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칠곡 역사·문화 스토리텔링 전국 공모전 대상작] 구상을 그리다 - 정유진(일반부문)

  • 인터넷뉴스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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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5-11-30   |  발행일 2015-11-30 제12면   |  수정 2015-11-30
20151130
이중섭 작 ‘K시인의 가족’

‘2015 칠곡 역사·문화 스토리텔링 전국 공모전’ 일반부문 대상작인 정유진씨의 ‘구상을 그리다’는 시인 구상과 화가 이중섭에 대한 이야기다. 구상 시인의 시선을 통해 불우했던 시대를 살다간 천재 화가 이중섭의 삶을 자서전적 형식으로 그린 작품이다. 이중섭의 처절하고 고독했던 인생역정과 그의 예술세계를 꾸미지 않은 문장으로 담아냈다. 원고의 분량이 많아 지면 사정상 줄여서 싣는다.


프롤로그

나는 1969년, 제주도를 탐방할 일이 있었다. 그때 서귀포를 들르게 되니, 자연히 중섭의 생각이 나서 행여나 하고 그 유작을 탐문해 보았다. 수소문 결과 요행히도 도장방집에 목판에다 그린 것 한 점과 양조장을 경영하는 그곳 유지 강임용 씨 댁에 넉 점이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내가 구매하겠다고 하자 강임용씨가 말했다. “그렇듯 고인과 관계가 깊은 분이라면 돈을 받고 팔기보다는 그저 한 점 드리겠습니다.”

나는 염치없이 그림을 골라왔다. 강임용씨로부터 무상으로 기증을 받은 것이다. 서귀포 바다의 풍경을 중섭 나름으로 심상화한 것으로, 마치 실낙원 이전의 에덴을 방불케 하는 그림의 제목은 ‘서귀포 풍경’이었다. ‘서귀포 풍경’을 그린 대향(大鄕) 이중섭, 그는 내 오랜 벗이었다.


#1. 이중섭을 만나다

내 이름은 구상준이다. 집에선 다들 나를 ‘구상’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나는 ‘구상’이란 이름이 점점 더 편해졌다. 내게는 나보다 먼저 세상 빛을 본 형이 둘이나 있다. 궁내부 주사였던 아버지는 내가 네 살 때 북한 함경도 지구 선교를 맡게 된 독일계 가톨릭 성베네딕도 수도원의 교육 사업을 위촉받았다. 그래서 우리 가족은 원산시 근교인 덕원이라는 곳으로 이사를 가게 됐다. 아버지는 원산 교구에 가서 해성학원을 설립하고 원장을 지냈다.

나의 어머니는 문학적 감수성이 뛰어난 분이었다. 어머니는 내가 어렸을 때부터 천자문, 동몽선습, 명심보감 등 한문의 기초 과정과 고시조, 신소설, 옥루몽 등 중국 소설까지 모든 것을 가르쳐 주셨다. 어머니 덕에 나는 보통학교에 들어가서 조선어 과목이나 글짓기, 이야기 시간에 누구보다 뛰어난 면모를 보일 수 있었다.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못 견디던 중섭은
1953년 일본으로 밀항해 가족을 만났다
그러나 그는 일주일 만에 다시 돌아왔다

늘 외로웠던 중섭은 세상 떠나기 1년 전
‘K시인의 가족’이란 그림을 완성했다
그림 속의 그 자신처럼 멀거니 바라보던
그의 표정이 눈에 선하다


내 나이 열다섯 살이 되던 해, 베네딕도 수도원 신학교에 들어갔다. 원래는 가톨릭 신부가 되고 싶어 들어간 것인데 그곳에서 생활하며 나는 느꼈다. 신부는 아무나 되는 게 아니라는 걸. 신부복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큰형에게나 어울리는 옷 같았다. 결국 베네딕도 수도원 신학교에 들어간 지 3년 만에 환속을 했다. 내 가슴에 일렁이는 일제와 신(神)과 제도에 대한 저항 의식이 날 세상 밖으로 이끌었다.

1935년 내 꿈을 찾기 위해 동경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닥치는 대로 일당 노동자로 일을 하며 생활비를 벌었다. 그러던 중 일본대학 종교과와 명치대학 문예과 전문부에 시험을 쳐 두 군데 모두 합격했다. 어디로 가야 할지 고민 끝에 일본대학 종교과를 선택했다.

1939년 나는 알고 지내던 나찬근의 소개로 ‘이중섭’이란 사람을 알게 되었다. 중섭은 나보다 세 살 위였다. 그는 1935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사립 제국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했다가 곧 싫증을 느끼고 나왔고, 자유로운 분위기의 문화학원 미술과에 입학했다고 했다. 권위 있는 공모전에서 수상한 실력 있는 친구였다. 나는 그를 대하자 대번에 생각했다. ‘루오’의 ‘예수의 얼굴’을 닮았구나. 그게 내가 느낀 그의 첫인상이었다. 우리는 그날 종일토록 여러 이야기를 했지만 그림 이야기가 중심이라 나는 그저 듣는 데 그쳤다.

그 이듬해 여름방학. 잠시 고향에 들른 나는 우연히 중섭과 마주쳤다. 그날 그는 ‘환방’ 분점이라는 술집으로 나를 안내하였다. 서슴없이 따라 들어가 서슴없이 마시고 있는데 중섭이 말했다.

“형, 구형은 예수를 닮았어! ‘루오’의 예수 얼굴을.”

“누가 할 소리. 나야말로 그런 인상을 받았어.”

그는 말도 안 된다고 했고, 나 역시 말도 안 된다고 말했다. 여하간 우리는 그날 밤 그 자리에서 속마음을 털어 놓으며 밤을 지샜다. 내가 그의 애창곡인 ‘소나무’라는 맑고 아름답고 우렁찬 노래를 들은 것도 그 밤이 처음이었다. 나는 생각했다. 우연이 반복되면 인연이라고, 어쩌면 중섭과 나는 인연일지도 모른다고. 후에 알게 됐는데 중섭은 문화학원에 다닐 때 루오의 그림을 무척이나 좋아했다고 한다. 그가 나에게 루오 그림의 예수 같다고 한 말은 칭찬이었던 것이다.


#2. 원산으로 돌아오다

1942년, 동경에서의 학생 생활을 마치고 나는 원산으로 돌아왔다. 원산으로 돌아온 나는 글만 읽으며 시 쓰기에 매달렸다.

나는 귀국 직후인 1942년부터 1945년까지 원산에서 ‘북선매일신문’ 기자로 활동했다. 1943년, 중섭 역시 귀국을 했고 나와 같이 원산에 거주하게 되었다. 그렇게 우리는 같은 지역에 살며 자주 만나게 되었다.

나는 광복을 4개월 앞둔 1945년에 서영옥이라는 여인과 결혼을 했다. 그녀는 동경제국 여의전을 나와 나의 큰형이 주임 신부로 있던 흥남천주교회 내에서 진료 사업을 도왔다. 큰형의 중매로 만난 영옥은 지적이고 착한 여자였다.

중섭 역시 그해에 일본 문화학원 시절에 사귄 야마모토 마사코(한국명 이남덕)와 결혼을 해 원산에 신혼살림을 꾸렸다. 중섭은 넓은 마당 한편에 닭장을 지어 닭을 길렀다. 중섭을 찾아가면 그는 늘 닭장에 서서 닭의 모습을 관찰하고 있었다.

1945년 8월15일. 드디어, 드디어 조국이 광복되었다. 1946년, 나는 원산여자사범학교 교사로 취직하였다. 중섭과 함께였다. 그러나 중섭은 미술교사로 일주일간 근무하다 그만두었다.

“대향. 나와 같이 학생들을 가르치기로 해 놓고 왜 그러는 거야?”

“상. 난 자신이 없어. 무얼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지 도무지 모르겠어.”

결국 중섭은 적성에 맞지 않는 교사 일을 그만두고 집에서 닭을 키우며 닭과 소를 그리는 데에 몰두했다. 중섭에게는 그림 그리는 게 천직이었던 것이다.

그해에 중섭은 조산아였던 맏아들을 디프테리아라는 병으로, 돌도 안 돼서 잃고 말았다. 우리는 관을 짜다 어린 것을 넣어 놓고는 시미즈 골목(원산 유흥가)으로 달려가 흠뻑 취해 돌아와 나란히 곤드라졌다. 한밤중 깨어 옆을 보니 그는 도화지에다 무엇을 열심히 그리고 있었다. 나는 냉수 한 사발을 들이켜고는 도로 자고 말았다. 그 이튿날 아침, 이제 관에다 못을 치고는 떠메서 나갈 판인데 그는 관 뚜껑을 열고는 어린 것 가슴에다 간밤에 그린 그림을 실로 꿰서 달아매주는 것이었다. 거기 그려진 것은 뛰고 자빠지고 엎어지고 모로 눕고 엎치고 구부리고 젖히고 물구나무선 온갖 장난질치는 어린이 모상이었다. 중섭은 입속말로 중얼거렸다.

“상! 밤에 가만히 생각을 하니 이 어린 것이 산소에 가서 묻히면 혼자서 쓸쓸해할 것 같아서 동무나 해주라고!”

중섭은 슬픔 속에서도 히죽 웃었다. 그런 중섭을 보며 마음 한구석이 아려왔다.


#3. 월남 그리고 천도복숭아

어느 날, 원산문예총의 위원장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신문이나 방송 등 어용에는 동원 안 할 터이니 광복 기념 시집 발간에 작품만 제출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광복 후 첫 시집이라는 의의와 문학 동인들과의 우애도 있고 해서 나는 ‘여명도’, ‘길’, ‘밤’ 등의 작품을 제출했다. 그리고 이 시편들이 소위 기성 대접을 받아 시집 ‘응향’의 권두에 실렸다. 시집의 장정은 바로 중섭이 맡았었는데 표지 그림은 역시 그가 즐겨 그리던 ‘군동상(群童像)’이었고, 종이는 한지를 쓰고 고풍하게 꾸몄다.

그런데 시집이 배포된 지 한 달 남짓한 1947년 정초 어느 날, 평양에서 날벼락이 떨어졌다. 북한의 전체 신문과 방송은 1면 톱과 특별 보도로 북조선 문학예술 총동맹중앙상임위원회의 시집 ‘응향’을 규탄하는 결정서라는 것을 발표하는 동시에 원산을 비롯한 각 지방 동맹에 총체적인 검열 사업을 벌일 것을 공고했다.

저들의 공격 대상은 나의 시편들이었다. 그것은 나의 시 자체가 그들 눈에는 예술지상주의적일 뿐 아니라 이미 나의 출신 성분이나 행동 거취가 반동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검열단을 파견하고 사흘 되던 날 새벽, 나는 자유를 찾아 홀로 원산을 탈출해 서울에 도착했다. 내겐 기억하고 싶지 않은 악몽과도 같은 일이었다. 아내는 내가 월남을 하고 2년 뒤, 1947년에 월남을 했다. 나의 어머니는 연세가 많아 넘어 오실 수가 없었다. 북에 두고 온 어머니 생각만 하면 가슴이 아려온다.

내가 월남하고 5년 뒤, 중섭도 가족들과 함께 유엔군의 수송선을 타고 월남했다. 부인과 두 아들, 그리고 장조카인 이영진도 함께였다. 중섭 부부는 첫째가 세상을 떠난 이후 둘째와 셋째를 낳았다. 두 아이 모두 아들이었다. 중섭과 가족들은 원산 부두에서 배를 탔고, 사흘 뒤 부산항에 도착했다. 전쟁 때문에 그들이 향한 곳은 부산 피란민수용소였는데 중섭은 그곳에서의 생활을 견디기 힘들어했다. 견디다 못한 중섭은 가족들을 데리고 제주도로 향했다. 그 시절, 중섭은 서귀포에 거주하며 은지화 기법을 착안하였다.

1950년부터 1953년까지 나는 종군작가로 지원하여 대구 근처 칠곡의 군부대에서 국방부 ‘승리일보사’ 주간으로 있었다. ‘승리일보’는 수돗물보다도 더 기다려지는 생명수와 같아서 1·4후퇴까지 서울은 ‘승리일보’ 일색이었다고 해도 과장이 아니었다. 1·4후퇴로 다시 내려간 대구에서 ‘승리일보’의 피란 보따리를 편 곳이 ‘영남일보’였다. 나는 거기서 신문 제작을 하는 한편 공군 문인단과 육군 종군작가단의 산파 역할도 하였다.

나는 부산에 종군작가단 일로 내려왔다가 우연히 중섭을 만났다. 중섭은 제주도에 있다가 1951년 12월에 다시 부산으로 오게 됐다고 했다. 중섭은 범일동의 판잣집에서 살고 있었다.

나는 한없이 초라하고 초췌해진 중섭을 보고 마음이 쓰렸다. 이대로 그를 혼자 두고 오기에는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지인을 통해 일자리를 알아봐주었지만 중섭은 그마저도 사양했다. 그리고 이듬해, 중섭의 아내는 두 아들을 데리고 한국을 떠났다. 표면적으로는 일본에 있는 부친 사망이 이유였으나 그 이면엔 다른 이유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홀로 남은 중섭은 가족이 없는 부산에서 외로움을 견딜 수 없어 했다. 그 모습을 보다 못한 다른 화가들의 권유로 중섭은 진해로 떠났다. 진해에 머물면서 마산, 통영에도 오가며 그는 ‘달과 까마귀’, ‘황소’와 같은 그림을 그렸다. 내 눈엔 모두 걸작이었다.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견딜 수 없었던 중섭은 1953년에 일본으로 밀항하여 가족들을 만나고 왔다. 주변에서 마련해 준 선원증으로 일본으로 건너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일주일 만에 다시 돌아왔다.

“대향, 왜 벌써 돌아온 거야?”

“상. 난 말야 굴욕적인 신세로 살기 싫었어.”

그의 슬픈 눈빛을 마주하자 나는 다른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1954년 6월, 경복궁 국립미술관에서 개최된 대한미술협회전에 중섭은 ‘닭’ 2점과 ‘소’를 출품했다. 또한 ‘달과 까마귀’라는 작품도 선보였다. 통영에 머물고 있을 때 그린 이 그림은 달밤의 까마귀를 그린 평범한 풍경화이다. 이제까지 중섭이 다루었던 새들이 비둘기를 포함해서 주로 평화나 환희를 상징하는 길조들인 데 반하여 까마귀를 소재로 다루었다는 점이 이채로웠다. 평범한 풍경화였지만 까마귀가 상징하는 의미 때문이었을까? 나는 그 그림 앞에서 ‘죽음’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어느 날, 나는 부산으로 내려가 중섭을 만났다. 혼자 외롭게 있는 중섭을 조금이라도 돕고 싶었다.

“대향. 대구로 같이 가세.”

당시 나는 대구 ‘영남일보’ 주필 겸 편집국장 일을 맡고 있었다. 중섭은 내 말을 따라 대구에 올라왔고, 나는 그를 대구역 앞 경복여관에 묵게 하였다. 이때 중섭은 서울 미도파 화랑에서의 개인전을 준비했다. 이 전시회는 가까운 친구들이 중섭의 생활고를 덜기 위해 마련한 것이었다.

1955년 1월18일부터 27일까지 서울 미도파화랑에서 개인전을 연 중섭은 그해에 대구에서도 영남일보 주최로 대구 미공보관 화랑에서 작품전을 열었다. 두 번의 작품전은 중섭의 예술 세계를 세상에 알리는 계기가 되긴 했으나 안타깝게도 중섭은 그림값을 제대로 받지 못했고, 경제적 어려움은 해결되지 않았다.

당시 나는 지병인 폐결핵으로 입원해 있었다. 하루는 대구에서 작품전을 마치고 난 직후 중섭이 나를 찾아왔다. 그의 손에는 도화지 한 장이 들려 있었다. 그가 그 도화지를 불쑥 내밀었다. 애호박만한 복숭아 하나가 그려져 있었고, 그 복판에는 씨 대신 머슴애가 물에서 갓 나온 청개구리와 노니는 장면이었다.

“이건 또 임자의 바보짓인가? 도깨비놀음인가?” 하고 웃으며 물었더니 그 역시 씩 웃으며 “그거 왜, 무슨 병이든지 먹으면 낫는다는 천도복숭아 있잖아? 이걸 먹고 임자 상이 우리 상이 얼른 나으라는 그 말씀이지!” 하고 겸연쩍은 듯 또 히죽이 웃었다. 그때 그 순하디순한 그의 말과 표정을 내가 이 그림이 없다한들 어찌 잊을 수 있으랴. 그는 모든 생각이 그림으로 꽉 차 있었지만 늘 내 생각을 잊지 않는 사람이었다.


#4. K시인의 가족

혼자라 늘 외로웠던 중섭은 그 무렵, 우리 가족의 모습이 단란해 보였는지 ‘K시인의 가족’이란 그림을 그렸다.

중섭이 세상을 떠나기 1년 전, 그러니까 1955년 낙동강변에 있는 왜관읍 나의 시골집에서 켄트지에다 스케치를 하고, 약간의 기름물감을 칠한 약 15호 가량의 작품이다. 중섭이 대구에 있던 나에게 와 있을 때, 나의 가족과 중섭 자신을 함께 그린 그림이었다. 남하한 가톨릭 분교 수도원이 왜관에다 자리 잡는 것을 보고 나도 그곳에다 조그마한 집을 사서 가족을 옮겨 놓고 주말은 거기서 보냈다. 이것이 나의 시골집 ‘관수재(觀水齋)’였다. 중섭도 발병 직전 그곳에 머물렀는데, 그때 우리집 ‘가족 사진’을 하나 만들어 준다고 그린 것이 바로 이 그림이다. 이 그림의 풍경은 그를 처음 시골집으로 안내해 갈 때 내가 세 살배기였던 둘째 놈을 위해 세발자전거를 사들고 가서 태워주며 놀았는데 그에게 그것이 퍽 부럽고 좋게 보였던 모양이다. 그림 속의 그 자신처럼 멀거니 바라보던 그의 표정이 눈에 선하다.

대구 전시회 이후 중섭의 건강은 악화되어 병원에 입원해야만 했다. 그리고 얼마 뒤, 병세가 호전되어 서울로 올라오게 된다. 서울시 종로구 누상동 160-202번지. 중섭은 그곳에 머물면서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그림도 그의 병을 막을 수는 없었다.

중섭이 병 앞에서 힘든 사투를 벌일 그 무렵, 나 역시 대구에서 가족을 데리고 서울로 올라왔다. 나는 수도국군병원에 중섭을 입원시켰다. 중섭의 상황을 알게 된 지인들은 모금 활동을 벌였고, 결국 그는 성베드로 병원으로 옮겨졌다. 그곳에서 그림 치료를 받은 중섭은 ‘낙서화’를 그리게 되었다. 중섭의 병세는 빠르게 호전되었고, 1955년 겨울에 퇴원할 수 있었다.


#5. 돌아오지 않는 강

중섭은 정릉 청수장 부근에 하숙방을 얻었다. 나는 중섭을 보기 위해 자주 그곳을 찾았다. 그러던 어느 날, 중섭은 한 남자가 창틀에 두 손을 얹고 창밖을 바라보며 누군가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그림을 그렸다. 나는 그 그림을 빤히 보다가 중섭에게 물었다.

“대향. 이 그림은 제목이 뭐야?”

“돌아오지 않는 강.”

“돌아오지 않는 강?”

“신문에서 봤어. ‘돌아오지 않는 강’이란 영화가 있다지?”

그는 신문에서 본 영화 광고를 보고 그린 것이라고 했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그림 속 남자는 중섭 자신이라는 걸. 그는 돌아오지 않는 강, 현해탄을 건너간 아내를 그토록 그리워하고 있었다.

1956년 봄, 중섭은 영양부족과 급성 간염으로 다시 거식증 증세가 나타나 청량리 뇌병원에 입원했다. 그 소식을 듣고 내가 대구에서 올라와 찾아가 보니 이것은 정말로 너무 참혹하였다. 그래서 내가 곧 적십자 병원에 교섭하여 옮기려고 청량리 병원 2층 수용실에 가서 그를 이끌어 내는데 그는 잠깐 기다리라고 하고선 각 방으로 돌아다니며 그 망측한 꼴의 환자들에게 일일이 창살로 악수를 청하며 위로와 작별의 인사를 나누었다. 그리고선 현관 앞에 나오다가는 멈춰 서서 나를 보며 말했다.

“상! 병원에서 준 성서와 슬리퍼값을 물고 가야 해.”

“이미 계산을 다 끝냈어.”

나는 어쩔 수 없이 그를 속이고는 지프 뒤에 태웠다. 그를 태우고 서대문까지 오면서 눈물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주체할 수 없었다.

중섭은 1956년 9월6일, 아무도 없는 병실에서 홀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41세. 그가 세상을 떠나고 3일 후에야 친구들이 알고 찾아와 장사를 지냈다. 한없이 순수했고, 정이 많았던 나의 벗 중섭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 화장터에서 한 줌의 재가 되었다. 그 유골 중 반은 망우리 공동묘지에 묻혔고, 반은 내가 일본에 있는, 그가 그토록 그리워하던 아내에게 보냈다. 후에 알게 됐다. 그의 머리맡에는 나의 시 ‘세월’이 적힌 종이가 놓여 있었다는 것을.



세월은 우리의 연륜을/ 묵혀가고/ 철따라 잎새마다/ 꿈을 익혔다 뿌리건만/ 오직 너와 나의/ 열매와 더불어/ 종신토록 이렇게/ 마주 서 있노라. (구상, 세월)



힘없이 떨리는 손으로 나의 시를 한 자 한 자 적어 나갔을 중섭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파 견딜 수가 없었다. 어쩌면 그는 병상에 누워 오지 않는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건 아닐까? 중섭과 함께할 수 있는 세월이 이토록 짧을 줄 알았더라면 나는 그와 좀 더 많은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그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것도, 그의 아픔을 좀 더 헤아려 주지 못한 것도 모두 후회가 되었다. 그러나 괜찮다. 나는 이제 그와 술잔을 마주할 수 없지만, 밤새도록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나눌 수도 없지만 그래도 괜찮다. 우리는 영원히 좋은 벗으로 남을 터이니, 그러니 괜찮다고, 정말로 나는 괜찮다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언젠가 이생이 아닌 어딘가에서 만나게 되는 날, 서로의 손을 꼭 붙잡고 우리는 정말 질긴 인연인 것 같다고 웃으며 말할 수 있기를 바라며 나는 그를 보내 주었다.

그해 12월20일. 나는 ‘초토의 시’라는 두 번째 시집을 발간하였다. 6·25 전쟁 이후 나의 시작 중에서 15편을 추려 엮은 것이었는데, 나는 이 시집의 표지화를 중섭의 그림으로 택했다. 그렇게라도 그의 넋을 기리고 싶었다.


에필로그

나는 1969년, 제주도를 탐방할 일이 있었다. 그때 서귀포를 들르게 되니, 자연히 중섭의 생각이 나서 행여나 하고 그 유작을 탐문해 보았다. 수소문 결과 요행히도 도장방집 목판에다 그린 것 한 점과 양조장을 경영하는 그곳 유지 강임용 씨 댁에 넉 점이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내가 구매하겠다고 하자 강임용씨가 말했다. “그렇듯 고인과 관계가 깊은 분이라면 돈을 받고 팔기보다는 그저 한 점 드리겠습니다.”

나는 염치없이 그림을 골라왔다. 강임용씨로부터 무상으로 기증을 받은 것이다. 아니, 강임용씨가 아니라 이중섭으로부터 받았다. 지금 내 앞에 겸연쩍은 표정으로 웃고 있는, 나의 오랜 벗 중섭에게 선물 받은 것이다.

“어이, 대향. 웃지만 말고 말 좀 해 봐. 이건 처음부터 날 위해 그린 거라고 말이야.”

“허허허. 맞네. 상이 자네를 위해 그린 게.”

“진작에 그럴 것이지. 우리는 정말 질긴 인연인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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