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시선] 부지런한 독일인?

  • 이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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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9-19   |  발행일 2019-09-19 제30면   |  수정 2020-09-08
일 적게 하고 속도 느리지만
과정서 생긴 유무형의 자산
축적해서 시스템 효율 높여
빨리빨리에 익숙한 우리도
근로구조와 방법 성찰해야
[목요시선] 부지런한 독일인?
이정미 대구경북연구원 연구위원

독일의 뷔르츠부르크는 인구 10여만명의 작은 도시지만 무척이나 아름다운 곳이다. 도시를 가로지르는 마인강은 해질녘이면 석양을 비추며 금빛으로 반짝이고, 다양한 양식의 옛 건물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시가지의 풍경은 다채롭고 정갈하다. 걷는 즐거움이 있는 도시, 그렇게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 보면 어느덧 발길은 마인강변 한편에 우뚝 솟은 마리엔베르크 요새를 향하게 된다.

마리엔베르크 요새는 도시의 풍경처럼 14~15세기, 17세기 건물들이 하나의 공간에 중첩적으로 배치되어 있는데, 역사적 문화유산이자 도시의 랜드마크로서 세심하게 관리된다. 이곳을 찾은 몇 년 전의 그날도 세월의 풍화를 견디지 못해 무너져 내린 벽돌담을 보수하는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미장공 2명과 중년 여성으로 보이는 감독자 1명이 작업 방향, 방식에 대해 의견을 주고받으며 천천히 일하고 있었다. 바쁘게 움직이는 우리나라의 보수공사 현장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다. 순간 ‘저리 일해서 언제 마치겠는가’라는 생각이 습관처럼 스쳐지나갔다.

독일인은 부지런한 민족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막상 이들과 함께 일하다보면 독일인의 근면성이 허명은 아닐까 의심되기도 한다. 우리와 비교할 때, 독일 사람들은 정말 천천히, 적게 일한다. 그래서 독일 사람과 처음 일해 본 한국인들은 그들의 일하는 속도와 시간 때문에 엄청난 답답함을 느낀다. 독일에서 처음 일을 시작할 때, 나 역시 비슷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해를 거듭하며 우리보다 느리게, 적게 일하는 독일의 근로문화가 오히려 더 효율적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2017년 기준으로 한국인의 연평균 근로시간은 2천24시간이다. 반면 독일은 1천356시간이다. 그런데 노동생산성을 보면 전혀 다른 결과가 나타난다. 우리의 시간당 노동생산성은 34.3달러인데, 독일은 60.48달러다. 독일은 우리보다 더 적게 일하지만 더 높은 생산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두 나라 사이의 자본과 기술격차를 감안한다 하더라도 제조업 선진국 반열에 든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둘째로 많이 일하고 있음에도(멕시코 2천258시간) 노동생산성에서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면, 우리의 근로문화와 관행에 대해 한번은 돌아볼 필요가 있다.

경향성 측면에서 본다면, 우리의 근로문화는 ‘속도’를 지향하나 ‘소모’로 귀결된다. 반면 독일의 근로문화는 ‘축적’을 지향하고 ‘효율’로 귀결되는 것 같다. 우리나라는 모든 일을 ‘빨리빨리’해서 최종 결과를 내는 데 집중한다. 때문에 일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생성되는 암묵지를 형식지로 전환하는 과제,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한계를 평가하고 극복하는 과제, 이를 통해 조직을 혁신하고 일하는 사람을 미숙련에서 숙련자로 성장시키는 과제는 무시되기 일쑤다. 따라서 남는 것은 눈에 보이는 유형자산일 뿐 이것의 확대재생산을 가능케 할 수 있는 무형자산은 일의 종료와 더불어 소모된다.

독일은 우리의 이런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최종 결과를 도출하는 시간이 다소 늘어나더라도 과정에서 생성되는 유무형 자산을 확실히 축적하고 공유함으로써 일을 하는 사람의 능력과 시스템의 효율성이 구조적으로 향상되는데 힘을 쏟는 편이다. 4차 산업혁명 국가전략으로 국내에 소개된 독일의 인더스트리 4.0도 핵심은 스마트 팩토리가 아니다. 사회 각 분야에서 축적된 산업적 노하우가 디지털 기술에 힘입어 빠르게 소통·공유되는 플랫폼을 구성하는 것이 인더스트리 4.0의 가장 중요한 과제이며, 스마트 팩토리는 이런 노력의 유형적 산물일 뿐이다.

돌이켜 보면 우리나라의 ‘빨리빨리’ 문화는 분단과 전쟁이 남긴 폐허 위에서 이른 시간에 산업화를 성취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형성된 근로 관행이었다. 섬유산업, 철강산업으로 대한민국의 산업화를 선도한 대구경북지역도 이처럼 오래된 습관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나 이제는 사회구조 전반의 혁신적 전환이라는 시대적 요구 앞에 바로 우리 자신부터 속도에 집착하여 사람과 조직을 소모시키는 오래된 근로문화를 일신하고, 축적과 공유를 지향하는 근로문화를 창출하는데 앞장서야 하지 않을까. 우리의 일하는 구조와 방법에 대한 성찰이 필요한 시간이다.
이정미 대구경북연구원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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