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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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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규의 수류화개(水流花開)] 자작나무(2) 기름기 많은 껍질, 가난한 자에 촛불로…신비스러운 자태, 문학·예술 소재로…
영양군 수비면 죽파리 첩첩산중에 자리한 자작나무숲에는 수령 30년생 자작나무들이 빼곡히 자라고 있다. 겨울의 이 숲에 들어서면 하늘을 향해 쭉쭉 뻗은 순백의 나무들이 별천지를 선사한다. 자작나무숲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죽파리 마을은 조선 시대 보부상들이 정착하면서 개척한 마을로 대나무가 많아 '죽파(竹坡)'라 불렀다고 한다.죽파리 자작나무숲은 인공 숲이다. 산림청이 1993년 죽파리 검마산(해발 1천17m) 자락 일대에 자작나무를 심어 조성했다. 솔잎혹파리로 소나무들이 죽으면서 황폐화한 곳에 자작나무를 심어 가꿔온 숲으로, 축구장 40개에 해당하는 30.6㏊에 12만 그루의 자작나무가 자라고 있다.자작나무숲에는 2㎞ 정도의 산책로가 조성돼 있다. 이 자작나무숲은 2020년 국가지정 국유림 명품 숲에 선정되기도 했다. 아직 정식 개장 전인데, 진입도로와 주차장을 비롯해 화장실, 자작나무숲 힐링센터, 자작나무 체험숲, 카페 등 관련 시설을 준비 중이다. 올해 하반기에는 현재 시험 운영 중인 전기차도 정식 운영할 예정이다.영양 자작나무숲과 더불어 우리나라의 대표적 자작나무숲으로 인제 자작나무숲이 있다. 영양 자작나무숲보다 더 일찍 유명해진 숲이다. 남한에서는 자생하는 자작나무를 보기 어려운데, 한반도에서는 중부 이북이나 고산 지역인 강원도 산간에서 드물게 보인다. 우리나라의 대표적 자작나무숲인 인제 원대리 자작나무숲도 산림청에서 조성한 국유림이다. 1974년부터 1995년까지 자작나무 약 70만 그루를 심어 가꾸어 온 곳이다. 원래 소나무 숲이었지만 솔잎혹파리로 병충해가 심해 소나무를 베어내고 그 자리에 자작나무를 심었다.원대리 자작나무숲 중에서도 자작나무가 특히 많은 '속삭이는 자작나무 숲'(6㏊)은 명품 숲으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해발 800m 정도 위치에 자리한 이 숲은 2012년부터 개방돼 찾는 사람들이 갈수록 늘고 있다. 이 숲의 자작나무들은 높이가 20∼30m에 이르고, 사람 가슴 높이 지름은 15∼20㎝ 정도.숲 안에는 정자처럼 지은 숲속 교실과 전망대, 인디언 집 등이 있다. 특히 자작나무를 엮어 만든 인디언 집이 인기를 끌고 있다. 이곳에서 찍은 사진들이 소셜 네트워크를 통해 퍼져나가면서 자작나무숲을 궁금해하며 찾아오는 발길이 늘어났다.영양 죽파리 및 인제 원대리의 자작나무숲과 함께 김천 수도산 자작나무숲, 청송 무포산 자작나무숲도 산림청이 조림해 가꿔온 대표적 자작나무숲이다.◆자작나무는'자작나무'라는 이름은 이 나무를 태우면 '자작자작' 소리가 나서 붙여졌다고 한다. 다른 나무도 불을 붙이면 타는 소리가 '자작자작' 나지만, 자작나무는 다른 나무에 비해 그 소리가 크다.자작나무가 다른 나무보다 소리가 많이 나는 이유는 자작나무의 성분 때문이다. 이 나무에, 그 껍질에 기름기가 많아서 그렇다. 기름 성분이 들어 있어 불이 잘 붙는 자작나무를 사람들은 불쏘시개로 쓰기도 했다. 그리고 흔히 결혼식을 올리는 것을 '화촉을 밝힌다'라고 하는데, 이때 화촉이 바로 자작나무 껍질 기름을 활용한 초를 말한다. 옛날 다른 기름이 흔치 않을 때 자작나무 껍질에 불을 붙여 촛불을 대신했다. '화촉(樺燭)'의 '화(樺)'자는 자작나무를 뜻한다. 같은 의미로 간혹 '화(華)'자를 쓰기도 했다는데, 지금 쓰는 '화촉(華燭)'이라는 말도 '화촉(樺燭)'에서 비롯된 것이다.자작나무 둥치를 만져보면 매끈매끈하면서 약간 폭신한 느낌이 든다. 기름기 때문인지 아주 부드럽고 매끄러운 가죽을 만지는 느낌이다. 자작나무의 하얀 껍질은 잘 벗겨지는데, 이 껍질은 종이 대용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우리나라는 물론, 일본이나 중국도 자작나무 껍질에 부처의 모습을 그리거나 불경을 적어 남겼다. 1973년 경주 천마총에서 하늘을 나는 천마(天馬)가 그려진 말다래가 출토되었는데, 천마가 그려진 말다래의 주재료가 자작나무 껍질이다. 말다래는 말안장에 늘어뜨려 진흙이 말에 튀는 것을 막는 장식품을 말한다.자작나무를 '백서(白書)'라고도 하는데, 옛날 그림을 그리는 화공들이 이 나무의 껍질을 태운 것을 활용해 그림을 그리거나 가죽을 염색하는 데 사용하면서 부른 이름이라고 한다.자작나무가 추운 날씨에도 잘 버텨 낼 수 있는 것도 줄기의 이런 껍질 덕분이다. 기름 성분이 있는 여러 겹의 얇은 껍질이 자작나무 줄기를 둘러싸고 있기 때문이다. 혹한의 추위를 버틸 수 있게 하는 이 기름 성분은 자작나무 줄기를 안 썩게 하는 기능도 있다. 백두산 근처의 집은 너와집이 많은데, 지붕을 자작나무 껍질로 덮고 바람에 날리지 않도록 그 위에 돌을 가득 올려놓았다. 자작나무 껍질에 기름기가 많아 잘 썩지 않기 때문이다.활엽수인 자작나무는 위도가 높은 곳에서 자라는데, 시베리아나 북유럽, 동아시아 북부, 북아메리카 북부 숲의 대표적인 식물이다. 실제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몽골을 여행하며 자작나무를 많이 볼 수 있었다. 우리나라는 함경도와 평안도 지역에서 자작나무가 자생하고, 백두산에 오르면 자작나무를 흔하게 볼 수 있다고 한다.여러 지역의 많은 민족이 자작나무를 영험한 나무라고 여기며 신성시했다. 중앙아시아 및 북아시아에서 굿을 할 때 샤먼은 자작나무와 말을 이용하여 제례를 치렀다. 말의 등 위에서 자작나무 가지를 흔들며 말을 죽인 뒤 자작나무 가지 불 속에 던진다. 몽골의 부랴트족은 자작나무를 천상계의 문을 열어 주는 문의 수호자로 생각했다.자작나무에 얽힌 이야기도 적지 않은데, 특히 이 나무의 탄생 설화가 유명하다. 몽골의 영웅이자 세계 역사를 바꿔 놓은 칭기즈칸이 유럽을 침략하던 시절, 칭기즈칸을 도운 유럽의 한 왕자가 있었다. 왕위계승에 불만을 품은 그 왕자는 칭기즈칸 군대의 우수함을 과대 선전해서 유럽 군대가 싸우지도 않고 도망가게 했다.이 사실을 안 유럽의 왕들이 이 왕자를 잡으려 하자 왕자는 홀로 북쪽의 깊은 산 속으로 도망갔다. 그러나 더는 도망갈 곳이 없자 땅에 큰 구덩이를 파고, 자신의 몸을 흰 명주실로 친친 동여맨 후 그 속에 몸을 던져 죽었다. 이듬해 어느 봄날, 왕자가 죽은 곳에서는 나무가 한 그루 자라났다. 이 나무가 마치 흰 비단을 겹겹이 둘러싼 듯, 하얀 껍질을 아무리 벗겨도 흰 껍질이 계속 나오는 자작나무라고 한다.자작나무는 문학과 예술 등의 소재로도 애용되었다. 시베리아를 배경으로 찍은 영화에는 대부분 자작나무숲이 등장한다. '닥터 지바고'는 특히 자작나무숲이 인상적이다. 광활하게 펼쳐진 설원(雪原)의 눈보라 속에 쭉쭉 뻗은 늘씬한 몸매와 하얀 피부를 자랑하던 자작나무숲은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이었다. 영화에서 주인공 지바고와 라라는 언제나 흰 눈과 자작나무를 배경으로 만남과 헤어짐을 이어갔다.최근 개봉한 영화 '영웅'에도 자작나무숲이 등장한다. 영화는 흰 눈이 쌓인 자작나무 숲에서 안중근과 동지들이 구국 투쟁을 맹세하며 손가락을 자르는 단지동맹 장면으로 시작된다. 이 장면에서 안중근은 이런 가사가 들어있는 노래를 부른다.'내 조국의 하늘 아래 살아갈 그 날을 위해/ 수많은 동지들이 타국의 태양 아래 싸우다/ 자작나무 숲으로 사라졌습니다/ 그들의 간절했던 염원이/ 하늘을 감동시킬 수 있도록/ 뜨거운 조국애와 간절함을 담아/ 저 안중근 이 한 손가락 조국을 위해 바치겠습니다.'북한의 시인 백석(1912~1996)이 1938년에 쓴 시 중에 '백화(白樺)'라는 시가 있다. 백화는 자작나무를 한자식으로 표기한 것이다.'산골 집은 대들보도 기둥도 문살도 자작나무다/ 밤이면 캥캥 여우가 우는 산도 자작나무다/ 그 맛있는 메밀국수 모밀국수를 삶는 장작도 자작나무다/ 그리고 감로같이 단샘이 솟는 박우물도 자작나무다/ 산 너머는 평안도 땅도 뵈인다는 이 산골은 온통 자작나무다' 글·사진=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영양 자작나무숲 5월 풍경. 〈영양군 제공〉몽골 자작나무숲. 멀리 산 아래 보이는 숲의 나무 대부분이 자작나무다. 짙게 보이는 나무는 소나무다.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여름궁전의 자작나무숲. 다른 나무와 어우러져 있는데, 지금도 이 멋진 숲을 보며 느낀 기분이 생생하다.자작나무 줄기의 껍질 모습.
[김봉규의 수류화개(水流花開)] 자작나무(1) 겨울 숲에서 마주한 순백의 지조
'자작나무처럼 나도 추운 데서 자랐다/ 자작나무처럼 나도 맑지만 창백한 모습이었다/ 자작나무처럼 나도 꽃은 제대로 피우지 못하면서/ 꿈의 키만 높게 키웠다// 내가 자라던 곳에는 어려서부터 바람이 차게 불고/ 나이 들어서도 눈보라 심했다/ 그러나 눈보라 북서풍 아니었다면/ 곧고 맑은 나무로 자라지 못했을 것이다/ 단단하면서도 유연한 몸짓을 지니지 못했을 것이다// 외롭고 깊은 곳에 살면서도/ 혼자 있을 때보다 숲이 되어 있을 때/ 더 아름다운 나무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도종환의 시 '자작나무'다. 한겨울의 자작나무숲을 보기 위해 영양 자작나무숲을 찾아갔다. 경북 영양군 수비면 죽파리 검마산 깊은 산속에 있다. 지난달 31일 아침, 대구에서 죽파리로 향했다. 최강 한파가 마무리되는 시기, 대구의 낮 온도가 영상인 날을 택했다. 처음 가보는 자작나무숲도 좋았지만, 그보다는 자작나무숲에 도달하기까지 계곡 옆길을 따라 혼자 깊은 산속을 10리 정도 걷는 시간이 더 좋았다. 깊은 산속의 자연을 온전히 누릴 수 있는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산 입구에서 계곡의 얼음 위로 걸어보기도 하며 천천히 1시간 이상을 걸어 올라갔다. 평일 오전 낮 12시쯤부터 걷기 시작했는데, 도착해 자작나무숲을 돌아볼 때까지 나 혼자였다.산속 계곡을 따라 낸 임도가 이어진다. 자갈과 흙으로 잘 만든 넓은 임도는 가파른 곳이 거의 없는, 걷기도 좋은 평탄한 길이다. 더불어 임도 옆으로 계곡 가까이에 따로 조성한 숲속 오솔길이 곳곳에 있는데, 이 길을 걸으면 더 호젓함을 누릴 수 있다.길은 양쪽에 높은 산줄기가 있어 햇빛이 들지 않는 구간이 훨씬 많았고, 계곡에는 얼음이 꽝꽝 얼어 있었다. 이날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씨였고, 추위는 많이 풀렸으나 산 계곡은 영하의 기온이었다. 무성하던 잎들이 모두 떨어진 활엽수 나목이 대부분이고, 곳곳에 멋진 적송들이 존재감을 드러내는 풍경이 펼쳐졌다. 그리고 들리는 건 내 발걸음 소리와 바람 소리, 새소리 등이 전부였다. 바람도 별로 없는 날씨였지만, 산 능선 위로는 바람이 지나가는지 멀리서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간혹 청설모 등이 오가는 소리도 들렸다. 그리고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는 소리가 두어 번 들렸다. 어릴 때 어른들이 들려준, 사람을 해치는 짐승이 지나가며 내는 소리가 아닌가 싶어 마음이 잠깐 움츠러들기도 했다. 너무 적막한 분위기 때문이었을 것이다.길 곳곳에는 아직 내린 눈이 녹지 않은 곳도, 빙판으로 변한 곳도 많았다. 식물이 피우는 꽃은 없지만, 대신 겨울이 만들어낸 다양한 얼음꽃을 계곡 옆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 나무나 큰 바위 아래에 보이는, 스며 나오는 땅속의 물과 영하의 날씨가 싸우며 만들어낸 얼음꽃들은 물론, 계곡 옆 곳곳에 흘러내리는 폭포들이 만들어낸 다양한 얼음 조각을 보는 즐거움도 각별했다. 고개를 들면 나목들이 늘어선 산 능선과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이 어우러진 풍경이 또한 마음을 충만하게 했다.그렇게 자연을 느끼며 걷다 보니 눈앞에 큰 계곡이 끝나고 세 개의 작은 계곡이 합쳐지는 산자락이 나타나면서, 거기에 자작나무숲이 멀리까지 펼쳐져 있는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한국에서는 보기 드문 자작나무숲을 거닐며 한겨울 자작나무숲 정취를 만끽했다. 오래 기억될 시간이었다. 심은 지 오래되지 않아 아직 줄기가 그리 굵지 않은 터라 약간의 아쉬움이 있었지만, 해가 갈수록 사람들의 더 많은 관심과 사랑을 차지할 것이 분명해 보였다. 글·사진=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 ☞[김봉규의 수류화개(水流花開)] 자작나무(2)에서 계속됩니다.맑은 겨울 하늘과 어우러진 영양 자작나무숲.지난달 31일 가 본 영양 자작나무숲. 1993년 검마산 자락 30여㏊에 심어 가꾼 자작나무숲으로 국내 최대 규모다. 영양군이 각종 편의시설을 조성 중인데, 아직 정식 개장하지 않았다.
[김봉규 기자의 '지구촌 산책' .35] 日 우지 뵤도인(平等院), 극락세계의 연못에 떠 있는 사찰…봉황이 날개 펼친 듯 화려
일본 교토(京都)부 남쪽에 있는 우지(宇治)시도 일본의 유명 관광지에 속한다. 우지는 특히 일본의 대표적 녹차 산지로 유명하다. 이곳에서 재배하는 녹차는 우지차로 불린다. 우지차의 맛은 매우 뛰어나서 일본 3대 녹차(시즈오카차·사야마차·우지차) 중에서도 일품이라고 한다. 심지어 구분 기준을 우지차와 그렇지 않은 차로 나누어, 본차(本茶)와 비차(非茶)라고까지 부르기도 한다. 이곳에 가면 다양한 녹차뿐만 아니라 녹차를 활용한 음식을 다채롭게 맛볼 수 있다.이 우지에 그 중심 법당 건물의 모습이 일본 화폐 10엔 동전에도 새겨져 있는 유명한 사찰 뵤도인(平等院)이 있다. 우지를 대표하는 관광명소이기도 한 이 사찰은 매우 독특하고 특별한 건축으로 많은 관광객의 발길을 끌어들이고 있다. 2011년 8월 교토에 머물며 관광하다 스포츠카 페라리를 타고 우지로 달려가 뵤도인을 방문한 적이 있다. 교토에 있는 자신의 집(전통 고택)에 머물며 관광을 하도록 해준, 친구의 지인인 일본인이 뵤도인은 한 번 가볼 만하다며 자신의 페라리를 직접 몰며 안내해 주었다. 스포츠카를 타고 속도를 즐기는 것이 취미 중 하나라는 그는 그날도 제한 속도를 가끔 무시하며 속도를 높이기도 했다.후지와라노 가문 별장을 사찰로 보수 아미타여래 사는 서방정토 극락 모습극락입구 연못 '구품연지' 위 봉황당 나무조각 맞춰 독자적 기법 제작 불상머리 위 닫집, 중앙 대형팔화경 장식 대대적 보수후 지붕에 황금빛 봉황상1천 여년간 화재 피해 단 한건도 없어◆극락세계를 담은 법당뵤도인 앞에는 강(우지가와)이 흐르고 있다. 이 사찰은 우지가와 강의 물길을 이용하여 사찰 중심 건물인 봉황당 주변에 연못을 조성해 놓고 있다. 그래서 극락세계의 연못을 상징하는 구품연지(九品蓮池)에 법당인 봉황당이 떠 있는 듯한 모습 그리고 봉황이 날개를 펼친 듯한 멋진 봉황당의 모습이 그 수면에 아름답게 비치는 풍경을 만날 수 있다. 뵤도인의 가장 큰 특징이자 매력이다.그리고 뵤도인은 후지와라노(藤原) 가문의 별장으로 지어졌던 것을 개축해 사찰로 만든 것인데, 사찰 경내 곳곳에 후지와라노 가문을 상징하는 등나무가 관람객들을 반기는 것도 특징이다. 성씨에 들어있는 한자 '등(藤)'이 등나무를 뜻한다.뵤도인의 핵심 전각인 봉황당은 봉황이 날개를 편 모습의 목조건물로, 법당 안에는 아미타여래 불상이 모셔져 있다. 처음 지어졌을 때 화려하고 멋진 모습 덕분에 불교를 믿고 서방정토 극락에 간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소개되던 유명 사찰이었다.일본 국보인 봉황당은 현세에 아미타여래가 사는 세계인 서방 극락정토를 나타내기 위해 지었다. 헤이안 시대 후기인 1053년 당시 최고 권력자였던 후지와라노 요리미치가 세운 법당인데, 연못 중앙에 있는 섬에 불당을 세워 마치 극락의 연못에 떠 있는 궁전과 같은 모습을 연출했다. 아름다운 불당이 수면에 비치는 모습도 방향에 따라, 날씨에 따라 다채로운 풍경을 선사한다. 연꽃을 키우는 연못은 불교에서는 연화세계, 즉 극락을 상징한다. 둥근 연못인 구품연지는 극락 입구의 연못을 뜻한다. 이 구품연지 가운데 섬을 만들어 법당을 세우고, 법당에는 서방 극락에 계신다는 아미타여래상을 모신 것이다.봉황당은 중심 건물인 정면 3칸의 중당(中堂) 그리고 그 양쪽에 연결되어 있는 회랑과 누각으로 구성돼 있다. 중당의 지붕 양 끝에는 마주 보며 서 있는 봉황상 한 쌍이 설치돼 있다. 이 봉황당을 정면에서 바라보면 날개를 펼친 새처럼 보인다.이 봉황당에는 아미타여래 좌상이 모셔져 있다. 일본의 대표적 불상 작가 조초가 1053년에 제작한 불상으로, 여러 개의 나무 조각을 하나로 짜 맞추는 일본의 독자적 기법으로 만들었다. 대좌와 광배를 함께 갖춘 불상인데, 가장 이상적인 불상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는 평을 듣는 불상이다. 불상의 높이는 2.77m. 아미타여래 불상은 편백 나무를 깎아서 몸통과 팔을 만들어 붙여 완성했고, 바탕에 옻칠하고 다시 금박을 입혔다.불상 머리 위에 있는 닫집도 화려하고 멋지다. 닫집 중앙의 대형 팔화경(八花鏡·열 개 꽃잎 모양으로 장식한 거울)은 금니로 칠해져 있는데, 법당 내부로 들어오는 빛을 반사한다고 한다. 불상과 닫집 모두 국보다.◆운중공양보살상과 봉황상극락세계를 연출한 모습은 봉황당 내에서도 볼 수 있는데, 불상 주변 벽에는 불상을 둘러싸듯이 구름 위를 날아 다니는 52개의 작은 보살상인 목조 운중공양보살상(雲中供養菩薩像)이 대표적이다. 봉황당 중당 내부의 중인방(中引榜·벽의 중간 높이에 가로지르는 목재) 위 좁은 벽에 나란히 걸려 있는 52구의 보살상으로, 불상과 함께 1053년에 제작됐다. 아미타여래를 보호하듯 벽에 걸려 있다. 각 보살상에는 남북 1호부터 26호까지 번호가 매겨져 있다. 모두 원형의 두광이 달려 있다. 구름을 타고 하늘을 날고 있는 모습인 운중공양보살상 중 5구는 승려의 모습을, 그 외는 보살 모습을 하고 있다. 악기(발·생황·박판·공후 등)를 연주하거나 춤을 추거나 불구를 들고 있거나 합장하는 등 각양각색의 모습을 하고 있다.또한 봉황당 안에는 9가지 방법으로 아미타여래를 맞이하는 그림인 구품내영도(九品來迎圖)가 그려져 있다. 생전의 행실에 따라 임종 때 아미타여래가 마중 나오는 모습이 상품상생부터 하품하생까지 9단계로 나뉘어 문과 벽에 그려져 있다.봉황당 중당 용마루 남북 쪽 양단에 설치된 봉황상은 높이가 약 1m로 구리로 만들었다. 봉황이 고개를 들고 날개를 편 채 서 있는 모습이다. 오른쪽에 동쪽을 향하고 있는 봉황을 북방 보살상(높이 95㎝), 왼쪽에 설치된 봉황을 남방 보살상(높이 98.8㎝)이라고 한다. 대기 오염에 의한 피해를 방지하기 위해 두 봉황상을 분리해 박물관인 봉상관에 보관하고 있다. 복제품으로 다시 제작한 봉황상이 그 자리에 설치되어 있다. 봉황상 중 남방 보살상은 2004년부터 발행된 1만엔 지폐에 그려져 있다.봉황당은 본존 아미타여래를 중심으로 하는 극락정토를 현세에 구현하기 위해 지은 것이기 때문에 아미타 불당이라고 불리었는데, 아미타 불당의 외관이 꼬리가 긴 새가 날개를 펼친 듯한 모습이고, 지붕 위에 봉황 장식이 있어 17세기 이후 봉황당으로 불리게 되었다.이 봉황당은 2012~2014년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거쳐 새로 단장됐다. 2011년 방문 당시에는 지붕 위의 봉황상도 푸른 청동상이었다. 지금은 보수공사 후 황금빛 봉황상으로 바뀌었고, 봉황당 건물도 칠을 다시 해서 새로 지은 듯한 모습이다.이 봉황당은 1천 년의 유구한 역사 속에서도 단 한 건의 화재도 발생하지 않았다고 한다.봉황당 근처에는 근래 새로 건축한 박물관인 봉상관(鳳翔館)이 있다. 주변 환경을 고려하고 첨단 설비와 자재를 활용해 만든, 멋진 공간이다. 노후화한 옛 보물관(1965년 준공)을 대신한 박물관으로, 첨단 설비 등을 도입해 소장 환경을 개선한 3세대 박물관이다. 2001년 3월에 개관했다. 봉황당을 중심으로 사적 명승지로 지정된 정원 경관과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건물 대부분이 지하 구조로 되어 있고, 자연광을 의도적으로 끌어들이는 등 조명에 대한 새로운 시도가 돋보이는 건축물이다. 또한 일보 최대 규모의 유리벽 전시 선반을 도입, 전시물에 대한 공간적 특성도 잘 살리고 있다.전시실과 수장고, 뮤지엄숍 등을 갖추고 있다. 수장품은 국보(범종 1구·운중공양보살상 26구·봉황 1쌍), 중요문화재(십일면관음보살상 등), 우지시 지정 문화재(제석천상·지장보살상 등), 최신 디지털 기술을 이용한 컴퓨터 그래픽 영상(복원 영상) 등.◆권력자의 별장을 개축한 사찰뵤도인은 1052년 관백(關白·왕을 대신하여 권력을 행사하는 관직)이던 후지와라노 요리미치(藤原賴通)가 자신의 아버지 미치나가(藤原道長)의 별장을 절로 고쳐서 지은 것으로, 다음 해 봉황당을 마련하고 아미타여래를 안치했다. 뵤도인은 후지와라노 가문의 후지와라노 미치나가(藤原道長·966~1028)가 당시 좌대신이 갖고 있던 우지의 별장을 매입해 시회(詩會)와 음악회를 즐겨 열었던 곳을 활용했다. 그의 아들 요리미치가 이곳에 극락세계를 구현한 사찰을 세운 것이다. 요리미치가 아버지의 별장을 물려받아 극락세계를 구현한 평등원을 건설한 것은 말법사상의 영향이 크다. 이 시기에는 불교가 쇠퇴하는 말법의 세상이 시작되는 때로 인식, 극락에 가게 해달라는 소망을 담아 건립했던 것이다.아미타여래는 죽은 사람의 영혼을 저세상으로 안내하는 역할을 한다. 이승에서 저승을 이어주는 매개물이 새라는 점에서 건물 모습을 봉황 모습으로 지은 것 역시 비슷한 상상력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봉황은 상상의 새이고,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새를 섬겼다. 새는 사람이 갖지 못한 날개를 지니고 하늘 높이 날아다니기에 새는 하늘의 뜻을 인간에게 전하고, 죽은 이의 영혼을 저세상으로 안내하는 상서로운 짐승으로 여겼다. 글·사진=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지붕 위에 한 쌍의 봉황상이 서 있는 뵤도인 봉황당. 오른쪽에 있는 회랑과 누각 건물이 왼쪽에도 대칭적으로 있다. 오른쪽 위 작은 사진은 봉황당의 옆모습.봉황당의 52구 운중공양보살상 중 하나.
[옛사람들의 행복콘서트] 섭생의 방법 절식…건강한 삶 위해 음식 절제하는 힘 길러야…"입의 유혹에 넘어가지 말라"
심신의 건강을 지키며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다양한 유혹에 빠지지 않고 잘 이겨내는 힘이 필요하다. 음식의 유혹은 떨치기 쉽지 않은 그 유혹 중 하나다. 온갖 먹거리가 풍부하고 유혹의 손길이 넘쳐나는 요즘은 특히 그 유혹을 이기는 힘이 절실한 것 같다. 건강에는 좋지 않은 '단짠' 음식이나 자극적이고 화려한 음식을 부추기는 방송 등이 넘쳐나는 환경은 음식의 유혹 자제를 더욱더 어렵게 하고 있다.2015년 초 글로벌 정보분석기업 닐슨이 발간한 '건강과 웰빙에 관한 글로벌 소비자 인식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인 응답자는 그 절반이 넘는 55%가, 전 세계 소비자는 50%가 다이어트 중이라고 밝혔다. 체중조절을 위해 전 세계 소비자들의 75%가 식단 관리를 하고, 72%가 운동을 한다고 응답했다. 반면, 한국인들의 주요 다이어트 방법은 '운동'이 71%, '식단 관리'가 57%로 나타났다.무절제한 음식 탐닉…비만 증가건강·행복 가로막아 '불행한 삶'음식을 많이 먹는 데 길들여지면습관 깊어져 굶주림도 더 심해져이익 성호사설 '먹는 습관' 중요시최근에는 코로나19로 배달음식 섭취가 늘고 신체 활동이 줄어들면서 비만이 더욱 증가했다. 지난해 11월 교육부가 공개한 '2021년 학생 건강검사 표본통계'에 따르면, 2021년 전체 초·중·고교 학생 가운데 비만 학생의 비율은 19%로, 2019년(15.1%)에 비해 3.9% 늘었다. 초등학교가 5%로 가장 많이 늘었고, 중학교 4.2%, 고등학교 1.5% 순이었다.맛있는 음식을 즐기는 것은 삶의 즐거움 중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지만, 순간의 쾌락을 위한 무절제한 음식 탐닉은 건강과 진정한 행복을 가로막는다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한다. 건강과 행복한 삶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음식을 절제하는 힘을 길러야 하는 것이다. 옛날의 많은 선비도 건강을 위한 섭생의 방법으로 절식을 권유했다.조선 순조 때의 시인 이양연(李亮淵)은 '절식하기 위한 경계의 말을 적은 팻말(節食牌銘)'이라는 시에서 '적당히 먹으면 편안하고(適喫則安)/ 지나치게 먹으면 편치 않네(過喫則否)/ 의젓한 너 천군이여(儼爾天君)/ 입의 유혹에 넘어가지 말라(無爲口誘)'고 했다. 천군은 몸의 주재자인 마음을 비유한 말이다. 간단하면서도 명쾌한 내용이다. 중국 북송의 시인 소동파가 남긴 글 '음식을 줄여 먹자(節飮食說)'도 음식의 유혹을 견디며 절식하겠다는 다짐을 적고 있다.'나는 오늘부터 하루 동안 먹고 마시는 양을 술 한 잔, 고기 한 조각으로 그칠 것이다. 귀한 손님이 있어 상을 더 차려야 한다 해도 그보다 세 배 이상을 넘지 않을 것이다. 그보다 덜할 수는 있어도 더할 수는 없다. 나를 초청한 사람이 있을 때는 미리 이 다짐을 알려준다. 주인이 따르지 않고 더 권하더라도 그 이상을 먹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첫째 분수에 맞으니 복이 길러질 것이요, 둘째 위가 넉넉하니 기운이 길러질 것이요, 셋째는 비용이 절약되니 재산이 늘어날 것이다. 원풍6년 8월27일에 쓰다.'그는 '네 가지 조심할 일(書四戒)'이라는 잠언에서도 음식의 유혹에 빠지지 않을 것을 경계하고 있다.'수레나 가마를 타는 것은 다리가 약해질 조짐이고/ 골방이나 다락방은 감기 걸리기에 십상이다/ 어여쁜 여인은 건강을 해치는 도끼이고/ 맛난 음식은 창자를 썩게 하는 독약이다.'다음 글도 보자."나는 천성이 책을 좋아해 날마다 끙끙대며 읽느라고 베 한 올, 쌀 한 톨 내 힘으로 장만하지 않는다. '천지간에 좀벌레 한 마리'란 말이 어찌 나 같은 존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겠는가. 다행히 선대가 남기신 전답이 있어서 몇 섬 몇 말을 거둔다. 거기서 나오는 식량을 절약해 많이 먹지 않는 것으로 첫째가는 경륜(經綸)이자 양책(良策)으로 삼는다.무릇 한 그릇에서 한 홉의 쌀을 덜어낸다. 남들은 아무 소용이 없는 일이라고 할지 몰라도, 하루에 두 그릇 먹으면 두 홉이고, 한 집이 열 식구라면 두 되가 될 것이다. 1만 가구가 사는 군(郡)이라면 2천 말이나 되는 많은 식량이다. 더구나 한 식구의 소비가 한 홉에 그치지 않는다. 또 한 사람이 1년 동안 먹을 것이 쌓이면 매우 많다. 쓸데없는 소비는 한 푼 한 홉도 아깝다.우리나라 사람들이 많이 먹으려고 드는 습성은 천하에 제일간다. 최근에 표류하여 유구국(琉球國)에 간 사람이 있다. 그 나라 백성들이 그에게 '너희 풍속이 항상 큰 사발과 쇠 숟갈로 밥을 떠서 실컷 먹으니 어떻게 가난하지 않겠는가'라며 비웃었다고 한다. 예전에 우리나라에 표류하여 온 자가 있어 우리 풍속을 잘 알고 하는 말이다. 내가 일찍이 바닷가에서 한 사람이 세 사람이 나눠 먹어도 굶주리지 않을 양을 먹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나라가 어떻게 가난해지지 않겠는가.어려서 배불리 먹는 습관이 들면 위장이 점점 커져서 다 채워지지 않으면 굶주림을 느끼게 된다. 습관이 점점 깊어져 굶주림을 점점 더 심하게 느끼게 되면 굶어 죽는 사람도 생길 것이다. 많이 먹는 습관으로 위장이 커지는 사람이 있다면, 습관으로 위장이 작아지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곡식을 끊고 먹지 않는 사람도 있다. 산과 들의 짐승들이 얼음이 얼고 눈이 쌓여도 죽지 않고 견디는 것은 습관의 결과다. 비록 늘 굶을 수는 없다 하더라도 너무 과하게 먹는 음식을 덜어내는 것이야 불가능하겠는가."성호(星湖) 이익(1681~1763)의 '성호사설(星湖僿說)'에 나오는 내용이다. 음식을 적게 먹는 습관을 들이자는 이야기다. 한쪽에서는 굶어 죽어가는 사람이 넘치는데도, 다른 한쪽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과식으로 오히려 건강을 해치고 살을 빼기 위해 전쟁을 하며, 지구촌을 병들게 하는 현실이다.하나의 글을 더 보자.'나는 어렸을 때 곤궁한 집안에서 자라고 또 성품이 소탈하여, 따뜻하게 입고 배불리 먹으려는 생각이 없었다. 그리하여 일찍이 옷을 두껍게 입지 않고 또한 음식을 잘 차려서 먹지 않았다. 추워도 버선을 신지 않고 맨발로 눈을 밟으며 겨울을 지냈고, 아침저녁 밥을 다만 채소와 거친 밥을 먹으면서 장성했다. 그 덕분에 지금까지 몸에 질병이 없고 오장육부가 깨끗하니, 네가 아이를 기를 적에도 이 노부(老夫)가 한 것처럼 한다면 병이 없고 장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덕을 이루고 훌륭한 일을 하는 기본 또한 여기에 있을 것이다.' 이 글은 당시로는 보기 드물게 장수한, 존경받는 선비인 여헌(旅軒) 장현광(1554∼1637)의 이야기다. 그가 태어난 지 몇 개월 된 어느 집 아이를 보며 그 어머니에게 한 말을 적어놓은 것이다.많은 현대인이 지나친 건강 염려, 과잉 영양섭취 등으로 오히려 건강을 해치고 있는 현실이다. 행복한 삶을 위해 음식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 돌아보게 하는 글들이다. 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단원 김홍도 그림 '새참'.
[흥미로운 명필이야기 .27] 명나라 문징명…청빈하고 지조 있는 지식인의 삶…짜임새 있고 강건한 필치
문징명(1470~1559)은 지금의 장쑤성 쑤저우(蘇州)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벽(壁)이고 자(字)가 징명(徵明)이었으나, 후에 이름을 징명으로 자를 정중(征仲)으로 바꿨다. 명대 문인화풍을 대표하는 오파(吳派·쑤저우의 옛 지명이 '吳')의 창시자 심주(沈周)의 가장 출중한 제자다. 화가이자 서예가이며 문학가.서예는 이응정(李應禎)에게 배웠고, 그림은 심주에게 배웠다. 서단에서는 축윤명, 왕총, 진순과 함께 오문사재자(吳門四才子)로 부르고, 화단에서는 소주지역 출신인 심주, 당인(唐寅), 구영(仇英)과 더불어 오문사가(吳門四家)로 통한다.문징명은 서예의 대가 이응정에게 글씨를 배우면서 스스로 왕희지, 구양순, 조맹부, 소식, 황정견, 미불 등과 같은 대가들의 서체를 습득하며 독창적인 서풍을 창조하려고 노력했다. 서예는 그가 그림을 그리는 데 필요한 용필법의 기초가 되고, 문인화가로서 갖추어야 할 소양을 지닐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는 해서, 행서, 예서, 초서, 전서 등 모든 서체에 능했다. 특히 소해(小楷·글씨 크기가 작은 해서체)에 뛰어났다. 문징명의 소해는 순수하고 정갈하며, 굳센 가로획과 세로획이 질박하면서 근엄하다.그의 글씨는 짜임새 있으면서 필치가 강건할 뿐만 아니라, 고매한 성품과 함께 전형적인 문인의 풍취인 서권기(書卷氣)가 있는 것이 특징이다. 문징명은 하루에도 수차례 천자문을 쓰면서 각고의 노력으로 서예가로 대성하게 되었다. 주화갱(朱和羹)은 그의 글씨에 대해 '명나라 해서 중에서 문징명이 제일'이라고 평했다.관직생활을 한 부친 문림(文林)을 따라 유년시절부터 전국 여러 곳에서 생활하며 국사에 관심을 갖게 되지만, 문징명 자신은 과거시험에 10차례 낙방하여 54세가 되어서야 주변의 추천으로 관직에 오를 수 있었다. 늦은 나이에 관직에 진출한 문징명은 베이징에서 한림원대조로서 무종실록 편찬사업 등에 참여하며 관직생활을 했으나, 58세에 관직생활을 청산하고 고향 쑤저우로 귀향하여 자신의 여생을 문장과 서화에 바쳤다.고상한 인품의 그는 권세를 두려워하지 않고 재물을 탐하지 않았다. 청빈하고 지조 있는 지식인으로 살았던 그는 서화를 팔아 생활하면서도 왕족과 환관 외국인에게는 팔지 않았다고 한다.명대 중기에 경제적 발달로 각 지역에서 다양한 화파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 중에서도 쑤저우를 중심으로 활동한 오파는 송·원 이래의 문인화 전통을 계승하며 문인화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그는 서예가로서 많은 작품을 남겼다. 90세로 별세하기 얼마 전까지도 파리 머리만 한 소해를 쓸 수 있었다고 한다. 믿기 어려울 정도의 일이다. 82세에 쓴 소해 '취옹정기(醉翁亭記)'는 그의 대표작 중 하나다. 1980년 저장성 난계(蘭溪)현에서 발견된 비석으로, 그가 1552년에 쓴 당룡묘비(唐龍墓碑)는 장편의 글을 해서로 썼는데, 글자가 사방 1㎝ 정도다. 83세의 고령으로 쓴 글씨여서 사람을 놀라게 한다.행초서 작품으로는 89세에 쓴 소식의 '적벽부'가 유명하다. 문징명이 유려한 행초서체로 쓴 작품이다. 1558년 문징명이 89세 되던 해 봄에 쓴 것임을 알 수 있다. 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문징명 글씨 '적벽부'(부분).
[동추(桐楸) 금요단상] 올 3월 대구시향 지휘봉 내려놓는 줄리안 코바체프…대구를 사랑한 지휘자, 제2의 고향 '굿바이~'
오랜만에 대구시립교향악단(대구시향) 연주회를 찾았다. 지난달 6일 대구콘서트하우스 그랜드홀에서 열린 대구시향 2023 새해음악회다. 상임지휘자 줄리안 코바체프가 지휘하고, 소프라노 임선혜가 협연자로 무대에 섰다.코바체프 지휘 연주회는 언제나 그랬듯이 이날도 객석은 모두 관객으로 가득 찼다. 이날은 합창석까지 관객으로 채워져 분위기가 더욱더 좋았다. 로시니의 '윌리엄 텔' 서곡을 시작으로 마스카니의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간주곡, 푸치니의 오페라 '라 보엠' 중 '나 홀로 길을 걸을 때'(임선혜 협연), 슈트라우스 2세의 '피치카토 폴카' '천둥과 번개 폴카' 등이 관객의 큰 박수 속에 이어졌다.그런데 경쾌하고 신나는 곡들을 감상하면서도 마음이 마냥 즐겁지는 않았다. 1년 정도 만에 본 코바체프의 모습 때문이었다. 살이 많이 빠진 데다, 웃는 모습이지만 예전보다는 활기가 많이 떨어진 것 같았다. 지휘를 마친 후 잠시 무대를 빠져나갈 때는 어깨가 구부러진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는데, 훌쩍 늙어버린 듯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싶었다.연주회가 끝나고 나오는 길에 대구시향 관계자를 만나 잠시 이야기를 들었다. 몸이 아팠던 일은 없고, 얼마 전 오는 3월 말로 끝나는 대구시향 지휘 계약 기간 만료를 끝으로 대구시향을 떠나야 하는 상황을 통보받고, 잠도 제대로 못 이루는 것 같았다고 전했다. 그는 대구시향을 오래도록 지휘하고 싶고, 대구에 계속 살면서 생을 마쳐도 좋다는 생각이라는 말을 종종 했었다. 그렇지만 대구시향 지휘자 생활을 언젠가 그만두어야 함을 생각했을 텐데, 그런 통보를 받았다고 일흔을 앞둔 나이(68세)인데도 마음을 추스르기가 그렇게 힘들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보기 드물게 마음이 여린 사람인 것 같다.2014년 4월 취임한 코바체프는 부드러운 지도력으로 처음부터 대구시향 단원들과 호흡을 잘 맞춰 나갔다. 호감을 주는 언행으로 관객의 마음도 빠르게 얻어갔다. 대구시민회관을 개축해 콘서트 전용홀로 2013년 11월 재개관한 대구콘서트하우스의 연주홀은 음향 상태 등이 좋아 세계적 연주자나 지휘자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이러한 것이 어우러져 코바체프가 지휘하는 대구시향 연주회는 객석 매진 기록을 이어갔다. 다른 도시 시향들의 부러움을 샀다.그는 대구 생활에 대해서도 좋은 인상을 수시로 표현하곤 했다. 매운 대구 음식도 입맛에 맞고, 시민이 인정이 많고 친절하게 대해줘서 대구가 고향 같다는 말도 종종 했다. 그런 코바체프에게 이 같은 인연이 짧게 끝날 뻔한 일이 일어났다. 2015년 5월29일에 열린 대구시향 정기연주회 때 앙코르곡을 지휘하다 쓰러져 버린 것이다. 직접 한국말로 '사랑의 인사'(엘가 곡)를 들려주겠다고 말한 뒤 지휘를 시작한 그는 몇 분 후 고목 나무가 쓰러지듯이 옆으로 쓰러졌다. 천만다행으로 관객 중에 의사와 소방관 등이 있어 이들 덕분에 위기를 넘길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바로 경북대병원으로 이송돼 심장 수술을 성공리에 마치고 건강을 되찾았다. 의사들은 기적이라고 했다. 그는 이와 관련, 당시 대구시향을 담당하던 나에게 '대구는 천사들이 나에게 새로운 생명을 준 천국'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그는 한국 귀화까지 생각하고 절차를 알아보다, 한국어 시험 통과 문제 때문에 포기하기도 했다. 대구시향과 대구에 대한 이 같은 각별한 사랑과 인연에 힘입어 그는 수차례 연임하면서 만 9년 동안 지휘봉을 잡을 수 있었다. 그가 지휘할 정기연주회는 1회 남아있는 모양이다. 1964년에 출범한 대구시향은 그동안 10명의 지휘자가 재임했는데, 코바체프는 초대 이기홍 지휘자(15년 재임)를 제외하고는 최장기간 재임한 기록을 남기게 되었다. 대구 클래식 팬들에게 많은 추억과 성과, 좋은 인상을 남긴 그에게 복된 앞날이 펼쳐지길 바란다. 그리고 대구시향도 그가 쏟은 정성과 사랑을 토대로 한 단계 더 발전해 대구시민의 박수를 더 많이 받는 교향악단으로 거듭나길 기대한다. 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줄리안 코바체프 대구시향 상임지휘자가 지난달 6일 대구콘서트하우스 그랜드홀에서 그의 마지막 새해 음악회인 대구시향 2023 새해음악회 지휘를 마친 후 관객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대구시향 제공)
제임스 호너 영화음악 걸작선 2LP 출시
두 번의 오스카상과 두 번의 골든글로브, 여섯 번의 그래미를 수상한 영화음악 거장 제임스 호너(1953 ~ 2015)의 헐리우드 영화음악 걸작선 'James Horner - Hollywood Story'가 2장의 LP<사진>로 출시되었다. 제임스 호너의 음악을 집대성한 음반이다. 제임스 호너의 작품은 전체 구조부터 디테일한 악기 구성까지 균형을 갖추고 있어 스크린 속에서 빛을 발한다. 특히 우아하면서도 감각적인 그의 멜로디는 영화를 본 사람이든, 보지 않은 사람이든 좋아하게 만든다. 섬세하고 깊은 오케스트라 음악에 능하며, 관현악과 신디사이저를 웅장하게 활용하는 액션 영화의 음악 뿐 아니라, 아일랜드 전통의 서정적인 선율을 살린 음악에도 조예가 깊다. 오리지널 스코어 뿐만 아니라 주제가로 사용되는 가창곡도 작곡한 호너는 음악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인정받은 음악인이다. 그는 2015년 6월 22일, 본인이 몰던 경비행기가 추락하는 사고로 사망했다. '타이타닉(Titanic)'(1998), '아바타(Avatar)'(2009), '스타트렉(Star Trek)'(1982), '가을의 전설(Legends Of The Fall)'(1995) 등 그의 걸작 16곡이 담긴 투명 노랑컬러 1천 장 2LP 한정판이다. 김봉규 기자 bgkim@yeongnam.com
[김봉규 기자의 '지구촌 산책' .35] 中 베이징 자금성, 980채 8707칸 방…세계 최대 규모 궁궐…'수도 천도' 황권의 지고무상·독존 구현
난징 황궁 본떠 베이징에 자금성 건립남방서 온 장인 등 인부 100만명 동원완공 6개월 만에 벼락으로 화재 발생3개 대전 포함 상당수 전각 불타기도명·청 왕조 황제 24명 500여년간 기거중심건물 태화전서 즉위·출정식 거행중국의 수도 베이징을 상징하는 건축물로, 베이징을 찾는 관광객의 필수 방문지인 자금성. 명나라 3대 황제 영락제 시절인 1421년부터 1924년 청나라 마지막 황제 선통제가 쫓겨날 때까지 500여 년 동안 명·청 왕조의 24명 황제가 살면서 중국 대륙을 통치하던 궁성이다. 현재 중국의 권부가 자리하고 있는 곳도 예전 자금성의 일부인 중난하이(中南海)다. 198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됐다.'자금성(紫禁城)'은 '황제의 허락 없이는 아무도 범접할 수 없는 공간'이란 의미를 담고 있다. 영어로는 'Forbidden City'로 번역된다. 세계 건축 사상 최대 규모로 평가받는 자금성은 동서 760m·남북 960m의 직사각형 대지(72만㎡)에 건물 980채(8천707칸의 방)가 대칭적으로 들어서 있다. 남쪽 오문(午門)에서 북쪽 신무문(神武門)에 이르는 남북 중심선을 축으로, 동서 양쪽에 대칭되게 건물이 배치되어 있다. 주변에는 높이 11m의 성벽과 너비 52m·깊이 6m의 해자(물길)로 둘러싸여 있다.두 번을 방문해 남쪽 오문으로 들어가 북쪽으로 주요 전각들을 지나가며 주마간산식으로 둘러보았는데, 규모에 놀랐으나 별 감동은 없었다. 별 감동 없이. 이 방대한 건축물인 자금성은 언제, 어떻게 건축되었을까.◆명나라 영락제 때 지어 천도자신의 조카이자 명나라 2대 황제인 건문제를 즉위 4년 만에 폐위시키는 '정난(靖難)의 변'을 일으키고 황제에 오른 영락제는 당시의 수도인 난징을 꺼렸다. 그래서 자신의 세력 기반이 있는 지금의 베이징으로 수도를 옮길 마음이었다.영락제는 반대를 무릅쓰고 1406년(영락 4년) 베이징 천도를 결정하고, 이듬해부터 난징의 황궁을 모방해 베이징 궁궐 건축을 시작하도록 했다. 이후 오랫동안 건축자재 확보 등 준비를 한 후 3년6개월의 본격적인 건축 공사를 거쳐 1420년 말에 완공했다. 완공 전인 1409년 황제의 임시거처가 마련되자 영락제는 이때부터 황궁이 있는 난징보다는 이곳에서 머물렀다고 한다. 영락제는 1421년 정월에 낙성식을 거행했다. 건축에 사용될 목재는 멀리 쓰촨성, 윈난성에서 녹나무 등을 벌목해 가져왔다. 인부 1천여 명을 산속에 투입하면 작업을 끝내고 살아 돌아온 이들은 500명 정도에 불과했다고 한다. 벌목작업만 하는 데 10년이 걸렸다.대리석은 허난성의 쑹산 등지나 베이징 근방 지역에서 채취해 공급했다. 대리석을 채취하는데 인부 10만명, 병사 6천명이 투입됐다. 기단부와 조각에 사용될 흰 대리석(漢白玉石)은 자금성에서 50㎞ 떨어진 채석장에서 운반했는데, 그중 가장 무거운 돌은 200t에 육박했다. 이런 돌은 마차로 운반하는 게 불가능했다. 그래서 인부들이 석재를 이동시킬 도로 500m마다 우물을 파고, 겨울에 우물의 물을 퍼내 도로를 빙판으로 만들어 운반했다. 노새 1천마리가 대리석을 끌고 베이징까지 한 달 정도 걸려 옮겼다고 한다. 이렇게 자금성을 건축하기 위해 남방에서 온 장인 10만명 등 100만명이 동원됐다. 그리고 쑤저우 등지에서 생산한 벽돌 1억개, 각종 도자기 기와 2억개 등이 소요됐다.1420년 12월 완성된 자금성에서 1421년 정월 성대한 낙성식이 치러졌다. 영락제는 황실 가족과 수많은 환관, 궁녀들을 거느리고 새로 지은 궁궐에 들어갔다. 그런데 완공 후 불과 반년도 지나지 않은, 같은 해 5월에 벼락이 쳐서 자금성의 중심 건물인 3개의 대전(大殿)을 포함한 상당수 전각이 불타버렸다. 가뜩이나 천도에 말이 많은 상황에서 힘들여 지은 궁전이 1년도 넘기지 못하고 벼락을 맞자 민심이 흉흉해지고, 급기야 다시 난징으로 환도하자는 주장까지 제기되었다. 영락제는 환도론을 주장한 신하 한 사람을 죽이고서야 겨우 여론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이후 영락제가 몽골을 정벌하러 나갔다가 원정지에서 객사해 북경에 돌아왔을 때도 그의 관은 잿더미가 된 자금성에 안치되었다가 능묘에 매장되었다. 불탄 자금성은 19년 후인 1440년(정통 5년)에 중건이 마무리되었다.◆황제 권위 구현한 궁궐자금성은 황제 권한은 지고무상(至高无上)하다는 봉건사상을 구현하고 있다. 그래서 궁전의 높이, 위치, 색상, 문에 박는 못의 수량 등은 모두 엄격한 규정과 의미를 담고 있다. 중국의 황궁 건축은 예전부터 확립된 원칙이 있었다. 황제가 공식적인 업무를 보는 곳은 궁전 건축의 전면에, 그리고 생활과 오락을 즐기는 공간은 뒷부분에 배치한다는 '전조후침(前朝後寢)'의 원칙이 기본이다. 그리고 좌측에 조상의 신위를 모시는 종묘(宗廟)가 있고, 우측에 토지신과 곡신(穀神)을 모시는 사직단(社稷壇)을 둔다는 '좌조우사(左朝右社)'의 원칙, 주요 핵심 건축물을 남북으로 일직선을 긋고 그 선상에 차례대로 배치하고 동서로 대칭을 맞추어 건물을 짓는 '중축대칭(中軸對稱)'의 원칙을 지키고 있다. 그래서 자금성의 전삼전을 비롯해 후삼전, 중요한 궁문과 광장 등은 모두 중축선 위에 배치하고 있다. 궁전 내부의 부속 건물들은 대칭으로 양측에 배치되어 있다. 이러한 배치는 고대 사회 황권의 지고무상과 독존의 의미를 체현하는 것이다.자금성에 들어서기 위해서는 남쪽의 정양문(正陽門), 대명문(大明門), 승천문(承天門), 단문(端門), 오문(午門), 황극문(皇極門) 등 성문 여섯 곳을 거쳐야 한다. 승천문과 황극문은 청대에 천안문(天安門)과 태화문(太和門)으로 각각 개칭되었다.오문부터 실질적인 자금성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태화문에 들어서면 일직선으로 삼대전인 전삼전(前三殿)과 후삼전(後三殿)이 자리 잡고 있다. 전삼전은 태화전(太和殿), 중화전(中和殿), 보화전(保和殿)이다. 특히 태화전은 즉위식이나 출정식 등 국가적인 의식이나 행사를 치렀던 곳으로, 이 황궁의 중심을 이루는 건축물이다. 자금성 최대의 궁전인 태화전은 동서 길이가 11칸(64m), 남북 길이는 5칸(37m), 높이는 28m이다. 대리석 기초까지 합하면 높이가 35m나 된다. 후삼전은 건청궁(乾淸宮), 교태전(交泰殿), 곤녕궁(坤寧宮)을 말한다. 황제는 이곳에서 정무를 보거나 황후·궁녀들과 일상생활을 했다. 후삼전의 뒤쪽은 정원인 어화원(御花園)으로 통하고, 그 뒤에는 자금성의 북문이 있다.건천궁은 황제가 일상적인 정무를 처리하는 궁전이다. 이곳 황제 어좌 위에 '정대광명(正大光明)' 편액이 걸려 있는데, 이 액자 뒤에 황태자의 이름을 써서 숨겨 두었다가 황제가 죽은 후에 개봉, 밀지(密旨)와 맞추는 태자밀건법(太子密建法)을 옹정제부터 실시했다.곤녕궁에는 황제가 신혼을 치르던 방과 침대가 있는데, 침대 커튼에는 황제가 자식 복이 많아 후계자들이 태어나기를 기원하는 동자 그림이 수놓아져 있다.곤녕궁 뒤에 있는 황실 정원인 어화원은 면적(80m×140m)은 작지만, 수목과 정자, 연못 등의 배치가 정교롭고 기이하다. 괴석들을 쌓아 만든 10m 높이의 퇴수산(堆秀山)과 그 위에 지은 어경정(御景亭)이 가장 눈에 들어온다. 어경정은 제후 비빈들이 중추절이나 칠석 등 명절에 올라 풍경을 감상하던 곳이다. 이와 더불어 만춘정(萬春亭), 부벽정(浮碧亭), 천추전(千秋亭) 등 정자와 누각, 소나무(백송)와 측백나무 등이 어우러져 있다.◆건축 책임자는 괴상난징의 황궁을 본떠 만든 자금성 건축의 책임자는 도목수 괴상(1399~1477)이다. 장쑤(江蘇)성 출신인 괴상은 황궁 건설 전문가인 부친에게 건축 기술을 배워 가업을 이었다.1416년에 이르러 베이징 천도를 반대하던 신하들도 마침내 동의하면서 천도가 확정된다. 이후 본격적인 황궁 건설 작업이 진행되고 1420년에 완공되는데, 괴상이 베이징으로 들어간 것은 1417년이다. 그는 공부영선소승(工部營繕所丞)이라는 높은 직책을 맡아, 황궁의 핵심인 삼대전(태화전·보화전·중화전)과 양궁(건천궁·곤녕궁), 천안문 등 주요 건물의 건축을 주관했다. 뛰어난 건축 능력을 발휘한 그는 전설상의 장인인 공수자(公輸子)에 비견되기도 했다.괴상은 천안문을 처음 설계한 인물로도 유명하다. 자금성을 건축하는데 동원된 후 첫 번째 임무가 황궁의 정문인 승천문(承天門·지금의 천안문)의 시공이었다. 당시 22세였던 괴상의 주도로 자금성 완공 때 함께 준공되었다. 문무백관들의 찬사를 받았다.괴상이 설계를 책임지고 건설을 지휘한 승천문은 처음에는 삼층누각 형태의 목패방(木牌坊)이었다. 1457년 이 목패방은 불행하게도 벼락을 맞아 불에 타버렸다. 1465년 괴상은 67세의 고령으로 다시 나서서 승천문 중건의 책임을 맡는다. 중건된 승천문은 규모가 원래보다 컸고, 거대한 궁전식 건축물로 확대됐다. 현재 천안문의 규모와 양식은 당시와 별 차이가 없다. 삼대전이 큰불로 소실된 후 정통 연간(1436~1449)에 진행된 삼대전 중건 공사도 그가 이끌었다. '헌종실록'은 괴상에 대해 높이 평가하고 있다. '정통 이래, 무릇 건축을 할 때면 괴상에게 맡겼다.' '그가 도면을 그리면 모두 황상의 마음에 들지 않는 경우가 없었다.' 글·사진=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해자가 둘러싸고 있는 자금성 북쪽의 모습.자금성 태화전. 자금성 최대 건물로 동서 길이 11칸(64m), 남북 길이 5칸(37 m), 높이 28m이다. 대리석 기초까지 합하면 높이가 35m나 된다.태화전으로 오르는 계단 중앙에 있는 대리석 조각물인 운룡계석(雲龍階石). 태화전 뒤의 보화전 운룡계석이 가장 큰 운룡계석인데 길이 16.5m·폭 3.07m·두께 1.7m이고, 무게는 200t이나 된다. 흰 대리석에 용과 구름 등이 새겨져 있다.
영화 '사랑과 슬픔의 볼레로' OST2LP 발매
예술과 영화, 특히 음악과 영화가 완벽히 조화를 이룬 영화 '사랑과 슬픔의 볼레로(Les Uns Et Les Autres)' OST가 2LP<사진>로 발매되었다. 영화개봉 40주년을 맞아 2021년에 HD 리마스터링하여 40년 만에 재발매된 불멸의 영화음악이다. '시네마 천국'과 더불어 유럽 최고의 영화음악으로 꼽히는 걸작이다. '사랑과 슬픔의 볼레로'(1981)는 클로드 를루슈 감독의 대표작으로, 3시간이 넘는 대작이다. 1936년부터 1980년에 이르기까지 2차 세계대전이라는 격동과 불행의 시대를 겪는 프랑스·독일·러시아·미국 국적의 네 가족이 대를 이어서 겪는 삶의 여정이 주요 줄거리다. 네 가족의 모델은 동시대의 상징성을 가진 실존 예술가들이었고, 그들의 굴곡진 삶은 영화 속에서 재구성된다. 그들은 미국 스윙 재즈의 대가 글렌 밀러(1904~1944), 오스트리아의 지휘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1908~1989), 프랑스의 샹송 가수 에디트 피아프(1908~1989), 러시아의 발레리노 루돌프 누레예프(1938~1993). 국내에서는 개봉하지 않았고, TV에서 4부로 나뉘어서 주말 저녁에 4주에 걸쳐 방송되었다. 영화음악은 입소문을 타고 1980년대 다방가와 심야 라디오 프로의 단골 신청곡으로 큰 인기를 누렸다. 음악 작업에 참여한 주인공은 영화음악계의 거장 미셀 르그랑과 프란시스 레이. 미셀 르그랑은 영화에 사용된 관현악곡을 편곡하고 직접 지휘했으며, 일부 보컬에 참여하기도 했다. 프란시스 레이는 릴리앙 데이비스와 '추억을 위한 발라드(Ballade Pour Ma Memoire)'를 듀오로 부르기도 했다. 앨범에 담긴 곡의 백미는 라벨의 '볼레로'. 프랑스 파리에서 발매된 이 음반은 국내에 초판 한정판으로 300장이 풀렸다. 김봉규 기자 bgkim@yeongnam.com
[김봉규의 수류화개(水流花開)] 소나무(2)...600살 정이품송과 혼례 올린 '미인송'…아기 소나무 200여 그루 생산 성공
준경묘를 천하명당으로 만드는 주인공은 주변의 멋진 금강송 숲이다. 넓은 숲을 이루고 있는 거의 모든 나무가 소나무인데, 그 금강송이 하나같이 크고 곧고 멋져 탄성이 절로 나오게 한다. 그중에 조선 세조가 내린 정 2품 벼슬을 가진 정이품송(수령 600여 년의 천연기념물·충북 보은)과 혼례를 올린, 대한민국 최고의 미인송이 있다. 산림청이 한국을 대표하는 소나무의 혈통 보존을 위해 10여 년의 연구와 엄격한 심사를 통해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나무로 선정한 나무다. 준경묘로 가는 입구 길옆 오른쪽 비탈에 다른 금강송과 더불어 서 있다. 높이 32m의 큰 나무인데도 대나무처럼 곧게 뻗어 유독 눈길을 끈다. 굵기는 가슴높이 둘레 2.1m 정도. 수령은 2001년 기준 95년.2001년 당시 산림청장이 주례를, 삼척시장과 보은군수가 각 혼주를 맡아 '소나무 전통혼례'를 치렀다. 삼척과 보은의 남녀 초등생 한 명씩을 신랑·신부 역으로 뽑아 혼례식을 거행했다. 나무 잘 타기로 소문난 한 청년이 정이품송의 화분을 가지고 32m 높이의 미인송에 올라 암술에 찍어 바른 후 주변 나무의 꽃가루가 침범하지 못하도록 비닐 포장지를 씌웠다. 이후 교접에 성공한 미인송의 솔 씨는 200여 그루의 아기 소나무 생산에 성공했다. 그중 한 그루는 혼례 10년 후인 2011년 서울 종로구에 있는 국립고궁박물관으로 이식됐다고 한다. 장생불사 '십장생' 상징 귀한 대접받아임금 관은 '황장목'·왕릉엔 송림 조성바닷가 자생하는 해송, 日 원산지 금송나이가 들면서 흰색으로 바뀌는 백송줄기가 퍼져 수려한 구미 독동리 반송◆'만수지왕(萬樹之王)' 소나무오랜 세월 동안 우리 민족의 삶과 함께해 온 소나무는 산성 토양에서 잘 자라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따뜻한 기후와 적당한 햇빛을 좋아한다. 특이하게 뿌리와 잎에서 타감작용(생물체가 자체적으로 만든 생화학적 물질을 분비해 주변의 다른 생물체의 생장에 영향을 주는 현상)을 일으키는 갈로타닌이라는 천연 제초제를 분비한다. 이런 특성 때문에 진달래와 철쭉 정도 외에는 소나무숲에서 함께 자랄 수 있는 식물이 거의 없다.소나무는 예로부터 귀한 대접을 받았다. 장생불사를 상징하는 열 가지 사물인 십장생(十長生: 해·산·물·돌·소나무·달 또는 구름·불로초·거북·학·사슴)에 속하는 소나무는 '만수지왕(萬樹之王)' 또는 '백목지장(百木之長)'으로 불리기도 한다.임금의 관을 짤 때도 소나무인 황장목을 사용하고, 왕릉 조성 때도 송림을 기본으로 했다. 경주에 있는 신라왕릉은 대부분 송림으로 둘러싸여 있고, 고려왕릉도 북한의 열악한 관리상태 때문에 찾아보기 어렵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송림을 조성했다. 조선왕릉도 송림을 원형으로 해서 다른 상록수들이 섞였다.100여 종이나 되는 지구상의 소나무는 북반구의 북위 30도 위아래로 폭넓게 분포하지만 주 분포지는 한국, 일본, 중국, 러시아의 우수리 지역이다.소나무는 잎으로 구분하면 두 갈래 잎에는 적송, 해송, 반송 등이 있다. 세 갈래 잎에는 백송, 리기다소나무 등이 있다.적송(赤松)은 껍질이 거북등처럼 갈라지며 하늘을 향해 쭉 뻗어 있다. 위로 올라갈수록 더 붉은색을 띤다. 목질이 단단하면서도 부드러워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건축재로 쓰이고 있다. 금강송도 적송에 속한다.반송(盤松)은 줄기가 여러 갈래로 갈라져 자란다. 줄기 밑부분에서 굵은 곁가지가 많이 갈라져 나무 모양이 우산처럼 더북한 반송은 만지송(萬枝松)이라고도 한다. 전국 곳곳에 아름답고 오래된 반송이 있다. 가지가 아래로 처지는 소나무는 처진소나무라 하고, 경북 청도 운문사의 처진소나무가 유명하다.바닷가에 자생하는 해송(海松)은 표피가 검다. 곰솔, 흑송으로도 불린다. 해송은 바닷바람을 맞은 탓에 껍질이 거칠고 강한 잎을 가지고 있다.껍질이 흰 백송(白松)은 소나무의 돌연변이로 알려져 있다. 중국 베이징 지방이 원산지다. 우리나라의 백송은 모두 중국에서 가져온 것이라 한다. 백송의 껍질은 매끄럽다. 20년 정도 되어야만 껍질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40년 이후에는 백색의 큰 껍질 조각이 떨어지며 백송의 특징이 나타난다. 대표적인 백송으로 서울 조계사와 재동 헌법재판소의 백송을 들 수 있다.1950년대 산림녹화용으로 미국에서 들여온 리기다소나무는 껍질이 거칠고 곧게 자란다. 목재는 질이 나쁘고 송진이 많이 나오며 옹이가 많아 쓰임새가 적지만, 송충이의 피해에 강하고 어디서나 잘 자라기 때문에 사방조림에 주로 사용했다. 지금은 별로 심지 않는다.일본 원산인 금송(金松)도 있다. 금송은 잎이 두툼하고 더운 지방에서 잘 자란다. 우리나라의 산림은 국토 면적의 65% 정도를 차지한다. 소나무는 1970년대까지 전체 산림의 50%를 차지했으나 자연환경의 변화에 따라 매년 감소, 2007년에는 23%인 150만㏊로 줄어들었다. 절반 이상이 사라진 것이다. 대신 같은 기간 활엽수림은 10%대에서 26%까지 넓어졌다. 국립산림과학원의 분석에 따르면 2060년경에는 지구온난화로 경북 북부, 지리산, 덕유산 등 고산지대와 강원도에서만 소나무를 볼 수 있을 것이라는 연구 결과도 나왔다.소나무는 개별 소나무를 비롯해 소나무 군, 소나무 숲(송림) 등 총 40건을 천연기념물로 지정해 보호하고 있다. (2020년 12월 기준) 이 중에는 서울 재동 백송(수령 600여 년)과 조계사 백송(수령 500여 년) 등 오래된 백송 5그루도 포함돼 있다.◆대표적 백송과 반송백송은 나이가 어릴 때는 껍질이 희지 않고 푸른색을 띠며, 나이가 들면서 점차 흰색으로 바뀐다. 중국이 원산지여서 '당송(唐松)'으로도 불리었다. 식물에서 '당'은 '중국'을 의미한다.우리나라의 백송 중에는 충남 예산의 추사고택 근처에 있는 '예산의 백송'(천연기념물 제106호)도 유명하다. 이 백송은 추사 김정희가 중국에서 가져온 씨앗을 고조할아버지 김흥경의 묘 옆에 심어서 자란 것이다. 김정희가 베이징에서 가져온 백송은 자금성 뒤편의 경산공원(景山公園)에서 볼 수 있다. 경산은 명조의 마지막 황제 숭정제가 자결한 곳이다. 이자성의 군대가 북경성을 포위하자 그 누구도 황제를 보호하지 않고 도망가버렸다. 숭정제는 어쩔 수 없이 자금성 뒤편의 경산에 올라 궁궐 자금성을 바라보면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산 정상 '만춘정(萬春亭)'으로 오르는 곳곳에서 키가 큰 백송을 만날 수 있다.자금성 안에도 멋진 백송 고목이 있다. 자금성 안 태화전, 중화전, 보화전, 건청궁, 교태전에는 나무가 한 그루도 없다. 자객이 몸을 숨길 곳이 없도록 감시하기 위한 방비책이라 한다. 그러나 자금성 북쪽 끝부분에 있는 어화원(御花園)은 각종 기암괴석이나 소나무와 측백나무, 향나무 등 수목으로 꾸며 놓고 있다. 황실 정원인 이곳에는 부벽정, 만춘정, 천추정 등 정자도 있다. 또한 태호(太湖)에서 가져온 수석들을 10m 높이로 쌓아 만든 퇴수산(堆秀山)이 있고, 그 꼭대기에는 어경정(御景亭)이 있다. 이 퇴수산 앞에 멋진 백송 한 그루가 서 있다. 수령 600년 정도라고 한다.천연기념물은 아니지만, 순천 송광사와 울진 불영사에서도 백송을 볼 수 있었다. 백송은 대부분 반송처럼 줄기가 여러 갈래로 나와 자란다.반송으로는 구미 독동리 반송, 무주 삼공리 반송, 고창 선운사 도솔암 장사송 등이 유명하다. 모두 천연기념물이다.도솔암 장사송은 고창 선운사에서 도솔암을 올라가는 길가에 있는 진흥굴 바로 앞에서 자라고 있다. 나무의 수령은 600년 정도. 반송으로 분류되는데 키가 크다. 높이는 23m, 가슴높이의 둘레는 3.1m. 높이 2.2m 정도에서 줄기가 크게 세 가지로 갈라져 있고, 그 위에서 다시 여러 갈래로 갈라져 부챗살처럼 퍼져 있다. '장사송' 또는 '진흥송'이라고 부른다. 장사송은 이 지역의 옛 이름이 장사현이었던 것에서 유래한 것이며, 진흥송은 옛날 진흥왕이 수도했다는 진흥굴 앞에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무주 삼공리 보안마을에서 자라고 있는 반송의 수령은 350년(1982년 지정 당시)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는 14m. 옛날에 이 마을에 살던 이주식(李周植)이라는 사람이 150여 년 전에 다른 곳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겨 심었다고 전해진다.구미 독동리 반송도 수형이 매우 수려하다. 수령은 400년으로 추정된다. 나무 높이는 13m. 뿌리 부분에서부터 줄기가 10여 개로 나뉘며 넓게 퍼져서 전형적인 반송의 형태를 보인다. 글·사진=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산림청이 엄격한 심사를 통해 한국 최고의 소나무로 선정한 준경묘 미인송(철책 안 소나무). 2001년 충북 보은의 정이품송과 혼례를 치른 후 후계목 생산에 성공했다.전북 고창 선운사 도솔암 장사송. 수령 600여 년의 천연기념물이다.중국 베이징 자금성 내 어화원의 백송.경주 흥덕왕릉 앞 솔숲.
[김봉규의 수류화개(水流花開)] 소나무...王家의 묘터 명당으로 만들어주는 '금강송 군락'
'남산 위에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이라는 구절로 애국가에도 등장하는 소나무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나무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 국민이 가장 좋아하는 나무이기도 하다. 지난해 8월 국립산림과학원이 발표한 설문조사 결과, 일반인 37.9%·전문가 39.3%가 소나무를 가장 좋아한다고 응답했다. 일반 국민은 경관적 가치(29%)와 환경적 가치(24.8%)를, 전문가는 역사·문화적 가치(36%)와 경관적 가치(24.6%)를 이유로 소나무를 가장 좋아한다고 응답했다. 이어 2위 단풍나무(16.8%), 3위 벚나무(16.2%), 4위 느티나무(5.8%) 순으로 나타났다. 이전 여섯 차례의 조사에서도 줄곧 가장 좋아하는 나무 1위를 기록했다.소나무 종류 중 가장 멋지고 아름다운 소나무로 금강송이 꼽힌다. 황장목, 미인송, 춘양목 등으로도 불리는 금강송은 목재로서의 가치도 가장 높게 평가받는다.이런 금강송으로 조성된 숲 중에서도 최고로 꼽히는 곳이 강원도 삼척 준경묘 금강송 숲이다. 이곳의 소나무는 '철갑을 두른 듯'한, 껍질이 두껍고 큰 일반 육송과는 차원이 다르다. 모두 키가 20~30m로 클 뿐만 아니라 하나같이 곧고 미끈하게 솟아 있다. 껍질도 얇고 붉은 기운이 감돈다. 보통의 소나무 숲과는 다른 기운이 느껴진다. 이 숲의 소나무는 특히 목재로서 최고의 가치를 지닌 나무로 대접을 받는다. 그래서 옛날부터 궁궐의 건물을 중건하거나 복원하는 데 사용됐다. 2008년 화재로 타 버린 숭례문이나 광화문의 복원 공사를 위해 이곳 소나무 수십 그루가 베어져 기둥이나 대들보로 쓰였다. 준경묘 금강송은 1961년 숭례문(국보 1호) 중건 당시에도 사용됐다.아름드리 금강송 숲 한복판에 있는 준경묘는 세종의 6대조 이안사의 아버지, 그러니까 세종의 7대조인 이양무의 무덤이다. 두타산(해발 1천357m)의 배꼽에 해당하는 천하명당으로 알려진 이 준경묘는 조선 왕조 탄생의 전설이 깃든 곳이다. 이안사가 도승의 계시를 받아 얻은 이 명당자리에 부친 이양무 묘를 쓴 후 5대에 이르러 조선이 건국됐다는 '백우금관(百牛金冠)'의 전설이다.이양무의 묘터를 구하러 산속을 헤매던 이안사가 우연히 한 도승의 말을 엿듣게 된다. 도승이 그 자리를 두고 혼잣말로 "소 100마리를 잡아 제사하고 금으로 된 관을 싸서 장사를 지낸다면 5대 안에 왕자가 출생할 자리"라고 한 것이다. 이안사는 그 자리에 아버지를 묻기로 마음먹지만, 가난한 형편에 소 100마리와 금으로 된 관은 언감생심이었다. 궁여지책으로 소 100마리를 흰 소 한 마리로 대신했다. '일백 백(百)' 자와 발음이 같은 '흰 백(白)'의 흰 소, 즉 백우(白牛) 한 마리를 쓴 것이다. 금관은 귀리 짚으로 엮어 만들었다.이렇게 명당자리에 쓴 이양무의 묘가 지금의 준경묘다. 도승의 예언대로 묘를 쓰고 5대가 지난 뒤에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고 왕위에 올랐다. 준경묘는 노동산(蘆洞山) 정상 부근에 있다. 묘는 골짜기 두 개가 합쳐지는 작은 분지 위쪽에 자리하고 있다. 경사진 곳에 축대를 쌓아 조성한 묘는 그리 크지 않고, 그 아래 정자각과 표석, 홍살문, 연못 등이 있다. 묘역은 잔디밭으로 관리하고 있다.일반인이 보기에 준경묘를 명당으로 만들어주는 주인공은 주변의 소나무다. 금강송 군락지로 울진 소광리가 규모도 크고 유명하지만, 준경묘 주변 금강송 숲도 소광리 못지않다. 준경묘 주변의 소나무들은 궁궐 목재로 사용하기 위해 문화재청의 소유로 되어 있으며, 삼척시가 관리하고 있다. 면적은 507만1천126㎡에 이르고 소나무만 34만여 그루가 자라고 있다.금강송 중에서도 최고의 금강송으로 평가받고 있는 이곳의 소나무 가운데서도 가장 아름다운 나무로 뽑힌 금강송이 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 소나무인 충북 보은의 정이품송과 혼례를 올린 금강송 한 그루가 그 주인공이다. 준경묘역 입구 오른쪽 비탈에 서 있다. 글·사진=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김봉규의 수류화개(水流花開)] 소나무(2)에서 계속됩니다.준경묘와 주변 송림. 준경묘는 태조 이성계의 5대 조부 이양무의 무덤이다.강원도 삼척시 미로면 활기리에 있는 준경묘 초입의 금강송 숲.
'재즈 피아노의 시인' 빌 에반스 콜렉터 에디션 LP 출시
고독한 '재즈 피아노의 시인'으로 불리는 빌 에반스의 한정판 콜렉터 에디션 LP 'BILL EVANS'<사진>가 삽화(28쪽)와 전기를 담은 양장본으로 출시되었다. 재즈 명인 빌 에반스(1929~1980)는 80여 장의 음반을 발매했으며, 그래미상에 31번이나 후보로 오르고 그 중 7번 수상했다. 마약 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한 그는 '역사상 가장 긴 자살'로 불리는 삶을 살다가 결국 1980년 9월 뉴욕에서 숨을 거두었다. 사후 그를 추모하는 30여개의 음반이 발매되었다. 모던 재즈에 없어서는 안될 존재인 에반스는 살아 있을 때는 대중에게 존중받지 못했지만, 후세에 가장 인기있는 재즈 피아니스트가 되었다. 이 음반에는 슬프도록 아름다운 'My Foolish Heart'를 비롯해 그의 트레이드 마크로 꼽히는 'Waltz For Debbie', 아일랜드 민요를 편곡한 연주 'Danny Boy', 영원한 재즈의 고전 'Autumn Leaves' 등 주옥같은 재즈 피아노 연주 8곡이 담겨있다. 전세계 1000장 한정판. 빌 에반스의 연주는 전통적인 흑인 재즈와 다르며 유럽 클래식의 영향에서도 벗어나 있다고 평가받는다. 그는 공연전에 리허설을 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평론가들은 그의 즉흥연주 스타일을 '스토리 텔링 주법'이라 평했으며, 마일스 데이비스는 "빌 에반스는 피아노 앞에선 조용했다. 그가 가진 사운드는 반짝이는 선율 또는 맑은 폭포에서 떨어지는 상쾌한 물줄기 같았다"라고 말했다.김봉규 기자 bgkim@yeongnam.com
[김봉규 기자의 '지구촌 산책' .34] 伊 아시시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 예수와 가장 닮은 프란치스코 성인…그가 영면한 언덕 위에 세운 대성당
"세속적으로 우리는 주교이고 사제이고 추기경이며 교황일 수 있지만, 십자가를 지고 가지 않는다면 주님의 진정한 제자는 될 수 없다. 진정한 권위는 봉사라는 사실을 절대로 잊지 말자. 몹시 가난하고, 약하고,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는 사람들을 끌어안아야 한다." 지구촌의 많은 사람으로부터 존경을 받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한 말이다. 가톨릭의 제266대 교황인 그는 기독교 역사상 최초의 신대륙·남반구·예수회 출신 교황이다. 예수회는 가톨릭 교회의 남자 수도회. 아르헨티나 베르고글리오 추기경이던 그는 2013년 교황으로 선출되면서, 역사상 최초로 프란치스코라는 이름을 선택했다. 이탈리아 아시시에서 평생 청빈하게 살며 이웃 사랑에 헌신한 프란치스코(1182~1226) 성인의 가르침을 따르겠다는 것이었다.교황은 2014년 8월 한국을 방문했을 때는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하는 연대는 그리스도인 생활의 필수 요소로 여겨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2023년 1월1일 제56차 세계 평화의 날(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을 기념하는 메시지를 통해서는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도덕적·사회적·정치적·경제적 위기는 모두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우리가 고립된 문제로 보는 것은 실제로는 서로의 원인과 결과"라며 불평등의 바이러스와 싸우고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도울 것을 촉구했다. 가톨릭의 프란치스코 성인을 기려 건립한 이탈리아 움브리아주 아시시에 있는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을 밖에서만 둘러보고 온 적이 있다.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가장 짧은 시간 동안 보냈지만, 인상이 매우 깊었던 곳이 아시시다. 대성당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시시 마을과 주변의 풍경이 평화롭고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멀리 보이는 산자락과 그 앞에 펼쳐진 넓은 들판, 산자락 끝에 있는 큰 성당과 오랜 역사가 묻어나는 주택 건물 등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드물게 마음을 편안하고 충만하게 했다. 빌린 차를 곳곳에 세우면서 아시시를 둘러보고 떠나왔는데, 좀 더 여유를 가지고 둘러보았으면 하는 아쉬움이 컸던 곳이다.아시시 범죄자 처형된 '지옥의 언덕'예수가 못 박힌 골고다 언덕과 닮아프란치스코 성인, 사후 묻히길 바라 하부 성당에 유해 봉안 후 상부 건축 600년 지난 19C초 숨겨진 묘소 발견가난한 자와 병든 자 위한 헌신적 삶세계 곳곳 순례자 참배 이어지는 성지 ◆프란치스코 성인의 무덤 위에 세워진 성당아시시의 상징 건축물이기도 한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은 프란치스코 성인이 매장된 무덤 위에 세워진 성당이다.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중심지인 이곳은 순례자들의 참배가 이어지는 성지이자 일반 관광객들도 적지 않게 찾는 곳이다. 2000년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성당과 프란치스코회 유적'이라는 명칭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1226년 10월에 선종한 성 프란치스코는 아시시 지역에서 범죄자들이 처형되는 장소였던 '지옥의 언덕'이 예수가 못 박힌 골고다 언덕을 닮았다며, 죽은 뒤 그곳에 묻히기를 바랐다. 선종 2년 만인 1228년 7월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프란치스코를 시성(諡聖)하였고, 이를 기념하고자 프란치스코 무덤 위에 성당을 건설하기로 결정했다. 그레고리오 9세는 프란치스코의 시성식이 거행된 다음날인 7월17일에 대성당의 초석을 놓았다. 언덕 경사면에서 공사를 진행하였기 때문에 전체 구조는 하부와 상부로 나누어 지어졌다.1230년 5월 새로 지어진 하부 성당에 유해를 봉안했다. 상부 성당 건축은 1239년부터 1253년까지 진행됐다. 교황 니콜라오 4세는 1288년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에 '교황 성당(Papal Church)'이라는 지위를 부여했다.프란치스코가 1209년에 창립한 탁발수도회인 프란치스코회는 프란치스코의 무덤을 비밀스러운 장소에 숨겼다. 무덤을 숨긴 목적은 이슬람 세력을 걱정해서였다고도 하고, 이탈리아 가문들 간 싸움 때문이었다고도 한다. 무덤은 단지 하부 성당의 어딘가에 있다는 수준으로만 전해졌다.600년 가까이 지난 19세기 초, 교황 비오 7세에게 허가를 받아 고고학자들이 하부 성당에서 묘소가 있을 만한 곳을 조사해 1818년에 결국 숨겨진 묘소를 발견했다. 하부 성당의 제대 앞에 입구가 있었고, 입구 위를 덮어 성당 바닥과 일체화하여 위치를 숨겼던 것이다. 바닥을 뜯어 입구를 찾아내자 13세기에 무덤을 보호할 때 쓰던 철제 난간이 있었고, 통로를 따라 내려가자 프란치스코의 관을 안치한 지하석실이 나타났다. 관이 있는 위치는 하부 성당의 제대 아래쪽과 거의 일치했다. 1997년 9월26일, 이탈리아 움브리아와 마르케 지방에 리히터 규모 5.5와 6.1의 강진이 연달아 발생했다. 하부 성당은 무사했지만, 조토 디 본도네가 그린 상부 성당의 프레스코 벽화는 산산조각이 나는 피해를 보았다. 그 후 30만 개가 넘는 벽화 파편들을 기존에 촬영된 사진 자료와 컴퓨터를 이용해 짜 맞추는 작업을 통해 복원에 착수, 3년여 만인 2000년에 세상에 공개되었다. 프란치스코의 생애를 28점의 연작으로 표현한 작품이다.프란치스코 교황은 2013년 9월 이곳을 방문해 성 프란치스코의 유해가 안치된 곳에서 기도한 뒤 성당 앞 광장에서 미사를 집전하기도 했다.◆아시시의 성인 프란치스코유럽 사람들은 아시시라고 하면 성 프란치스코(1182~1226)를 떠올린다. 수많은 순례자는 '가난과 결혼한 수도자' '예수 그리스도와 가장 닮은 그리스도인'으로 불리는 그의 헌신적인 삶을 기린다.평생을 청빈하게 살며 이웃 사랑에 헌신한 성 프란치스코는 이탈리아 아시시의 부유한 옷감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젊어서 향락을 추구했던 그는 1202년에 이웃 도시 페루자와의 싸움에서 포로가 되어 1년간 감옥에 있으면서 말라리아를 앓았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에 따라서 살 것을 결심했다. 1205년 이후 프란치스코는 재산과 가족을 포기하고 청빈과 이웃 사랑에 헌신했다.1209년 프란치스코는 교황 인노첸시오 3세에게 수도회 설립 인준을 요청하기 위해 11명의 제자와 함께 로마로 갔다. 이들을 만난 교황은 처음에는 프란치스코가 제출한 회칙의 생활 양식이 너무나 이상적이며 엄격하다는 이유로 인준을 유보하였으나, 그날 밤 꿈에서 쓰러져가는 산 조반니 대성전을 프란치스코가 어깨로 부축하여 세우는 장면을 보고, 다음 날 수도회를 인준했다.이후 '작은 형제들의 모임'(프란치스코회의 정식 명칭)의 수도사들은 예수의 생활을 본받아 청빈하게 지내면서 가난한 사람과 병든 사람을 위로했다. 프란치스코는 1212년에는 여제자인 성녀 클라라(1193∼1253)에게 권유해 '가난한 클라라 수녀회'를 설립하게 하였다. 그녀 또한 성녀였다. 그녀는 매일 허름한 수도복을 입고 사시사철 맨발로 다녔으며, 삭발한 머리에는 흰 두건과 검은 수건을 쓰고 다녔다. 잠자리는 맨바닥 위의 요였고, 베개는 나무토막이었으며, 공동침실은 춥고 적막했다. 식사는 대개 하루에 한 끼만 먹었고, 주일과 성탄절에만 두 끼를 먹었다. 고기와 포도주는 언제나 금했고, 주로 빵과 채소를 먹었다. 달걀이나 우유가 생기면 병자들에게 주었다. 클라라는 프란치스코가 죽은 지 30년 만에 죽음을 맞았다.이들 탁발 수도사들은 10년도 안 되어 그 수가 5천명이나 되었고, '작은 형제회'는 이탈리아 밖으로 퍼져나갔다. 성 프란치스코는 1226년 10월4일에 아시시에서 별세했다. 성 프란치스코와 관련해 이런 일화가 전한다. 그는 믿음과 수도 생활에 투철한 성인이었으나, 남자로서 느끼는 성욕을 떨치는 일이 힘들었던 모양이었다. 프란치스코는 자신이 느끼는 욕망을 없애 달라고 기도하면서, 틈만 나면 장미 가시덤불 위에서 맨몸으로 데굴데굴 굴렀다. 그리고 그의 사후에 피어난 아시시의 장미들에서는 가시가 없었다고 한다. 오늘날에도 아시시의 산타 마리아 델리 안젤리 성당 마당에 피는 장미꽃들은 가시가 없다고 한다. 아시시를 벗어나 다른 곳에 심으면 장미 가시가 생겨나고 다시 아시시로 옮겨와서 심으면 다시 가시가 없어진다고 한다.◆아시시아시시는 이탈리아 중부 움브리아주 북부의 아펜니노 산맥의 남서쪽 기슭 위에 있다. BC 295년 로마인들이 아시시움(Asisium)을 건설하면서 현재의 도시명 '아시시'가 탄생했다. 수바시오 산기슭에 있는 아시오(Asio)라는 구릉의 비탈에 건설된 아시시는 이탈리아의 '푸른 심장'이라는 애칭도 갖고 있다.아시시에서는 성벽, 극장, 원형 경기장, 미네르바 신전(산타 마리아 소프라 미네르바 성당으로 바뀜) 같은 옛 로마 흔적들을 여전히 볼 수 있다. 1997년에는 폼페이 같은 드문 상태의 프레스코화와 모자이크화가 잘 보존된 방이 있는 고대 로마의 빌라 유적지가 발견되기도 했다.아시시는 로마 시대에서 중세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도시이면서 성소(聖所)로서 유지되어 온 독특한 지역이다. 아시시의 문화 경관, 종교 건축물, 교통 체계 및 전통적 토지 사용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성 프란치스코 성당은 예술과 건축 발달에 큰 영향을 준 뛰어난 예이다.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예술과 종교 정신의 교류는 전 세계의 예술과 건축술의 발달에 크게 기여했다. 글·사진=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이탈리아 아시시에 있는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 전경. 이 성당의 중심 지하에 성 프란치스코의 무덤이 있다.성 프란치스코 대성당 아래는 밀과 해바라기 등을 심은 넓은 들판이 펼쳐져 있다. 들판의 해바라기밭과 마을.
니나 시몬 재즈 기념비 'Jazz Monuments' 4LP 전집 출시
'블랙 클래식' 니나 시몬(1933~ 2003)의 전성기 음악을 4LP 8면으로 구성한 전집 음반 'Jazz Monuments'<사진>가 출시되었다. 니나 시몬의 전기가 담긴 8쪽 책자가 포함된 이 전집 음반은 그의 탄생 90년, 사후 20주기를 기념해 제작됐다. 전 세계 1천500세트 손글씨 넘버링 한정판. 모든 트랙은 2022년에 리마스터링되었다. '쏘울의 대사제' '흑인 인권운동가' 등 수식어가 많은 니나 시몬의 음악 역사 중 그의 전성기로 꼽히는 1957년부터 1962년까지 발매한 6장의 정규음반을 총 4장에 아로새겼다. LP A 'NINA SIMONE ESSENTIAL'은 1959년 뉴욕 타운홀 실황에서 앙코르곡으로 불러 뜨거운 갈채를 받은 'I Don't Want Him' 등 그의 6장의 앨범에서 뽑은 최고의 다섯 곡을 담았다. LP B와 C는 1957년에 녹음한 데뷔 앨범 'Little Girl Blue'의 곡을 담았다. 클래식 전공자답게 클래식을 차용한 피아노 즉흥연주가 아름답다. 마지막 LP H 'NINA SIMONE SINGS DUKE ELLINGTON'은 1962년에 듀크 엘링톤 작품을 노래한 앨범이다. 니나 시몬은 어려서 클래식을 전공했지만, 흑인이라는 이유로 커티스 음악원의 입학을 거절당했다. 이후 인종차별에 대한 강렬한 트라우마로 자신의 음악을 '블랙 클래식'이라고 불렀다. 니나 시몬의 매력은 단연 일반 남성 못지않은 깊은 저음과 음색이다. 거칠면서도 깊은 울림을 지닌 목소리는 유려한 피아노 연주와 함께 아름다운 하모니를 이룬다. 특히 그의 음악은 영혼을 담은 강렬한 보이스로 수많은 영화에 삽입되어 영화의 주제를 상승시켰다. 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신년특집]2023년 토끼해 이야기…희망 가득 새해 향해…토끼처럼 '폴짝'
2023년은 계묘년(癸卯年) 토끼해다. 호랑이해가 저물고, 정확하게는 음력 1월1일(설날)부터 토끼해가 시작된다. 토끼해의 주인공인 토끼는 십이지(十二支:쥐·소·범·토끼·용·뱀·말·양·원숭이·닭·개·돼지)의 12띠 중 네 번째 띠에 해당한다. 방위로는 동쪽(正東), 시간으로는 오전 5시부터 7시까지를 나타낸다. 십이지 동물 가운데 토끼(卯)는 만물의 생장과 번창, 풍요를 상징한다. 토끼띠 사람은 어떻다고 인식되었을까. 착한 성품을 타고난 토끼띠는 이상주의자이다. 토끼의 넉넉한 양기를 받아 원만한 기풍과 자애로운 정을 지닌 토끼띠는 느긋하고 온화한 기질로 주변 사람에게 많은 호감을 산다. 감수성이 뛰어나고 유머가 풍부하여 예능 계통에 재능을 보인다. 쉽게 사는 것을 좋아하고 다툼에 빠지는 것을 싫어한다. 또 자기 앞길을 가로막는 장애물들을 간단히 뛰어넘으며 뛰어난 탄력으로 재난에서 벗어난다. 토끼띠는 꿈을 중요시하고 항시 생각이 앞서기 때문에 노력이 부족하고, 재능만 믿고 한 우물이 아니라 여러 개의 우물을 파는 결점도 보인다. 의지와 담력을 키우고,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살아야 한다.귀여운 외모·날쌘 동작꾀 많은 동물로 여겨져용궁서 탈출한 토생원육지서도 여러 위기 모면코로나·우크라-러 전쟁 등국내외 위기 어수선한 때토끼처럼 지혜 발휘하며2023년 새해 잘 넘어가길◆전통문화 속 토끼 이미지우리나라 민속 문화에서 토끼는 꾀 많고 귀여운 동물로 인식되어 왔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동물이지만, 달나라에서 방아를 찧고 있는 상상의 대상이기도 하다. 친숙한 동물이면서 신령스러운 존재이기도 했던 것이다.토끼는 포식자의 사냥감 대상이기에 항상 주위를 경계하며 민감한 모습을 보여, 겁이 많고 나약한 사람에 비유되기도 한다. 하지만 용궁으로 잡혀가나 기지를 발휘해 다시 도망 나오는 내용인 '토끼전' 등의 옛날이야기에서 토끼는 영리하고 지혜로운 동물로 여겨지기도 한다. 또한 '계수나무 한 나무 토끼 한 마리'라는 동요 가사처럼 우리나라 사람은 달에 토끼가 살고 있다고 믿었다. 달나라의 계수나무 아래서 절구질을 하는 토끼는 우리의 대표적 토끼 이미지이다. 달나라에 사는 토끼는 옥토끼(玉兎)다. 동아시아의 전설에서 달에 산다는 옥토끼 전설은 나라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다. 중국 신화에서는 절구로 불로장생의 약초를 빻고 있지만, 한국과 일본에서는 떡방아를 찧고 있다. 또한 중국과 한국에서는 토끼가 계수나무 아래서 절구를 찧는다고 전해지지만, 일본 설화에는 나무가 등장하지 않는다.옥토(玉兎)는 은토(銀兎)라고도 불리며 중국과 일본에서는 월토(月兎)라고도 한다. 한국에서는 옛날부터 이를 옥토끼라고 불러왔다. 우리에게 너무나 친숙한 달나라에서 방아를 찧는 옥토끼의 모습은 이미 5세기 후반 고구려 고분에서도 흔하게 발견된다. 이 벽화의 토끼는 불사약(不死藥)을 찧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토끼는 꾀가 많은 동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토끼가 기발한 꾀를 내 위기를 모면하는 구토설화(龜兎說話)에서 비롯됐다. 용궁에 끌려갔다가 자신의 간을 육지에 두고 왔다는 기지를 발휘해 위기를 모면한 토끼의 이야기다.삼국사기에도 구토설화가 등장한다. 백제의 침략으로 위기에 처한 신라의 김춘추는 고구려 연개소문에게 도움을 청하러 가지만, 연개소문은 김춘추에게 고구려의 옛 땅을 돌려달라고 요구하며 그를 볼모로 잡아둔다. 김춘추는 고구려를 탈출하기 위해 고구려 신하에게 뇌물을 주며 도와달라고 청한다. 이때 그가 김춘추에게 들려준 이야기가 바로 구토설화다. 이후 김춘추는 자신을 풀어주면 왕을 설득해 땅을 돌려주겠다고 연개소문을 속여 무사히 신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이러한 구토설화는 고전소설 '토끼전' '별주부전', 판소리 '수궁가' 등으로 전해지고 있다.토끼는 만약을 대비해 3개의 구멍을 만든다는 뜻의 '교토삼굴(狡兎三窟)'도 신중하고 영리한 토끼의 지혜를 상징하는 이야기다.◆판소리 '수궁가' 속 토끼 이야기바다 궁전에 사는 용왕이 병에 걸려 온갖 약을 다 써보지만 낫지 않는다. 용한 의원이 땅 위에 사는 토끼의 간이 좋다는 처방을 내놓자 용왕은 별주부(자라)에게 세상으로 나가 토끼를 데려오라는 명령을 내린다. 바깥세상으로 나간 자라는 고생 끝에 토끼를 발견하고 토끼를 꾀어 용궁으로 데려가는 데 성공한다.토끼가 왕궁에 도착해 얘기를 들어보니 자기 배를 갈라 간을 내어 용왕의 약으로 쓴다고 했다. 토끼는 궁리 끝에 꾀를 부려 자기 간이 약효가 탁월하다는 소문 때문에 간을 떼어놓고 다닌다고 말했다. 용왕이 그 말을 믿지 않자 자신의 밑을 보여 주면서 "하나는 오줌 싸는 구멍, 하나는 똥 싸는 구멍, 하나는 간을 뺐다 들였다 하는 구멍"이라고 대답했다. 토끼 말을 믿게 된 용왕은 자라에게 다시 토끼를 세상으로 데려가 토끼 간을 가져오도록 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자라는 토끼를 등에 업고 다시 육지로 나가 숨겨 두었다는 토끼 간을 가져오라고 했다. 제 세상을 만난 토끼는 자라를 응징하고, 자라는 뭍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죽을 목숨이 살아나게 된 토끼는 좋아서 깡충깡충 뛰어다니며 까불다가 사람이 쳐놓은 덫에 걸리고 말았다. 그러나 토끼는 이 위기에서도 또 탈출한다. 망연자실한 토끼 옆으로 쉬파리 떼가 날아들자 꾀를 부려 쉬파리 떼에게 자기 몸에 오줌을 잔뜩 발라 달라고 하고, 쉬파리들은 토끼 몸에 오줌을 잔뜩 뿌려주었다. 아이들이 덫에 걸린 이 토끼를 보고 잡아먹으려고 하다가 냄새가 심하게 나자 썩은 줄 알고 버리고 가버렸다. 토끼는 또 좋아라고 달아나다가 이번에는 독수리에게 잡힌다. 그러나 또 꾀를 내어 독수리 욕심을 유발해 도망을 치게 된다. 토끼의 조심성과 지혜로 만만치 않을 토끼해 한 해를 모두 잘 넘어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계묘년 새해 첫날에 떠오르는 붉은 해를 배경으로, 건강한 흑묘(黑卯)가 희망의 새싹을 물고 새해 첫발을 내디디려고 하네요. 장두일(영남대 교수) 화가가 영남일보 독자를 위해 그려준 계묘년 연하(年賀) 그림입니다. 2023년 토끼해는 여러 가지 안 좋은 국내외 환경으로 인해 만만치 않은 한 해가 될 것 같습니다. 그래도 모든 이들이 신중하고 지혜로운 토끼의 기운 듬뿍 받아 밝고 희망찬 마음으로 건강하고 복된 나날을 펼쳐가기를 기원합니다. 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의료대란으로 번진 의대 증원
의료개혁특위 "의료개혁 시기상 미룰 수 없는 과업…소통 통해 의견 좁힐 것"
경북대, 내년도 의대 입학정원 '155명' 조정에 대구경북 타 대학 결정도 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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