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칼럼] 맛있는 글, 맛없는 정치

  • 박규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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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9-23   |  발행일 2019-09-23 제31면   |  수정 2019-09-23
[월요칼럼] 맛있는 글, 맛없는 정치
박규완 논설위원

글 중의 글, 글의 최고봉은 어떤 글일까. 음식에 대한 평가 잣대가 맛이듯 글도 ‘맛있는 글’이 압권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맛있는 글은 쉽게 탄생하진 않는다. 산고도 있어야 하고 쓰는 이의 내공도 필요하다. 대체로 맛있는 글엔 굴곡이 있다. 하물며 몸매도 S라인이 돋보이는 시대에 글인들 1자처럼 밋밋해서야 독자에게 감흥을 주기 어렵다. 음식도 밍밍한 맛이라면 다들 고개를 돌리지 않나. 짧은 글이라도 기승전결(起承轉結)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읽는 이의 구미를 돋우고 흡인력을 유발한다.

탄탄한 기초도 필수다. 골프 역시 그립, 어드레스, 상체 회전 등 기본이 공고하지 않으면 일취월장이 불가능하지 않나. 구개음화, 연음현상, 반어법, 도치법, 생략법, 형용모순, 체언, 성상 관형사 따위는 꿰고 있어야 한다. 같은 낱말의 반복 사용이 암묵적 금기사항이란 점도 간파해야 한다. 시류와 정실에 휘둘리는 헤픈 글은 대접받지 못한다.

글의 격을 높이는데 필요한 세 가지는 절제, 어휘력, 은유(隱喩)다. 감정과 분량을 절제하지 않으면 글은 쓸데없이 방만해진다. 그러면 함축성은 희석되고 초점마저 흐려진다. 특히 비판의 글일수록 정제되지 않은 표현과 억센 문장, 정서적 오지랖을 경계해야 한다. 어휘가 풍부한 글은 반찬 많은 밥상에 비유할 만하다. 늘 판에 박힌 낱말과 관용어만 사용하면 하품 나오는 글이 될 공산이 크다. 쌈박하고 맛깔스러운 어휘, 쫀득한 순우리말, 궁합 맞는 고사성어를 끌어낼 줄 아는 직조(織造)능력이면 금상첨화다.

셰익스피어는 신어(新語)의 창조자이자 언어의 마술사다. 그를 통해 나온 조어(造語)만 1천700개가 넘는다. 비유와 은유에도 달인이다. ‘The world is your oyster(세상에 못 할 게 없다)’도 셰익스피어에 의해 만들어졌다. 세상이 당신이 즐겨먹는 굴이라니 얼마나 찬란한 은유인가. 셰익스피어 문학이 고급영어로 다뤄지는 이유다. 빼어난 은유는 글맛의 농도를 올리는 자연조미료나 진배없다.


한데 정치권의 기상도는 ‘맛없음’ 일변이다. 한 달간 들끓었던 ‘조국 소용돌이’는 도무지 잦아들 기미가 없다. 눙치기와 오불관언(吾不關焉)이 난무하고 도덕성과 공정의 좌표는 흔들린다. 과거 조국이 날린 정의로운 멘트는 위선으로 소환되며 청년들의 분노를 자아낸다. 진영 충돌이 빚어낸 불협화음이 절정에 이르렀고 경제와 민생은 투쟁에 밀려났다. 애꿎게도 그 정치적 비용은 고스란히 국민이 치러야 한다.

위법 여부를 떠나 조국 장관의 딸이 소위 ‘스카이 캐슬’의 특혜를 누린 건 명약관화하다. 부인 또한 사문서 위조 등 여러 의혹에 연루돼있다. 그런데도 문재인 대통령은 만신창이 후보자의 임명을 강행하며 국민정서를 비켜갔다. 기대했던 반전(反轉)이나 절제는 없었다. 조국을 살렸으되 진보의 자산인 공정과 정의를 탕진하고 중도층의 지지도 잃었다. 명백한 패착이다. 일월무사조(日月無私照), 예기(禮記)에 나오는 경구다. 해와 달은 만물을 공평하게 비추거늘 문 대통령은 왜 사연(私緣)의 끈을 놓지 못했을까.

문재인정권의 대형 악재에도 불구하고 자유한국당의 지지율이 미동조차 하지 않는 것도 야릇하다. 오버가 너무 심하고 걸핏하면 의정을 팽개치는 정당 이미지 때문은 아닐까. 삭발이 눈길을 끄는 이벤트는 될망정 국민에게 감동을 주진 못한다. 장외투쟁에 대한 여론도 호의적이지 않다. 보수야당의 조국 퇴진 투쟁에 대한 국민 반응은 찬성 42%, 반대 52%다. 한국당 2020경제대전환위원회에서 내놓은 ‘민부론(民富論)’은 문 정권의 경제실정을 보완할 내용이 그득하다. 한국당은 정책으로 승부하고 인적쇄신으로 ‘도로친박당’의 색채를 걷어내야 한다.

두서없는 횡설수설, 절제 없는 장광설은 맛없는 글이다. 작금의 우리 정치가 딱 그 짝이다. 여과 없이 쏟아내는 막말·독설보다 촌철살인의 패러디나 은유가 더 호소력 있다는 걸 셰익스피어가 증명하지 않았나. 국민은 절제 없이 독주하는 정권, 막 나가는 정당을 배척한다. ‘맛있는 정치’를 갈망하는 까닭이다.
박규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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