하루 종일 병실을 배회하면서 질기고도 질긴 명을 힘겹게 소진하고 있는 것이다.

헤르만 헤세는 인간의 삶이 정말 고통으로 지옥으로 변하게 되는 것은 “두 시대, 두 문화, 두 종교가 서로 교차할 때”라고 했다(‘황야의 이리’). 지금 우리는 세 시대, 세 문화에다 여러 종교가 뒤엉켜있는 시대를 살고 있다. 너무 급히 달려왔기에 공동체 문화의 마지막 보루라고 할 수 있는 가정마저 해체되면서 모든 이의 삶이 위태롭고 불안해졌다. 삶이 불안하기에 너나 할 것 없이 자식농사에 목숨을 걸다시피 한다. 하지만 위법성은 없으나 일반 국민의 정서에 염장을 지르는 장관, 의원급 특별 국민들의 자식농사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미로 속에 숨어있는 법과 제도의 맹점을 찾아낼 수 있는 능력과 인맥이 있어야 한다. 그런 집안의 추석에는 수시모집을 앞둔 수험생의 SCI급 논문을 놓고 온 가족의 심층토론이 있겠지만, 일반 국민의 추석상에는 괴괴한 침묵이 흐르거나 언성이 높아지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민족대명절의 풍경조차 이렇게 나뉘어져 있다. 다가오는 추석이 불안하다.

김진국 (신경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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