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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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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사람들의 행복콘서트] 부족한 인내심…"장수하며 화목하게 사는 비결은 火를 참고 또 참는 '忍'을 덕목으로 삼는것"
중국 당나라 사람 장공예(張公藝)는 9대가 한 지붕 아래서 화목하게 생활한 집안으로 유명했다. 665년 당나라 고종은 태산에 제사 지내러 가는 도중, 장공예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그의 집을 방문했다. 고종은 그렇게 장수하며 대가족이 화목하게 살 수 있는 비결을 그에게 물었다.장공예는 예를 표한 뒤 아무 말 없이 단지 참을 '인(忍)'자를 100여 자 써 보여 준 뒤, 고종을 향해 말했다. "부모와 자식 간에 인내가 없으면 자비와 효행을 잃게 됩니다. 형제 사이에 참을성이 부족하면 다른 사람에게 비웃음을 삽니다. 형제의 아내들 사이에 참을성이 없으면 형제들이 뿔뿔이 흩어지게 되고, 고부 사이에 참지 못하면 효도하는 마음을 잃게 됩니다."고종은 그 자리에서 장공예에게 작위를 내리고, 그의 아들에게도 벼슬을 내렸다. 그리고 건물을 하나 세울 것을 명하고, 친히 '백인의문(百忍義門)'이라는 글자를 써 주며 현판으로 걸도록 했다. 장공예가 죽고 나서도 자손들은 '인(忍)'을 집안의 최고 덕목으로 삼고, 그의 가르침을 기리기 위해 백인당(百忍堂)을 세워 제사 지내면서 '인(忍)'을 가훈으로 삼았다.참지 못해 불러오는 불상사들이 점점 늘고 있다. 최근에도 국민을 놀라게 한 참사가 대구에서 일어났다. 변호사 사무실에 한 남성이 휘발유를 들고 들어가 불을 질러 무고한 사람 6명을 죽게 만든 사고가 발생한 것이다. 불을 지른 당사자도 현장에서 함께 사망했다. 범인이 분노와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해 일으킨 참사로 분석되고 있다.이 같은 분노 범죄가 늘고 있는 이유에 대해, 전문가들은 스트레스와 분노를 참지 못하는 개인이 양산되는 데서 원인을 찾고 있다. 개인적 원인이든 사회적 시스템에 의한 것이든, 사람들이 분노가 심해지고 참을성이 약해져 사소한 일에도 화를 잘 내면서 범죄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잠시라도 경중을 파악하지 못하니, 순식간에 성인이 미치광이가 되는구나(造次失輕重 俄然判聖狂).'조선 후기의 실학자 안정복(1712~1791)이 집에서 부리는 종의 일로 인해 순간적으로 마음을 다스리지 못한 것을 뉘우치며 쓴 시 중 일부다. 화를 참지 못해 종을 심하게 꾸짖은 뒤, 장공예의 고사를 인용한 명나라 학자 진헌장(陳獻章)의 아랫글이 문득 생각나서 두려운 마음에 시를 써 반성한 것이다.'노여움의 불길 타오르면 참음의 물로 꺼야 하네. 참고 또 참아도 노여움이 거세진다고 할지라도, 백 번을 더 참아 마침내 장공예처럼 된다면 큰일도 이룰 수 있도다. 만약 참지 못하면 당장 낭패가 닥칠 것이다.'아래는 율곡 이이의 글이다.나의 생질 홍석윤(洪錫胤)이 자신의 어머니를 뵙기 위해 떠나려 할 적에 나를 찾아와 이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석윤 : 제가 학문을 하고자 하지 않는 것은 아니나, 뜻이 굳건히 서지 못하여 공부에는 전념하지 않고 하는 일 없이 세월만 보내고 있으니, 경계할 만한 말씀을 주시면 써서 벽에 붙여 놓고 아침저녁으로 보며 저의 게으름을 채찍질하겠습니다.율곡 : 옥은 쪼아내지 않으면 그릇을 만들 수 없고, 사람은 배우지 않으면 도리를 알지 못한다. 도리를 알지 못하면 사람이 될 수 없으니, 명색이 선비이면서 학문을 하지 않는 자들은 모두 금수 되기를 꺼리지 않는 것이다. 이미 금수 되기를 꺼리지 않는다면, 벽에 경계의 말을 붙여 놓더라도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석윤 : 원래 배우고자 하지 않는 자에게는 경계의 말이 소용없겠지만, 배우고자 하나 뜻이 굳지 못하여 학문이 잘 안 되는 자는 경계의 말을 듣거나 보면 분발할 수 있습니다.율곡 : 그렇다. 사람에게는 병이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혈기(血氣)의 병이고, 하나는 지기(志氣)의 병이다. 혈기의 병은 의원에게 묻고 약을 구하여 외물(外物)로써 치료할 수 있고, 지기의 병은 자각하고 자수(自修)하여 내심으로 치료할 수 있다. 외물로써 치료할 수 있는 것은 그 권한이 남에게 있고, 내심으로 치료할 수 있는 것은 그 권한이 나에게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대부분 권한이 남에게 있는 혈기의 병은 치료하려 하면서, 권한이 나에게 있는 지기의 병은 조금도 고치려고 노력하지 않으니 괴이한 일이다.성심(誠心)으로 몸을 닦고자 한다면 게으름의 병은 근면으로써 치료하고, 욕심의 병은 도리를 잘 따름으로써 치료하고, 몸을 단속함이 엄격하지 못한 병은 장엄과 정중으로써 치료하고, 생각이 산란한 병은 마음을 한 군데 집중하여 잡념을 없애는 주일(主一)로 치료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내 몸에 있는 병을 치료하기 위해 약을 밖에서 구하지 않아도 치료하지 못할 병이 없는데, 어찌 학문이 이루어지지 않을 염려가 있겠느냐.석윤 : 몸을 지키는 중요한 말을 해 주십시오.율곡 : 집안에 들어와서는 효도하고 밖에 나가서는 공경하며, 글을 읽어 사리를 연구하는 궁리(窮理)를 돕고, 선을 행하여 사욕(邪慾)을 버리고 본래의 성품으로 돌아가기를 구하라. 고요히 있을 때는 생각을 한곳에 모아 잡념을 없애는 경(敬)으로 마음을 곧게 하고, 움직일 때는 사물을 헤아려 사리에 알맞게 하는 의(義)로써 몸가짐을 방정하게 하며, 자신을 채찍질하는 데는 용맹스럽게 하고, 몸을 지키는 데는 끈기 있게 계속하여라. 내가 너에게 해 줄 수 있는 말은 이것뿐이다.대화를 마치고 이 말을 써서 그에게 주었다.이이가 그의 생질을 경계한 글이다. 글의 제목은 '증홍생석윤설(贈洪甥錫胤說)'이다.유학자이자 정치가로 '동호문답' '성학집요' 등의 저술을 남긴 이이는 현실과 원리의 조화와 실효를 강조하는 철학사상을 제시했다.분노를 참지 못하는 것도 이이가 말한 '지기의 병'에 해당할 것이다. 스스로 그 부족한 바를 알고 자수(自修)하여 내심으로 치료할 수 있고, 해야 하는 것이다. 분노의 요인을 사회적으로 없애 가는 것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개개인의 인내력을 키우는 일이다. 정신적 힘은 어릴 때 대부분 형성된다고 하니, 어릴 때 그런 힘을 충분히 기를 수 있는 교육환경을 만드는 일이 절실하다는 생각이다.사람들의 인내심이 높아지고, 인내심이 부족한 이들이 줄어들어야 더 평화롭고 행복한 세상이 될 것이다. 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청나라 심전(沈銓) 그림 '구세동안(九世同安)'. 장공예의 구세동거(九世同居) 이야기를 소재로 그린 작품이다.
[동추(桐楸) 금요단상] 넉넉한 그늘 내어주는 왕버들 노거수 아래서…
노거수의 넉넉한 그늘이 반가운 계절이다.얼마 전 경북 군위 고로면(삼국유사면) 산(수기재) 아래에 있는 도예가 전문환의 작업실을 지인들과 함께 방문했다. 거기서 보기 드문 노거수를 만났다. 작업실 바로 앞에 있는 왕버들이다. 왕버들은 작은 저수지 둑에 자라고 있었다. 밑둥치에서 크게 세 줄기로 갈라져 자랐는데, 갈라진 세 가지 위에 큼직한 정자를 하나 지어도 될 만했다. 줄자를 찾아 일부러 한번 밑둥치를 대충 재어 보았다. 9m 정도 되었다. 그렇게 굵은 나무는 직접 본 적이 없다. 전문환 작가가 이곳에 작업실을 마련한 것이 1995년인데, 당시에는 왕버들 밑둥치가 저수지 물속에 잠겨 있었다고 한다. 그 후 산 계곡에서 떠내려온 자갈과 모래가 점점 쌓여 지금처럼 주위가 둑이 되어버렸다고 한다. 그곳 어른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수령이 400년 이상 된 것으로 추정된다.수백년 장수 누린 노거수장자의 '무용지용' 이야기'쓸모 없음의 쓸모' 떠올라도예 작가의 작품도 연상이 노거수를 보면서 장자의 '무용지용(無用之用·쓸모없음의 쓸모)' 이야기가 떠올랐다. '장자'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장석(匠石)이 제나라에 가다가 지신을 모시는 사당에 심어진 상수리나무를 보았다. 그 크기는 수천 마리의 소를 그늘에 가릴 수 있고, 둘레가 백 아름이나 되며, 높이는 산을 내려다볼 정도였다. 땅에서 열 길을 올라간 뒤에 비로소 가지가 뻗어 있었으며, 수십 척의 배를 만들 수 있을 정도였다. 나무를 구경하는 사람들이 마치 저잣거리처럼 많이 몰려와 있었는데, 장석은 돌아보지도 않고 그대로 길을 가며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장석의 제자는 실컷 그 나무를 보고서 장석에게 황급히 달려가 이렇게 말했다.'제가 도끼를 잡고 선생님을 따라다닌 이후 저토록 아름다운 나무는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선생님께서는 보려 하지도 않으시고 걸음을 멈추지 않고 떠나가시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장석이 대답했다. '그런 말 하지 말게. 쓸모없는 잡목이네. 배를 만들면 가라앉고, 관이나 곽(槨)을 만들면 빨리 썩고, 그릇을 만들면 빨리 부서지네. 대문이나 방문을 만들면 나무 진액이 흘러나오고, 기둥을 만들면 좀이 생기니 쓸모없는 나무이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기에 이처럼 장수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이네.'장석이 돌아와 잠을 자는데 그 상수리나무가 꿈속에 나타나 이렇게 말했다.'그대는 어디에다 나를 비교하려 하는가. 그대는 나를 무늬목에 비교하려 하는가. 아가위나무, 배나무, 귤나무, 유자나무는 과실이 익으면 잡아 뜯기고 욕을 당하게 되지. 큰 가지는 꺾이고 작은 가지는 찢기네. 이것은 그 잘난 능력으로 인해 자신의 삶을 괴롭히게 되는 것이네. 그 때문에 천수를 마치지 못하고 도중에 요절해 버리지. 스스로 세속 사람들에게 해침을 받는 것이네. 모든 사물이 이와 같지 않음이 없네. 나는 쓸모없기를 추구한 지 오래되었네. 거의 죽을 뻔했다가 비로소 나의 큰 쓸모를 이루었네. 내가 만약 쓸모가 있었다면 이처럼 큰 나무가 될 수 있었겠는가. 그대나 나나 하찮은 존재일 뿐이네. 어찌하여 나를 쓸모없다고 헐뜯는가. 그대 같은 사람이 어찌 쓸모없는 나무를 알아보겠는가.'쓸모 유무는 무엇을 기준으로 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우리가 쓸모 유무를 너무 쉽게 판단하는 것이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무용지용 이야기는 이 왕버들에 깃들어 작업해온 전문환 도예가의 작품을 두고 하는 이야기라는 생각도 들었다. 미술 작가들은 작업을 할 때 일반인과는 다른 관점에서 쓸모 유무를 판단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전문환은 특히 더 '무용지용'의 작업을 하는 것 같았다. 도예 작업뿐만 아니라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설치 작업도 하는데, 기발하고 엉뚱한 장난 같은 작품이 많았다.그의 작품을 보며 장자의 '무용지용'을 떠올린 생각을 들려주며 어떤지 그에게 물어봤다."어떻게 제 마음을 그렇게 잘 아십니까. 딱 맞습니다."더 큰 쓸모, 쓸모없음의 쓸모를 생각할 줄 알아야 우리의 삶이, 지구촌 환경이 덜 각박해질 것이다. 글·사진=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경북 군위군 삼국유사면 수기재 아래의 전문환 도예가 작업실 앞에 있는 왕버들 노거수. 밑둥치 둘레 9m.전문환 작
영남선비문화수련원, 청소년예절교육원 개설
영남선비문화수련원(이사장 서영택)은 최근 대구 구암서원에 성균관 부설 청소년예절교육원의 영남지원을 개설했다. 영남선비문화수련원과 성균관(관장 손진우)은 최근 구암서원에 성균관 부설 청소년예절교육원 영남지원을 개설하는 협약 체결식과 현판식을 진행했다. 이 청소년예절교육원의 지원 개설은 영남지원이 처음이다.이날 현판식에는 경북도향교재단 박원갑 이사장, 대구향교 우종익 전교, 현풍향교 윤홍석 전교, 칠곡향교 배종찬 전교 등 지역 20개 향교 전교와 유림 지도자 120여 명이 참석했다.손진우 성균관장은 "조만간 향교·서원 지원법이 통과되면 관련된 교육프로그램과 조직을 제대로 갖춰 관련 사업을 진행할 필요가 있어 이곳에 영남지원을 설치하게 됐다"고 밝혔다. 배광식 대구 북구청장도 참석해 환영사를 했다. 영남선비문화수련원은 2016년에 문을 연 후 각종 국고 보조사업을 위탁받아 진행해 왔다. 2019년에는 대구시교육청과 상호협력을 체결, 대구시 초등학생 및 중학생을 대상으로 한 지역연계 체험학습도 시작했다. 지난 5월에는 6만명 수료생을 배출하는 성과를 이루었다.서상보 영남선비문화수련원장은 "성균관 청소년예절교육원 영남지원은 앞으로 청소년예절 강사 양성에 힘쓰면서 다양한 예절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해 진행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영남선비문화수련원(이사장 서영택)과 성균관(관장 손진우)은 최근 대구 구암서원에서 지역 유림 관계자 등이 참석한 가운데 성균관 부설 청소년예절교육원 영남지원 현판식을 가졌다.
[김봉규 기자의 '지구촌 산책' .25] 북한 금강산, 기암 절경 병풍삼아 떨어지는 폭포…그 물줄기 담는 구룡연에 또한번 감탄
북한 주민의 형편이 매우 어려운 모양이다. 그들의 삶은 1990년대 고난의 행군 시절보다 더 어렵다고 한다. 그런데도 북한 정권은 핵 무력 개발을 갈수록 강화하고 있고, 7차 핵실험 강행이 임박했다는 보도가 이어지고 있다. 북미 간은 물론, 남북 간의 관계도 당연히 악화할 수밖에 없다. 위기가 고조되고 있으니 남북 교류 돌파구를 여는 것은 생각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다.남북 관계가 비교적 좋았던 시절도 있었다. 특히 금강산 관광이 진행되던 때가 생각난다. 다행히 그 시절에 금강산을 구경할 수 있었는데, 그때가 다시 돌아왔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금강산 관광은 1998년 11월18일부터 2008년 7월11일까지 진행됐고, 금강산 관광을 다녀온 사람은 193만4천662명(해로 55만2천998명, 육로 138만1천664명)이었다.2005년 이맘때쯤 1박2일 일정으로 금강산을 다녀왔다. 육로를 통해 갔다. 당시의 금강산 풍광과 추억을 더듬어본다.비가 많이 온다는 금강산. 특히 봄·여름에는 비가 많이 와 맑은 날씨의 금강산을 본다면 그것은 큰 복이라고 하는데, 다행히 쾌청한 날씨여서 아름다운 금강산의 풍광에 흠뻑 빠져드는 복을 누릴 수 있었다.봄에는 온 새싹과 꽃으로 뒤덮이므로 금강(金剛)산이라 하고, 여름에는 봉우리와 계곡에 녹음이 깔리므로 봉래(蓬萊)산, 가을에는 단풍으로 물들어 풍악(楓嶽)산, 겨울에는 기암들만 앙상한 뼈처럼 드러난다고 해 개골(皆骨)산이라 불렸다. 눈 덮인 봉우리들이 수를 놓아 설봉(雪峯)산으로도 불렸다고 한다.꽃도 보이고 녹음도 짙을 만큼 짙어진 봄과 여름 사이의 금강산을 일부만이라도 둘러볼 수 있었다. 구룡연 코스와 해금강·삼일포 코스를 관광했다.◆구룡연 코스이 계절의 금강산 계곡은 잘생긴 소나무라서 '미인송'으로 불리는 적송 줄기의 붉은 색과 흰 바위, 옥빛의 맑디맑은 물, 신록의 초록 빛깔이 조화를 이루며 선경을 빚어낸다. 숙소인 금강산호텔에서 차를 타고 외금강 코스의 하나인 구룡연 계곡을 가기 위해 신계사 입구로 들어서니, 아름다운 미인송들이 사열하듯 우리를 맞이했다. 신계사는 남한의 불교 조계종이 2004년 11월 복원한 대웅전 건물 하나만 서 있었다. 복원사업을 위해 남북 공동으로 건물터 발굴 작업이 한창이었다. 신계사는 장안사, 표훈사 등과 함께 금강산 4대 사찰 중 하나다. 신계사 대웅전 앞에 서니, 미인송 숲 위로 멀리 보이는 외금강 봉우리들의 풍광이 장관이었다.신계사에서 다시 미인송 숲길을 따라 올라가 계곡 입구에 들어서니 우선 맑은 물과 그 빛깔에 탄성이 절로 나왔다. 이 금강산 물을 보고 옛사람들은 '떨어지면 폭포요, 흐르면 비단 필이라. 흩어지면 백옥이고 모이면 담소이며, 마시면 몸에 좋은 약수로다'라고 읊었다.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갈수록 아름다움을 더해가는 선경이 펼쳐졌다. 비췻빛 담소(潭沼)와 미인송의 아름다운 자태, 잘생긴 바위들이 어우러지는 곳곳에 폭포들이 상쾌함을 더한다. 숲길을 나와 고개를 들어보니 신록과 미인송이 어우러진 기암 봉우리들이 푸른 하늘을 배경 삼은 절경이 펼쳐졌다. 멋진 풍광을 만끽하며 걷다가 고개를 드니, 멀리 82m 높이에서 흰 물줄기가 아름답게 떨어지는 구룡폭포가 눈에 들어왔다. 구룡폭포는 겸재 정선, 단원 김홍도 등 금강산을 찾은 시인묵객들이 작품으로 남긴 대표적 작품 소재였다. 더 가까이 가서 보았다. 폭포 아래에는 폭포가 만들어낸 둥근 못이 인상적이었다. 구룡연(九龍淵)이다.구룡폭포에서 조금 내려오다 왼쪽으로 800m 정도의 가파른 계단을 올라갔다. 큰 바위 위에 오르니 눈앞에 절경이 펼쳐졌다. 구룡대라 불리는 이 전망 바위는 150m의 절벽 위 바위 봉우리다. 그 위에서 내려다보는 상팔담(上八潭·구룡폭포 위 계곡에 8개의 담소가 연이어 있는 곳)과 눈 앞에 펼쳐지는 세존봉을 비롯한 수백 개의 봉우리가 입을 다물지 못하게 했다. 중국의 소동파가 '바라건대 고려국에 태어나 금강산을 한번 보고 싶다(願生高麗國 一見金剛山)'라 한 것이 괜히 한 말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해금강·삼일포 코스금강산은 비로봉(해발 1천639m)을 중심으로 한 내금강, 외금강, 바닷가의 해금강으로 나뉜다. 해금강은 비무장 지대에 있어 북한 사람들도 가기가 힘들다.바다로 나간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향을 피웠다는 향로봉을 중심으로 30분 정도의 산책코스를 돌아보았다. 그곳 설명을 맡은 북한 여성 '관리원'은 해금강은 해변에 핀 해당화미, 기암 위의 청송미, 푸른 파도의 창파미, 바다 위 기암미, 아름다운 백사장미 등 5합미를 갖추고 있다고 설명하면서 "해금강의 절경은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서 보는 것이 제격"이라고 말했다.해금강에서 금강산호텔 쪽으로 조금만 올라가면 삼일포가 나온다. 옛날 어느 왕이 잠깐 들러 쉬고 가려다 경치가 하도 좋아 3일간 머물렀다 하여 삼일포라 불린다는 곳이다. 옛날에는 바다였으나 지금은 호수로 바뀐 곳으로,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다. 호수 한복판에 와우도라는 작은 섬이 하나 있고, 정자도 하나 있다. 호수 주변을 산책하고, 주변의 높은 전망대에 올라 전경을 감상하며 즐겼다.이곳에서 여성 관리원의 설명을 듣고 노래를 듣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이었다."삼일포는 봄과 여름에는 보트 놀이를 하고 겨울에는 두께 1m가 넘는 얼음이 얼어 스케이트를 타며 즐기곤 했는데, 몇 년 전부터는 겨울이 되어도 얼음이 30㎝도 얼까 말까 하는 것입네다. 왜 그럴까 생각하고 생각해서 그 원인을 알아냈는데, 바로 남측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면서 여러분들이 염원하는 통일의 열기 때문에 그랬던 것입네다."그 관리원은 "비로봉에서 해돋이를 보고 내려와 해금강에서 어죽을 먹고, 삼일포에서 보트 놀이를 한 뒤 총석정에서 달맞이를 해야 금강산을 다 즐겼다고 할 수 있습네다"라고 말했다.북한 말과 남한 말의 차이를 말하며 들려주는 사례도 재미있었다. 애연가는 '담배질꾼', 살 빼는 것은 '몸 깐다', 거스름돈은 '각전', 서명하다는 '수표하다'로 말한다고 했다.◆정주영의 꿈금강산관광사업은 현대그룹 창업주 정주영의 꿈에서 비롯됐다. 그는 자신의 일생 소원이 "내 고향 금강산을 국제관광단지로 만들어 통일에 기여하는 것"이라고 말했었다.정주영은 금강산 자락 통천에서 나고 자랐다. 그는 가출하면서 훔친 '아버님의 소 판 돈 70원'을 밑천으로 자전거 수리점부터 시작해 한국의 대표적 자본가가 된 입지전적 실향민이다. 김대중 대통령을 도와 '정주영의 꿈'이 실현되도록 정책적으로 지원한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도 평안북도 위원에서 나고 자란 실향민이다. 이들 실향민의 고향을 그리워하는 수구초심이 금강산관광을 현실로 만든 원천이었다. 남한의 첫 금강산 관광객 826명을 포함한 1천418명을 태운 현대금강호가 1998년 11월18일 오후 강원도 동해항을 떠나, 14시간여 만인 19일 오전 8시쯤 장전항에 닻을 내렸다. 남북 분단 이후 최대 교류협력사업인 금강산관광의 시작이다.해로로 시작한 금강산관광은 초반에는 관광객이 적어 어려움을 많이 겪었다. 2003년 9월부터 군사분계선을 가로지르는 육로관광이 시작되면서 관광객이 급증하기 시작했다. 2007년에는 34만5천6명에 이르렀고, 그해 10월에는 6만3천명이 금강산을 다녀와 '월 최고기록'을 갈아치우기도 했다. 2008년 3월17일부터는 자기 차로 금강산에 다녀올 수 있는 '승용차관광 상품'도 출시됐다.하지만 2008년 7월11일 이른 아침에 일반인 출입이 금지된 장전항 해변을 산책하던 여성 관광객이 인민군 초병의 총격으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금강산관광은 중단됐다.최근 북한은 금강산 관광지구 내 남한의 시설들을 무단 철거 중인 것으로 확인됐다. 금광산관광이 재개될 날이 언제 올까.금강산관광 당시 상팔담 위 구룡대 안내를 맡고 있던 여성 안내원에게 누가 기념사진을 찍자고 하자 "지금은 복무 중이라 안 되고, 나중에 좋은 날이 오면 마음 놓고 찍읍시다. 머지않아 그날이 올 것이며, 그때 지겹도록 실컷 찍읍시다"라고 했었다. 글·사진=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금강산 구룡폭포.금강산 구룡대 위에서 내려다 본 상팔담. 구룡폭포 위에 있다.김홍도 작 '구룡연'금강산 해금강.김봉규 전문기자
[김봉규의 수류화개(水流花開)] 해당화(2) 약초꾼·난개발 수난사…동해안 해변 수놓은 진분홍빛 군락 '멸종위기'
동해안을 따라 북쪽으로 더 올라가면 울진의 월송정과 망양정 주위에도 최근에 심은 해당화를 만날 수 있다.요즘 동해안에서 보게 되는 해당화 군락 대부분은 조경을 위해 인공적으로 심어 조성한 것들이다. 옛날부터 자생하던, 강인한 생명력으로 아름다운 꽃을 피워 멋진 풍광을 선사하던 모래밭 해당화 군락은 거의 사라져 버렸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포항의 화진포와 월포를 비롯해 영덕, 울진, 삼척, 강릉, 속초, 고성 등의 해변을 수놓던 해당화가 백사장 난개발과 약초꾼 등으로 인해 멸종 위기에 몰려야 했다. 그러자 곳곳에서 해당화 복원 운동이 펼쳐지기도 했으나 별 성과를 못 거둔 것 같다.포항 송라면 화진리 천연기념물 보호300m 군락지 조사 중 훼손 당하기도영덕·울진·삼척·강릉·속초·고성 등민간단체 복원운동 불구 점차 사라져 국내 최고군락 꼽는 태안 신두리사구서해안 군락지는 동해안 보다 잘 보전약재 사용·울타리에 심어 잡귀 쫓아바닷가 오누이 이야기 속 슬픈 전설 中 양귀비 일화속 등장·詩句에 사용포항시 북구 송라면 화진리의 자생 해당화 군락지의 경우 천연기념물로 보호해야 한다는 요청을 받아들여 문화재청이 2004년 현지 조사를 진행하기도 했으나, 2005년 5월 강원도 누군가 포클레인을 동원해 300m의 해당화 군락지를 훼손하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그 후 민간단체가 2005년 6월 훼손된 해당화 군락지 모래언덕에 해당화나무 400여 그루를 심는 등 복원사업을 펼쳤으나 오래가지 못했다.삼척시 근덕면 맹방해변 해당화도 1994년 주민들이 성금을 모아 해당화 심기 운동을 벌이기 시작한 이후 한동안 성과를 거두기도 했으나 무단채취, 도로개설, 관리 잘못 등으로 다시 대부분이 사라져 지금은 찾아보기 힘들 정도가 되어 버렸다.해당화가 군화인 강원도 고성군에서는 2002년 토성면 봉포리에 해당화공원을 조성했다. 하지만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고 방치되다 최근 다른 꽃들을 심어 재정비하자, 다시 그 자리에 해당화를 심자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동해안과는 달리 서해안에는 자생 해당화 군락지가 잘 보전되고 있는 편이다. 국내 최대의 모래언덕인 태안 신두리 해안 사구의 해당화 군락은 우리나라 최고의 해당화 군락으로 꼽힌다. 광활한 모래 언덕 곳곳에 피어있는 진분홍 해당화의 풍경은 사람들의 마음을 빼앗기에 충분하다. 시간과 바람이 빚어낸 신두리해안사구의 거대한 모래언덕 곳곳에 옹기종기 해당화 동산이 펼쳐지면서 특별한 풍광을 선사한다. 인천시 옹진군의 '삼형제섬' 신시모도, 대청도, 덕적도, 백령도 등에서도 5월이 되면 멋진 해당화 군락을 만날 수 있다.자생 해당화 군락지는 많이 사라졌지만, 근래 들어서는 해당화가 조경용이나 관상용으로도 많이 심어지고 있다. 그래서 요즘은 해변이 아닌 곳에서도 해당화를 종종 만날 수 있다. 며칠 전 대구 신천 둔치에서 진분홍 꽃이 핀 해당화를 만날 수 있었다. 심은 지 얼마 안 된 듯했는데, 한 군데 몇 포기 심어놓은 것이 전부였다. 주변에 서부해당화, 장미 등을 같이 많이 심어놓은 것 같은데, 해당화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아 아쉬웠다. 더 많이 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당화는해당화(海棠花)는 장미과에 속하는 낙엽관목이다. 줄기에 가시와 털이 있다. 잎은 어긋나게 달리며 두껍고 타원 모양이다. 표면은 주름살이 많고 윤기가 있으며 털이 없고, 이면은 잔털이 많다. 지름 6∼9㎝ 정도의 향기로운 꽃이 5∼7월에 홍자색으로 핀다. 흰색도 있고, 연분홍색도 있다. 꽃은 계속 피고 지는데, 9~10월에 피어나는 예도 있다. 5개의 꽃잎과 꽃받침이 있고, 다수의 수술이 있다. 둥근 열매는 8월 이후 황적색으로 익는다. 해변의 모래밭이나 산기슭에서 주로 자라났다. 우리나라 해안 모래언덕에서 쉽게 볼 수 있었으나, 현재는 원형 그대로 남아 있는 곳이 드물다.해당화는 꽃이 아름답고 특유의 향기를 지니고 있으며 열매도 아름다워 관상용으로도 선호된다. 꽃은 향수원료로 이용되고 약재로도 쓰인다. 열매는 약용 또는 식용한다. 해당화의 붉은 꽃잎은 향기가 좋아 여인들이 꽃잎을 넣은 향낭을 만들어 차고 다녔다. 색도 고와 옷이나 음식에 색소로 사용하기도 했다. 해당화로 담근 술은 향기와 붉은빛이 좋아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았다. 해안가 사람들이 즐겨 담가 먹던 전통술이었다. 해당화는 잡귀를 쫓아내는 의미가 있어 해안가 민가에서는 울타리로 심기도 했다.해당화는 한약재로도 사용되었다. 주로 피의 운행을 순조롭게 하거나 어혈을 풀어주는 데 활용되었다. 민간요법으로는 당뇨나 관절염에 쓰이기도 했다. 한때 그 뿌리와 열매가 당뇨에 특효라는 소문이 돌면서 사람들이 마구 캐가 바닷가에서 해당화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수난을 당하기도 했다. 해당화에서 뽑아낸 추출물은 당뇨의 예방과 치료 목적으로 연구되고 있기도 하다.해당화는 피지 않은 꽃봉오리가 붓 모양이어서 '필두화'라고도 불린다. ◆해당화 전설'매화는 맑은 손, 복사꽃은 요염한 손, 연꽃은 깨끗한 손, 해당화는 외로운 손'이라는 말이 있다. 조선 시대인 1809년 빙허각 이씨가 가정 살림에 관한 내용을 쓴 '규합총서(閨閤叢書)'에 나오는 구절이다. 해당화에 대한 당시의 정서를 엿볼 수 있다.해당화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옛날 바닷가에 오누이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관청에서 누이를 궁녀로 뽑아 배에 태워 데려가 버렸다. 누이 잃은 동생은 그 자리에 서서 며칠을 울다가 선 채로 죽고 말았다. 이후 그 자리에 동생의 서러운 눈물과 같은 붉은 꽃 한 송이가 피어났다. 그 꽃이 바로 해당화다.우리나라 이야기는 아니지만, 해당화와 관련한 유명한 일화가 있다. 중국 당나라 현종과 양귀비의 이야기다.현종은 어느 날 심향정(沈香亭)에 올라 사랑하는 양귀비를 불렀다. 이때 양귀비는 전날 밤에 마신 술이 깨지 않아 자리에 누워 있었다. 그래도 양귀비는 황제의 부름을 받고 거역할 수가 없어서 황급히 일어나기는 했으나, 얼굴은 창백하고 걸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시녀의 부축을 받고 나온 양귀비의 얼굴은 그래도 예쁘기만 했다. 백옥같이 흰 얼굴에 불그레한 홍조가 곱게 피어 있었고, 눈은 가느다랗게 뜨고 몇 가닥 흩어진 머리카락이 이마에 나부꼈다.현종은 한동안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너는 아직도 술에 취해 있느냐"라고 말을 건넸다. 그러자 양귀비는 "해당화의 잠이 아직 깨지 않았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양귀비는 자신의 붉은 얼굴을 해당화에 비유한 것이다. 이때부터 중국에서는 해당화를 '수화(睡花)'라고 불렀다고 한다. ◆해당화 명칭에 얽힌 이야기하지만 여기에 나오는 해당화는 우리나라의 해당화와 명칭은 같으나, 우리가 지금 지칭하는 해당화는 아니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해당(海棠)'이라고 부른 식물은 중국에서는 '매괴( 괴)'로 불리었다고 한다. 그리고 중국에서 '해당'이라고 지칭하던 식물은 꽃사과 또는 명자나무라고 전문가들은 파악하고 있다.우리나라와 중국의 고문헌에서 해당화와 관련해 불일치하거나 상충하는 내용이 자주 등장하는 것은 '해당(海棠)'이라는 한자 식물명이 이처럼 중국과 한국에서 서로 다른 식물을 지칭한 것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고문헌에서 나타나는 '해당'이라는 식물명을 번역할 때는 주의가 필요한 것이다. 양귀비나 두보와 얽힌 고사 등 해당화와 관련된 중국의 고사는 우리나라의 해당화가 아니라 꽃사과 또는 명자나무에 대한 것이라고 한다. 두보는 해당화 명소인 쓰촨(四川)성 청두(成都)에서 오래 살았지만 해당화를 읊은 시가 하나도 없는데, 두보의 어머니 이름이 해당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이런 해당화와 관련한 시 두 수를 소개한다. 먼저 이규보의 '해당(海棠)'이라는 시다.'해당화가 잠이 깊어 노곤하게 늘어지니(海棠眠重困의垂)/ 양귀비가 술에 취했을 때와 같네(恰似楊妃被酒時)/ 다행히 꾀꼬리가 울어 잠을 깨우니(賴有黃鶯呼破夢)/ 다시 미소 지으며 교태를 부리네(更含微笑帶嬌癡)''악학궤범'을 편찬하고 '용재총화'를 지은 학자이자 문신인 성현(1439~1504)의 '매괴( 괴)'라는 한시다.'한 그루 매괴 나무 있으니(一朶 괴樹)/ 전하는 말에 해당화라 이르는데(人傳是海棠)/ 이슬 내려 꽃가루를 가벼이 씻고(露華輕洗粉)/ 바람 불어 향기를 살살 풍겨주네(風骨細通香)/ 처음엔 붉은 비단을 오렸나 했더니(始訝紅羅剪)/ 결국은 비단 우산을 펼친 듯하구나(終成錦산張)/ 어여뻐라 더없이 고운 자태 뽐내며(憐渠矜絶艶)/ 글 읽는 책상 가까이 피어 있는 게(開近讀書床)' 글·사진=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대구 신천 둔치에 핀 해당화. 요즘은 해당화를 조경용으로도 많이 심어 해안이 아닌 곳에서도 종종 볼 수 있다.경주 양동마을 무첨당 화단에 핀 해당화. 무첨당은 회재 이언적 종택의 사랑채 이름이다.포항시 북구 흥해읍 오도리 국도 옆 산비탈에 핀 해당화. 인동초와 찔레 등이 무성한 수풀 속에 피어 있었다.동해안 해당화 열매(2010.10.29).
[김봉규의 수류화개(水流花開)] 해당화(1)…척박한 모래땅에서 순박하고 곱게 핀 해당화야~
5월부터 3개월 정도 꽃이 피고 지는 해당화. 우리나라 서해와 동해 해변의 모래언덕이나 산기슭에서 자라면서 진분홍색의 아름다운 꽃을 피워, 옛날부터 많은 사람의 각별한 사랑을 받아왔다. 척박한 모래언덕에서도 화사하면서 순박한 아름다움과 은은한 향기를 선사하는 해당화는 우리 민족의 정서를 대변해 오기도 했다. 그런 정서는 우리 문화와 예술 곳곳에 녹아들었다. '명사십리 해당화야 꽃 진다고 서러워 마라/ 명년삼월 봄이 오면 너는 다시 피련만/ 우리 인생 한번 가면 다시 오기 어려워라~.' 이런 내용의 민요가 오래전부터 불려 왔고, 유행가에도 해당화에 당대의 정서를 담은 가사들이 많이 등장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유행가 가수로 알려진 채규엽(1906~1949)이 1930년대 발표한 대중가요에는 '봄도 짙은 명사십리 다시 못 올 옛이야기/ 해당화에 속삭이던 그 님이었건만'이라는 구절이 들어있다. 이미자가 부른 '섬마을 선생님'(1966년)은 널리 알려진 대중가요다. '해당화 피고 지는 섬마을에/ 철새 따라 찾아온 총각 선생님/ 19살 섬 색시가 순정을 바쳐/ 사랑한 그 이름은 총각 선생님/ 서울엘랑 가지를 마오 가지를 마오.'승려 시인이자 독립운동가였던 만해 한용운은 조국의 광복을 고대하는 마음을 해당화에 실어 지은 시 '해당화'를 남겼다.'당신은 해당화 피기 전에 오신다고 하였습니다/ 봄은 벌써 늦었습니다/ 봄이 오기 전에는 어서 오기를 바라더니/ 봄이 오고 보니 너무 일찍 왔나 두려워합니다/ 철모르는 아이들은 뒷동산에 해당화가 피었다고 다투어 말하기로/ 듣고도 못 들은 체하였더니/ 야속한 봄바람은 나는 꽃을 불어서/ 경대 위에 놓입니다 그려/ 시름없이 꽃을 주워서 입술에 대고/ "너는 언제 피웠니"하고 물었습니다/ 꽃은 말도 없이 나의 눈물에 비쳐서/ 둘도 되고 셋도 됩니다.'대구의 '천재화가' 이인성은 1944년 6월 한용운이 별세하자 그와 그의 시 '해당화'를 기려 '해당화'라는 제목의 걸작을 남겼다. 먹구름 낀 쓸쓸한 바닷가 모래밭에 핀 해당화 앞에 흰 수건을 쓴 여인이 앉아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고, 그 옆의 두 소녀 중 한 소녀는 해당화 한 송이를 감싸 쥐며 보고 있다.이런 해당화는 나에게도 스며들었고, 20여 년 전부터 실제 접하게 되면서 해당화는 내가 매우 좋아하는 꽃 중의 하나가 되었다. 특히 2005년 5월 말 금강산 여행을 할 당시, 해금강에서 해당화를 보았을 때 정말 반갑고 좋았던 기억이 새롭다. 그 전후에 동해안 해변에서도 몇 차례 자생하는 해당화 군락을 보며 즐거워했던 기억이 있다. 척박한 환경에서도 잘 버티며 오랫동안 자생해온 해안 모래밭 해당화 군락은 점점 사라져갔다. 특히 동해안 해변의 자생 해당화는 대부분 사라져 버렸다.얼마 전 동해안을 찾아봤다. 먼저 포항시 북구 흥해읍 오도리에 있는 사방기념공원으로 향했다. 그곳에 심어놓은 해당화를 보기 위해서였다. 사방기념공원은 한국의 근대적 사방(砂防) 사업이 시작된 지 100주년이 된 것을 기념해 2007년 11월 개장한 공원이다. 오도리 일대는 1975년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총면적 4천500㏊를 녹화해 사방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룩한 대표적 지역이다.공원에 도착하기 전 도로변에 있는 주택의 축대 사이에 심어놓은 해당화가 눈에 들어왔다. 진분홍색 꽃 가운데 흰 꽃도 보였다. 조금 더 가니 도로 옆 산비탈 쪽에 인동초와 찔레 등 수풀 속에 해당화 몇 송이가 피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자생하는 것인 듯해 매우 반가웠다. 사방기념공원에 가니 주차장 앞 바다 쪽에 해당화 화단을 길게 조성해 놓았다. 이미 꽃이 지고 열매를 맺은 것도 있고, 꽃을 피운 것도 있었다. 가뭄이 오래 계속되어서인지 생육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았다. 다시 월포해수욕장을 거쳐 영덕 해맞이공원도 둘러봤으나 해당화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 전통마을도 가 보았다. 그곳의 갈암종택 해당화를 인터넷에서 보았기 때문이다. 이곳 해당화도 벌써 꽃은 지고 열매만 남아있었다. 해당화는 선비들의 사랑을 받아 종택 뜰에 꽃을 피우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경주 양동마을 회재종택, 고령 개실마을 점필재종택, 대구 옻골마을 백불암종택 등에서도 탐스러운 꽃을 피운 해당화를 만날 수 있다. 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김봉규의 수류화개(水流花開)] 해당화(2)에서 계속됩니다.충남 태안 신두리 해안사구의 해당화 풍경. 광활한 해안 모래언덕 곳곳에 해당화 동산이 펼쳐지는 이곳은 우리나라 최고의 해당화 군락지로 꼽힌다.(2022년5월25일) 〈태안군청 제공>
'20세기 소울 음악의 상징' 레이 찰스 음반 발매
'20세기 소울 음악의 상징' 레이 찰스의 LP 음반<사진>이 그의 전기를 담은 아트북과 함께 발매됐다. 블루스, 소울, 재즈, 가스펠을 아우르며 흑인음악 발전을 이끌었던 레이 찰스의 전성기 음악이 담겨 있다. 레이 찰스는 7세에 시력을 잃는 시각장애를 극복하고 엄청난 전설을 만들어냈다. 이번 음반 'RAY CHARLES - JOSE COREEA' LP에는 그의 창작력이 가장 빛을 발했던 시기인 1950년대 힛트곡과 그의 전기영화 'RAY (2004)'에 삽입되었던 'I've Got A Woman', 'Hallelujah, I Love Her So', 'Unchain My Heart', 'Come Rain or Come Shine', 'Hit The Road Jack' 등 13곡이 담겨있다. 그의 삶은 프랑스 화가 호세 코레아의 일러스트에 담겨 있다. 레이 찰스의 전기를 그린 호세 코레아는 수 많은 책과 매거진의 삽화, 초상화 등을 작업했다. 글을 쓰는 작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레이 찰스의 음반은 '2CD + 아트북'으로도 발매되었다. 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흥미로운 명필이야기 19] 산곡도인 황정견…사공의 노가 허공 날다가 물결에 부딪혀 파문이 이는 것을 보고 '서법 이치' 깨닫기도
황정견(1045~1105)은 중국 북송시대 서예가이다. 유명 문학가이기도 하다. 서예가로는 채양, 미불, 소식과 더불어 북송 4대가로 꼽힌다. 호는 산곡도인(山谷道人)이며, 흔히 '황산곡'으로 불린다.1067년 진사에 합격한 후 여러 벼슬을 지냈다. 국사편수관으로 있을 때 실록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사실을 왜곡한 부분이 많았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아 유배를 당했다. 1101년 휘종이 즉위하면서 다시 기용되기는 했으나, 또다시 유배지를 전전하다 1105년 유배지에서 별세했다. 훗날 그의 제자들이 '문절(文節)'이란 시호를 붙여 주었다.지조를 지킨 그는 역경에 처해서도 가난과 고난을 기꺼이 즐기면서 태연하게 지냈다. 평생 유학의 영향을 받았으나 선학(禪學)의 영향도 비교적 깊게 받았다.시를 잘 지은 그는 '강서시파(江西詩派)'의 조종(祖宗)으로 추대받았다. 두보를 특히 존경했다. 그는 과거의 문장이나 시구를 빌려 자신의 학문을 도야하되 거기에 얽매이지 말고 새롭게 거듭나야 하며, 시인은 기교의 속박을 벗어나 스스로 일가를 이루어야 한다고 강조했다.'시서쌍절(詩書雙絶)'이라는 평을 들었던 그는 해서·행서·초서 3체 모두에 능했다. 앞서간 서예가들의 글씨를 섭렵하고 장점을 취하며 소화한 뒤 새로운 것을 창출하려고 노력했다. 또한 생활 속에서 새로운 것을 찾아 자신의 예술적 소양과 결부시키면서 새로운 것을 창출하고자 했다. 예를 들면 배를 타고 여행을 하는 도중에 사공이 힘들게 노를 저을 때마다, 노들이 번쩍번쩍 허공을 날다가 물결에 부딪쳐 파문을 일으키는 것을 보고 서법의 이치를 깨닫기도 했다. 이런 노력의 결과, 만년에 접어들면서 그의 글씨는 완숙해지면서 자신만의 독특한 예술풍격을 창출했다. '내가 검남(黔南)에 있을 때는 나의 글씨가 연약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융주(戎州)로 옮겨온 후 옛날에 쓴 글씨를 보니 보기 싫은 글자가 대략 열 자 가운데 서너 자나 된다. 지금 비로소 옛사람들이 말한 침착통쾌하다는 말을 깨닫게 되었으나, 이를 알아주는 사람이 드물구나.'그가 자신의 글씨와 관련해 남긴 소회 중 하나다. 그의 작품으로 '복파신사시권(伏波神祠詩卷)' '송풍각시(松風閣詩)' '이백억구유시권(李白憶舊遊詩卷)' '화엄소(華嚴疏)' '화기훈인첩(花氣薰人帖)' 등이 전하고 있다. 복파신사시권은 큰 글씨로 쓴 대작으로, 그가 병에서 회복 후 쓴 득의작(得意作)이다. 범성대(范成大)는 이 작품에 대해 '황산곡은 만년에 서법이 완성되었으나, 이 서첩에 대해서는 조금도 남은 여한이 없을 것이다. 손과 마음이 서로 조화를 이루고 붓과 먹이 또한 사람의 뜻과 같다'라고 평했다.'송풍각시'는 황정견이 직접 시를 짓고 행서로 쓴 작품이다. 그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화기훈인첩' 역시 그의 최상급 작품으로 평가받는데,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꽃향기가 사람을 취하게 해 명상을 깨뜨리려 하네(花氣薰人欲破禪)/ 사실 마음은 이미 중년을 지났지만(心情其實過中年)/ 봄이 오면 시상을 떠올리는 것 무슨 까닭인가(春來詩想何所以)/ 여덟 굽이 강가에서 배를 타고 물을 거슬러 오르네(八節灘頭上水船).' 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황정견이 짓고 쓴 시 '화기훈인(花氣薰人)'
[옛사람들의 행복콘서트] 선비, 자리를 짜다…"누군가 업신여기는 것도 내 분수에 맞는 즐거운 일이면 이보다 좋은 것은 없다"
'수처작주(隨處作主) 입처개진(立處皆眞)'이라는 말이 있다. 어떤 처지에 있든 '주인'이 되면, 그곳은 모두 바로 참된 자리가 된다는 의미다. 당나라 임제(臨濟) 선사의 말이다. 많이 회자하는 구절이지만, 사람이 어떤 상황에서도 주체적으로 살아가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누리는 신분의 노예가 되기도 하고, 명성이나 권력의 노예가 되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부나 편리의 노예가 되어 참된 삶을 살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수많은 '갑질'이 그런 것이고, 비굴과 아첨이 또한 그런 삶이다. 사장과 직원, 스승과 제자, 노인과 젊은이, 부모와 자식, 판검사와 피의자 등 여러 관계에서 자신의 사회적 신분이 씌우는 굴레에서 완전히 자유롭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수처작주' 하기가 어려운 것이다.위 말에서 임제 선사가 드러내고자 한 바는 이런 의미보다 한 차원 더 높은 것으로 해석된다. 말하자면, 마음에 어떤 분별심도 없는 '주인'으로 살면 어떤 환경에 처하든, 무슨 일을 당하든 걸림이 없이 무애자재(無碍自在)하게 된다는 의미다. '무아(無我)'가 되고, 부처가 되어야 하니 아무나 이를 수 있는 경지는 아닐 것이다.관련한 옛글을 하나 소개한다. 시골 사람들의 농담에 이런 것이 있다.'시골 선비가 젊어서 과거 문장을 익히다가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면 풍월이나 읊고, 그러다 기운이 빠지면 자리 짜는 일을 하다가 마침내 늙어 죽는다.'이 농담은 그런 처지의 선비를 천시하고 업신여겨서 하는 말일 것이다. 선비다운 풍모에서 멀리 벗어나고, 풍류와 아치를 손상하기로는 자리를 짜는 일이 가장 심하다. 그래서 자리 짜는 일을 특히 천하게 여겨서, 빈궁하고 늙은 사람이 마지막에 하는 일로 생각한다. 사람으로서 이렇게 하다가 일생을 마친다면 참으로 불쌍히 여길 일이다. 그렇다고는 하나, 주어진 분수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을 느닷없이 비난하고 비웃을 일만은 아니다.이제 나는 과거 문장도 풍월도 일삼지 않는다. 산속에 몸을 붙여 살아가므로 궁색하기가 한결 심하다. 따라서 농사짓고 나무하는 일이 내 분수에 맞는다. 더욱이 자리를 짜는 일이야 그다지 근력이 들어가는 일도 아니잖은가.집사람이 그저 밥이나 축내고 신경 쓸 일도 하나 없는 나를 못마땅하게 여겨, 그 형제의 집에서 자리 짜는 재료를 얻어다가 억지로 내게 자리라도 짜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이웃 사는 노인을 불러서 자리 짜는 방법을 가르치게 하였다. 나는 속을 죽이고 그 일을 하는 수밖에 어쩔 도리가 없었다.사회적 신분 굴레서 자유롭지 못한 삶씨줄 날줄 엇갈려 가며 자리 짜는 일빈궁한 선비가 마지막에 하는것 여겨괴로움은 모두 잊어버리고 일에 몰두어떤 처지에 있던 그 자리가 참된 자리 처음에는 손은 서툴고 일에 마음이 집중되지 않아서 몹시 어렵고 더뎠다. 종일토록 해봐야 몇 치 길이밖에 짜지 못했다. 그러나 날이 지나고 일이 조금씩 익숙해지자, 손을 놀리는 것도 저절로 편해지고 빨라졌다. 짜는 기술이 머릿속에 완전히 익자, 자리를 짜면서 곁에 있는 사람을 보고 말을 나누더라도 씨줄과 날줄이 번갈아 가며 엇갈리는 것이 모두 순조로워서 조금의 오차도 생기지 않았다.그렇게 되자 이제는 괴로움은 다 잊어버리고 즐겨 자리를 짜게 되었다. 식사하고 소변을 보러 가거나 귀한 손님이 올 때가 아니면 쉬지를 않았다. 따져보니 아침부터 저녁까지 한 자 길이를 짰는데, 솜씨가 좋은 사람으로서는 여전히 서툴다고 하겠지만 내 처지에서는 크게 나아진 것이다.천하에 나만큼 재주가 없고 꾀가 부족한 자가 없다. 한 달 배워서 이런 정도까지 이른 것을 보니, 이 기술이란 것이 천하의 보잘것없는 기술임을 얼추 알 만하다. 내가 이 일을 하는 것이 참으로 적합하다. 비록 이 일을 하다 내 일생을 마친다고 해도 사양하지 않겠다. 왜냐하면, 내 분수에 알맞기 때문이다.이 일을 하여 내게 보탬이 되는 것은 다섯 가지다. 일하지 않고 밥만 축내지 않는 것이 첫 번째이다. 일없이 하는 괜한 출입을 삼가는 것이 두 번째이다. 한여름에도 찌는 듯한 더위와 땀이 나는 것을 잊고, 대낮에도 곤한 낮잠을 자지 않는 것이 세 번째이다. 시름과 걱정에 마음을 쏟지 않고, 긴요하지 않은 잡담을 나눌 겨를이 없는 것이 네 번째이다. 자리를 만들어 품질이 좋은 것으로는 늙으신 어머니를 편안하게 모실 수 있고, 거친 것으로는 내 몸과 처자식이 깔 수 있다. 또 어린 계집종들도 맨바닥에서 자는 것을 면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나머지로는 나처럼 빈궁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 다섯 번째이다. 정축년 여름 5월 아무 날에 쓴다.구사당(九思堂) 김낙행(1708~1766)의 '직석설(織席說)'이다. 김낙행은 안동 출신으로, 밀암(密庵) 이재의 제자다. '근사록(近思錄)' '심경(心經)' 등에 조예가 깊었다. 강좌(江左) 권만, 대산(大山) 이상정 등과 교유하며 글을 쓰고 학문을 연마한 선비로,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향촌에서 한평생을 보냈다. 문장으로 이름이 났고, 효행이 지극했다. 특히 제문(祭文)에 뛰어나서 '구제밀찰(九祭密札·구사당 김낙행의 제문과 밀암 이재의 편지)'로 불리기도 했다. 생산적인 일을 하지 않는 선비가 부인의 성화에 떠밀려 자리 짜는 일을 하게 되면서 깨닫게 된 것들을 담고 있다. 가난한 선비의 처지와 생각을 엿볼 수 있다. '선비' '양반'이라는 신분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해 '주인'으로 살지 못했다면, 훨씬 더 불행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자리를 짜면서 재미와 보람도 느끼게 못 했을 것이다. 임제 선사는 '수처작주'라는 구절에 앞서 이렇게 말했다. "도를 배우는 이들이여, 불법(佛法)은 애써 공을 들여서 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평상시대로 아무 일 없는 것이다. 똥 싸고 오줌 누며, 옷 입고 밥 먹으며, 피곤하면 눕는 것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나를 비웃을 것이지만, 지혜로운 이는 알 것이다. 옛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자신 밖을 향해서 공부하는 사람은 모두 어리석고 고집스러운 사람이다'라고." 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
[동추 금요단상] 밀양 위양지와 완재정…저수지가 품은 5개의 섬…그 가운데 섬에 지은 정자…그 못의 화룡점정이 되다
밀양에 있는 위양지(位良池)라는 못이 가볼 만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못 안의 섬에 있는 완재정(宛在亭)이라는 정자에 대한 사연과 함께.이팝나무 꽃이 한창 피어나던 때 가보았다. 그다지 큰 저수지는 아니었지만, 농사를 위해 만든 저수지가 이렇게 멋진 곳이 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전국 곳곳에 있는, 크고 작은 수많은 저수지를 위양지처럼 만들어 가면 정말 좋겠다 싶었다. 위양지는 신라 때 농업용수 공급을 위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현재의 못은 임진왜란 후인 1634년 밀주(밀양) 부사가 다시 조성했다는 기록이 있다. 무엇보다 오래전부터 둑 전체에 다양한 나무를 심어 아름답게 가꾼 점이 특별했다. '위양(位良)'은 양민(良民)을 위한다는 뜻인데, 백성을 위해 농사용 물 공급만 생각한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을 생각했던 것이다.저수지 둑의 나무들을 언제부터 심어 가꾸었는지 모르겠지만, 노거수들이 많았다. 그중 왕버들을 보면 두세 사람이 안아야 할 정도로 굵고 커서 수백 년은 된 듯하다. 완재정의 내력을 담은 그 기문(記文)을 보면, 오래전부터 위양지의 풍광이 대단히 좋았던 모양이다. 전체 면적이 6만2천790㎡인 저수지 안에 5개의 작은 섬이 있다. 섬 중 한 곳에는 완재정이라는 정자가 있다. 주변 풍경이 비치는 맑은 물과 노거수들 덕분에 둑길을 한가롭게 걸으며 풍광을 즐기기에 최고의 못인 것 같다. 소나무와 왕버들, 느티나무, 팽나무 등 노거수들이 어우러져 멋진 풍광을 선사한다. 눈이 내린 듯 하얀 꽃이 만발한 이팝나무와 어우러질 때는 더욱더 멋지다. 완재정이 있는 섬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배를 타야 했으나, 지금은 섬을 연결하는 작은 다리가 설치되어 있어 쉽게 접근할 수 있다. 둑길에는 곳곳에 의자가 설치돼 있고, 정자도 있어 느긋하게 풍경을 즐길 수 있다.완재정에는 각별한 사연이 있다. 완재정의 주인공은 학산(鶴山) 권삼변(1577~1645). 그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산청에서 의병으로 궐기했지만, 왜군에 잡혀 일본에서 10여 년간 포로 생활을 했다. 1604년에 사신을 따라 귀국한 후 이곳에 새롭게 터를 잡고 살게 되었다. 그는 5개 섬이 있는 위양지 경치가 중국 양양(襄陽)의 못과 같다 하며 좋아했다. 그래서 가운데 섬에 정자를 짓고자 마음먹고 '완재'라는 이름까지 정한 뒤 시도 남겼다. 그러나 형편이 여의치 않아 정자를 건립하지는 못했다. 300여 년의 세월이 흐른 후인 1900년 후손들이 그의 뜻을 받들어 비로소 정자를 지었다.완재정 마루 위에 걸린 완재정기(宛在亭記)에 이러한 사연이 담겨 있다. 기문은 이만도가 지었다.'밀양 시내에서 20리 되는 곳에 화악산(華嶽山)이 있고, 산 아래에 위양리(位良里)가 있다. 동네 앞에 양야지(陽也池)가 있는데 양양지(陽良池)라고도 부른다. 주위가 4~5리이고 가운데 작은 섬 다섯이 있다. 수많은 전답에 물을 대고 사방 둑에는 모두 아름다운 나무와 화초가 있다. 신라와 고려 시대에 주민들에게 혜택을 주는 근원이었으며, 은자가 소요하던 곳이다.우리 조선 시대에 학산 권삼변(權三變)이 단성(丹城)에서 본 동네로 와서 살면서 본 못이 중국 양양(襄陽)의 습씨지(習氏池)와 같음을 즐겨, 일찍이 정자를 짓고자 하여 완재정이라 이름을 지었다. 시는 이미 완성하였으나 집은 짓지 못하여 자손들의 한이 된 지 300여 년이 되었다. 경자년(1900)에 우중, 중영, 중우, 만석, 병석, 중기 등이 비로소 다섯 섬 중 가운데 작은 섬 하나에 그 조상이 남긴 뜻을 이루어 집 세 칸을 짓고 네모진 배를 갖추어 왕래하도록 하였다.'이어서 '완재'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그 주인공이 바로 권삼변이라고 말하고 있다. 완재는 '시경'에 나오는 '물가 한쪽에 있는 저 사람, 물길 거슬러 올라가려니 길이 막혀 험하고 멀지만, 물길 따라 내려가니 완연히 물 한가운데 있네(遡游從之 宛在水中央)'라는 구절 중에서 가져온 것이다.정자가 지어진 사연이 아름답고 멋있지 않은가. 덕분에 위양지 풍광의 화룡점정이 되어, 더욱더 멋진 장소로 만들게 된 것이다.국내 곳곳에서 물과 주변 풍광이 좋은 저수지를 보게 되는데, 대부분 둑이나 둘레에 나무가 없어 아쉬워하곤 했다. 많은 저수지가 위양지처럼 변모해 국민의 사랑을 받게 되면 좋겠다. 글·사진=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주변의 산 그림자가 물에 비치고, 완재정 앞의 이팝나무 꽃이 핀 풍경의 위양지.위양지 둑의 숲길.
[김봉규 기자의 '지구촌 산책' .24] 中 우이산 하매촌, 茶 실크로드 '만리차로(萬里茶路)' 출발지…富 일구며 호화주택 마을 조성
중국 푸젠성 우이산(武夷山) 대홍포로 대표되는 무이암차(武夷巖茶)로도 유명하다. 우이산에서 나는 이 찻잎 덕분에 옛날부터 인근 마을이 번성했고, 지금도 무이암차는 우이산 주변 주민들의 중요 소득원이 되고 있다. 무이암차로 번성했던 대표적 마을이 하매촌(下梅村)이다.하매촌은 청나라 때 러시아와 유럽까지 팔려나가던 무이암차의 집산지로 차시장이 크게 형성되면서 한동안 번성했는데, 지금도 당시에 지은 화려한 건물들이 많이 남아있다. 그리고 옛날 거리와 우물, 빨래터 등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중국 전통 마을의 분위기를 온전히 느낄 수 있다. 물론 곳곳에서 주민들이 차를 만들어 판매하고 있다.마음 한가운데로 흐르는, 200여 년 전에 인공적으로 만든 좁은 수로를 중심으로 그 좌우에 집들이 늘어선 풍경이 정겹고 독특하다. 수로 위에는 곳곳에 다리가 놓여 있고, 수로 양쪽에는 지붕을 얹은 길이 나 있다. 수로 쪽에는 난간이 설치돼 있어 주민들이 흐르는 물을 보며 쉬기도 한다. 마을 사람들은 수로 양쪽에서 환담을 나누거나 채소를 다듬고, 책을 읽기도 한다. 500여 가구 2천500여 명이 살고 있는 하매촌은 관광객들도 많이 찾는 곳이다. '하매'는 이 마을 앞으로 흐르는 하천인 매계(梅溪)의 하류에 자리하고 있어서 붙은 이름이다. 매계 상류에 있는 마을은 '상매(上梅)'다.◆수로 양쪽에 늘어선 고택 거리하매촌은 지금까지도 이처럼 청나라 강희제와 건륭제 때의 번성했던 모습을 보여주며 옛 모습을 잘 유지하고 있다. 하매촌에는 두번 가보았는데, 생활환경과 주민들의 일상이 한가한 옛날 모습이어서 좋은 인상을 받았다.이 마을에는 송나라 때 들어온 강(江)씨를 비롯해 명대에 이주해 온 다양한 성씨들이 살아왔다. 그리고 청나라 때는 추(鄒)씨가 장시성(江西省) 난펑현(南豊縣)에서 이주해 정착하면서 마을의 번성을 주도하게 되었다. 그 이후 민국초기에도 저장성(浙江省) 룽취안(龍泉)에서 다양한 성씨가 하매촌으로 이주했다.추씨의 경우, 1694년 추원로(鄒元老)가 가족을 이끌고 이곳으로 와서 자리 잡게 되었다. 이들은 여러 대에 걸쳐 창업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유명한 거상이 되었다. 추씨는 진상(晋商)과 합작한 차 사업으로 엄청난 부를 일구었다. 사업 성공으로 많은 돈을 벌어들인 이들은 호화주택들을 건립하고, 가문의 사당도 지었다. 또한 거액을 투자해 마을 변두리를 흐르는 물길을 마을로 끌어 들여 900m에 달하는, 당계(當溪)라는 수로도 조성했다.주거 공간을 중심으로 하면서 교육과 오락 공간을 겸한 하매촌의 고택은 대부분 큰 홀 하나와 여러 개의 방, 누각, 별채를 두었다. 서재와 정자도 세우고, 채광과 통풍 등을 위해 건물 사이에 네모난 뜰도 조성했다. 가옥의 정문을 보면 정교한 벽돌조각이 화려하다. 벽돌조각에는 인물과 새, 꽃, 산수 등 다양한 무늬가 새겨져 있다. 방문이나 창문에도 기하학적 무늬와 길한 의미를 가진 도안을 조각해 장식했다. 돌기둥과 건물의 기단, 화단의 난간 등에도 정교한 석각으로 장식해 눈길을 끈다.고택 중 청나라 때 지은 추씨 대부제(大夫第)는 하매촌의 고건물 중 가장 잘 보존된 건물이다. 추씨 가문 중 한 사람이 청나라 관직인 중헌대부(中憲大夫)를 지냈기에 저택 이름을 '대부제'라고 했다.이 건물에서는 웅장한 문루(門樓)와 정교하면서도 우아한 석각, 정교하고 다채로운 장식의 문살들이 눈길을 끈다. 건물 기둥과 문 등이 오래되어 보수와 정비가 필요한 상태인데도 방치되고 있었다.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었다. 근처의 추씨가사(鄒氏家祠)는 하매촌의 대표적 고택이다. 추씨가문의 사당인 이 건물은 1790년에 건립됐다. 개방형 홀의 양쪽에 별채를 두고, 2층에는 무대 공간을 만들었다. 건물 내부는 다양한 문양이 새겨진 들보와 높은 기둥에다, '충효(忠孝)'와 '인의(仁義)' 등이 새겨진 현판, 좋을 글귀를 새긴 주련(柱聯) 등이 많이 걸려 있어 눈길을 끌었다. 여러 인물과 생활상, 시골경관 등을 정교하면서도 생동감 있게 새겨 화려하게 장식한 네 짝의 문이 특이 인상적이었다.사당 입구인 문루는 크고 화려했다. 다양한 문양이 정교하게 새겨진 벽돌로 장식되어 있는데, 문 양쪽에 '목본(木本)'과 '수원(水源)'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가족의 번영과 융성이 나무처럼 마을에 뿌리를 내리라는 의미와 더불어, 강물의 원천인 작은 물줄기가 끊임없이 흐르는 것과 같이 후손들이 조상을 돌이켜 보고 그 근본을 잊지 말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문루 입구의 좌우에 있는, 원형의 벽돌 조각은 각각 문승(文丞)과 무위(武尉)를 상징한다. 대를 이어 문무를 겸비한 인재를 배출하라는 의미라고 한다. ◆만리차로(萬里茶路) 기점하매촌은 우이산 차가 러시아와 유럽까지 수출되며 번창하던 당시의 대표적 차 집산지였다. 소위 '만리차로(萬里茶路)' 또는 '만리차도(萬里茶道)'의 시작 지점이었던 것이다. 중국 차상들은 차를 푸젠성 우이산에서 매입해 가공한 찻잎을 수로를 이용해 후베이성(湖北省) 한커우(漢口)에 모았다. 그리고 다시 수로로 후난성(湖南省) 북부와 허난성(河南省) 북부까지 이동시킨 뒤 육로를 통해 산시성(山西省), 내몽골, 몽골을 거쳐 모스크바까지 가져가 판매했다. 중국 북방 초원과 러시아 유목 민족은 육류와 우유 위주 식생활을 했다. 그래서 찻잎을 이용해 느끼함을 잡고 소화를 도왔으며, 비타민을 보충했다. 산시성 상인 진상이 이 사업 기회를 포착했다.찻잎 상인들은 장거리 운송과 보관에 편리하도록 찻잎을 벽돌 모양의 차인 전차로 가공하도록 했다. 러시아 사람들은 차를 잘게 부수어 사모바르(주전자)에 넣고 끓인 후 설탕과 우유를 넣었다. 그들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이 차로 길고 혹독한 겨울을 이겨냈다. 사모바르는 러시아의 가정에서 물을 끓이는 데 사용하는 주전자다. 러시아어로 '자기 스스로 끓는 용기'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데, 사모바르는 18세기에 홍차가 보급되면서 함께 발달했다.진상의 차를 꺄흐따에서 수집한 러시아 상인들은 이르쿠츠크에서 서쪽으로 시베리아를 가로질러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 가져갔다. 이 경로가 유럽과 아시아 대륙을 가로지른, 한나라 때의 실크로드에 비견되는 만리차로이다.만리차로의 노선은 우이산 하매촌에서 시작되었다. 진상들은 우이산에서 채취해 가공한 찻잎을 매입한 후 북쪽으로 운송, 양쯔강을 거쳐 한커우에 가져갔다. 우이산 하매촌은 바다와 육지 차로(茶路) 모두의 출발점이었다. 우이산 찻잎은 남북 각각 하나씩 유통경로가 있었다. 하나는 육지로 통하는 길이다. 진상들이 매집해 곳곳에 판매했는데, 한커우에서 다시 러시아 상인들에게 판매했다. 다른 하나는 '해상 실크로드'를 통해 네덜란드 상인 손을 거쳐 영국, 프랑스 등 유럽 국가에 판매했다.당시 만리차로에서 찻잎은 하매촌에서 숭안현(우이산시)으로 운송되고, 다시 육로로 장시성(江西省)의 연산현(鉛山縣) 하구진(河口津)으로 운송되었다. 하구진에서 다시 배에 오른 차는 신강(信江)을 따라 북쪽으로 포양호를 거쳐 후베이성 한커우에 도착했다. 이 차는 다시 북쪽 몽골과 러시아까지 팔려 나갔다.차 산업이 한창 흥할 때는 하매촌 앞 매계에는 하루 300척의 대나무 뗏목이 차를 운송했다고 한다. 하매촌 마을 입구에 '진상만리차로기점(晋商萬里茶路起點)'이라는 비석에 서 있다. 영화롭던 차집산지로서의 명성을 상징하는 표석이다. 우이산 인근의 하매, 성촌(星村), 적석(赤石) 등은 우이산 차를 생산하고 운송하는 요충지였다. 1949년 이후 우이산의 모든 개인 차기업들은 국영으로 회수되어 숭안차(崇安茶) 공장에 합병됐다.후베이성 한커우는 1858년 '중·러 천진조약' 체결 후 중·러 찻잎 길의 중요 집산지가 되었다. 1863년 러시아 상인들은 중국에 공장을 세우고 산지에서 직접 원료를 구입해 벽돌차로 가공한 뒤 러시아로 수출했다.1863년부터 1877년까지 러시아 상인들은 후난성과 후베이성 접경지역에 3개의 벽돌차 차창을 세웠다. 1877년 러시아 상인들은 한커우로 공장을 이전했다. 러시아 상인들은 증기기계로 차를 제조하는 선례를 열었다. 선진 제조설비로 차를 가공함으로써 효율을 높이고 표준화한 덕분에 차 매출은 크게 증대되었다.하매촌은 푸젠성(福建省) 난핑시(南平市)의 현급 우이산시(武夷山市) 동부에 있는 촌급 행정구로, 2005년 중국역사문화명촌으로 지정되었다. 글·사진=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우이산시 하매촌 풍경. 인공적으로 만든 수로가 마을 중앙을 가로지르고 있다.하매촌 추씨 사당 입구 모습. 1790년에 건립됐다.하매촌 추씨 사당 내부.하매촌 호화 고택인 대부제(大夫第)의 문살 모습. 화려한 문살 장식의 문이 많았다.하매촌의 높은 담장과 좁은 골목.하매촌 대부제의 기둥 조각.
우크라이나 민속음악에 뿌리 둔 렐레카의 'Sonce U Serci(마음속의 태양)' 음반 발매
우크라이나 민속 음악에 뿌리를 둔 노래를 담은 렐레카의 음반 'Sonce U Serci(마음속의 태양)'<사진>이 나왔다. 4인조 밴드 렐레카는 2016년에 베를린에서 결성하여 베를린 글로벌 음악 크리올 2017에서 우승했다. 이어서 2018년 3월의 부르크하우젠 바커할레 국제 재즈 콩쿠르에서 우승하며 또다시 존재감을 과시한다. 렐레카의 데뷔앨범 'Sonce U Serci(Sun in the Heart)'은 밴드 보컬 빅토리아 렐레카의 고향 우크라이나의 민속음악이 음악의 중심이며, 재즈의 즉흥적인 자유와 조화를 이룬다. 단순히 전통을 연결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를 넘어 감정의 미묘함에까지 도달, 음악을 빛나게 만든다. 베이시스트 토마스 콜라치크(독일)와 드러머 야콥 헤그너(독일)가 그의 개념 실현을 도왔다. 2019년부터 피아니스트 포벨 와이드스트랜드(스웨덴)가 렐레카 팀에 합류하며 앨범의 완성도를 높였다. 2017년 데뷔 EP와 디지털 싱글(2020)을 출시하며 우크라이나 재즈 음악을 5년에 걸쳐 숙성시킨 앨범 'Sonce U Serci'은 국적과 언어를 초월한 감동을 준다. 우크라이나 전통에 따른 '사랑과 행복에 대한 이야기(Son, Marusyn Tatko, Ruzha)' '자연에 대한 관심(Karchata, Polonyna)' 등 우크라이나의 과거와 현재의 주제를 담고 있다.이번 앨범은 180g 오디오파일 LP와 CD로 출시되었다.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위클리포유 커버 스토리] 김봉규의 수류화계(水流花開) - 이팝나무 (2)…오월의 산하 수놓는 하얀송이…'쌀밥' 연상 이름·마을 수호신으로 대접받아
경남 김해시 주촌면 천곡리에 있는 이팝나무는 1982년 11월9일 천연기념물 제307호로 지정되었다. 지정될 당시 수령이 500년으로 추정된 노거수이다. 40년 지났으니 540년이나 된 이팝나무인 셈이다. 이 나무도 지상 1m 높이에서 가지가 2개로 갈라져 성장했다. 그 두 줄기를 중심으로 이후 많은 가지가 넓고 높게 뻗어 자라면서 노거수다운 멋진 자태를 보여주고 있다. 마침 현장에서 나흘 후인 5월2일 동제(洞祭) 준비를 위해 나무 주위를 청소하던 분을 만나게 되어 잠시 이야기를 들어봤다. 천곡리 이팝나무의 수령이 신천리 것보다 더 오래된 것 같다고 이야기한 그는 태풍 등으로 큰 가지들이 부러지는 일을 겪으면서 지금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20~30년 전에는 지금보다 더 풍성한 모습이었다고 말했다.이 두 나무는 오래전부터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비는 제사를 지내는, 마을의 수호신으로 모시는 당산목(堂山木) 역할을 해왔다. 요즘은 이팝나무가 만개하는 때에 날을 잡아 동제를 지내고 있다. 마을마다 풍년 점치는 나무로 보호천연기념물 지정 노거수·군락 9곳김해 신천·천곡리 가장 오래된 고목경상도 며느리의 한이 서린 전설도생명력 강해 새 가로수 대안 떠올라대구 대표 달성 옥포면 교항리 군락200~300년 40여그루 군데군데 자태◆이팝나무는이팝나무는 높이가 20m 이상 크고, 굵기도 몇 아름이나 될 정도로 자란다. 대체로 5월 초순에 파란 잎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새하얀 꽃이 가지마다 소복소복 피어난다. 꽃잎은 가느다랗게 넷으로 갈라지는 모양이다. 20일 정도 피어 있는 꽃은 은은한 향기를 내뿜는다. 활짝 피었다가 마치 눈이 내리듯 우수수 떨어지는 낙화 풍경도 장관이다. 꽃이 지고 나면 타원형의 자주색 열매가 맺힌다.우리나라에서는 중부 이남, 주로 남쪽에 자라왔다. 이팝나무는 농민들이 오랫동안 풍년을 점치는 나무로 삼았기에 보호가 잘 돼 노거수들이 많은 편이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수령 수백 년 되는 이팝나무 노거수와 군락이 9곳이나 된다. 이 중 경남 김해시에 있는 신천리 이팝나무와 천곡리 이팝나무가 가장 오래된 노거수다. 이팝나무는 우리나라와 함께 일본과 중국의 일부에서 자라고 있는 세계적 희귀목으로 알려져 있다. 이 나무를 처음 본 서양인들은 눈이 내린 나무처럼 보여 '눈꽃(Snow flower)나무'라 불렀다. 한자 이름으로는 중국이나 일본에서 사람이 죽어 저승의 육도(극락, 인간, 지옥, 아귀, 축생 등)로 갈 때 뇌물로 관 속에 넣어주는 쌀(六道米)과 관련해 붙여졌다는 '육도목(六道木)', 잎을 차 대용으로 쓴다고 해서 붙여진 '차엽수(茶葉樹)' 등으로 불린다.이팝나무는 아까시나무와 함께 5월의 산하를 하얗게 수놓는 대표적 나무이다. 새하얀 꽃들이 초록의 나뭇잎과 어우러진 모습은 보는 이의 눈길을 끌기에 충분하다. 덕분에 이팝나무는 2000년대 이후 가로수는 물론 공공건물, 공원 등의 정원수로 심는 경우가 빠르게 늘어났다. 대구를 포함해 서울, 대전, 광주 등 대부분 도시들이 이팝나무 가로수를 늘려왔다.가로수도 시대에 따라 인기 수종이 바뀌어 왔다. 플라타너스에서 은행나무로, 다시 은행나무에서 벚나무로 변했다가 최근에는 이팝나무가 가장 선호되고 있다. 꽃이 쌀밥처럼 보이는 이팝나무는 한국인의 정서에 맞는 데다 흙이 얕은 곳에서도 번식할 만큼 생명력이 강하고 꽃도 오래 피어 새로운 가로수의 대안으로 떠올랐던 것이다.덕분에 요즘은 어디를 가나 5월 초순이면 흰 꽃이 흐드러지게 핀 이팝나무를 볼 수 있다. 이팝나무와 더불어 배롱나무도 가로수로 많이 심었기 때문에, 여름이 되면 붉은 꽃들이 흐드러진 배롱나무 가로수들이 눈을 즐겁게 할 것이다. ◆이팝나무 명칭 유래먹고 살기 힘든 시절, 고깃국과 함께 하얀 쌀밥을 먹는 것이 최고의 바람이었다. 흰꽃으로 덮인 이팝나무는 쌀밥을 연상시키므로 '쌀밥나무'를 뜻하는 '이팝나무'로 부르게 됐다고 한다. '이밥'이 '이팝'으로 변음되어 '이팝나무'가 된 것이다. 북한에서는 쌀밥을 지금도 '이밥'이라고 한다. '이밥'은 '이(李)씨 밥'으로, 조선왕조 시대 벼슬을 해야 이씨인 임금이 내리는 흰쌀밥을 먹을 수 있다 하여 쌀밥을 '이밥'이라 했다 한다.이팝나무가 쌀밥과 인연을 맺게 된 것과 관련, 어느 며느리의 한 서린 죽음의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옛날 경상도 땅에 18세의 나이에 시집을 온 착한 며느리가 시어머니의 온갖 구박을 받으며 살고 있었다. 한 번은 큰 제사가 있어 제사에 쓸 쌀밥을 짓게 되었다. 평소 잡곡밥만 하던 며느리는 처음 쌀밥을 지으면서 혹시 잘못돼 꾸중 듣게 될까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뜸이 잘 들었는지 알아보려고 밥알 몇 개를 떠먹어 보았다.그것을 보게 된 시어머니는 제사에 쓸 밥을 며느리가 먼저 먹었다며 갖은 학대를 가했다. 억울함을 견디지 못한 며느리는 어느 날 뒷산으로 올라가 목을 매 죽었다. 그 이듬해에 며느리가 묻힌 무덤가에 나무가 자라더니 흰 꽃을 가득 피워냈다. 쌀밥에 한이 맺힌 며느리가 죽어 나무가 되었다며 동네 사람들은 그 나무를 이팝나무라 불렀다.이팝나무 꽃이 풍성하게 잘 피면 그해 벼농사가 잘 되는 조짐이고, 그로써 이밥을 먹게 된다고 하여 이팝나무라 불렸다는 설도 있다. 하얀 꽃이 나무를 덮고 있는 모습이 밥주발 위로 봉긋이 올라온 쌀밥그릇 모양이어서 이팝나무라 부르게 되었다고도 한다. 명칭에 대한 또 다른 이야기는 꽃피는 시기가 입하 무렵이어서 '입하나무'라 부르다가 '이팝나무'로 변했다는 것이다.◆대표적 이팝나무 노거수 및 군락이팝나무는 느티나무처럼 마을 수호신으로 모시는 당산목으로도 대접받았기 때문에 노거수가 적지 않다. 그래서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것만도 9건이나 된다.김해 신천리 이팝나무(천연기념물 제185호/ 1967.7, 수령 600년), 김해 천곡리 이팝나무(천연기념물 제307호/ 1982.11, 수령 500년), 순천 평중리 이팝나무(천연기념물 제36호/ 1962.12, 수령 400년), 고창 중산리 이팝나무(천연기념물 제183호/ 1967.2, 수령 250년), 진안 평지리 이팝나무군(천연기념물 제214호/ 7그루, 1968.11, 수령 280년), 양산 신전리 이팝나무(천연기념물 제234호/ 1971.9, 수령 300년), 광양 인동리 이팝나무(천연기념물 제235호/ 1971.9, 수령 450년), 포항 옥성리 흥해향교 이팝나무 군락(천연기념물 제561호/ 26그루, 2020.12, 수령 100~150년) 등이다.가장 최근에 지정된 '포항 흥해향교 이팝나무 군락'은 포항시 흥해읍 옥성리 흥해향교와 임허사 주변에 있는 이팝나무 군락이다. 향교 건립을 기념해 심은 이팝나무의 씨가 번식해 조성된 군락이라고 전해진다.대구의 대표적 이팝나무 고목 군락은 교항리 이팝나무 군락이다. 달성군 옥포면 교항리에 있는 이 군락은 1991년 7월 천연보호림으로 지정되었다. 교항리 주변 들판 한가운데 있는 3천여 평의 나지막한 구릉을 크고 작은 이팝나무들이 덮고 있다. 팽나무, 굴참나무 등이 일부 자라고 있지만, 이팝나무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이 군락지에는 수령 200~300년의 이팝나무 40여 그루가 군데군데 자리 잡고 있다. 그 사이에는 1990년대 중반에 심은 작은 이팝나무 수백 그루가 자라고 있다. 교항리 주민들은 이곳 이팝나무 고목들을 오래전부터 마을 수호림으로 여기면서 관리해 왔다. 마을 사람들은 땔감이 없을 때도 이팝나무만은 베지 않았다고 한다. 영천 대창면 용전리에도 이팝나무 노거수가 한 그루 있다. 많이 알려진 이팝나무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인지 궁금해 한번 찾아가 보았다. 앞으로는 논밭이 펼쳐져 있는 야산 끝자락에 자리하고 있었다. 꽃이 만개한 상태여서 멀리 5리 정도 떨어진 큰 도로에서도 눈에 금방 들어왔다. 이 나무는 신천리나 천곡리 이팝나무와 달리 밑둥치에서 가지가 나눠진 것이 아니고 한 줄기로 자라 수형이 상하 타원형의 모습이었다. 밑둥치 굵기는 2m 30㎝. 세월이 흐를수록 명물 이팝나무가 될 것 같았다. 중국 산둥성 토천촌(土泉村)에는 수령이 2천700여 년이나 되었다는 이팝나무가 있다. 현지인들이 신수(神樹)로 대접하는 나무로, 기원전 685년 제나라 임금 환공(桓公)이 임금으로 즉위하면서 심었다고 한다. 노동절이면 전국에서 이 이팝나무를 보러 사람들이 몰려든다고 한다. 사진으로 봐서는 2천700년이 된 고목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또한 장쑤성에는 980년이 된 이팝나무가 사람들을 불러모으고 있다고 한다. 글·사진=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김해시 한림면 신천리의 이팝나무(2022년 4월28일). 1967년 천연기념물로 지정되고, 당시 수령 600년으로 추정됐다. 우리나라 최고령 이팝나무다.김해 주촌면 천곡리 이팝나무 앞에서 동민들이 동제를 지내고 있다.(2022년 5월2일) 〈김해시청 제공〉영천시 대창면 용전리 이팝나무. 들판 뒤쪽 야산 끝자락에 자리하고 있어 눈에 잘 띈다. 밑둥치 굵기를 재어보니 2m30㎝ 정도 되었다. (2022년 5월12일)
[위클리포유 커버 스토리] 김봉규의 수류화계(水流花開) - 이팝나무 (1)…立夏 알리는 눈꽃천지
다투어 피어나는 봄꽃들이 천지를 수놓더니, 그 자리를 신록이 이어받았다. 벌써 그 신록의 향연도 막바지다. 신록이 한창일 때 탐스러운 흰 꽃을 피우며 그 찬란함을 더하는 나무가 있다. 여름의 시작을 알리는 입하를 전후해 피어나서 '입하목(立夏木)'이라고도 불리던 이팝나무다. 지금은 꽃이 거의 다 졌지만, 4월 하순이나 5월 초순에 신록의 새잎과 더불어 흰 꽃을 무수히 피워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주인공이다.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이팝나무 고목을 찾아 나섰다. 지난달 28일 천연기념물 이팝나무 두 그루가 있는 경남 김해로 향했다. 대구 시내에는 근래 가로수로 심은 수많은 이팝나무가 한창 꽃을 피워, 곳곳에 때아닌 눈꽃 천지를 만들고 있었다. 대구 전체 가로수 중 이팝나무가 11%에 이른다고 한다.이팝나무가 꽃을 한창 피우는 때라서 그런지 대구 시내를 벗어나서도 이팝나무가 가장 많이 눈에 띄었다. 수성IC와 동대구IC 도로 주변에는 온통 이팝나무꽃 천지였다. 신록과 어우러진, 맑고 흰 꽃구름이 눈을 즐겁게 했다. 밀양으로 가는 고속도로와 일반 국도 가에도 가로수로 심은 이팝나무가 정말 많음을 알 수 있었다. 이팝나무가 이렇게 많은가 싶었다. 주변 산자락에서 흰 꽃을 피우기 시작한 아까시 꽃도 곳곳에서 눈에 들어왔다. 이팝나무와 아까시나무의 흰 꽃이 연초록의 신록과 참으로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팝나무는 원래 우리나라 자생 나무로, 남쪽 지방에 주로 잘 자라는 수종이나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 근래 중국 이팝나무를 수입해 가로수와 정원수로 심으면서 급증한 모양이다.김해시 한림면 신천리(新泉里)의 이팝나무를 먼저 찾았다. 마을 안쪽 길옆에 있는데, 나무가 크고 꽃이 피어 근처에 가니 쉽게 눈에 들어왔다. 승용차가 들어갈 정도의 골목을 따라가니, 이달 중에 완공될 주변 정비공사 마무리 작업이 한창이었다. 평일인데도 이 나무를 보기 위해 찾아온 사람들이 사진을 찍고 있었다. 방문 당시 얼마 전부터 꽃을 피우기 시작한 것 같았다. 그래서 꽃봉오리 상태가 대다수며 꽃이 아직 전체적으로 연둣빛을 띠고 있었다. 며칠 후면 눈처럼 흰색으로 바뀔 것 같았다. 신천리 마을에서는 해마다 이 이팝나무의 장수와 마을 안녕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는데, 5월4일 행사를 진행한다고 했다. 꽃이 만개하는 날을 잡아 제사를 지내기 때문에 해마다 일정한 날 지내는 것이 아니고 조금씩 다를 수 있다고 한다.신천리 이팝나무는 1967년 7월 천연기념물 제185호로 지정됐다. 당시 높이 15m 노거수로서, 나무의 나이는 600년 정도로 추정되었다. 지금은 수령이 650여 년이 되는 셈이다. 지금도 건강해 보이는데, 밑둥치를 대충 재어보니 5m 정도 되었다. 밑둥치에 치료를 받은 흔적이 크게 남아 있어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줄기는 지상 1m 정도에서 둘로 갈라지고, 가지들이 대부분 온전하게 유지되고 있어 전체적으로 둥근 모습의 수형을 보이고 있다.당시 600년 추정 근거가 남아있는지 물으니 별다른 것은 없다고 했지만, 여러 가지 정황을 근거로 추정했을 것이다. 수령이 사실이라면 이 이팝나무는 우리나라 이팝나무 중 최고령이다. 주변에 주택들이 인접하고 있어 노거수로서의 면모를 제대로 보여주는 분위기가 아닌 환경인 것이 좀 아쉬웠다.이어 차량으로 20분 정도 거리에 있는 주촌면 천곡리 이팝나무를 찾아갔다. 이 나무는 주변 환경이 훨씬 좋았다. 마을 뒷산 끝자락에 자리하고 있었다. 주변에 다른 건물이 없고 잔디밭과 화단 정도만 있어 높이가 18m나 되는 노거수의 자태를 제대로 드러내고 있었다.이 나무는 신천리 이팝나무보다 꽃이 더 많이 핀 상태였다. 밑둥치를 재어보니 7m 정도 되어 신천리 나무보다 더 굵었다. 나무 자태도 신천리 나무보다 더 노거수다운 위엄을 자랑하고 있었다· 글·사진=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위클리포유 커버 스토리] 김봉규의 수류화계(水流花開)-이팝나무(2)에서 계속됩니다.경남 김해시 주촌면 천곡리에 있는 이팝나무. 1982년 천연기념물 307호로 지정된 이팝나무로, 높이가 18m, 수령은 540년.
어른들을 위한 옛동요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음반 발매
통기타 가수 이성원의 동요 음반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사진>가 180g 오디오파일 45rpm LP로 발매되었다. 2022년에 오리지널 마스터(1999녹음)에서 새롭게 리마스터링하여 독일에서 마스터 컷팅과 프레싱을 한 음반이다.'이성원이 노래하는 어른들을 위한 옛동요'라는 부제가 붙은 이 음반에는 '겨울나무' '엄마야 누나야' '구두발자국' 등 옛동요 10곡이 담겨있다. 이 음반을 만들 때 초등학교 아이들의 도움을 받았다. 춘천에서도 한참 들어가는 깊은 산골에 있는 추곡초등학교 학생들이 이 음반의 첫 곡과 마지막 곡을 불러주었다. 한 학년이라야 고작 서너 명, 전교생이 스물 아홉 명에 불과한 작은 학교다. 시를 쓰는 교감선생님의 협조로 아이들의 때묻지 않은 소리를 실을 수 있었다. 이성원이 노래하는 옛동요는 초등학교의 선생님과 낡은 풍금소리를 가슴 한 켠에 묻어두고 훌쩍 세월을 넘겨버린 어른이를 위한 동요 음반이다.
의료대란으로 번진 의대 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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