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진단] 문제는 승자독식이다

  • 이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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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10-29   |  발행일 2019-10-29 제30면   |  수정 2019-10-29
조국 논란 본질은 승자독식
공직자 표리부동 국민 반감
정치권은 당리당략에 매몰
대입 개편은 임시변통 불과
사과 통해 국민과 소통해야
[화요진단] 문제는 승자독식이다
이창호 편집국 부국장

성군(聖君)인 세종 임금도 때론 극대로(極大怒)했다. ‘시근 없이’ 말을 내뱉는 몇몇 신하 때문이었다. 용코로 걸린 이는 집현전 학자 정창손이었다. ‘삼강행실도’를 ‘훈민정음’으로 옮기라는 어명에 반기를 든 것. “백성들이 문자를 몰라서, 교육을 받지 못해서 너절한 짓을 해 온 게 아닙니다. 사람의 천품은 교육으로 고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자기 딴엔 간언(諫言)을 했지만 결국 사달이 났다. 임금은 그를 단칼에 파직하며 일갈했다. “네 ○이 어디서 과인의 하늘 같은 백성을 업신여기는가. 백성의 천품이 교화될 수 없다면 네 ○이 정치는 왜 해, 그저 백성 위에 눌러앉아 권세와 부귀를 누리기 위해선가.” 조선시대판(版) ‘승자독식(Winners take all)’을 엄중 경계한 세종 임금의 일화다.

작금 조국 논란을 계기로 터져 나온 민성(民聲)의 큰 줄기도 다름아닌 ‘승자독식 타파’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일가만을 향한 외침은 아니다. 특권·특혜의 아이콘인 이 사회 권력·부유층에 대한 준엄한 경고이리라. 불공정(不公正)·불의(不義)를 통해서라도 모든 걸 차지하려는 그들 말이다. “모두가 용이 될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고 했던 조 전 장관. 정작 제 자식은 특목고·의학전문대학원에 보냈다. 문제는 편법·특권을 불사하며 ‘사회의 열매’를 독식하려 했다는 점이다. ‘비교적 깨끗한 학자’로만 여겨 온 그에게 청년들이 배신감과 분노감을 토로한 이유다.

추상(秋霜)같은 민심과 달리 정치권은 당리당략만 팠다. 민주당은 ‘승자독식 타파’를 갈망하는 외침에 애써 귀를 막았다. 자유한국당은 그런 민심을 교묘히 이용했다. 특히 한국당은 조국 사퇴 이후 태도가 돌변했다. 광장에서 시민과 함께 외친 ‘승자독식 타파’는 이제 안중에 없다. 그들에겐 오로지 ‘조국 사퇴’ 뿐 이었으니. 최근 한국당의 ‘조국 사퇴 유공(有功) 의원 표창장 수여식’도 당의 실체를 재확인시켜 준 삼류 코미디였다. 이 당은 정신 차리려면 아직 멀었다. 편집국 한 후배가 뼈있는 얘길 했다. “표창장을 주려면 광장의 시민에게 주는 게 옳다”고. 공감 백배다. 조국 사퇴 이후 민주당도, 한국당도 총선을 위한 정치공학적 셈법뿐이다. 어차피 그들에게 승자독식 타파는 불편한 ‘숙제’일 뿐이다. 본디 승자독식을 금과옥조(金科玉條)로 여겨 온 그들 아닌가.

그 와중에 문재인 대통령은 대입 정시 비중 확대에 나섰다. 뭐가 그리 급했나. 초민감한 대입 문제를 지금 이 시점에, 왜 또 건드리나. 이 개편안이 학생을 ‘문제풀이 늪’으로 밀어넣고, 사교육을 더 부채질 할 거란 생각은 못했나. 결국엔 또 다른 ‘교육 승자독식’을 초래할 거란 고민은 하지 않았나. 패착을 부를 단견이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구조적 ‘교육 불평등’ 해소를 위한 공론화다. 부모의 교육 기득권이 자식에게 고스란히 승계되는 ‘교육 승자독식’ 혁파를 위한 담론의 장 말이다.

무엇보다 지금은 대통령의 사과가 먼저다. ‘(불공정 승자독식으로 정의되는) 조국 사태는 명백한 내 책임이고, 내 잘못’이라는…. 무엇이 두려운가. 잘못을 인정할 경우 ‘레임덕’(권력누수)이 올 것을 걱정했나. 그렇다면 국정 수장답지 않은 무책임한 태도다. 더 늦기 전에 대 국민 사과를 하라. 사과는 대통령 주요 덕목 가운데 하나다. 진정성 있는 사과는 국민과 소통하는 길이기도 하다.

필자는 이른바 ‘586세대’다. 대학시절인 30년 전엔 누구나 장밋빛 미래를 꿈꿨다. 눈부신 경제성장 시대였다. 취업을 제때 하지 않아도, 다니는 직장에 불쑥 사표를 내도 걱정이 별로 없던 시절이었다. 뭘 해도 ‘긍정적 미래’가 올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이 충만했다. 2019년 오늘은 어떤가. 끝모를 저성장시대 속, 끝없는 ‘사다리 경쟁’만을 강요받는다. 부모 경제력이 자녀 성공과 무관하지 않은 시대. 미래에 대한 자신감은 줄어들고, 권력·부유층의 승자독식만 굳어져 가고 있다. 취업을 하지 않으면, 또는 직장을 관두면 미래를 장담할 수 없다는 공포감. 지금 청년들을 보면 마음이 아리는 까닭이다.이창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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