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망·실종 200여명” 70년 전 미 공군 독도오폭 진상규명 절실

  • 손선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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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10-25 07:28  |  수정 2017-10-25 07:30  |  발행일 2017-10-25 제6면
독도폭격사건 진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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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수 제작된 수조에서 탈염작업중인 독도조난어민위령비 원형. <독도박물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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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의 폭격사건이 일어난지 2년 만인 1950년 6월8일 독도 선착장 근처 몽돌해변 절벽 아래 독도조난어민위령비가 세워졌다. 사진은 당시 제막식 때 모습.

울릉도 안용복기념관에 상설전시될 독도조난어민위령비는 미군의 폭격으로 희생된 어민의 넋을 달래기 위해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최초로 독도에 세워졌던 비석의 원형이다. 비석은 이후 독도의 아픈 역사를 기억하고 영토 수호 의지를 다질 수 있는 기록물로 활용될 것으로 기대된다. 하지만 폭격사건의 진상은 공개되지 않았고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영남일보는 25일 독도의 날을 맞아 독도폭격사건의 기록을 살펴봤다.

1948년 美 공군 오인 폭격으로
독도 앞바다 어민들 인명 피해

사건 당시 피해상황 신문보도
사망·실종자 9∼16명 추산
유족들 구술 증언과 큰 차이

우발적 사고로 규정한 美軍
보상금 돼지 한마리 값에 그쳐
위령비 문구엔 희생 대신 조난


◆1948년 6월 독도에서는…

1948년 6월8일, 독도 앞바다가 ‘붉게’ 물들었다. 이날 정오쯤 바다에서 고기잡이하던 어민들 머리 위로 폭탄이 떨어졌다. 평화롭던 바다는 미 공군의 폭격으로 아비규환의 현장이 됐다.

당시 독도는 연합군최고사령관지령(SCAPIN) 제1778호(1947년 9월16일)에 의해 오키나와 기지에 주둔하는 주일 미 공군의 폭격연습지로 지정돼 있었다. 독도가 지리적으로 옛 소련 및 북한과 가장 가까운 곳이어서 미 공군이 소련을 봉쇄할 수 있는 군사적 공간이었기 때문인 것으로 추측된다. 이 사건은 다음 날 독도로 조업 나온 어민들에게 구조된 생존자들에 의해 세상에 알려졌다. 사건 발생 사흘 뒤인 11일부터 조선일보, 동아일보, 경향신문, 민주일보 등이 독도폭격사건의 피해상황을 보도했다. 당시 인명·재산피해 규모는 신문사에 따라 제각각이었다. 사망·실종자는 9~16명, 부상자 3~36명, 침몰선박 11~20척, 파손선박 4척 등으로 기록했다. 한편 정부는 사망자 14명, 부상자 6명, 침몰선박 4척으로 피해규모를 집계했다.

그해 6월17일 미군정은 미 공군 극동사령부를 통해 미 제5공군 소속 B29 폭격기가 어선들을 바위로 오인해 연습폭격했다고 발표했다. 당시 국회는 폭격사건을 논의하고 대책을 강구했다. 하지만 미 군정에 피해 배상을 당당히 요구할 수 없었다. 남한 단독정부가 수립되기 전 미군정 치하였던 탓이다. 끝내 폭격사건과 관련한 최종 조사결과보고서는 발표되지 않았다. 미국의 공식 사과는 없었다.피해자와 유족 가운데 보상을 받지 못한 이가 대다수인 데다 일부가 받은 보상금도 당시 돼지 한 마리 값에 그쳤다고 알려졌다.

◆밝혀지지 않은 진실 커져가는 의혹

2000년대 들어 학계를 중심으로 몇몇 연구자에 의해 독도폭격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한 연구가 이어졌다. 2005년 12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폭격사건에 대한 공식적인 조사를 벌였다. 당시 유족 등의 구술 증언을 토대로 사건을 재구성했다. 그 결과 사망·실종자는 200명 내외, 침몰선박은 50척 내외로 추산됐다. 피해규모가 10배 이상 차이가 나는 까닭은 미군정의 조사가 부실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한편 독도폭격사건의 배후가 일본이라는 설도 제기됐다. 1951년 일본 외무성과 일본 국회가 독도영유권을 주장하기 위해 벌인 공작이 미 공군의 독도폭격연습장 지정에 영향을 끼쳤다는 주장이다. 당시 연합군최고사령부지령(SCAPIN) 1033호(1946년 6월22일) 맥아더라인 선포에 따라 일본 선박과 선원은 독도로부터 13해리 이내로 접근이 금지됐다. 폭격훈련 2주 전 미국이 일본 어민들에게 독도 접근을 경고했다는 사실 또한 일본 배후설을 뒷받침한다. 미군이 독도 접근이 불가능한 일본 어민에게는 훈련사실을 통보하고, 정작 우리나라의 어민들에게는 알리지 않았다는 게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 일본 외무성은 독도를 일본령으로 전제해 주일 미공군 훈련장으로 선정하는 협정을 맺었다가 2차 독도폭격사건이 벌어진 이후 일본 어민들의 조업 불편 등을 이유로 독도를 미공군의 훈련구역에서 제외한 바 있다. 독도를 둘러싸고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로 봐 일본이 독도폭격사건에 개입했다고 의심하고 있지만 추정에 불과하다.

◆독도조난어민위령비에 담긴 의미

6·25전쟁 직전인 1950년 6월8일, 독도 선착장 근처 몽돌해변 절벽 아래 ‘독도조난어민위령비’가 세워졌다. 독도 어민들이 숨진 지 2주년을 맞아 원혼을 위로하고 독도가 한국영토임을 알리기 위한 의도였다. 비문에 희생이 아닌 조난(항해 도중 닥친 재난)이란 문구를 넣은 까닭은 당시 미군 측의 눈치를 보고 자제한 표현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폭격은 끝나지 않았다.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9월15일, 2차 폭격이 일어났다. 이날 오전 11시쯤 미공군 폭격기가 독도를 향해 폭탄을 투하했다. 인명피해는 없었다. 한국 정부는 재발방지를 요청했다. 사건 자체를 얼버무리던 미국은 이듬해 3월 독도를 폭격 훈련지에서 제외했다. 첫 폭격사건이 일어난 지 4년9개월이 지난 뒤였다.

이후 독도조난어민위령비는 일본의 소행인지, 태풍의 여파인지 알 수 없는 이유로 소실됐고, 독도폭격사건은 50년 가까이 역사의 뒤안길에 묻혔다.

경북도는 2005년 광복 60주년을 맞아 독도에 위령비를 재건립했다. 비문은 원형에 새겨진 문구와 같다. 이 때문에 독도에서 조업하던 어민이 폭격으로 숨진 것이 아니라 조난을 당한 것으로 오해할 가능성이 높다.

이 와중에 60여년간 수장돼 있던 위령비 원형이 발견돼 민간 공개를 앞두고 있다. 위령비가 시사하는 바는 크다.

이태우 영남대 독도연구소 연구교수는 “독도폭격사건은 민간인 희생사건으로 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독도영토주권을 침해당한 사건으로 인식해 범국민적 영토주권 수호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 이에 앞서 진상 규명을 위한 민·관·학 3자의 총체적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손선우기자 sunwoo@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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