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 추 거문고 이야기] 〈7〉줄 없는 거문고(상) 전원시인 도연명 '줄 없는 거문고' 뜯으며 마음의 소리 읊다

  • 조현희
  • |
  • 입력 2024-04-12 07:35  |  수정 2024-04-12 07:36  |  발행일 2024-04-12 제14면

2024040701000241100009841
그래픽=장수현기자


거문고(琴)는 도연명에서 유래한 '줄 없는 거문고', 즉 무현금(無絃琴)의 정신이 부각되면서 선비들로부터 더욱더 사랑을 받게 되었다. 관리 생활을 했지만, 대부분의 생애를 초야에 묻혀 절개를 지키며 전원시인으로 살았던 도연명(365~427)은 중국은 물론, 동아시아 전체에서 널리 사랑받은 선비 시인이다. 도연명은 거문고를 사랑하고 연주하기도 했는데, 무현금도 곁에 두고 있었던 모양이다. 대표작으로 꼽히는 '귀거래사'를 비롯해 많은 작품을 남긴 도연명에 대해 양(梁)나라의 종영(鍾嶸)은 '시품(詩品)'에서 '고금 은일시인(隱逸詩人)의 종(宗)'이라 평가했다. 후세에도 똑같이 평가되었다.

대표작 '귀거래사' 남긴 中 대문호
관직 내려놓고 전원에 묻혀 낭만 즐겨
이백 등 후대 시인 그의 문장 추종
'무현금' 바람직한 선비 표상으로


◆도연명과 무현금

이런 도연명의 삶을 기록한 양(梁)나라 소통(蕭統·501~531)의 '도연명전'은 '도연명은 음률을 몰랐지만, 줄 없는 거문고를 늘 곁에 두고 술이 적당하게 되면 금(琴)을 어루만지며 자신의 마음을 기탁하곤 했다(淵明不解音律, 而畜無絃琴一張, 每酒適, 輒撫弄以寄其意)'라고 적고 있다.

그리고 소통은 도연명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리하며 인격과 문학을 높게 평가했다. '연명의 문장은 일반 수준을 뛰어넘어 정채롭다. 적절하게 그리는 듯 현실을 비판하고 참된 경지에서 회포를 풀며, 아울러 굳은 정절로써 도에 안주하고 절개를 지켰으며, 스스로 농사짓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재산 없음을 걱정하지 않았다.'

이보다 앞서 도연명 사후 60년 정도 지나서 심약(沈約)이 지은 '송서(宋書)' 중 '은일열전(隱逸列傳)'에서도 도연명의 무현금에 대해 거의 같은 내용을 적고 있다. 도연명은 그의 작품이나 기록을 보면, 거문고를 전혀 연주할 줄 몰랐던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도연명의 고고한 삶을 표현하면서 이와 같이 표현한 후 무현금의 세계는 바람직한 선비를 표상하는 경지를 상징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도연명의 '귀거래사'에 나오는 대목이다. '돌아가리라. 교제를 그만두고 어울림을 끊어야겠다. 세상이 나와는 서로 어긋나니, 다시 수레를 메고 나가 무엇을 구하겠는가. 친척들과의 정다운 대화를 기뻐하고, 거문고와 책을 즐기면서 시름을 잊으리라. 농부가 나에게 봄이 왔다고 알리면, 장차 서쪽 밭에서 농사일을 해야겠다. 혹은 천을 두른 수레를 준비하게 하고 혹은 한 척의 배를 저어, 깊숙하게 물고랑을 찾아들기도 하고 울퉁불퉁한 길의 언덕을 지난다.'

그리고 51세에 자식들을 위해 쓴 글 '여자엄등소(與子儼等疏)'에는 '어려서 거문고를 배웠고 책을 읽었다. 조용하게 혼자 있는 것이 좋았단다. 책을 읽고 깨닫는 바가 있으면 너무 기뻐 밥 먹는 것조차 잊었단다. 잎사귀 무성한 나무와 나무 그늘을 보거나 때맞추어 새들이 날아와 지저귀면 마음이 절로 들뜨기도 했단다'라는 구절이 있다. 이를 보면 거문고 연주를 배워 연주할 줄도 알았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물론 거문고를 직접 연주하며 즐기는 것보다는 그 너머의 세계에 더 의미를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도연명은 줄 없는 거문고를 지니고 수시로 거기에 마음을 실어 달래면서, 스스로도 '다만 거문고가 지닌 아취를 알면 그뿐이지, 어찌 수고롭게 줄을 튕겨 소리를 낼 것인가(但識琴中趣 何勞絃上聲)'라고 이야기했다. 이처럼 거문고를 곁에 두고 사랑하는 것은 단순히 그 소리를 즐기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다스리며 깨달음을 얻는 데 있었다.

실학자 성호(星湖) 이익(1681~1763)은 도연명을 사모하는 친구를 위해 지어준 글에서 이렇게 이야기했다.

'내가 일찍이 듣건대, 한(漢)나라 제갈후(諸葛侯)가 은거할 때에는 무릎을 끌어안고 휘파람을 불고 칠현금(七絃琴)을 연주하며 평생을 마칠 것처럼 지내다가, 고기가 물을 만나듯 자신을 알아주는 주군을 만나자 우뚝이 삼분천하(三分天下) 하는 공업을 이루었다. ~ 저 도연명 또한 제갈량을 사모한 자였기에 깊이 좋아하는 뜻을 자신의 이름에 드러내고서 마침내 무현금(無絃琴)을 두고 그에 회포를 부쳤으니, 아마도 제갈량과 같은 체(體)를 가지고 있었으나 쓰임이 없었던 것이리라. 이제 그대가 도연명을 좋아하는 것이 도연명이 제갈량을 좋아했던 이유이니, 이것으로 충분히 다할 수 있을 것이다. 내 벗은 힘쓸지어다.'

◆'무현금'에 대한 중국인들의 찬사

도연명 별세 후 많은 이들이 그의 무현금에 대해 각별한 의미를 부여하며 찬사를 보냈다. 그중 먼저 당나라 시인 이백(701~7620)의 시 '희증정율양(戱贈鄭栗陽)'이다.

'도연명은 날마다 취해서/ 다섯 그루 버드나무에 봄이 온 줄 모르네/ 꾸미지 않은 거문고엔 본래 줄이 없고/ 술을 거를 때는 칡베 두건을 쓰네/ 맑은 바람 불어오는 북쪽 창문 아래에서/ 스스로 복희 황제 때의 사람이라 말하네/ 언제나 율리에 가서/ 평생 가까이 했던 벗을 한번 만나 볼는지'

도령(陶令)은 도연명이 팽택령(彭澤令) 벼슬을 지냈다 하여 칭한 말이다. 오류(五柳)는 도연명이 자신의 집 문 앞에 다섯 그루의 버드나무를 심어놓고 스스로 '오류선생(五柳先生)'이라 일컬었던 데서 유래한다.

그리고 도연명은 여름철 한가로울 때에 북쪽 창 아래에 눕고는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자 스스로 희황상인(羲皇上人)이라 칭하였다고 한다. 희황은 중국 고대의 전설상의 삼황(三皇)의 한 사람이자 상고 시대의 제왕인 복희씨(伏羲氏)를 가리킨다. 중국인들은 복희씨가 살던 상고 시대야말로 이상적인 정치가 행해지던 때라 믿어서 이런 표현을 쓴 것이다. 율리(栗里)는 도연명이 살던 마을로, 여기서는 시인의 친구가 현령으로 있는 율양을 이야기한다.

백거이(772~846)는 '구중유일사(丘中有一士)'라는 시를 남겼다. '산 속에 사는 한 선비(丘中有一士)/ 도를 지키며 오랜 세월 보냈네(守道歲月深)/ 걸을 때는 새끼로 맨 옷을 입고(行披帶索衣)/ 앉아서는 줄 없는 거문고 타네(坐拍無絃琴)/ 흐린 샘물은 마시지 않고(不飮濁泉水)/ 굽은 나무 그늘에는 쉬지를 않네(不息曲木陰)/ 티끌만큼이라도 의에 맞지 않으며(所逢苟非義)/ 천 냥의 황금도 흙보다 못하게 여기네(糞土千黃金)/ 마을 사람들 그 기풍 따르니(鄕人化其風)/ 난초 숲에 있는 듯 향기가 나네(薰如蘭在林)/ 지혜롭든 어리석든 강하든 약하든(智愚與强弱)/ 서로 속이고 괴롭히는 일 없었네(不忍相欺侵)/ 그 선비 찾아가 보고 싶어(我欲訪其人)/ 만나러 가려 하다 다시 생각하네(將行復沈吟)/ 그 얼굴 꼭 봐야만 하겠는가(何必見其面)/ 그 마음 제대로 배우면 될 일이지(但在學其心)'

이런 시에서 알 수 있듯이 도연명 이후 많은 중국 선비들이 그의 무현금의 정신세계를 인용하는 가운데, 도연명의 삶을 사랑하며 이상적인 선비의 삶을 추구하고 있다. 한국의 선비들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

김봉규 <문화전문 칼럼니스트> bg4290@naver.com

기자 이미지

조현희 기자

문화부 조현희 기자입니다.
기사 전체보기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위클리포유인기뉴스

영남일보TV





영남일보TV

더보기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