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창간 76주년 사람과 지역의 가치를 생각합니다
x
김봉규 기자
전체기사
[옛사람들의 행복콘서트] 수오(守吾) "천하 만물보다 '나'의 맑은 마음을 지키는 것이 행복의 요체다"
몸과 정신이 맑고 상쾌해지는 가을이다. 이런 날씨 덕분에 흐트러진 마음도 차분해지면서 맑아지는 것 같다. 쾌청한 가을 하늘처럼 마음을 맑게 유지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다산 정약용(176~1836)의 글 '수오재기(守吾齋記)'가 있다. '나를 지키는 집(서재)에 대한 기록'이라는 의미다. 자신의 큰 형님인 정약현(丁若鉉)이 서재의 이름으로 걸어 놓은 현판의 의미에 대해 쓴 글이다. 사람이 가장 지켜야 할 바는 외물이 아닌 '나(吾)'이고, 나의 본래 성품을 잃어버리면 안 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처음에는 '나를 지킨다'라는 의미의 '수오(守吾)'라는 서재 이름에 대해 의문을 품는다. 그러나 벼슬길에서 쫓겨나 유배의 길에 오르자 '나를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어려운 것인가를 깨달으면서 이 글을 썼다."수오재(守吾齋)라는 것은 큰 형님이 그 거실에 붙인 이름이다. 나는 처음에 의심하며 '사물이 나와 굳게 맺어져 있어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것으로는 나[吾]보다 절실한 것이 없으니, 비록 지키지 않더라도 어디로 갈 것인가. 이상한 이름이다'라고 생각했다.내가 장기로 귀양 온 이후 홀로 지내면서 정밀하게 생각해 보았더니, 하루는 갑자기 이러한 의문점에 대해 해답을 얻을 수 있었다. 나는 벌떡 일어나 스스로 이렇게 말했다.'대체로 천하의 만물이란 모두 지킬 수는 없고, 오직 나만은 마땅히 지켜야 한다. 내 밭을 지고 도망갈 자가 있는가? 그러니 밭은 지킬 것이 없다. 내 집을 지고 달아날 자가 있는가? 그러니 집은 지킬 것이 없다. 나의 정원의 꽃과 과실나무 등 나무들을 뽑아갈 자가 있는가? 그 뿌리가 땅에 깊이 박혀 있다. 나의 책을 훔쳐 없애버릴 자가 있는가? 성현의 경전은 세상에 널리 퍼지기를 물이나 불과 같은데, 누가 능히 없앨 수 있겠는가? 나의 옷과 식량을 도둑질하여 나를 군색하게 하겠는가? 지금 천하의 실이 모두 내가 입을 옷이며, 천하의 곡식은 모두 내가 먹을 양식이다. 도둑이 비록 한두 개를 훔쳐 가더라도, 천하의 모든 옷과 곡식을 모두 없앨 수 있겠는가. 그런즉 천하의 만물은 모두 지킬 것이 없다.오직 이른바 나라는 것은 그 성품이 달아나기를 잘하여 드나듦에 일정함이 없다. 아주 친밀하게 붙어 있어서 서로 배반하지 못할 것 같으나, 잠시라도 살피지 않으면 어느 곳이든 가지 않는 곳이 없다. 이익과 작록(爵祿)으로 유인하면 가버리고, 위엄과 재화(災禍)가 겁을 주면 가버리며, 심금을 울리는 아름다운 음악 소리만 들려도 가버리고, 새까만 눈썹에 흰 이빨 미인의 요염한 모습만 보아도 가버린다. 그런데, 한 번 가면 돌아올 줄을 모르니 붙잡을 수도 없다. 그러므로 천하에서 가장 잃어버리기 쉬운 것으로는 나 같은 것이 없다. 어찌 실과 끈으로 잡아매고 빗장과 걸쇠로 잠가서 굳게 지켜야 하지 않겠는가.'나는 나를 잘못 간직했다가 나를 잃은 자이다. 어렸을 때는 과거 급제하는 명예가 좋게 보여서 과거 공부에 빠진 것이 10년이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처지가 바뀌어 조정에 나아가 검은 사모를 쓰고 비단 도포를 입고, 미친 듯이 대낮에 큰길을 뛰어다녔다. 이처럼 하기를 12년이었다. 또 처지가 바뀌어(유배의 몸이 되어) 한강을 건너고 문경새재를 넘어, 친척들과 멀어지고 조상의 묘소를 버린 채 곧바로 아득한 바닷가의 대나무 숲(첫 유배지인 포항의 장기)에 달려와서야 멈추게 되었다. 이때에는 나도 땀이 흐르고 두려워 숨을 죽이면서, 내 발뒤꿈치가 함께 이곳에 오게 되었다. 내가 나에게 말했다.'그대는 무엇 때문에 여기에 왔는가? 여우나 도깨비가 끌어서 온 것인가? 또는 해신(海神)이 불러서 온 것인가? 그대의 집과 고향은 모두 초천(苕川)에 있는데, 어찌 그 본향(本鄕)으로 돌아가지 않는가?'그러나 끝끝내 나라는 것은 멍한 채로 움직이지 않으며 돌아갈 줄을 몰랐다. 그 얼굴빛을 보니 마치 얽매인 것이 있어서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가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리하여 끝내 붙잡아서 함께 머물렀다. 이때 나의 둘째 형님 좌랑공(佐郞公)도 그의 나를 잃고 나를 따라 남해로 왔으니, 역시 자신을 붙잡아서 그곳(유배지)에 머물렀다. 오직 나의 큰 형님만은 그 나를 잃지 않고 편안하고 단정하게 수오재(守吾齋)에 앉아 계시니, 어찌 본디부터 지키는 것이 있어 나를 잃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이것이 큰형님께서 그의 거실에 이름 붙인 까닭일 것이다.큰형님께서 일찍이 '아버지께서 나에게 태현(太玄)이라고 자(字)를 지어주셨으니, 나는 오로지 나의 태현을 지키고자 이것으로써 나의 거실에 이름을 붙였다'라고 하셨지만, 이것은 핑계 대는 말씀이다.맹자가 이르되 '지켜야 할 것 중에 무엇이 가장 중대한가? 자신의 몸을 지키는 것이 가장 중대하다'라고 하였으니, 그 말씀이 진실하다. 드디어 나 스스로 말한 것을 큰형님께 보이고 수오재의 기(記)로 삼는다."스스로를 돌아보게 하는 내용이다. 자신을 지키는 것, 자신의 맑은 마음을 지키는 것이 행복의 요체라고 할 수 있다.불교에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이라는 유명한 말이 있다. 어떤 처지에 있더라도 자신을 잃지 않고 주인으로 산다면, 당신이 있는 그곳은 모두 참된 자리라는 의미다. 당나라 임제 의현(?~867) 선사의 말이다.이 구절 앞뒤 내용을 함께 보자."수행자들이여, 부처님 법은 애써 힘쓸 필요가 없다. 다만 평소 아무 탈 없이 똥 싸고 오줌 누고, 옷 입고 밥 먹으며, 피곤하면 잠자면 된다. 그뿐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나를 비웃는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안다. 옛 성인 말씀하시길 '밖을 향해 공부하지 마라. 그것은 어리석은 이들의 짓일 뿐이다'라고 했다. 그러니 그대들은 어디에 있으나 주인이 된다면, 있는 곳 그대로가 모두 참된 것이 된다. 어떤 경계가 다가오더라도 그 영향을 받지 않아야 한다."불법을 깨닫는 차원이 아니더라도 언제나, 어떤 상황이나 유혹에도 '자신'을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글·사진=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다산 정약용이 유배 시절 머물렀던 강진 다산초당.
[흥미로운 명필이야기 23] 안평대군, 세종 셋째 아들이자 '조선 4대 명필가'…안견에게 자신의 꿈 이야기 들려줘 그린 '몽유도원도' 탄생
안평대군(1418~1453)은 서예, 시, 그림 모두에 뛰어나 '삼절(三絶)'이라고 불렸다. 특히 조맹부와 소식 등 중국의 유명한 문인들의 서예들을 수집해서 보고 연마, 조맹부 체를 가장 잘 구사하는 명필로 명나라 황제까지 감탄했다고 한다. 명나라 사신들이 오면 안평대군에게 달려가서 글을 써달라고 간청했을 정도였다. 호탕하고 인간적인 면모도 있어서 많은 사람이 좋아하고 따랐다. 그는 고려 말부터 유행한 조맹부 글씨체를 따랐지만, 자신의 개성을 마음껏 발휘한 활달한 기풍은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 뛰어난 자질을 타고났을 뿐 아니라 궁중에서 성장하는 과정에서 궁궐에 소장된 많은 서화 진적(眞蹟)과 자신의 수장 서화를 보고 수련했던 덕분이다. 신숙주의 '보한재집(保閑齋集)'에 의하면, 모두 222점의 서화를 수장하였는데, 그중 안견(安堅)의 작품을 제외한 대부분이 중국 서화가의 명적이었다. 안평대군은 세종의 셋째 아들로 문종과 세조의 친동생이다. 세조가 일으킨 계유정난의 희생양으로 알려져 있다. 이름은 '이용'. 호는 비해당(匪懈堂), 매죽헌(梅竹軒), 낭간거사 등으로 불렸다. 수양대군과 더불어 문무에 능했으나, 안평대군은 특히 문필과 관련한 일에 빼어난 능력을 발휘했다. 흔히 조선의 사대 명필가를 손꼽으라면 안평대군, 양사언, 한석봉, 김정희를 이야기한다. 그는 아버지 세종의 한글 창제에도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훈민정음 해례본 판각 글씨도 원래 그의 솜씨였으나, 현존하는 해례본은 첫 장만 안평대군의 글씨체를 모방하여 다시 만들어 붙인 영인본이라고 한다. 안타깝게도 세조가 즉위한 뒤 그의 영향력을 두려워한 세조에 의해 수많은 그의 작품들이 불에 타 소실되었다. 현존하는 작품으로는 임진왜란 때 강탈당해 일본 덴리 대학에 소장 중인 안견의 '몽유도원도'에 쓴 발문과 세종대왕영릉신도비 등이 있다.안견의 대표작 몽유도원도는 그를 아끼고 후원하던 안평대군이 자신의 꿈 이야기를 들려주며 그림을 그리게 했고, 발문은 자신이 직접 쓴 걸작이다. 안평대군은 시와 그림도 좋아하고 예술에 조예가 깊어 당대의 선비들과 두루 사귀었는데, 특히 안견의 그림을 좋아해서 잠시도 곁을 떠나지 못하게 할 정도였다. 안견 또한 자신을 알아주는 안평대군을 위해 많은 그림을 그렸다. 하지만 안견은 수양대군의 야망과 음모를 꿰뚫고 안평대군의 그늘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수양대군이 왕이 되면 안평대군은 죽을 것이고 그러면 자신도 안전할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안견은 대군의 아끼는, 베이징에서 구한 용매먹을 일부러 훔친 뒤 알게 함으로써 관계를 소원하게 만들었다. 얼마 후에 계유정난이 일어나자 안평대군은 역적으로 몰려 사약을 받았고, 그의 집을 드나들던 사람들마저도 모두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하지만 안견은 죽음을 면하였을 뿐만 아니라 아들을 출세시킬 정도로 명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안평대군이 직접 시를 짓고 글씨를 쓴 것으로 전하는 '만리관산(萬里關山)' 작품이 있다. 쪽물을 들인 종이에 금니로 쓴 작품이다.'만리 관산에 계수나무 그림자 드리운 가을/ 누가 높은 누각에 기대어 옥피리를 부는가/ 그 소리 은하수 끝까지 퍼져가니/ 아, 저기에 내 친구가 있구나(萬里關山桂影秋 何人橫玉倚高樓 一聲吹入廣寒殿 自有知音在上頭)' 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안평대군 작품으로 전하는 '만리관산(萬里關山)'.
[동추(桐楸) 금요단상] 반가사유상이 일깨워 준 진리, '시대와 환경에 따라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나는 지금까지 철학자로서 인간 존재의 최고로 완성된 모습을 표현한 여러 형태의 신상(神像)들을 봤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조각들에는 어딘지 인간적인 감정의 자취가 남아 있어 절대자만이 보여 주는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나는 이 미륵상에서 인간 존재의 가장 정화되고, 가장 원만하고, 가장 영원한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나는 철학자로 살아오면서 이 불상만큼 인간실존의 진실로 평화로운 모습을 본 적이 없습니다."독일의 유명 철학자 칼 야스퍼스(1883~1969)가 일본 고류지(廣隆寺)의 목조반가사유상을 보고 남긴 말이다. 이 반가사유상과 매우 유사한, '쌍둥이'라고 표현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닮은 반가사유상이 한국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 국보 83호인 금동반가사유상이다. 야스퍼스가 금동으로 만든 이 반가사유상을 보았다면, 더한 찬사를 보냈을 것이다. 국보 83호는 신라 때 작품이고, 일본 목조반가사유상은 신라에서 만들어 선물한 것이라는 주장이 정론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국보 83호 작품이 국보 78호 금동반가사유상과 함께 새로운 공간에 전시돼 그 진가를 발하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이 반가사유상 2점을 상설로 전시하기 위해 특별히 마련한 '사유의 방'을 2021년 11월 개관, 많은 사람에게 깊은 감동을 선사하고 있다. 개관 3개월 만에 10만명이 다녀갔다고 한다.국보 83호는 로댕의 조각 작품 '생각하는 사람'보다 더 아름답고 자연스러운, 세계 최고의 작품이라는 찬사를 듣는다. 이 반가사유상이 1천200년 후에 탄생한 '생각하는 사람'과 900년 후에 그린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보다 더 많은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날이 머지않기를 기대한다. 태풍 '힌남노'가 지나간 후 경북 청도의 한 암자(성지암)에 다녀왔다. 여성 친구들이 다니는 암자인데 그녀들의 권유로 함께 갔다. 산속에 있는 이 암자를 방문한 날이 특히 청명한 날씨여서 가을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었다. 법당(무설전)이 하나만 있는 작은 암자다.이 법당 안에 들어가 홀로 앉았다. 좌우와 뒤쪽 모두 창문으로 되어 있어서 주변의 자연을, 그 기운을 온전히 느낄 수 있었다. 왼쪽으로는 푸른 잔디 마당, 그 뒤의 산등성이 곡선과 하늘이 심신을 상쾌하게 했다. 오른쪽으로는 낮은 돌담과 멀리 보이는 산자락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쾌청한 초가을의 기운에 서서히 내가 스며들어 갔다. 눈으로는 초록을, 코로는 가을의 내음을, 귀로는 벌레나 새소리를, 몸으로는 산들바람을 느끼며. 특히 남쪽 잔디마당 쪽의 풍경이 좋았다. 마당 한가운데 적당한 크기의 반가사유상 조각 작품(김호성 작)이 있는데, 절 마당에 참으로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철근과 좁고 긴 철판 등을 연결해 만든, 속이 빈 이 반가사유상 작품은 국보 83호를 모델로 한 것이다. 멀리 보이는 산과 하늘을 배경 삼은 잔디마당에 자리한 이 반가사유상은 이 암자에 특별한 기운을 불어넣고 있었다.걸작 국보 83호의 힘이다. 1천300년 전에 탄생한 우리의 반가사유상은 많은 예술가와 철학자에게 영감을 주었고, 이 시대의 작가와 스님에게도 영감을 주어 청도의 한 암자를 특별하게 만들고 있다. 무설전 안에도 법당에 어울리는 특별한 작품이 있다. 김길후 화가의 와불(臥佛) 작품이다.성지암 마당의 반가사유상을 통해서도 제행무상(諸行無常)의 이치를 확인할 수 있다. 시대와 환경에 따라 반가사유상도 새롭게 탄생하는 것이다.제행무상은 불교의 세 가지 진리이자 근본교리인 삼법인(三法印) 중 하나다. 모든 것은 시시각각으로 변해 한 모양으로 머물러 있지 아니하다는 것,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일체는 무상한데 사람은 변하지 않기를 바라는 바를 품고 산다. 거기에 모순이 있고, 그래서 괴로움과 불행이 초래된다.'반가사유상의 사유'를 통해 제행무상의 진리를 항상 잊지 않을 수 있으면 좋겠다. 글·사진=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경북 청도 성지암 무설전에서 바라본 마당 풍경. 잔디마당 위에 반가사유상 작품이 하나 설치돼 있다.국보 83호 금동반가사유상(국립중앙박물관).
재즈 피아노 거장 토미 플래너건의 처음이자 마지막 피아노 솔로 앨범 LP 출시
재즈 피아노 거장 토미 플래너건1930~2001)의 피아노 솔로 앨범 'Tommy Flanagan - In His Own Sweet Time'이 LP<사진>와 CD로 발매되었다. 이 음반은 지난 26년 동안 독일의 재즈 명문 엔자(enja) 레이블의 음악 도서관에서 잠자던 토미 플래너건의 미공개 마스터를 발굴·제작한 음반으로, 1994년 10월 9일 독일 바이에른 마을 노이부르크(Neuburg)의 '버드랜드 재즈 클럽'에서 공연한 토미 플래너건의 '라이브 서정시'이다. 1958년에 문을 연 유럽 최고(最古)의 재즈클럽에서 공연한 토미 플래너건의 이 기념비적인 공연은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피아노 솔로 앨범이 된 것이다. 토미 플래너건은 16년 동안 엘라 피츠제럴드의 피아니스트로 함께 했으며, 재즈의 고전으로 불리는 소니 로린즈의 'Saxophone Colossus', 존 콜트레인의 'Giant Steps'의 협연으로 유명하다. 플래너건은 45년 동안 리더작으로 40여 장의 앨범, 사이드맨으로 400여 개의 음반을 출시했다. 하지만 이번에 출시된 음반이 유일한 솔로 피아노 음반이다. 1970~1980년대 엔자 레이블을 통해 발표한 'Ballads & Blues'(1978), 'Super Session'(1980), 'Giant Step'(1982)은 플래너건의 3대 명반으로 꼽힌다. 김봉규 기자 bgkim@yeongnam.com
[김봉규 기자의 '지구촌 산책' .29] 中 저장성 부춘강…청산 속 숨어 있는 에메랄드 보석…황제 광무제 절친, 낚시하며 은거
부춘강(富春江)은 중국 저장성(浙江省) 경내를 흐르는 강이다. 길이는 100㎞ 정도. 이 강은 안후이성(安徽省)의 황산에서 발원하는데, 저장성 중북부를 지나고 항저우(杭州)를 거쳐 동중국해로 흘러든다. 이 강의 상류는 신안강(新安江)이고, 중류가 부춘강이며, 항저우를 흐르는 하류가 전단강(錢壇江)다. 지역별로 부르는 이름이 다른 것이다.부춘강과 그 주변은 특히 자연풍광이 아름다워 예로부터 산수화로도 많이 그려졌다. 특히 원나라 황공망의 부춘산거도(富春山居圖)는 중국 10대 명화로 꼽히는 걸작으로, 중국 최고의 산수화로 꼽힌다. 1347년부터 3년 동안 여섯 장의 화선지를 이어 붙여가며 부춘강의 풍경을 담은 후인 1350년 봄, 여든두 살의 황공망은 부춘산거도의 마지막 부분에 8행의 발문을 쓰고 낙관을 찍었다. 긴 두루마리 형식의 이 그림(33㎝×637㎝)에는 겹겹이 둘러선 산봉우리, 울창한 소나무와 빼어난 기암괴석, 구름과 안개에 덮인 농가 등이 어우러져 멋진 정취를 자아낸다.2007년 7월 항저우 서호를 둘러본 후 부춘강을 찾았다. 하류에서 배를 타고 엄자릉조대를 향해 천천히 거슬러 올라가는 여정이었다. 부춘강은 청산 속에 숨어있는 에메랄드 보석이라는 찬사도 듣는다. 강 양쪽의 첩첩한 푸른 산봉우리와 능선이 다양한 모습으로 펼쳐지는 그 사이를 고요히 흐르는 맑고 풍부한 물이 별천지를 연출했다. 그리고 강물 위 곳곳에 부평초가 수를 놓고 있어 각별한 풍광을 선사했다. 그 넓고 긴 강을 가고 오는 동안 함께한 일행 말고는 다른 여행객이 아무도 없었다. 신선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부춘강이 멋진 풍광과 함께 중국 역사에서 영원히 회자하도록 한 인물이 있다. 후한 때의 엄자릉(嚴子陵)이다. 그는 중국은 물론 한자문화권의 선비들에게 은둔의 표상이 된 주인공인데, 그 엄자릉이 은거하며 낚시를 하던 엄자릉조대(嚴子陵釣臺)가 이곳에 있기 때문이다.◆엄자릉이 낚시하던 조대엄자릉(기원전 37~서기 43)으로 더 널리 알려졌지만, 원래 이름은 엄광(嚴光)이다. 자릉은 그의 자. 저장성 닝보(寧波) 출신이다. 친구가 황제(후한 광무제)의 자리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은둔한 것으로 유명한 그의 원래 성과 이름은 장준(莊遵). 그러나 광무제가 황제가 된 후 황제 아들 이름이 유장(劉莊)이라서 그 이름을 쓸 수 없는 제도(避諱) 때문에 '장'자를 쓸 수 없게 되자, 성과 이름을 엄광으로 바꾸고 부춘산에 은거했다.광무제는 중국 역사상 정치를 잘한 황제 중 한 사람으로 꼽힌다. 전한을 찬탈한 왕망을 제압하고 한나라를 새로 부흥한 그는 전란으로 피폐한 백성을 위한 정책을 펴고 탐관오리를 단죄하는 등 덕치를 펼쳤다.엄자릉은 광무제 유수(劉秀)와 동문수학한 절친한 친구 사이다. 유수가 황제에 오르기 전 군대를 일으키자 엄자릉은 적극적으로 도왔으나, 그가 황제가 된 후부터는 은거에 들어갔다. 광무제는 엄자릉이 보고 싶어 초상화를 그리게 해 방방곡곡을 수소문하며 찾았다. 마침내 제나라 사람이 "어떤 남자가 양가죽 옷을 걸친 채 연못에서 낚시하고 있습니다"라고 전해왔다는 보고를 듣자, 광무제는 그가 바로 엄자릉이라 생각했다. 광무제는 귀한 예물과 함께 사신을 보내 궁으로 초대했다. 그러나 엄자릉은 세 번이나 거절한 뒤에야 할 수 없이 응했다.엄자릉이 도성에 도착하자 평소 친분이 있었던 사도(司徒·관직 명칭) 후패(侯覇)가 자신의 처소에서 얘기를 나누기 위해 사람을 보냈으나, 엄자릉은 응하지 않았다. 광무제는 그의 언행을 전해 듣고는 웃으며 "이 친구, 예전 그대로구먼"이라고 한 뒤 수레를 타고 엄자릉의 처소로 찾아갔다. 엄자릉은 황제인 광무제가 찾아와도 일어나지 않고 누워 있었다. 광무제는 누워 있는 엄자릉 옆에 앉아 그의 배를 어루만지며 나라를 다스리는 것을 도와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엄자릉은 "옛날에 요 임금은 그렇게 덕행이 있었지만, 허유(許由)가 들어서는 안 될 말을 들었다고 강물에 귀를 씻고, 그 이야기를 들은 소부(巢父)는 허유가 귀를 씻은 물조차 더럽다며 말에게도 물을 먹이지 않고 그냥 가버렸다는 허유와 소부의 고사를 모르는가"라고 말하며 거절했다. 광무제는 그냥 돌아가야만 했다.그 이후에도 광무제는 엄자릉을 불러들여 옛날 일을 언급하며 며칠 동안 지내며 함께 누워 자기도 했다. 이때 엄광은 자신도 모르게 광무제의 배에 다리를 얹는 실례를 저질렀다. 이를 본 환관이 황망하여 태사(太史)에게 보고했다.이튿날 태사가 광무제에게 지난밤 일을 빗대어 이렇게 말했다. "어젯밤에 갑자기 혜성이 황제의 별자리를 침범했습니다." 광무제가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짐이 엄광과 더불어 잤을 뿐이니 신경 쓰지 마시오!"광무제가 그에게 간의대부(諫議大夫)를 제수하려 하자, 사양하고 부춘산(富春山)에 들어가 다시 은거하였다. 서기 41년에 광무제가 다시 그를 불렀으나 오지 않았다. 서기 43년 80세에 생을 마쳤다. 광무제는 매우 상심하며, 바로 조서를 내려 돈과 곡식을 하사했다고 한다. 엄광은 부춘산에 묻혔다.후세 사람들은 부춘산을 '엄릉산(嚴陵山)'으로 부르기도 했다. 그리고 그가 낚시하던 강의 여울을 엄릉뢰(嚴陵瀨), 그가 앉아 낚시하던 바위를 '엄자릉조대(嚴子陵釣臺)'로 칭했다.중국 북송 때의 정치가인 범중엄(989~1052)이 엄주(嚴州)의 태수였을 때 엄자릉의 사당을 짓고 그 후손을 불러 제사를 지내도록 하면서 지은 글 '엄선생사당기(嚴先生祠堂記)'가 전한다. 그 내용의 일부다."선생의 마음은 해와 달보다도 높고, 광무제의 도량은 천지의 바깥까지도 감싸 안을 만하구나. 선생이 아니라면 광무제의 위대함이 이루어질 수 없었으며, 광무제가 아니라면 어찌 선생의 고결함을 이룰 수 있었겠는가. 탐욕스러운 사람을 청렴하게 하고 나약한 사람을 일으켜 세워주니, 이는 유교의 가르침에 커다란 공로가 있는 것이다. 나 중엄이 이곳의 태수로 와서, 이제야 비로소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내노라. 그리고 선생의 후예인 네 집안의 조세를 면제해 주어 선생의 제사를 받들도록 하였다. 그리고 또 다음과 같은 노래를 짓는다.'구름 위에 솟은 산 푸르고/ 강물은 깊고 넓네/ 선생의 덕은(先生之風)/ 산같이 높고 물처럼 영원하네(山高水長)'"엄자릉조대는 강가 언덕 위에 있다. 엄자릉조대 유적지에 도착하면 뒷면에 '산고수장(山高水長)' 글귀가 새겨진, 돌로 만든 패방(牌坊)이 맞이한다. 패방 부근에 엄자릉 소상(塑像)을 모신 사당 '엄선생사(嚴先生祠)' 등이 있다. 낚시하던 곳에 오르는 산길에는 이 조대를 찾은 시인묵객들의 석상과 그들의 시를 새긴 비석들이 즐비하게 서 있다. 소식, 육우, 정섭, 조맹부 등의 상과 많은 비석들을 볼 수 있다.강가 언덕 위에 오르면 평평하고 넓은 바위가 나타난다. 이곳에 '엄자릉조대' 비석이 비각과 함께 세워져 있다. 이곳에 오르면 유장하게 흘러가는 부춘강과 주변의 산들이 어우러진 풍광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다.한편 당나라 시인 이백은 엄자릉의 삶을 주제로 이렇게 읊었다.'소나무 잣나무는 고고하고 곧으니/ 복숭아나 자두 같은 얼굴 하기 어렵네/ 고결하여 환히 빛나는 엄자릉은/ 푸른 물결에 낚싯대 드리웠네/ 몸은 떠돌이별과 은거하고/ 마음은 뜬구름과 한가롭네/ 만 승의 천자에게 길게 읍하고/ 부춘산으로 돌아갔네/ 맑은 바람 천치를 씻어내는 듯하니/ 아득하여 오를 수 없네/ 나를 길게 탄식하게 하니/ 바위틈에 깊이 숨어 살려네'◆오자서 유적부춘강 가에는 중국 춘추시대 문무를 겸비한 정치가이자 '복수의 화신'으로 불리기도 하는 오자서(伍子胥)를 기리는 사당과 정자 서정(胥亭)도 있다.오자서는 원래 초나라 출신이다. 오자서의 아버지는 초나라 태자의 스승이었으나 BC 522년 태자 옹립 내분에 말려들어 장남과 함께 결국 초나라 왕(平王)에게 죽임을 당한다. 오자서는 복수를 다짐하고 도망을 가게 되는데,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이 강을 건너 오나라로 망명한다. 당시 엄청난 현상금이 걸린 오자서는 어떤 노인의 도움을 받아 무사히 강을 건널 수 있었다. 강을 건너기 전 얼마나 노심초사했던지 하룻밤 사이에 머리가 하얗게 세어버렸다고 한다. 이곳 사당에는 머리가 세기 전의 오자서와 머리가 센 다음의 오자서 상이 함께 봉안돼 있다.오나라로 도망가 공자 광(光)의 책사가 된 그는 BC 515년 광을 오나라 왕(합려)으로 즉위시키고 자신은 재상이 된다. 그 후 초나라 정벌을 주도면밀하게 계획하고 추진, 오나라를 군사 강국으로 만든다. 마침내 BC 506년에 대대적으로 초나라를 침공, 수도를 함락하고 종묘를 불태우는 혁혁한 전과를 거두었다. 그리고 평왕의 무덤을 파헤쳐 시신에 300대나 매질함으로써 사원(私怨)도 풀었다. '사기' 오자서열전에는 예전의 친구였던 신포서(申包胥)가 오자서의 이런 행동에 대해 천리(天理)에 어긋난다고 비난했지만, 오자서는 '나의 해는 저물고 갈 길은 머니, 도리에 어긋난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吾日莫途遠 吾故倒行而逆施之)'라고 말했다고 한다. '날은 저물고 갈 길은 멀다', 즉 '할 일은 많은데 시간은 없다'라는 뜻의 사자성어 '일모도원(日暮途遠)'은 여기에서 비롯한 것이다. 글·사진=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엄자릉조대에서 바라본 부춘강 풍경.부춘강 엄자릉조대 유적지 입구에 있는 패방의 뒷면. 엄자릉의 덕을 표현한 글귀 '산고수장(山高水長)'이 새겨져 있다. 앞면에는 중국 서화가이자 문화계 유명인사였던 조박초(1907~2000)의 '엄자릉조대'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엄자릉이 낚시하던 바위 위에 세운 '한엄자릉조대' 비석.부춘강가에 있는 오자서 사당의 오자서 상.
[김봉규의 수류화개(水流花開)] 배롱나무(2) 山寺 고목으로 많아…껍질 수시로 벗는 것처럼 욕망·번뇌 벗고 수행 전념 의미
추위에 약하고 햇빛이 잘 드는 곳을 좋아하는 배롱나무는 우리나라 남부지역에서 많이 볼 수 있었다. 옛날에는 서원과 종택, 정자, 사찰 등에 많이 심었다. 양정동 배롱나무처럼 옛사람들은 무덤 근처에도 배롱나무를 종종 심었다. 배롱나무가 자손의 부귀영화를 가져다준다고 믿었다고 한다. 대구 수성구 모명재 뒤에 있는 두사충의 묘에 가보면, 그 앞에 오래된 배롱나무 두 그루가 자라고 있다. 두사충은 중국 명나라 장수로, 임진왜란 때 원군으로 조선에 와 활동하다가 조선에 귀화한 인물이다. 전남 함평 백야산에 있는 함평이씨 선산의 묘소 제사를 위한 재실인 영사재(永思齋) 앞의 배롱나무 고목은 수령이 500년이 넘었다. 20여 년 전에 보호수(수령 500년)로 지정됐다.◆담양 명옥헌 배롱나무서원이나 종택의 사당 앞에도 배롱나무 고목이 많다. 대표적인 것으로 경북 안동의 병산서원 사당 존덕사(尊德祠) 앞 배롱나무를 꼽을 수 있다. 사당으로 오르는 계단 좌우와 전사청 마당 등에 자라는 배롱나무 고목 여러 그루가 여름이면 사당 주변을 붉은 꽃 천지로 만든다. 이곳 배롱나무는 2008년 안동시 보호수로 지정되었는데, 1613년 사당 존덕사를 건립하면서 류성룡 후손인 류진이 심었다고 한다.최근(2019년) 보물로 지정된 대구의 달성 하목정의 배롱나무도 유명하다. 하목정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한 낙포 이종문(1566~1638)이 1604년쯤 건립한 정자형 별당 건물이다. 하목정 주위에 배롱나무들이 둘러싸고 있는데, 그중 하목정 뒤편 언덕 위에 자리한 사당 담장 안의 배롱나무가 가장 오래된 고목이다.사당의 주인공은 전양군(全揚君) 이익필(1674~1751). 이익필의 위패와 초상이 봉안된 이 사당은 250여 년 전 창건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사당 담장 안에 배롱나무가 자라고 있다. 이익필은 1728년 이인좌의 난 때 공을 세워 공신에 올랐으며, 사후에 나라로부터 제사를 폐하지 말고 자손 대대로 모시라는 불천위(不遷位)의 영예를 받은 인물이다.배롱나무는 선비들이 특히 좋아했는데, 배롱나무 풍광의 진수를 보여주는 대표적 명소가 담양 명옥헌이다. 배롱나무를 위주로 조성한 정원인 이곳을 그 꽃이 만발했을 때 찾으면 황홀한 풍광이 탄성을 절로 자아낸다. 별세계에 온 듯 착각에 빠지게 한다.담양 소쇄원과 함께 조선 시대를 대표하는 민간정원인 명옥헌의 역사는 조선 선비 오희도(1583~1623)에서 시작된다. 벼슬에 큰 관심이 없던 그는 만년에 마을 뒷산에 '세속을 잊고 사는 집'이라는 뜻의 망재(忘齋)를 지어 살았다. 오희도가 세상을 떠나고 아들 오이정(1574~1615)이 아버지를 기리기 위해 정자 명옥헌을 짓고 앞뒤에 연못도 조성했다. 그리고 배롱나무도 심었다. 명옥헌 배롱나무의 시작이다.명옥헌 원림에는 수령 100년 이상 된 배롱나무 30여 그루가 있다. 배롱나무는 정자 명옥헌 주변의 소나무, 느티나무, 동백나무와도 잘 어우러지고, 연꽃이 핀 연못과 조화를 이뤄 더욱더 멋진 풍광을 선사한다. 정자 앞에 그 안에 작은 섬이 하나 있는 연못이 있고, 그 주위에 배롱나무가 늘어서 있다. 정자 주위에도 배롱나무가 둘러서 있다. 명옥헌에 '삼고(三顧)'라는 편액이 걸려 있는데, 인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 오희도를 중용하기 위해 세 차례 찾아온 일화가 서려 있다.보물 지정 달성 하목정 둘러싼 고목 선비들이 즐긴 담양 명옥헌 붉은꽃주변 나무와 잘 어우러져 멋진 풍광영동 반야사 수령 500년, 사찰 중 最古 조선 무학대사가 꽂은 지팡이가 자라 관음보살이 배롱나무 위 현신하기도꽃말 '떠난 임 그리움'·부귀영화 상징당나라 현종, 양귀비보다 사랑한 나무◆산사 배롱나무배롱나무는 사찰에서도 많이 심었다. 출가 수행자들이 껍질을 수시로 벗는 배롱나무처럼 세속적 욕망과 번뇌를 벗어버리고 수행에 전념하라는 의미에서 경계의 방편으로 삼으라는 것이었다고 한다.오래된 산사 대부분에는 배롱나무 고목들이 자라고 있다. 밀양 표충사, 순천 송광사, 승주 선암사, 고창 선운사, 김제 금산사, 김천 직지사, 양산 통도사, 구례 화엄사, 하동 쌍계사, 장성 백양사, 서산 개심사, 계룡산 신원사 등의 사찰을 한여름에 찾으면 붉은 꽃을 피운 수백 년 된 배롱나무를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산사 배롱나무 중 가장 오래된 나무는 영동 반야사의 배롱나무 두 그루다. 500년이 넘었다. 여름날 반야사 마당에 들어서면 멀리 보이는 배롱나무가 바로 눈길을 사로잡는다. 극락전 앞에 두 그루가 적당한 거리를 두고 서 있다. 극락전은 대웅전이 새로 건립되기 전에는 중심 법당이었다. 작은 법당인데, 붉은 꽃이 흐드러지게 핀 배롱나무가 완전히 가리고 있다. 배롱나무 앞에는 작은 삼층석탑(보물)이 서 있다. 이 배롱나무는 단연 이 사찰의 주인공이다.이 두 그루 배롱나무는 산사 배롱나무로는 보기 드물게 보호수(영동군수 지정)로 지정돼 있다. 1994년에 지정된 것인데, 안내판에는 당시 수령은 500년이고, 나무 높이는 8m와 7m, 가슴높이 지름은 1.5m와 1.2m 등으로 기록돼 있다. 한쪽 나무의 밑둥치는 성인 두 사람이 팔로 안아야 할 정도다. 방문 당시 한 스님이 지나가기에 잠시 배롱나무에 관해 물어봤다. 스님은 친절하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조선 시대 무학대사가 가지고 다니던 배롱나무 지팡이를 이곳에 꽂아두었는데, 이것이 나중에 둘로 나뉘어서 자라게 되었다고 한다. 반야사 스님이 들려준, 그야말로 전설 같은 이야기다.이 배롱나무는 오래전부터 사진작가들에게 많이 알려져 있었는데, 여름이 되면 해마다 수많은 전화가 걸려와 전화를 받는 일이 성가실 때가 많았다고 한다. 꽃이 만발했는지, 언제 절정이 되는지, 언제 가면 좋은 사진을 찍을 수 있는지 등을 물었는데, 요즘은 인터넷이 발달해 예전만큼은 전화가 걸려오지 않는다고 했다. 70여 년 전에는 관음전에 관음보살이 현신했는데, 당시 한참 동안 배롱나무 위에 머물다 사라졌다는 이야기를 할머니 신자들이 들려줬다는 말도 했다. ◆배롱나무 이야기배롱나무는 백일 동안 붉은 꽃을 피워 백일홍(百日紅)이라고도 불리지만, 정식 명칭은 아니다. 식물 백일홍과 구별해 '목백일홍(木百日紅)'으로도 부른다. 중국에서는 간지럼 타는 나무라는 뜻으로 파양수라 하고, 일본에서는 나무를 잘 타는 원숭이조차도 미끄러지는 나무라는 뜻으로 사루스베리(猿滑)라고 부른다. 나무줄기는 매끈하고 껍질이 자주 벗겨진다. 꽃은 7~9월에 피고, 부귀영화를 상징한다. 꽃말은 '떠나간 임에 대한 그리움'. 꽃은 대개 붉은색이지만, 보라색 꽃과 흰색 꽃을 피우는 나무도 있다. 중국의 당나라 현종은 배롱나무를 양귀비보다 더 사랑했다고 한다. 현종은 자신의 집무실 중서성(中書省)을 자미성(紫微省)이라 불렀는데, 이 자미성에 배롱나무를 많이 심었기 때문에 배롱나무꽃을 '자미화(紫微花)'라고 했다고 한다.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절명시(絶命詩) 4편을 남기고 음독·순국한 매천 황현은 '아침이고 저녁이고/ 천 번을 보고 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는다'라고 읊으며 이 꽃을 특히 사랑했다.숙부에게 내쫓긴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능지처참 형을 받은 사육신 중 한 명으로 절개의 표상인 성삼문도 배롱나무를 매우 좋아했다. 그는 자신의 일편단심과 충절을 100일 동안 변함없이 붉은 꽃을 피우는 배롱나무꽃에 담아 이런 시 '백일홍'을 남겼다.'어제저녁 꽃 한 송이 지고(昨夕一花哀)/ 오늘 아침 꽃 한 송이 피어(今朝一花開)/ 서로 일백일을 바라보는(相看一百日)/ 너와 마주하여 즐거이 한 잔 하리라(對爾好衡杯).'성삼문을 비롯한 사육신의 위패를 모시고 기리는 논산 충곡서원도 여름이면 곳곳의 배롱나무들이 붉은 꽃을 피워 그들의 일편단심을 대변한다.배롱나무에는 가슴 아픈 사랑의 전설도 서려 있다. 옛날 어느 어촌에 머리가 셋 달린 이무기가 살고 있었다. 이무기는 해마다 마을에 내려와 처녀를 한 사람씩 제물로 받아 잡아갔다. 어느 해는 제물로 바쳐질 처녀를 연모하는 한 청년이 처녀를 대신하겠다고 나섰다. 청년은 처녀의 옷을 입고 제단에 앉아 이무기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이무기가 나타나자 준비한 칼로 이무기의 목을 베었으나 하나의 목은 자르지 못했다. 이무기는 그대로 도망쳐 버렸다. 처녀는 청년의 용감함과 사랑에 반해 목숨을 구해준 은혜에 보답고자 평생 반려자로 모시겠다고 했다.그러나 청년은 이무기의 나머지 목을 마저 베어야 한다며 배를 타고 이무기를 찾아 나섰다. 떠나면서 "이무기 목을 베어 성공하면 하얀 깃발을 내걸 것이고, 실패하면 붉은 깃발을 걸겠소"라고 말했다. 처녀는 청년이 떠난 후 매일 빌면서 청년이 무사히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100일이 되는 날 멀리서 청년의 배가 돌아오는 모습이 보이는데, 불행히도 붉은 깃발을 걸고 있었다. 처녀는 청년이 이무기에게 당해 죽었다고 생각하고 자결하고 말았다. 그런데 그 깃발은 이무기가 죽으면서 내뿜은 피로 붉게 물든 것이었다. 사정을 알게 된 청년은 자신의 잘못을 통탄하며 처녀의 시신을 양지바른 곳에 묻어 주었는데, 이듬해 그 무덤에서 곱고 매끈한 나무 한 그루가 자라나 백일 동안 붉게 꽃을 피웠다. 글·사진=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영동 반야사 배롱나무. 보호수로 지정된 이 나무의 수령은 500년이 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초가지붕과 어우러진 경주 양동마을의 배롱나무.담양 명옥헌의 가을 풍경. 배롱나무 사이로 정자 명옥헌 지붕이 조금 보이는데, 여름이면 이곳은 붉은 배롱나무꽃 천지로 변한다.흰색과 보라색 꽃을 피운 배롱나무.
[김봉규의 수류화개(水流花開)] 배롱나무(1) 여름 100일간 붉은 자태 뽐내다 가을꽃에 바통
여름에 피는 꽃은 대부분 오래 피는 것 같다. 연꽃과 능소화가 그렇고, 무궁화도 마찬가지다. 꽃이 100일 동안 꽃이 피어 '백일홍'으로도 불리는 배롱나무도 마찬가지다. '열흘 붉은 꽃이 없다'라는 의미의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는 말을 무색하게 하는 꽃들이다.6월 말부터 피기 시작한 배롱나무꽃은 지금도 피어난다. 꽃이 한 번 피어 2~3개월 유지되는 것이 아니고, 꽃들이 연이어 피고 지는 것이기는 하지만. 이처럼 오랫동안 꽃을 피우는 배롱나무는 흐드러지게 꽃을 피워 여름 무더위를 잊게 해주고 가을로 들어선 뒤에도 한참 동안 더 진해진 빛을 발하며 가을꽃들에 바통을 넘겨준다. 이런 배롱나무를 요즘은 쉽게 볼 수 있다. 근래 들어 전국 곳곳에 가로수와 정원수 등으로 많이 심어졌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흔하지 않았다. 오래된 산사나 서원, 종택, 묘소 등이 아니면 잘 만나보기 어려웠다. 배롱나무도 고목이 적지 않지만,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경우는 한 건(두 그루)뿐이다. 부산 양정동 배롱나무다. 1965년 4월에 천연기념물 제168호로 지정된 이 배롱나무는 지정 당시의 명칭은 '부산진 배롱나무'였고, 추정 수령은 800년이었다. 부산시 부산진구 양정1동, 화지산 화지공원 내에 있다. 천연기념물 지정 당시, 이 나무에 대한 기록이다.'원줄기는 죽고 새로 자란 동쪽의 4그루와 서쪽의 3그루가 있다. 동쪽의 것은 키가 7.2m이고 가슴높이의 줄기 둘레가 60~90㎝ 서쪽의 것은 키가 6.3m이고 가슴높이의 줄기 둘레가 50~90㎝ 정도이다. 고려 중엽 때, 동래정씨의 2세 정문도공의 묘소 앞에 동서 양쪽으로 각기 1그루씩 심어진 것이 원줄기가 썩고 변두리 부분만 살아남아 오늘날의 모습으로 된 것이다.'두 그루의 원줄기는 오래전에 죽고 그 주변에 새로 자라난 가지들이 성장해 지금의 상태가 된 것이다. 지금은 별개의 나무들처럼 보인다. 최근에 측량해본 결과동쪽 나무는 높이 8.9m, 나무 전체 폭은 남북 10.9m와 동서 11.2m로 원형을 이루고 있다. 서쪽 나무는 높이 7.7m, 나무 폭은 남북 9.4m와 동서 4.11m이다.두 그루의 배롱나무가 있는 묘소는 동래정씨 시조 선산인 화지산 자락에 있는데, 정씨 가문이 이 묘역 일대를 가꾸어 오다 근래 시민들에게 개방하면서 '화지(華池)공원'으로 부르게 되었다.천연기념물 배롱나무는 동래정씨 시조로 알려져 온 2세조 정문도의 묘소 앞 좌우에 있다. 정문도는 고려 중기 동래 지역의 호장(戶長·고려 시대 지방 향리직의 우두머리)을 지낸 인물이다. 이곳에 그의 묘소를 쓴 이후 후손 중 고려와 조선 시대에 많은 인재가 배출돼 명문가로 성장했다고 한다. 이 정문도 묘는 '정묘(鄭墓)'로 불리어 왔다. 배롱나무 아래 1732년에 세운 묘비 '동래정씨 시조 고려안일호장부군묘갈(東萊鄭氏始祖高麗安逸戶長府君墓碣)'이 서 있다. 묘비명은 후손이 썼다.이곳은 명당으로도 유명한데, 묘비 내용 중 '공께서 세상을 떠나서 장사 지낼 적에 행상(行喪)이 화지산에 이르자 마침 눈이 녹은 것이 범이 웅크리고 앉은 모습과 같은 기이함이 있었다. 그래서 그곳에 장사 지냈다'라는 구절이 있다.배롱나무는 이 정묘를 조성할 때 심은 것이라 전한다. 정문도의 생졸년은 알려지지 않으나 그의 손자 정항이 1136년 57세 때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다. 정문도가 1100년 전후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하면 그 수령이 지금은 900여 년 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지금의 나무둥치가 900년이 된 것은 아니다. 국내 최고령 배롱나무인데, 현재 생장 상태가 양호한 상황은 아니다. 양쪽 다 주홍색 꽃이 핀다.정묘 주변에는 정문도를 기리는 사당인 추원사가 있고, 정묘를 수호하기 위해 고려 때 창건한 화지사도 있다. 화지사는 영호암(永護庵), 만세암(萬世庵), 정묘사(鄭墓寺) 등으로 불리다가 최근에 화지사라고 부른다고 한다. 이 배롱나무가 '정묘사 배롱나무'로도 불리는 이유인 것 같다. 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 ☞[김봉규의 수류화개(水流花開)] 배롱나무(2)에서 계속됩니다.부산 양정동 배롱나무. 1965년에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이 배롱나무는 900년 전 정문도의 묘소 앞에 심은 것으로 두 그루가 성장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문진우 촬영, 2015년 7월)
삼바와 재즈의 세련된 만남, 두스코 고이코비치 'Samba Do Ma(바다의 삼바)' LP 출시
빈틈없는 멜로디 프레이징과 트럼펫·플뤼겔혼으로 들려주는 하이클래스 발라드 연주의 1인자 두스코 고이코비치의 'Samba Do Mar(바다의 삼바)' LP<사진>가 나왔다. 두스코 고이코비치는 신선하고 번뜩이는 그만의 브라질을 보여준다. 빌라 로보스의 바로크풍 곡들과 안토니오 카를로스 조빔의 전설적인 보사노바 곡, 아르헨티나 출신의 세르히오 미하노비치와 자신의 독창적인 곡들로 꾸며진 앨범이다. 특히, 헝가리 출신의 기타 비르투오소 페렝 스넷베르거(Ferenc Snetberger)가 고이코비치와 짝을 이뤄 브라질 무드를 발산하는 멋진 사운드와 솔로 연주를 뽐낸다. 옛 유고슬라비아 출신의 세계적인 재즈 트럼펫 연주자 두스코 고이코비치는 유럽을 주무대로 지난 50년간 재즈 뮤지션으로 활동하며 트럼펫과 플뤼겔혼 연주 뿐만 아니라 작곡가와 편곡자 등으로 활동 영역을 넓혀왔다. 마일스 데이비스, 디지 길레스피, 듀크 조단 등 재즈의 거장들과 함께 연주하면서 거장의 반열에 올라섰다.그의 음악은 단순히 미국식 비밥의 재연이 아닌 유럽적인 감수성, 동유럽의 특색을 반영한 독자적인 스타일을 구축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평론가들로부터 '첫 곡이 플레이되고 5초 안에 당신은 이 음반의 노예가 될 것' '동유럽의 서정과 브라질의 열정의 교감' 등 호평을 받으며 '독일 레코드 비평가상' '스윙저널 그랑프리' 등을 수상했다 독일 엔자(enja) 레이블의 화제작으로, 180g 오디오파일 화이트 컬러 음반. 1천 장 한정판.김봉규 기자 bgkim@yeongnam.com
[흥미로운 명필이야기 22] 북송 서예가 미불…날카로운 칼로 적진 베어버리고 강한 쇠뇌로 천리 쏘아 꿰뚫는 형세
미불(1051~1107)은 중국 북송의 화가이자 서예가. 자가 원장(元章)이어서 미원장으로도 불린다. 호는 녹문거사(鹿門居士), 양양만사(襄陽漫士) 등. 화가로서는 발묵산수(撥墨山水)를 배워 점묘에 의한 미법산수(米法山水)를 시작, 남화(南畵)의 대표 작가로 평가받는다.그의 글씨는 침착하면서 통쾌하여 '준마를 탄 듯한 입신의 경지'라는 찬사를 받았다. 역사상 가장 뛰어난 서화 감식가 중의 한 사람으로도 칭송받고 있다. 행동거지가 가끔 미친 듯하여 '미전(米癲)'으로도 불린 그에 대해 '송사(宋史)' 중 '미불전'은 '특히 서예에 절묘했으며, 침착하면서도 하늘을 나는 것 같았다. 왕헌지의 필의를 얻었다'라고 적었다.서예 공부에 특히 매진했던 그는 스스로 "평생 내가 종이에 쓴 것을 합치면 10장은 넘는다"라고 이야기했다. 그의 아들도 그에 대해 "소장하고 있던 진당(晉唐)의 진적(眞跡)을 책상에서 펼쳐보지 않은 날이 없으며, 손에서 두루마리를 놓지 않고 이를 임서하며 공부했다"라고 전했다.미불은 '군옥당첩(君玉堂帖)'에서 자신의 글씨 공부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나는 처음에 안진경의 글씨를 배웠는데, 이때가 칠팔 세 때였다. 글자가 너무 커서 한 폭에 다 들어가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 뒤 유공권의 긴밀하게 짜인 결구를 보고 그가 쓴 금강경을 배웠다. 오래 있다가 이것이 바로 구양순에서 나온 것임을 알고 구양순을 배웠다. 오래 지나니 글씨가 마치 목판에 도장을 찍고 주판알을 배열하듯 일률적으로 되었다. 그리고 저수량을 좋아하여 가장 오랫동안 배웠다.'황정견은 "미불의 글씨는 마치 날카로운 칼을 가지고 적진을 베어버리고, 강한 쇠뇌로 천 리를 쏘아 목표물을 꿰뚫는 형세이다. 다른 서예가들의 필세가 여기서 다한다"라고 평했다. 미불은 옛사람들의 묵적을 임서하는 데도 남달리 뛰어나, 사람들이 때때로 진품과 그의 임서작품을 분간하지 못하곤 했다. 그는 또한 서화 평론을 좋아해 '서사(書史)' '화사(畵史)' '보장대방록(寶章待訪錄)' 등의 책을 지었다. 전하는 서예 작품으로, 38세 때 스스로 시를 짓고 행서 35행으로 쓴 '초계시첩(苕溪詩帖)'을 비롯해 '축소첩(蜀素帖)' '다경루시첩(多景樓詩帖)' '배중악명시첩(拜中嶽命詩帖)' '산호첩(珊瑚帖)' 등이 있다.배중악명시첩도 미불이 시를 짓고 행서로 쓴 작품이다. 44세 때 쓴 것이라고 한다. 옛사람들의 장점을 모아 스스로 일가를 이루고 있음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시첩 뒤에 원나라 서화가 예찬이 쓴 발문은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소동파는 미불이 문장이 맑고 뛰어나면서 빼어나며, 글씨는 초탈하고 묘하여 입신의 경지에 들어갔다고 말했다. 당시 이미 아는 이가 이와 같이 평가를 했는데, 하물며 후세에 그의 시를 외우고 글씨를 보는 사람이야 더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미불이 앞서간 대가들을 넘어서 자신만의 서풍을 형성할 수 있었던 것은 많은 대가, 여러 가지 서풍, 여러 시대의 서예작품을 열심히 공부했기 때문이다. 미불은 왕희지에 대해 우호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왕희지보다 그 아들인 왕헌지를 더 좋아했다. 때로는 이왕(二王)보다 저수량을 더 우대하기도 했던 그는 저수량을 가장 오랫동안 공부했고, 실제 그가 변함없는 칭찬을 보낸 이는 저수량뿐이다. 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미불 작 '산호첩'
[옛사람들의 행복콘서트] 공익을 생명처럼…"富·권력·명예만 좇으며 사는 삶이 어찌 행복하랴"
경제적으로 생활이 안정되지 않으면 안정된 마음, 바른 마음을 유지하기 어렵다. 의식주를 비롯, 생존에 필요한 기본적 여건도 충족되지 않는 이들에게 공익이나 자비, 공명정대 등을 실천하기를 요구하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맹자의 '무항산(無恒産)이면 무항심(無恒心)'이라는 유명한 말이 바로 이것을 이야기하고 있다.제나라의 임금(宣王)이 정치에 관해 묻자 맹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경제적으로 생활이 안정되지 않아도 항상 바른 마음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오직 뜻있는 선비만 가능한 일입니다. 일반 백성에 이르러서는 경제적 안정이 없으면 항상 바른 마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항상 바른 마음을 가질 수 없다면, 방탕하고 편벽되며 부정하고 허황하여 어찌할 수가 없게 됩니다. 그들이 죄를 범한 후에 법으로 그들을 처벌한다는 것은 곧 백성을 그물질하는 것과 같습니다."바른 마음, 맑은 마음을 유지하는 유항심(有恒心)은 행복한 삶을 사는 데 매우 중요하다. 경제적으로 넉넉한 유항산자이든, 가난한 무항산자이든 마찬가지다. 맹자도 무항산이면서 유항심으로 사는 것은 뜻있는 선비나 가능하다고 한 것처럼, 아무나 그런 삶을 살 수는 없다. 하지만 유항심일 수 있는 유항산자인데도 바른 마음을 갖지 못하면, 행복할 수 있는데도 행복을 멀리하는 불행한 사람이다. 항심하려고 애쓰지 않는 유항산자는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없을 것이다.인간의 행복은 외적 조건이나 환경보다 주관적 의식이 더 좌우한다. 그리고 즐거움이나 기쁨의 강도보다 그 빈도가 더 중요하다. 양심을 거스르는 언행을 하면서 진정한 행복을 바라는 것은 어불성설일 것이다. 달리 말하면 의미 있는 삶이 행복한 삶과 직결되는 것이다. 크든 작든 남에게 도움이 되는 삶이 보람과 행복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공직자는 사익을 멀리하고 공익을 우선하며 일을 해야 더욱 더 행복할 수 있을 것이다. '공(公)'을 생명처럼 여기며 공직자의 삶을 살았던 사람이 적지 않다. 경북 봉화 닭실마을에 있는 정자인 청암정의 주인공인, 조선 중기 문신 충재 권벌(1478~1548)도 그런 선비 중 한 사람이다. 그는 후덕한 면모 속에 '죽음으로도 뺏을 수 없는 절의'를 지녔던 대표적 인물이었다. 그는 평생 흐트러짐 없는 절의 정신과 '공(公)'에 입각한 신념으로 일관한 삶을 살았다.벼슬길로 나선 이후 오랜 관료 생활 동안 줄곧 '공(公)'을 우선시하며 행동했던 권벌은 1512년 8월 어느 날 경연(經筵: 임금에게 경서나 역사를 강론하는 자리)에서 "무릇 시종(侍從)하는 신하는 생각한 것이 있으면 반드시 말하는 것이니, 말하는 것이 만약 '사(私)'라고 하면 그르거니와 그것이 '공(公)'이라면 어찌 꺼리며 말하지 않겠습니까. 임금은 마땅히 악한 것은 멀리하고 착한 것은 드러내야 하는 것이니, 착한 말은 써주고 악한 말은 버리는 것이 마땅합니다"라고 역설했다.그는 공에 해당하는 것이면 어떤 사안이라도 말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아울러 그는 임금 역시 임금 자리를 공으로 여기는 군주관이 필요함을 강조했다. 1518년 6월에는 "요순은 천하를 만백성의 소유로 보고 자기 자신을 그것과 상관이 없는 것으로 여겼던 사람이었습니다. 임금이 그 자리를 천하의 공기(公器)로 여긴다면 그 마음은 넓게 두루 미쳐서 백성에게 은혜를 입힐 수 있지만, 만약 천하를 자기의 소유물로 여긴다면 사사로운 일만을 생각하고 또 욕심이 일어나게 되어 자신을 위하고 욕심을 채우는 일만 하게 됩니다"라고 했다.그는 공을 생각한다면 어떤 사안이라도 군주에게 말해야 하고, 옳다고 생각한 바를 꾸밈없이 그대로 말하는 것을 공이라고 믿었다. 이런 충재에 대해 사신(史臣)은 '충성스러운 걱정이 말에 나타나고 의기가 얼굴색에 드러나 비록 간신들이 늘어서서 으르렁거리며 눈을 흘기는데도 전혀 개의하지 않고 늠름한 기상이 추상같았으니, 절개를 굳게 지키는 대장부라 일컬을 만했다'라고 기록하고, '머리를 베고 가슴에 구멍을 낸다 해도 말을 바꾸지 않을, 실로 무쇠 같은 사람(眞鐵漢)이었다'라고 평했다.'남자는 모름지기 천 길 절벽에 선 듯한 기상이 있어야 한다'라며 스스로 경계했던 난은 이동표(1644~1700) 또한 청렴 강직한 문신으로 이름이 높았다. 그는 사간원 사간이 되어 시정을 논한 '논시정소(論時政疏)'에서 이렇게 간언했다."사대부의 출처거취가 올바르지 못해 승진을 다투어 관기(官紀)가 극도로 혼탁함에도 대각(臺閣: 사헌부와 사간원)이 바로잡지 못함은 직책을 다했다고 할 수 없고, 전하가 간신(諫臣)을 대하는 도리 또한 다하지 못해, 10대간(臺諫)이 굳이 다투어도 1대신(大臣)이 말 한마디로 제지하며 잘난 듯이 남의 뜻을 꺾기만 하고 받아들이는 아량이라고는 없으니, 오늘날 언로가 막힌 것이 어찌 제신(諸臣)들만의 탓이겠습니까? 임금과 신하가 서로 정의(情意)가 통하지 못해 독촉과 견책이 따르게 되니, 신하는 임금의 뜻에 어긋날까 두려워 아유구용(阿諛苟容: 아첨하는 일)을 일삼아서 이른바 '황공대죄(惶恐待罪) 승정원(承政院)이요 상교지당(上敎至當) 비변사(備邊司)'라는 옛말이 불행히도 오늘의 현상입니다."승정원은 대통령실에 해당하고, 비변사는 국가안보위원회와 유사한 기관이었다.사림의 종사(宗師)로 추앙받던 남명 조식(1501~1572)이 단성현감에 임명되자(1555년) 현감직을 사양하며 상소문을 올린다. 조선을 놀라게 한 극언(極言)으로 유명한 이 상소문은 '단성소(丹城疏)' 혹은 '을묘사직소(乙卯辭職疏)'라고 불린다. 그중 일부다.'알지 못하겠으나, 전하께서 좋아하시는 바는 무엇입니까? 학문을 좋아하십니까, 풍류와 여색을 좋아하십니까, 활쏘기와 말 달리기를 좋아하십니까, 군자를 좋아하십니까, 소인을 좋아하십니까? 좋아하시는 바에 따라 존망이 달려 있습니다.진실로 어느 날 척연히 놀라 깨닫고 분연히 학문에 힘을 써서 홀연히 덕을 밝히고 백성을 새롭게 하는 도리를 얻게 된다면, 덕을 밝히고 백성을 새롭게 하는 도리 속에는 모든 선이 갖추어져 있고 모든 덕화(德化)도 이것에서 나오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나라를 고루 공평하게 할 수 있고 백성을 화평하게 할 수 있으며, 위태로움도 편안하게 할 수 있습니다.'공직에, 특히 고위공직에 있으면서 본분인 공익에는 별 관심이 없고 사리사욕 채우는 데 더 마음을 쓰는 사람이 행복할 수 있을까. 먹고 사는 데 전혀 어려움이 없는데도 평생 부와 권력, 명예를 좇으며 항심으로 살지 못하는데 어떻게 행복할 수 있겠는가. 글·사진=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공(公)'을 생명처럼 여겼던 권벌이 1526년에 지은 청암정(경북 봉화).권벌이 항상 휴대하고 다녔던 책 '근사록'.
[동추(桐楸) 금요단상]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다문화 이웃
얼마 전 외국인 이주노동자 후원 행사에 다녀왔다. 미등록 외국인 근로자를 위주로 한 이주노동자를 돕는 단체인 경산이주노동자센터(소장 안해영·재중동포)가 주최한 '2022 후원의 밤' 행사로, 대구삼성라이온즈파크 내 한 카페에서 열렸다. 각국에서 온 이주노동자들과 센터 관계자, 다양한 자원봉사자를 비롯한 후원자 등이 참석해 치킨과 맥주, 이주노동자들이 준비한 음식 등을 즐기는 훈훈한 분위기였다. 감사패 전달, 가수들의 공연 등이 펼쳐졌다.센터에서 한국어수업과 고충상담을 돕고 있는 친구의 권유로 참석하게 되었는데, 이런저런 현실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주노동자를 비롯한 국내 체류 외국인 문제를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2000년대 들어 결혼이주여성과 외국인 근로자 유입이 급증하면서 국내 체류 외국인이 2019년 말 기준으로 252만4천656명(장기 체류자 173만1천803명, 단기 체류자 79만2천853명)에 이르렀다. 불법체류자도 39만여 명이나 됐다.다문화는 이제 선택이 아닌 필수인 사회가 되었다. 외국인 인권, 다문화가정 자녀교육, 외국인 범죄, 지역주민과의 갈등, 불법체류 등 여러 가지 심각한 문제가 야기되고 있는 현실이다. 건강하고 발전적인 다문화 사회를 위한 보다 근본적 정책 방향 정립과 치밀한 대책 마련이 절실하다는 생각이다. 우리 역사에도 다문화 사회에 어떻게 성공적으로 대처했는지 참고할 만한 사례들이 적지 않다. 고구려 각저총 벽화에 씨름하는 두 남자가 그려져 있다. 이들의 이목구비를 보면 코가 높고 쌍꺼풀이 짙어 고구려인으로 보기 어렵고, 중앙아시아 출신 서역인으로 추정된다. 신라 제42대 왕인 흥덕왕이 묻힌 경주 흥덕왕릉에 가면 무덤 입구에 서 있는 무인석이 눈길을 끈다. 이목구비와 터번(아랍인 두건) 등을 보면 아랍인 모습임을 금방 알 수 있다. 이와 비슷한 무인석상은 경주 괘릉에도 있다. 2005년 봄 경주를 방문한 이라크국립박물관 연구원들은 괘릉의 무인석상을 보고 '자신들의 조상을 닮은 모습'에 깜짝 놀랐다고 한다.이는 당시 신라인과 고구려인이 서역인과 활발한 국제교류를 하고 외국인에 대해 개방적이었음을 보여주는 사례일 것이다.고려는 더 개방적이고 적극적인 외국인 포용 정책을 폈음을 알 수 있다. 고려는 오는 자는 거절하지 않는다는 '내자불거(來者不拒)'라는 정책을 통해 이주민이 고려 사회에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도왔다. 유민과 이주민을 귀화인으로 적극적으로 수용한 것이다. 귀화하면 이름을 호적에 올리고 성을 하사했다. 주택과 식량, 가축 등도 내려주었다. 이런 정책 덕분에 우리나라 귀화성 136개 중 60여 개가 고려 때 시작되었다. 물론 범법자가 생기면 남해안 지방의 섬에 유폐하는 등 엄격한 관리도 병행했다.귀화인들은 주요 관직에 오르기도 하면서 고려 사회의 중심부까지 진출했다. 진정한 고려인으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이다. 고려는 자국민이 된 이방의 인재를 통해 풍성한 문화와 강력한 국력을 갖추어 나갔다. 벽란도를 통해 송나라는 물론 대식국이라 불리던 무슬림 상인과도 무역을 했다. 대식국 상인을 통해 서역에 고려가 'corea(코리아)'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이주 노동자가 없으면 우리 경제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상황까지 왔지만, 이들에 대한 차별은 여전히 존재한다. 열악한 노동환경은 말할 것도 없고 거주권과 인권 침해 사례는 지금도 끊이지 않고 있다. 정부가 코로나19 등으로 심화한 인력난 해결을 위해 이주노동자 카드를 꺼내 들면서도 문제 해결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 것 같다.경주 최부자 가문의 6훈(六訓) 중에 '주변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도록 하라'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가 들어있다. 어떤 난리가 일어나도 화를 당하지 않고 만석꾼 부자 집안을 대대로 300년 동안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다. 개인이든 국가든 최대한 베풀며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 옳다. 사필귀정이고 인과응보인 것이 인간사 아닌가. 글·사진=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지난달 13일 대구삼성라이온즈파크의 한 카페에서 경산이주노동자센터가 마련한 '2022 후원의 밤' 행사가 열렸다.지난달 13일 대구삼성라이온즈파크의 한 카페에서 경산이주노동자센터가 마련한 '2022 후원의 밤' 행사가 열렸다.다문화가족 문화체험행사에 참가한 결혼이주여성들이 다문화멘토의 도움을 받아 명절 음식을 만들고 있다. 〈영남일보 DB〉
[김찬일의 방방곡곡/길을 걷다] 최고령 MC 이름 딴 빼어난 비경의 옥연지, 송해선생의 푸근한 미소와 음성 서려있는 듯
달성군 옥포 소재 송해공원걷기만 해도 100세 무병장수한다는 '백세교'수중 보름달·풍차 반대편 로드 지나다 보면이름부터 웃음 부르는 '담소·실소 전망대' 만나 故송해선생, 세계 최고령 MC 기네스에 등재 부인 故석옥이씨 고향 옥포를 제2고향 삼아'송해기념관'선 선생 삶 반추하며 어록 되새겨송해공원. 정말 찰진 이름이다. 전국에 공원이 허다하지만, 이름 하나만으로도 독보적인 유명세를 떨친다. 여기도 송해공원이 되기 전에는 그냥 하나의 유원지에 불과했다. 그러나 송해공원이 되고, 우리가 송해공원을 불러 주었을 때 하나의 의미가 되고, 관광의 꽃이 되었다. 마치 김춘수의 시(詩) 꽃처럼.옥포 옥연지가 송해공원 얼개다. 8월 어느 날 오후, 호수는 잔잔하고 아름다웠다. 비슬산에서 내려온 산줄기가 호수에 검은 물그림자를 만든다. 그 뭐랄까, 아무르 하구의 검은 강처럼. 그 밖에 물빛은 하늘이 잠겨서인지 파르라니 하다. 어쩌면 우리가 태어날 때, 몸에 번져 있던 스탬프 푸른 몽골 반점과 같은 때깔이다. 물레방아와 생태연못을 관람하고 걷기를 시작한다. 하트터널을 지난다. 사랑의 파문이 가슴에 인정 샷을 한다. 걷기만 해도 100세까지 건강하고 너끈하다는 백세교를 건너, 팔각정 백세정에 오른다. 옥연지의 빼어남이 눈자위에 얼룩진다. 풍경은 언젠가 가 닿고 싶었던 상상의 화면이다. 고요한 수면을 응시한다. 정적이 감도는 저 무언의 못에 강력한 힘이 있다.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마음에서 솟구치는 부력이 느껴진다. 이런 굴절이 지워진 원초의 에너지가 나를 바꾸는 첫걸음이라 생각된다. 백 세까지 애면글면 살면 인생의 정답이 될까. 루소는 '식물은 재배에 의해 가꾸어지고, 인간은 교육에 의해 만들어진다'라고 했다. 산다는 건 호흡하는 것이 아니라 활동하는 것이다. 가장 잘 산 사람이란 가장 오래 세월을 산 사람이 아니라, 인생을 가장 잘 체험한 사람이라 했다. 이즘에서 문득 송해 선생님이 떠올랐다. 그분은 어떤 삶을 경험하며 살아왔을까. 송해의 닉네임과 대명사를 에둘러 찾아보자. 국민의 대축제, 격식 없는 흥겨움, 우리 시대의 딴따라, 세대 간의 연결, 유쾌한 웃음, 일요일의 남자, 전국팔도 유람. 이것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는다. 전 국민과 함께 울고 웃던 영원한 국민 MC 송해(Song Hae). 세계 최고령 MC 기네스 등재. 40여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전국노래자랑'의 최장수 진행자, 가수, 희극인, 영화배우, 라디오 DJ 등 다방면으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우리가 그분을 부르는 호칭은 영원한 오빠, 선생님, 할아버지, 선배님, 해형 등 매우 많다. 이는 세상과 이어진 송해의 폭넓은 삶의 스펙트럼을 보여주는 방증이다. 구순을 넘은 연세에도, 무대에서 관중과 함께 시시콜콜 웃고 울며 우리 모두의 '형님, 오빠'가 될 수 있었던 속살은 송해만이 가진 구수함 때문이다.그럼 송해 선생님의 일생을 간략하게 무꾸리 해보자. 그분은 1927년 4월27일 황해도 재령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송복희이다. 어릴 적부터 장난기 많고 인사 잘하는 개구쟁이로 마을에서 소문이 자자했다. 또 노래 부르기를 좋아해 재능이 남달랐다. 1949년 아버지의 반대에도 해주음악전문학교에 입학, 성악을 공부하였다. 이렇게 되기까지 어머니의 뒷받침이 큰 영향을 미쳤다. 학업 도중 6·25전쟁이 터지자 처음에는 고향 집에서 피란했다. 당시 구월산 일대에서 암약하던 북한인민군 유격대의 모병을 피하려 인근 마을에 숨었다가 집으로 돌아오기를 수차례 했다. 그러다가 1·4후퇴 때에 다시 집을 나서며 어머니께 "잠시 또 피했다가 오겠습니다"라고 인사를 드렸다. 어머니는 걱정스러운 눈길로 송해에게 "얘야 이번에는 정말 조심하거라" 하며 아들을 보냈다. 송해는 "걱정하지 마세요"라고 대답하고 집을 나섰다. 그게 마지막 인사가 될 줄 자신도 몰랐다.송해는 피아의 구분마저 없던 아수라장의 전쟁터에서 피란 행렬 따라 해주 연안까지 왔다. 여기서 피란선을 얻어 타고 연평도에 다다르게 된다. 연평도에서 유엔군이 준비한 LST에 몸을 싣고 3일 밤낮을 항해하여 부산에 도착하였다. 본명이 송복희인 그분은 피란선 함상에서 새로운 각오로 송해라는 이름으로 개명하였다. 부산에서 혈혈단신으로 이리저리 유랑하다 국군에 입대, 대구에 있던 육군본부 통신병으로 배치되었다. 그러나 군대의 허니문인 휴가가 와도 오갈 데가 없었다. 외톨이가 그분의 족쇄였다. 이를 딱하게 여긴 부대 선임이 자기 고향으로 함께 데려가 휴가를 보내곤 했다. 그 선임이 누이까지 소개해 주어 그런 인연으로 결혼하였다. 바로 석옥이씨다. 이제 송해는 부인 석옥이씨의 고향 옥포 기세리가 제2 고향이 되었다. 한편으론 서울서 창공악극단에서 데뷔하여 가수, MC, 코미디언 등 다방면으로 활약하였다. 특히 1988년 5월8일부터 약 40년간 '전국노래 자랑'을 진행, 국민 MC로 떠올랐다. 그러다 2022년 봄 코로나 확진을 받았고, 5월 '전국노래자랑' 진행까지 맡았다. 하지만,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2022년 6월8일 향년 95세를 일기로 타계하였다. 정말 파란만장한 일생이었다. 수중 보름달과 풍차의 반대편 로드로 걷는다. 담소 전망대가 나온다. 눈가에 웃음을 담고 보면 복(福)을 불러오는 행운의 풍경이 된다. 대화도 웃으면서 해야 한다. 언제나 미소를 띠고 말씀하시던 송해 선생님의 얼굴이 눈에 아슴아슴하다. 불과 250m 가면 금굴이 있다. 어디를 살펴도 금은 없고 굴만 있다. 더 깊이 멀리 파면 거기에 금이 있을까. 석가는 자기 마음속에 금이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도 우리는 한사코 마음 밖에서 금굴을 파고 있다. 왜일까. 마음속의 금, 단꿈 같은 법어다. 실소 전망대를 지나 폭소전망대에 도착한다. 실소도 폭소도 웃음이다. 박장대소를 한다. 손뼉까지 치며 파안대소도 해본다. 좀 더 참을 걸, 좀 더 베풀 걸, 좀 더 기도할 걸. 껄껄껄, 다시 통쾌하게 웃는다. 그래도 모자라서 배꼽을 잡고 웃는다. 이렇게 눈물이 나도록 웃고 기뻐하면, 허공에서 송해 선생님이 함박웃음으로 실루엣을 그린다.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웃음과 익살로, 현실의 골문에 오버래핑 성공과 희망을 슛, 득점하시던 송해 오빠의 발효된 순발력은 우리의 감탄이고 존경이었다. 출렁다리도 구름다리도 지난다. 이제 얼추 한 바퀴 돌았다. 송해기념관에 들른다. 그분이 평소 자주 하시던 말씀이 적혀있다. '인생이란 나도 모르게 흘러가는 것.' '저는 사람을 많이 아는 게 부자다 라고 생각해요. 그게 바로 나이거든요.' '저는 사람을 많이 사귀면서 느낀 즐거움에서 힘을 얻어요.' 송해 오빠의 참모습은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변화 시켜, 관중과 기쁨의 무대에서 만나는 데 있었다. 몸짓 혹은 상황만으로도 웃음을 만들어 내는 분위기가 그분의 퍼포먼스였다. 그의 일생을 다 말하기에는 벽이 너무 높다. 그분이 평소에 자주 불렀던 노래를 여기에 옮기면서 그 가사와 음정이 품고 있는 회한의 감정을 따라가면 그분의 일생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유랑청춘'은 이렇다. "눈물 어린 툇마루에 손 흔들던 어머니, 하늘마저 어두워진 나무리 벌판아, 길 떠나는 우리 아들 조심하거라, 그 소리 아득하니 벌써 70년, 보고 싶고 보고 싶은 우리 엄마여."그나저나 '딴따라' 도 한번 보자. "강산이 좋다, 사람이 좋다, 풍악 따라 걸어온 유랑의 길, 바람 속에 청춘이 간다, 인생이 이거라고 이거라고 어느 누가 말 할 수 있나, 아 오늘은 어디에서 임자 없는 노래를 불러보나, 가진 것 없어도 행복한 인생, 나는 나는 나는 딴따라." 노래는 그분 인생의 등뼈였다. 그분은 음악과 웃음으로 일생의 퍼즐을 맞췄다. 이렇게 그분이 되찾은 무대, 되찾은 영혼, 되찾은 생명이 우리에게 저 보들레르적인 교감을 일으켰다. 그분의 인간적인 웃음과 공감이 무슨 마술처럼, 가장 일상적인 일들이 코미디가 되고, 해학으로 탈바꿈하는 것이다. 그것이 국민에게 받아들여지고 숙성되어 또 다른 꿈과 현실로 진화하는 것이다. 글=시인·방방곡곡트레킹 회장 kc12taegu@hanmail.net사진=백계분 여행사진 작가☞문의: 대구광역시 달성군 관광과 (053)668-3913 ☞내비주소 : 달성군 옥포읍 기세리 598 ☞트레킹 코스 : 물레방아 - 백세정 - 금굴 - 담소 전망대 - 출렁다리 - 구름다리 - 송해정 - 송해기념관 ☞인근의 볼거리 : 용연사, 화원 유원지, 남평문씨 세거지, 비슬산 유가사, 수목원, 김광석 거리, 진골목, 제일교회, 달성공원, 도동서원.백세정으로 가는 데크로드 주변의 옥연지 풍경.대구 송해공원 내 옥연지 분수 풍경.송해공원 내 송해기념관.
메이지 천황은…韓 국권침탈·강대한 군사제국주의 건설, 日 우익집단 상징…'신궁' 역할도 커져
메이지 천황(明治天皇)은 일본의 제122대 천황이다. 고메이 천황(孝明天皇·1831~1866)의 둘째 아들로, 이름은 무츠히토(睦仁). 교토 출생이며, 1867에 즉위했다. 도쿠가와막부(德川幕府)를 타도하고 정치권력을 환수한 후 에도(江戶)를 도쿄로 개칭하여 천도했다. 1968년 연호를 메이지(明治)로 정했다. 징병제를 시행하고, 1889년 흠정헌법(欽定憲法ㆍ일명 제국헌법)을 발포했다. 일본 최초의 근대적 헌법이다. 청일(淸曰)전쟁과 노일(露日)전쟁, 우리나라 국권 침탈 등을 일으키며 강대한 군사적 제국주의 국가를 만들었다.그는 오랜 쇄국정치로 뒤떨어진 일본을 근대화해 일본 국민에게는 큰 존경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정부는 항상 인민 반항의 위협을 받았고, 이를 탄압했다. 1910년에는 천황 암살을 기도한 고토쿠(幸德) 사건을 야기하기도 했다. 메이지 천황의 개혁 정책에서 이름을 따 연호를 메이지유신이라 불렀으며, 일본에서는 그를 높이 평가해 메이지 대제(明治大帝), 메이지 성제(明治聖帝), 무쓰히토 대제(睦仁大帝) 등으로도 부른다. 메이지 천황은 이처럼 메이지유신을 통해 일본을 근대화하고 부국강병을 이끈 천황으로, 일본 국민의 사랑을 받았다. 그래서 일본 정부는 사후에 거대한 신궁을 세울 계획을 세웠고, 국민도 여기에 호응했던 것이다.메이지 천황을 신으로 모시는 메이지 신궁은 시작부터 천황을 정점으로 따르는 일본 우익집단의 상징 역할을 해왔다. 막부체제에 기반을 두었던 시대를 완전히 종식하고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전체주의 사회를 완성한 메이지 천황은 일본 우익 집단들에게는 정신적인 기둥이나 마찬가지였다. 메이지 신궁은 창건 이래로 수많은 우익집단과 고위인사들이 모이는 장소로 애용되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메이지 신궁의 신직은 일본 우익집단들 사이에서 상당한 명망과 영향력 있는 직책이었다. 신궁의 신직들이 은퇴한 후 우익집단의 지도자나 실무자 역할을 겸하며 메이지 신궁의 영향력은 더욱더 커졌다.메이지 신궁은 또한 전후에 종교법인으로 탈바꿈한 뒤, 다양한 수익사업을 벌여 엄청난 수익을 벌어들였다. 참배객들의 시주, 결혼식장과 조리시설의 운영, 운동시설 대여 등으로 엄청난 수익을 낸다. 이외에도 종교법인 특성상 감사가 느슨한 점을 이용해 비공식적으로 전달하는 고위 인사들의 기부금 등까지 포함하면, 메이지 신궁은 막대한 자금을 움직이는 큰 손이 되고 있다고 한다. 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
[김봉규 기자의 '지구촌 산책' .28] 일본 도쿄 메이지신궁…도심 울창한 숲속 경계의 문 지나니 神聖의 공간
일본의 대표적 종교는 신도(神道)와 불교다. 2017년 12월 현재 일본의 종교 신자 수는 신도 8천474만명, 불교 8천770만명, 기독교 191만명, 기타 790만명으로 추산되었다. 일본 문화청 통계자료다. 이 인구를 모두 합하면 일본 총인구를 훨씬 웃도는데, 이러한 수치는 한 사람이 복수의 종교 신자임을 보여준다. 일본인의 종교관은 좀 특이하다. 종교 생활을 신앙에서 우러나는 종교적 행위가 아니라 일상적 삶의 관습으로 삼는 독특한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다양한 종교를 넘나들며 각 종교에서 파생된 문화를 각자의 생활 전반에 녹여내고 있다. 그래서 종교 생활을 하면서도 무교라고 대답하는 사람이 많은데, 특히 신도 신자는 대부분 종교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신도는 자연과 조상을 숭배하는 일본 고유의 토착 신앙이자 종교다. 신도 신자들이 숭배하는 신들을 모시는 종교시설이 신사(神社)다. 일본의 신사는 어느 정도 이상의 규모가 되는 곳이 8만8천 곳에 이르는 것으로 10여 년 전쯤 파악되었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작은 신사들까지 포함하면 20만~30만 곳이나 될 것이라고 한다.일본 국민은 이사하거나 아기가 태어났을 때, 시험을 앞두었을 때 등 중요한 일이 있으면 신사를 찾아가서 소원을 빌거나 복을 기원한다.신사에 대한 호칭은 신사 외에도 신궁(神宮), 궁(宮), 대사(大社), 사(社)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신궁은 황실과 관계가 있는 신을 모신 신사이고, 대사는 중추적인 신사에 해당한다. 3대 신궁으로 꼽히는 메이지(明治) 신궁, 이세(伊勢) 신궁, 우사(宇佐) 신궁이 대표적 신궁이다.2011년 10월 일본 도쿄를 여행할 때 메이지 신궁을 찾아가 잠시 둘러봤다.◆일본 3대 신궁 중 하나인 메이지 신궁메이지 신궁은 왕정복고 후 단행한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성공으로 근대화와 부국강병을 가져온, 일본인의 존경을 받는 절대군주 메이지 천황(明治天皇·1852~1912) 부부를 제신(祭神)으로 모신 신사다.메이지 신궁은 메이지 천황 사후 8년이 지난 1920년에 완공됐다. 지금의 건물들은 2차 세계대전 때 전소된 후 1958년에 재건됐다. 1920년 11월1일 낙성식을 겸하여 메이지 천황 부부의 신위를 봉안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은 제2차 세계대전 말기, 일본의 패전이 점점 눈앞으로 다가오던 1945년 4월 중순 미군 공습으로 건물 대부분이 파괴됐다. 패전 이후인 1946년 5월 부지에 가건물을 짓고 행사를 열었으며, 그 뒤 본격적으로 재건을 시작해 1958년 11월에 다시 낙성했다.전체 부지는 22만평(70만㎡) 정도. 둘러본 후 무엇보다 도심에 그렇게 넓고 울창한 숲이 펼쳐져 있다는 것만 해도 정말 부럽다는 마음이었다. 다 둘러보지도 못했다.메이지 신궁의 숲은 일본 전국에서 '헌납'한 다양한 나무 12만 그루로 조성됐다. 아무것도 없는 평지에 일본 국내는 물론, 당시 식민지에서도 나무를 공수하여 심은 것이다. 처음 조성 때는 장기적으로 100년 정도 지나면 그럴듯한 숲을 이루리라 예상하였으나, 50년 만에 지금과 같은 숲이 되었다고 한다.신궁은 울창한 숲속에 본전을 비롯해 메이지 박물관, 신궁 내 정원인 메이지신궁어원(明治神宮御苑)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황실의 황태후가 출입하던 곳이었다는 어원에는 연못, 창포밭, 정자, 우물 등이 있다.신궁 옆으로 흐르는 하천을 건너는 다리(神宮橋)를 건너면 신궁 정문 앞 광장과 정문 입구의 토리이(鳥居)가 눈에 들어온다. 토리이가 엄청나게 크다. 안으로 들어가다 보면 토리이를 몇 개 더 만나게 된다. 토리이는 우리나라 사찰의 일주문이나 서원의 홍살문과 유사한 시설이다. 신성한 공간과 세속적인 공간을 구분 짓는 경계 역할을 한다. 일본에서 신성한 곳이 시작됨을 알리는 관문인 토리이는 흔히 신사 앞에서 볼 수 있다.토리이의 기본 구조는 두 개의 기둥이 서 있고, 기둥 꼭대기를 서로 연결하는 가사기(笠木)로 불리는 가로대가 놓여있는 형태이다. 그리고 제일 위에 있는 가로대의 약간 밑에 두 번째 가로대가 있는데 누키(貫)라 부른다. 통나무로 만든 이곳 토리이는 대만에서 헌납을 받아서 만든 것이라고 한다. 당시 대만은 삼림 황폐화가 덜해 원시림이 비교적 많았다.정문 토리이를 지나 숲길을 걷다 보니 길옆에 같은 크기의 다양한 술통 200개 정도를 쌓아놓은 것이 눈에 들어왔다. 일본 주류회사들이 술이 잘 익기를 기원하며 바친 제물 술통이라고 한다. 맞은편에는 포도주통 60개가 3단 높이로 진열돼 있다. 생전에 포도주를 좋아한 메이지 천황을 추모하기 위해 프랑스 부르고뉴에서 기증받은 것들이라고 한다. 또 하나의 토리이를 통과해 들어가면 메이지 신궁 건물 구역이 펼쳐진다. 신을 모시는 본전(本殿), 손과 입을 씻은 후 참배하는 내외배전(內外拜殿), 축사전(祝祠殿) 등이 자리하고 있다. 본전 앞 양쪽에 신목(神木)이라는 큰 나무 두 그루가 자라고 있다. 신궁 건립 당시에 심은 녹나무로, 백년해로의 의미를 담고 있어 '부부나무'라고 불린다 한다. 이곳에서는 전통혼례식이 많이 열린다. 전통혼례식 장면도 볼거리다. 2018년 아키히토 천황의 5촌 조카 아야코 공주 결혼식도 여기서 진행됐다.본전의 건축물 자체는 특이한 점이 별로 없다. 지붕의 푸른 기와는 구리로 만든 것이다. 붉은빛이던 새 구리 기와가 공기 중에서 물과 이산화탄소에 의해 산화되어 푸른빛으로 변한 것이다. 녹청 피막이 형성되면 더는 녹슬지 않아 반영구적이다.신도를 믿는 사람이 신들에게 제사를 지내고 참배를 하는 곳인 신궁이나 신사는 일반적으로는 신의 신위를 봉안한 본전, 신을 예배하고 각종 의례를 행하는 배전(拜殿), 신의 영역을 표시하는 문인 토리이 등으로 이루어진다. 이와 더불어 신에게 바치는 신락(神樂)을 연주하는 신락전, 신관(神官)의 집무를 위한 사무소, 신원(神苑) 등의 시설을 갖추고 있다.이런 신도는 관련 경전이나 교의가 없고 설교도 없다. 대신 신을 향해 소원을 빌고 감사를 드리는 축사(祝祀)를 한다. 장례의식은 신사에서 하지 않는다. 글·사진=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일본 도쿄 메이지 신궁에 있는 토리이(鳥居) 중 하나. 토리이는 신성한 공간과 세속적인 공간을 구별짓는 경계 역할을 한다.메이지 신궁 본전으로 향하는 길옆에 있는 일본 술통들. 주류회사들이 술이 잘 익기를 기원하며 제물로 바친 것이라 한다.메이지 신궁 본전 앞에서 일본 전통혼례식이 열리고 있다.
[김봉규의 수류화개(水流花開)] 연꽃(2) 여름날 연못에 떠오른 청초한 자태…부처의 성품·다산 상징
한여름 연못에서 피어나는 정결하고 아름다운 연꽃. 이 연꽃 덕분에 7~8월의 무더위를 잠시나마 잊는 이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최근 들어 7월과 8월 전국 곳곳에서 연꽃축제가 열린다. 그 수가 갈수록 늘고 있다. 다양한 연꽃들이 수놓는 대규모 연꽃단지가 그만큼 많아진다는 말이다. 지자체들이 다양한 연못을 조성하고 각종 편의시설을 갖춘 연꽃단지를 조성한 덕분이다. 요즘과는 다른, 연꽃축제라는 말을 듣지도 못하던 30년쯤 전에 전남 무안 백련지를 찾아간 기억이 새롭다. 당시로는 보기 드문 백련, 즉 흰 연꽃이 가득한 드넓은 연못의 장관이 주는 감흥을 지금도 되살릴 수 있다. 넓은 들판에 위치한 회산백련지는 동양 최대 백련 자생지로 알려져 있다.연꽃 명소'무안 회산 백련지' 동양 최대 자생지 서동요 설화 유명 '부여 궁남지 연꽃' 국내 최대 연근 생산지 '안심 연꽃단지'전남 무안군 일로읍 복용리에 있는 이 회산백련지는 오래전부터 유명했다. 전체면적이 10만평 정도(31만3천313㎡)로, 2001년 동양 최대 백련 자생지로 기네스북에 등재된 곳이기도 하다. 회산(回山)은 이곳 마을 이름이다.일제 때 농업용수를 확보하기 위해 인근 마을의 주민들이 축조한 이 저수지는 영산강 종합개발계획으로 인해 농업용수를 공급하는 기능을 상실하면서 백련 자생지로 탈바꿈했다. 1955년 여름 어느 날 이 마을의 한 주민이 연뿌리 12주를 이 저수지의 가장자리에 심으면서 시작됐다. 그날 밤 꿈에 하늘에서 학 12마리가 저수지에 내려와 앉는 모습을 보고 좋은 징조라고 여겨 정성을 다해 백련을 가꾸어 나갔다.둘레가 3㎞인 이 백련지에서는 1997년 연꽃축제를 시작한 이후 해마다 연꽃축제를 열어왔다. 올해 제25회 무안연꽃축제는 지난달 21일부터 4일 동안 열렸다. 멸종 위기 식물인 가시연꽃 집단자생지이기도 한 이 백련지에는 수련, 홍련, 애기수련, 어리연, 노랑어리연 등 30여 종의 연꽃과 50여 종의 수생 식물이 자생하고 있다. 부여 궁남지 연꽃도 유명하다. 궁남지는 서동요 설화로 잘 알려진 백제 무왕 35년(634)에 만들어졌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인공연못이다. 7월이면 5만여 평에 달하는 연못이 연꽃으로 가득해진다. 백련, 홍련, 수련, 가시연 등 다양한 연꽃이 피어난다. 연못 한가운데 떠 있는 아담한 정자(포룡정), 연못 가장자리 곳곳에 있는 초가지붕 파라솔과 아담한 벤치가 놓인 모습과도 잘 어울린다.부여군은 이곳을 널리 알리기 위해 2003년 8월 제1회 부여서동연꽃축제를 개최했다. 형형색색의 연꽃들을 관람하며 다채로운 문화체험 행사에 참여할 수 있다. 밤에는 연꽃을 배경으로 하는 조명 쇼가 펼쳐진다. 올해 제20회 부여서동연꽃축제는 7월14일부터 4일간 펼쳐졌다.우리나라 최대 연근 생산지인 대구 안심(반야월)연꽃단지도 유명하다. 2014년 안심지역이 국토교통부의 '도시활력증진 개발지역' 공모사업에 선정된 이후 대구시 동구청이 사업비 80억원을 들여 '안심창조밸리 조성사업'을 추진하면서, 이 연꽃단지도 새롭게 변신했다. 데크로드, 전망대, 연생태관, 레일카페 등 부속시설과 편의시설이 많이 갖추어져 도심 속의 힐링공간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가남지 코스, 점새늪 코스, 안심습지 코스 등 13㎞에 이르는 4개의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다. 이곳에서도 2017년부터 연꽃축제가 열리고 있다. 대구 동구청이 주최한 올해 제5회 안심창조밸리 연꽃축제는 8월11일부터 15일까지 진행됐다.경주 동궁과 월지 연꽃단지, 시흥 연꽃테마파크, 전주 덕진공원 연꽃단지, 양평 세미원, 함양 상림연꽃단지, 청도 유등지 등도 연꽃 명소이다.연꽃 이야기고려 충선왕과 원나라 여인 사랑 정표진흙에서 나왔으나 맑고 곧으며 고결선비들이 사랑한 꽃…'군자'라 찬미고려 충선왕이 젊은 시절 원나라에 가 있을 때, 한 여인과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그 여인도 왕을 뜨겁게 사랑했다. 그러던 중 왕이 고려로 귀국하게 되었다. 여인은 당연히 따라나서려 했지만, 함께 돌아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어쩔 수 없이 이별해야 하자, 충선왕은 사랑의 정표로 연꽃 한 송이를 꺾어 연인에게 주고 떠나왔다. 둘의 심정이 어떠했을까.떠나온 후 왕은 한시도 그리움을 잊지 못해 동행했던 익재 이제현(1287~1367)에게 다시 돌아가서 여인이 어떻게 지내는지 살펴보게 했다. 이제현이 가보니 여인은 다락 속에 있었는데, 며칠 동안 식음을 전폐하여 말도 제대로 못 할 지경이었다. 겨우 몸을 일으키고 억지로 붓을 들어 시 한 수를 적어주었다.'떠나시며 건네주신 연꽃 한 송이(贈送蓮花片)/ 처음에는 그렇게도 곱고 붉더니(初來灼灼紅)/ 가지를 떠난 지 지금 몇 날인가(辭枝今幾日)/ 초췌해진 모습이 나와 같구나(憔悴與人同).'그 시를 가지고 돌아온 이제현은 자신의 가슴도 아팠을 것이지만, 그대로 전할 수 없어 엉뚱한 보고를 했다. "그 여인은 술집으로 들어가서 젊은 남자들과 술을 퍼마시면서 날을 보내고 있다고 하는데, 어디 있는지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현은 이듬해 왕의 생일을 맞아 비로소 그 시를 올리며 사실을 고하고 사죄하며 처벌을 기다렸다. 사연을 알게 된 왕은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했다. "만약 내가 그때 이 시를 보았다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그 여인에게 되돌아갔을 것이오. 경(卿)이 나를 사랑하여 일부러 거짓말을 하였으니, 참으로 충성스러운 일이오."허백당 성현(1439~1504)의 '용재총화'에 수록된 이야기다. 연은 특히 불교와 인연이 깊은 식물이다. 연의 성품은 부처의 성품, 즉 불성(佛性)과 일맥상통하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우선 연은 늪이나 연못의 진흙 속에서도 맑고 깨끗한 꽃을 피워낸다. 이것은 사람의 마음은 본래 청정하여 비록 나쁜 환경 속에 처해 있다 할지라도 그 자성(自性)은 절대 더럽혀지지 않는다는 불교의 기본교리에 비유될 수 있는 것이다.그리고 꽃이 피는 동시에 열매를 맺는다. 이것은 모든 중생은 태어남과 동시에 불성을 지니고 있으면서 성불할 수 있다는 사상을 반영하고 있다.또한 연꽃은 아름다우면서도 고결한 풍모를 지니고 있어 세속을 초월한 깨달음의 경지를 연상하게 한다. 그것은 곧 부처의 모습에 비유될 수 있는 것이다.연꽃은 선비들로부터도 사랑을 받아왔다. 연꽃을 찬미한 글로는 북송 유학자 염계 주돈이(1017~1073)의 '애련설(愛蓮說)'이 유명하다. 국화는 '은일(隱逸)'로, 연꽃은 '군자(君子)'로, 모란은 '부귀(富貴)'로 특징지으면서 자신은 연꽃을 사랑한다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군자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 특성을 지닌 연꽃을 사랑한다는 내용이다.'물과 육지에서 피는 초목의 꽃 가운데에는 사랑스러운 것들이 매우 많으나, 진(晉)나라의 도연명은 유독 국화를 사랑하였고, 당나라 이래로는 세상 사람들이 모란을 매우 사랑했다. 내가 유독 연꽃을 사랑하는 이유가 있다. 연꽃은 진흙에서 나왔으나 더럽혀지지 않고, 맑은 물결에 씻어도 요염하지 않으며, 속은 비어 있고 밖은 곧으며, 덩굴지지 않고 가지를 치지 않는다. 그리고 향기는 멀어질수록 더욱더 맑으며, 우뚝한 모습으로 깨끗하게 서 있어 멀리서 바라볼 수는 있지만 함부로 하거나 가지고 놀 수 없음을 사랑한다.내가 생각건대 국화는 꽃 가운데 은자(隱者)이고, 모란은 꽃 가운데 부귀한 자(富貴者)이며, 연꽃은 꽃 가운데 군자(君子)라고 하겠다. 아! 국화를 사랑하는 것은 도연명 이후에는 들은 바가 드물고, 연꽃을 사랑하는 것은 나와 함께 할 이가 어떤 사람일까? 모란을 사랑하는 이들은 마땅히 많을 것이다.'다산 기원많은 종자 맺어…부인 의복에 연꽃문양 위장염·불면 치료…식품으로도 애용연꽃은 종자를 많이 맺기에 민간에서는 다산의 징표로 보았다. 부인의 의복에 연꽃의 문양을 새겨넣는 것도 연꽃의 다산성에 힘입어 자손을 많이 낳기를 기원하는 것이었다.연은 연못에서 자라는 식물이다. 논밭에다 재배하기도 한다. 뿌리는 옆으로 길게 뻗는다. 원주형이고 마디가 많으며, 가을철에 끝부분이 특히 굵어진다. 잎은 뿌리에서 나와 물 위에 높이 솟는다. 원형에 가까우며 백녹색이고, 잎맥이 사방으로 퍼진다. 잎 크기는 지름 40㎝ 정도이고, 물에 잘 젖지 않는다.꽃은 7~8월에 피며, 보통 연한 홍색 또는 백색이다. 꽃대 하나에 한 개의 꽃이 달린다. 꽃받침은 녹색이며 일찍 떨어지고 꽃잎은 길이 8∼12㎝, 너비 3∼7㎝. 열매는 타원형이고, 길이 2㎝ 정도로 먹을 수 있다. 원산지는 인도이며, 오래전부터 재배됐다.실생활에서는 약재와 식용으로 애용되어 왔다. 연꽃의 종자는 신체허약, 위장염, 불면 등의 증상에 치료제로 이용되었다. 잎은 소변장애나 토혈 등의 증상, 연근은 지사제나 건위제로 이용되었다. 연근은 식품으로도 사용되고 있다. 글·사진=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경주 동궁과 월지(안압지) 연꽃단지의 여름 풍경.함안 아라홍련경주 동궁과 월지 홍련함안 연꽃테마파크 수련
의료대란으로 번진 의대 증원
동산병원·대구가톨릭대병원 10일 집단 휴진 할까
보건의료 위기경보 '심각' 단계 때 외국 의사 의료행위 허용…대구 의료계 반발
많이 본 뉴스
오늘의운세
개띠 5월 10일 ( 음 4월 3일 )(오늘의 띠별 운세) (생년월일 운세)
영남생생 New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