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희의 그림 에세이] 봄날, 옛 그림 속 노승을 찾아서

  • 김남희
  • |
  • 입력 2024-04-12 07:40  |  수정 2024-04-12 07:42  |  발행일 2024-04-12 제13면
구름 위 노승은 서방정토에 당도하였나
아미타불 곁으로 나아가고픈 맘
화폭에 담은 김홍도의 '염불서승'
낮잠에 빠져든 스님 적막의 경지
이를 잡아 놓아주는 노승의 여유
도인 같은 스님들의 깨달음 소재
구도자 그린 선승화 조선시대 유행
김홍도 염불서승
김홍도, '염불서승', 모시에 옅은 채색. 20.8×28.7㎝. <간송미술관 소장>
햇살 한 줌이
새순에 닿는다.
햇살이
이불 위에 모여
겨울을 털어낸다.
식물에도
손길이 뻗었다.
생명을 움트게 한다.
평온한 봄날이다.
해바라기하는 꽃나무 곁에서
차를 마신다.
나른해진다.
금방 꿈결로 접어든다.
멀리 따스한 햇살 아래
잠 든 노승이 보인다.
그도 나처럼 꿈속일까.
도인을 찾아서
조선시대에 유행한
선승화(禪僧畵) 속으로 들어간다.

◆낮잠 든 노승과 이 잡는 노승

낮잠에 빠진 스님을 그린 혜산(蕙山) 유숙(劉淑, 1827~1873)은 차비대령화원을 지낸 중인 출신이다. 그는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 문하에서 남종문인화풍을 받아들였지만 풍속화의 마지막 전통을 이었다. 그의 '오수삼매(午睡三昧)'는 한 명의 인물이 화면을 장악한 선승화이다. 주름진 옷 선이 꿈틀거리는 용 같다. 마치 도를 가슴에 품은 스님이 중생에게 "인생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듯하다. 화가는 질문에 답을 하듯 '오수삼매'를 그려 보인다.

한낮 햇살 아래 노승이 무릎을 세운 채 잠에 들었다. 성근 짚신을 신은 스님의 맨발이 처연하다. 두 손을 무릎에 얹고 얼굴을 묻은 자세가 엄숙하다. 짓눌린 높은 콧대에 감은 눈, 검은 눈썹, 반듯한 이마가 수려하고, 주름진 얼굴에서 연륜이 느껴진다. 깎은 머리가 희끗하다. 머리카락에서 깊은 도력이 묻어난다. 가사 아래 드러난 목덜미가 꿋꿋하다. 곧고 건조한 필선으로 옷깃을 그렸다. 웅크린 어깨에는 강한 먹을 가했고, 풀어헤친 장삼은 농담에 변화를 주었다. 옷 주름이 날개를 접은 천사의 폼이다.

햇살이 기운다. 깊은 잠은 바람 소리, 새소리도 멀리한다. 꿈속을 거닐다가 적정(寂靜)에 든 노승은 아미타불을 친견한다. 환한 가슴을 열어 극락으로 들어가는 순간 화들짝 잠에서 깨어난다. '이' 때문이었다. 겨우내 입었던 장삼에 여러 마리의 이가 기생하고 있었다. 노승은 옷 속에 있는 이를 잡아서 놓아주기로 한다. 스님이 옷을 풀어헤쳐 이를 잡는다. 이 광경을 기막히게 그린 화가가 관아재(觀我齋) 조영석(1686~1761)이다.

2024040701000244300009932
유숙, '오수삼매', 종이에 수묵, 40.4x28㎝. <간송미술관 소장>
2024040701000244300009933
조영석, '이 잡는 노승', 종이에 옅은 색, 23.9×17.3㎝. <학고재 소장>
조영석은 서민을 그림의 주인공으로 내세운 사대부 화가이다. 그는 관념적인 산수화나 인물화를 그리기보다 현실생활에 종사하는 인물을 사실적으로 그렸다. 풍속화의 새 시대를 연 시대정신이 앞선 화가였다. 사대부의 신분이어서 그림을 외면하기도 했지만 결국 그림의 재능에 순응하며 살았다.

노승을 그린 작품에는 그의 위트와 순발력이 넘친다. 특히 '이 잡는 노승'은 소나무 등걸에 앉아 이를 잡아서 놓아주는 노승의 여유로운 순간을 포착하고 있다. 햇살이 좋아서 산책에 나선 노승은 소나무 그늘에서 쉬어가기로 했다. 소나무 등걸에 앉은 스님은 옷자락을 펼쳤다. 겨울 동안 동거한 제법 살이 오른 이를 이사 보내기 위해서다. 이를 잡으려는 노승과 잡히지 않으려는 이 사이의 결전이 시작되었다.

노승의 예리한 눈빛에 이가 딱 걸린 모양이다. 스님은 입술을 앙다문 채 눈빛을 모은다. 이를 놓치지 않을 태세다. 이는 한동안 실랑이를 벌이다가 결국 스님의 손길에 백기를 든다. 성근 머리에 흰털이 길게 자란 눈썹, 이를 잡기 위해서 숨을 참은 듯 상기된 얼굴, 스님의 앉은 자세 등에서 조영석의 예리한 관찰력이 돋보인다. 필선으로 옷 주름을 그렸고, 물기 가득한 담묵으로 나무를 표현했다. 사실적인 인물과 남종화풍의 소나무가 조화를 이룬 것은 조영석이기에 가능했다.

◆호리병 속의 박쥐와 스님의 뒷모습

뒷모습으로 화면을 압도하는 신선이 있다. 호리병을 들고 길을 가던 중 잠시 쉬려고 앉았다. 불현듯 호리병을 연다. 순간 호리병에서 박쥐가 날아간다. 이 모습을 연담(蓮潭) 김명국(金明國, 1600~?)이 그림으로 남겼다. 바로 '박쥐를 날리는 신선'이다. 그는 선승화로 조선이 아닌 일본에서 더 인기를 얻은 신필(神筆)로 불린 화가다. 대표작인 '달마도' 못지않게 빼어난, '박쥐를 날리는 신선'도 득의의 걸작이다. 이 작품은 신선과 박쥐가 등장하는 도석(道釋)인물화다. 왜 신선과 박쥐가 한 쌍을 이루었을까. 박쥐는 부처의 제자 16나한 중 열세 번째 인계타 존자의 전생 모습이다.

어느 날, 박쥐가 살고 있던 동굴에 지나가던 상인들이 추위를 피해서 들어왔다. 그중 한 상인이 불을 피우고 경전을 읽었다. 생솔가지가 타면서 동굴에 연기가 꽉 찼다. 죽음이 닥쳐와도 박쥐는 밖으로 나가지 않고 경 읽는 소리에 심취했다. 이후 박쥐는 죽어서 사람으로 환생했다. 불교에 귀의하여 생사를 초월한 아라한과를 얻었다. 박쥐는 호리병 속에 있다가 중생을 구제할 순간이 오면 세상 밖으로 나온다.

'박쥐를 날리는 신선'은 박쥐가 전생(前生)을 벗고 아라한이 되는 순간을 보여준다. 신선 옆에 놓인 호리병에는 박쥐가 빠져나간 뒤 한줄기의 연기가 피어오른다. 신선은 가볍게 날개를 펼치며 날아가는 박쥐를 본다. 넓은 등을 보이며 앉은 신선은 더벅머리에 이마가 살짝 보인다. 화가의 표현력이 익살맞다. 살짝 드러난 이마가 빛을 발하며 신선의 앞모습을 유추케 한다. 대담한 필획으로 처리한 두꺼운 옷과 화가의 무르익은 텅 빈 배경에서 묘한 긴장감이 돈다. 왼쪽 위에 쓴 '연담'이 인물과 조화를 이룬다.

호리병에서 빠져나간 박쥐는 아라한이 되어 한 사람의 죽음을 배웅하러 간다. 박쥐는 화가의 꿈속으로 들어갔다. 화가는 죽음을 예감하고 혼신을 다해서 염불을 외운다. 꿈에서 깬 화가는 구름을 타고 아미타불 곁으로 가는 스님을 그린다.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 1745~1806 이후)의 '염불서승(念佛西昇)'이다. 그의 바람은 그림처럼 스님이 되어 이생을 떠나는 것이었다.

2024040701000244300009934
김남희(화가)
죽음을 앞둔 김홍도는 생을 반추해 본다. 화가로서 화려한 인생을 살았다. 재능을 한껏 발휘하여 왕에게 총애도 받았다. 풍속화가로 알려졌지만 신선도를 잘 그려서 화원(畵員) 화가로 발탁되었다. 화려한 삶도 잠시 인생의 덧없음을 감지한다. 화가로서 마지막 힘을 다해 '염불서승'을 그린다. '염불서승'은 염불을 하며 서방 정토로 올라간다는 뜻이다. 김홍도는 아미타불을 친견하러 갈 때 입을 수의(壽衣)를 생전에 준비했다. 모시 천에 자신을 스님의 모습으로 그렸다.

옅은 하늘색 위에 구름이 물결을 이루며 떠 있다. 구름 위에는 연꽃이 만발하게 장식되어 있다. 승복 차림의 스님은 극락세계를 바라본다. 편안하게 앉은 자세가 평화롭다. 화가의 기량이 넘치는 필력을 가볍게 처리하여 머리와 귀, 꼿꼿한 목선, 갸름한 얼굴선이 해맑다. 눈꼬리를 보일 듯 말 듯 찍어 마치 부처의 눈에 점안(點眼) 의식을 한 것 같다. 김홍도만의 노련함이다. 머리를 중심으로 광배를 그려서 득도한 스님의 열반을 표시하였다. 왼쪽 위에는 '단로(檀老)'라는 관지(款識)가 있다. 그 아래 자신의 호를 새긴 두 개의 낙관을 두었다. 김홍도는 아마 '염불서승'의 수의를 입고 아미타불 곁으로 갔을 것이다.

◆베란다의 아미타불

오수를 즐긴 스님이 몸을 일으킨다. 덩달아 나도 잠을 깬다. 알싸한 꽃향기가 가득하다. 새가 우짖는다. 정신을 차리니 우리 집 베란다다. 차가 식었다. 꽃나무 위로 햇살이 찬란하다. 콩알만 한 연둣빛 점이 박힌 춘란은 생명을 틔우느라 분주하다. 40년 넘게 나와 함께한 관음죽이 등대처럼 서 있다. 관음죽은 그림 속의 노승이 애타게 찾던 나의 아미타불이다.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위클리포유인기뉴스

영남일보TV





영남일보TV

더보기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