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이야기 길

  • 입력 2003-04-26 00:00

선산(善山)의 비봉산공원에 가면 ‘이야기 길’이 있다. 단계천을 건너
비봉산 남쪽 자락을 오르다 보면 창연한 역사와 전설이 오롯이 살고 있는
이야기 길이 나타난다. 오밀조밀 정답게 모여 사는 산아래 마을도 보고,
솔가지 끝에 얹혀있는 파란 하늘도 보며 솔바람에 안겨 이야기 길을 걷
는다. 이야기는 봉(鳳)이 날개를 벌려 마을을 싸안고 나는 형상의 비봉산
유래담으로부터 시작된다. 신라 일선주(一善州)로부터 시작하여 현대의 도·농
통합에 이르기까지의 유서 깊은 역사가 있고, 백(百) 골짜기에 한 골이
모자라 왕도(王都)가 못된 안타까운 전설도 있고, 인재의 고장임을 입증하듯
길재·하위지·김종직의 충절과 학문을 일깨워 주고, 명창 박록주의 예술도
얘기해 준다. 지난날의 애환어린 삶의 모습을 조용한 목소리로 들려주는
이야기들은, 자랑과 긍지에 젖게 하면서 오늘날 우리의 삶을 돌아보게도 한
다. 과거의 흘러간 꿈만 담고 있는 이야기가 아니라, 새로운 역사와 전설
을 만들어가게 하는 열정을 지닌 이야기들이다.

그런 이야기 길을 걸으면서 가슴 한켠이 아려오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도시와 농촌의 균형적 발전을 기약하며 도·농 통합의 새로운 도시를 만
들었다. 군청은 출장소가 되고, 유서 깊은 이름을 뒤로 한 채 공장의 기
계 소리 우렁찬 도시의 이름을 따랐다. 개발사업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지
만, 많은 사람들은 도시지역에 비해 경제적, 문화적으로 상대적인 낙후감을
느끼고 있다. 도시에는 학교가 자꾸 세워지는데, 농촌은 인구가 자꾸 줄
고 있다.

이제 역사와 전설은 공장의 높다란 굴뚝 속에서만 생겨날 수 있는 것
일까. 지난날 찬란했던 역사는 이야기 길의 안내판 속에서만 찾아야 하는
것일까. 지금 정치인들은 지방분권을 말하고 있다. 중앙과 지방이 정답게
손잡고 도시와 농촌이 나란히 어깨 겯고, 아름다운 전설을 만들어 나갈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비는 마음 간절하다. 비봉산공원 이야기 길을 걸으며.
이일배<수필가·선산중 교감>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인기뉴스

영남일보TV





영남일보TV

더보기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