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人의 든든한 지원군’ 구상…사인 한 장이면 술집 무상으로 드나들 정도

  • 백승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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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6-06-24   |  발행일 2016-06-24 제34면   |  수정 2016-06-24
詩人·영남일보 주필 겸 편집국장으로 명망
52년 시평 ‘고현잡화-낙동강까지 또 와야’
전쟁에 무감각해져가는 정부에 날선 비판
20160624
시인 구상은 영남일보에 머물며 다양한 사회시평을 지면에 실었다. 1952년 4월28일자 ‘낙동강까지 또 와야’에서는 전쟁에 무감각해져가는 정부와 각계각층의 행태에 대해 날선 비판을 가했다.

6·25전쟁 당시 피란문인들의 든든한 후원자는 시인 구상이었다. 당시 그는 국방부 기관지 승리일보 주간으로 일하며 문단의 궂은일도 도맡았다. 특히 가난한 문인들에게 일거리를 찾아주며 그들을 도왔고, 외상 술값이 늘어날 때면 자신의 주머니를 털어 갚아주기도 했다. ‘구상’이라는 이름 두 자를 쓴 사인 한 장이면 술집을 무상으로 드나들 만큼 명망과 신용을 갖춘 인물이었다.

특히 구상은 1·4후퇴 직후 영남일보에 피란 보따리를 풀었다. 그는 영남일보의 배려로 아예 신문사에 집무실을 꾸렸다. 김영보 사장 바로 옆자리에 책상을 두고 승리일보를 제작해 나갔다. 그러면서 틈틈이 자신의 작품을 영남일보에 실었다. 시인이기 전에 강직한 언론인이었던 그는 사회시평 형식의 글을 자주 내놓았다. 고현잡화(考現雜話), 각설일필(却說一筆)이라는 타이틀을 단 시평은 시대의 부조리를 날카롭게 꼬집었다. 1952년 4월28일자 ‘낙동강까지 또 와야’에서는 전쟁에 무감각해져가는 정부와 각계각층의 행태에 대해 날선 비판을 가했다.

‘(전략)몸서리칠 염전사상(厭戰思想)과 패전의식(敗戰意識)이 거리에 충일(充溢)하다. 그래도 전시국민선전대책(戰時國民宣傳對策)에 행정부나 국회나 사회 각 기관은 무심하다. 거리에는 정훈국(政訓局)이 대민공작(對民工作)을 철수한 후로는 전쟁 수행에 대한 벽보 하나 안 내붙는다. 이즈음 가두(街頭)에는 범람하는 외국영화의 간판과 선거벽단(選擧壁單)만이 춤을 춘다.(중략) 이 해이(解弛)하고 분체(分體)된 국민조직을 재편(再編)하고 민심을 전쟁에 응집(凝集)시키는 것이 급선무가 아니겠는가. 그렇지 않으면 민주주의고 자유고 정치고 머지않아 붉은 개가 다 물어 갈 것이요, 이 땅 백성들은 고래 싸움에 새우 등이 모조리 터지는 격이 될 것이다. 정말 낙동강안(洛東江岸)에 공산군 포성이 가까이 와야 비전국민(非戰國民)에서 결전국민(決戰國民)이 되려는가.’

1953년에는 영남일보에 실은 사회비평 원고를 중심으로 사회평론집 ‘민주고발’을 출간했다. 하지만 이승만 정권의 독재를 비판한 내용이 담겼다는 이유로 ‘민주고발’은 판매금지되고 말았다. 이 일로 그는 반공법 위반죄로 15년형을 선고받고 반년여에 걸친 옥살이를 하다 무죄로 풀려났다.

승리일보 폐간 이후에는 영남일보 주필 겸 편집국장을 맡아 이승만 정권의 독재에 정면으로 대항했다. 영남일보에 재직하면서도 그는 여전히 문인들과 가깝게 지내며 한국문단을 도왔다. 화가 이중섭과도 친분이 두터웠는데, 거처가 마땅치 않았던 이중섭은 자신에게 오는 우편물을 ‘경상북도 대구시 영남일보사 구상 씨 앞’으로 배달하게 했다.

백승운기자 swback@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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