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순진의 사필귀정] 피해자의 말 못하는 아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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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2-28   |  발행일 2018-02-28 제30면   |  수정 2018-02-28
[박순진의 사필귀정] 피해자의 말 못하는 아픔
<대구대 경찰행정학과 교수>

검찰에서 촉발된 성폭력 사건 폭로가 문단, 연극계, 연예계, 종교계로 확산되면서 온 나라가 충격에 휩싸이고 있다. 가해자는 관행이었다거나 상대가 동의하였다는 등 뻔뻔한 주장을 펼친다. 사실 자체를 부인하기도 하고 고통을 준 일인지 몰랐다고도 한다. 피해자는 오랜 기간 말할 수 없는 고통에 시달리고 있음에도 가해자는 관행이나 사소한 일로 치부할 정도로 여성에 대한 비인간적인 폭력이 우리 사회에 만연하고 있었던 것이다.

누구든 타인으로부터 공격당하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고통스러운 경험이다. 말하기 좋아하는 일부 인사들은 왜 거부하지 않았냐면서 피해자를 비난한다. 하지만 피해자가 싫다고 분명하게 말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피해자가 거부하는 것은 권력을 가진 상대에게 밉보이고 승진이나 능력에 맞는 자리를 빼앗기고 힘들게 얻은 배역을 걷어찰 때 가능하다. 피해자를 노골적으로 배제하거나 보이지 않게 차별하는 조직문화도 피해자를 힘들게 만든다. 가해자가 이런 사정을 잘 알고서 그러는 것이라 더 치사한 것이다. 사건이 공개된 후에 가해자가 오히려 뻔뻔한 태도를 보이거나 적반하장 격으로 큰소리를 치기도 하니 개탄스럽다. 진작 처벌 의사를 밝히고 가해자를 대상으로 행동했어야 한다면서 피해자를 나무라는 일도 있다. 피해 자체가 엄청난 충격이라 피해자는 일시적으로 피해 사실을 외면하려 한다. 가해자가 우월한 지위와 권력관계를 이용하여 저지르는 행위라서 피해자가 피해 사실을 공개하고 문제 삼는 일은 많은 용기를 필요로 한다. 피해자는 신고만 하면 경찰과 검찰이 온전히 자신의 편을 들어줄 것으로 기대한다. 지난 30여년 사이 꾸준하게 법적·제도적 개선이 이루어져왔고 실무에서도 진전이 있었다고 하지만 여전히 일선에서는 피해자의 목소리에 온전히 귀 기울여 주지 않고 피해자의 입장을 우선으로 사건을 해결해주지도 않는다.

용기를 내어 피해 사실을 공개하더라도 가해자가 곧바로 처벌받는 것도 아니다. 성폭력 사건은 대부분 사적인 공간과 공개되지 않은 장소에서 일어나는 특성이 있어 가해 사실을 입증하기 쉽지 않기 때문에 피해자가 매우 구체적으로 반복하여 피해 사실을 주장해야 한다. 피해자는 피해를 당한 사실 자체가 무엇보다 고통스럽고 한시라도 빨리 아픔을 치유하고 벗어나기를 희망한다. 그러나 가해자를 처벌하기 위해 피해자는 상당 기간 참혹한 기억을 되살리면서 아픔을 감내해야 한다.

힘 있는 가해자를 처벌하기 위해 피해자는 소중하게 일구어온 사회적 관계와 지위를 포기하고 때로는 인생을 걸어야 한다. 망설이고 주저하는 사이 시간이 흘러 처벌이 불가능해지기도 한다. 모 검사장 사건도 그렇고 En시인 사건도 그렇고 모 연극 연출가 사건도 그렇다. 힘 있는 자리에 있는 가해자를 대상으로 즉각 문제를 제기하지 못하다가 뒤늦게 이들을 처벌하려 해도 법적으로 안 된다 하니 분통이 터진다. 공개된 소수의 가해자만 처벌하거나 고통을 주었다면 사과한다는 따위의 말로 끝낼 일이 아니다. 반드시 피해자의 입장을 우선으로 하여 정의롭게 일이 해결되어야 한다. <대구대 경찰행정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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