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면으로, 만남의 場으로…피란문인들의 고달픔 달래준 영남일보

  • 백승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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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6-06-24   |  발행일 2016-06-24 제34면   |  수정 2016-06-24
■ 6·25와 대구, 그리고 영남일보
20160624


영남일보는 6·25전쟁 중 대구에 둥지를 튼 문인들의 사랑방이었다. 영남일보는 그들의 거처나 다름없었던 서문로의 감나무집 맞은편에 있었다. 특히 서울의 매일신보 학예부장 출신이었던 당시 사장 김영보와 안면이 있던 터였다. 청록파 시인 박목월, 조지훈, 박두진을 비롯해 정비석, 구상, 마해송, 김팔봉, 김소운, 최정희, 최인욱, 최태응 등 한국 문단을 대표하는 문인들이 신문사에 북적였다. 그들은 영남일보에서 신문을 읽고 담배를 피우며 피란살이의 고단함을 달랬다. 밤엔 편집국 의자를 붙여놓고 그 위에서 잠들기도 했다.

특히 영남일보는 문인들에게 작품을 발표할 수 있는 지면을 아낌없이 제공했다. 당시 영남일보는 전쟁 중에도 하루도 빠짐없이 발행된 전국 유일의 신문이었다. 마땅히 작품을 발표할 매체가 없었던 문인들에게는 오아시스나 다름없었다. 수많은 작품이 이 시절 쏟아졌고, 전선문학은 영남일보를 통해 전성기를 맞았다.

‘전선문학’ 꽃피운 영남일보

전쟁중에도 매일 발행된 전국 유일 신문
피란살이 고단함 달래는 문인들로 북적
청록파 시인도 수시로 드나들며 작품 발표
그 시절 실린 작품 ‘불멸의 이름’으로 전해

1·4후퇴후 김동리 소설 ‘스딸린…’ 연재
소설 장르의 전선문학 개척한 요람이기도
파격적 애정관 담은 정비석의 ‘여성전선’
‘자유부인’의 계기가 된 소설로 큰 인기


◆전선문학의 장(場) 영남일보

전쟁 초기 영남일보에 발표된 문인들의 작품은 시와 수필이 주를 이루었다. 대부분 전쟁의 참화를 알리고 애국심을 진작시키는 글이었다.

‘조국으로 가는 길은 항쟁의 길이고/자유로 가는 길은 진격의 길이다/넘어져도 열 번 일어나는 용기를 배우자.’

문총구국대 단원이었던 시인 신동집은 1950년 9월3일자 영남일보에 시 ‘조국(祖國)으로 가는 길’을 발표하며 전 국민의 힘을 모아 전쟁에서 승리할 것을 강조했다.

‘오오 조국!/그것 하나 때문에/행복 대신 청춘도 아낌없이 바칠지어다/(중략) 모두들 갔다. 형도 아우도 이웃도 함께 갔다/(중략)생명이 꽃잎처럼 흩어진대도 서슴지 않고 갔다/그것 하나 때문에 오직 청춘도 정열도 아낌없어라/

시인 심재원도 같은 해 9월10일자 신문에 시 ‘그것 하나 때문에’를 실으며, 조국을 위해 청춘과 열정을 바칠 것을 당부했다.

문총구국대 경북지대장이었던 한솔 이효상은 1950년 9월6일자 영남일보에 실은 시 ‘전쟁(戰爭)’에서 전쟁터로 아들을 보낸 부모들의 애틋한 마음을 드러냈다.

‘마침내 사랑하는 자식 놈을 입대시키던 날/나도 마저 입대하기를 비로소 진정 원하여 보았다/평생에 깨끗이 살기를 뜻한 이 몸이 가다가 바위에 부닥치면/수정같이 깨어지기를 뜻한 이몸이/애기처럼 조국을 부둥켜 안고 하루 밤 깊은 시름을 하여 보았다/전쟁은 마침내 내 주먹 안에 왔다’

전쟁 초기와 달리 1·4후퇴 이후에는 시와 수필은 물론이고 소설, 사회시평, 시사만화, 동요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이 실렸다. 육군종군작가단 소속의 만화가 김용환은 시사만화를 연재했고, 김장수는 동요를 지면에 발표했다. 실질적인 ‘전선문학’의 전성기나 다름없었다. 작품의 내용은 반공의식과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것이 주를 이루었다. 더러는 피란살이의 고단함과 향수를 달래는 작품이 실리기도 했다.

◆청록파 시인들의 작품도

박목월, 조지훈, 박두진 등 청록파 시인들도 영남일보에 수시로 드나들었다. 이들 역시 문총구국대 혹은 종군작가(문인)단의 일원으로 대구에서 활발한 작품활동을 이어갔고, 특히 영남일보를 통해 격동의 시대를 기록했다.

‘(전략) 다시 벗이여/내가/넌줏이/일러주노니/시련(試鍊)이/크면 클수록/우리의 승리가/한결/빛남을 아느냐. (중략) 우리가/피로써 살길을 여는/그러기에 더욱 찬란한 봄이여/아아/우리가/목숨과 정성과/힘을 모아/비로소 사는/그러기에 더욱 찬란한 봄이여/오로지 우리의/조그만 힘이/무궁하고 어마어마한/행복(幸福)의 밑자리를/놓음에 이바지되는/그러기에 한결 영광(榮光)스런 봄이여.’

박목월은 영남일보 1951년 1월1일자 신년호에 시 ‘새로운 봄에’를 발표하며, 겨울을 이겨낸 봄처럼 시련이 클수록 전쟁의 승리가 빛나는 것임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그는 다시 한번 힘을 모을 때라고 촉구했다.

박두진은 1952년 9월3일과 4일자에 수필 ‘人情 스●’을 두 차례 연재했다. 대구에서 자신이 겪은 일화를 소개하며 전란 중에도 우리 사회에는 아직 인정이 남아있고, 희망이 있다는 메시지를 던지며 글을 갈무리했다. 공군종군문인단의 부단장이었던 조지훈은 1952년 1월1일자 영남일보 신년호에 그해 한국 문화계를 전망하는 글 ‘1952년의 전망…불안의 절정에서’를 싣기도 했다.

◆김동리·정비석의 소설 연재

영남일보는 소설 장르의 전선문학을 개척한 요람이기도 했다. 1·4후퇴 이후 영남일보에는 본격적으로 소설이 연재됐다.

한국문단의 대표적인 소설가 김동리의 ‘스딸린의 노쇠(老衰)’가 그 첫째 작품이었다. 1951년 6월7일부터 18일까지 연재된 김동리의 소설은 소련이 6·25전쟁의 배후로 개입하게 된 내막과 말년에 이른 스탈린의 내면을 다룬 작품이었다.

영남일보 연재 소설 중 가장 큰 인기를 끌었던 작품은 육군종군작가단으로 활동하던 정비석의 ‘여성전선(女性戰線)’이었다. 이 소설은 1952년 1월1일 첫 회가 실린 후 그해 7월9일까지 총 180회가 연재됐다. 대립적인 성격의 두 여성을 통해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애정관을 작품 속에 드러내, 독자들로부터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연재 도중 영화화하기로 결정되었고, 전쟁 이후인 1957년 김기영 감독에 의해 실제 영화로 제작됐다.

특히 정비석이 자신의 대표작인 ‘자유부인’을 발표할 수 있었던 것도 영남일보의 ‘여성전선’이 실질적인 계기가 됐다. 자유부인은 전쟁 직후인 1954년 1월부터 8월까지 서울신문에 연재되면서 큰 인기를 끌었다. 성 윤리에 대한 논란의 중심에 섰던 문제작이기도 했다. 당시 서울신문 측은 영남일보에 연재한 정비석의 ‘여성전선’이 큰 인기를 끌었던 것에 착안해 작가의 서울 귀환 기념 작품으로 자유부인을 청탁했고, 이후 신문 연재 소설 초유의 인기를 모았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계속된 인연

전쟁이 끝나고 피란 문인들은 하나둘 서울로 떠났다. 하지만 문인들은 그들을 안아준 영남일보와의 인연을 끝까지 이어갔다. 휴전 이후에도 수시로 자신들의 글을 지면에 실었다. 청마 유치환은 1954년 8월7일자에 대구에서 출간된 두권의 시집을 읽고 쓴 서평을 기고했고, 청록파 시인 박목월은 창간 20주년을 맞은 영남일보에 축시 ‘그것은 빛’을 보내오기도 했다. 이 시는 1965년 10월12일자 1면에 실렸다. 문총구국대 경북지대장이었던 한솔 이효상은 전쟁 이후 국회의장에 취임했고, 영남일보 창간 기념 때마다 축하 휘호를 보내오기도 했다.

전란 속에서 문인들이 머물렀던 대구, 피란과 격동의 시대를 표류하며 거닐었던 그 공간은, 이제 희미한 기억 저편에 빛바랜 사진처럼 앉았다. 하지만 그 시절, 그들이 영남일보에 발표한 작품은 지금 한국문단에 ‘불멸의 이름’으로 새겨져 있다.
백승운기자 swback@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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