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추억기행 .14] 기생이야기<4> 국창 박녹주

  • 입력 2003-02-13 00:00

구미시 선산읍 노상리 마을회관 앞 놀이터. 화강석 장구와 북을 깔고
앉은 ‘인간문화재 제5호 박녹주(朴綠珠:1905∼79)여사 기념비’가 외롭게 서
있다. 1981년 세워진 이 비석의 주인공 박녹주의 삶은 ‘사랑의 찬가’란
노래 등으로 한 시대를 풍미하다가 노경엔 약물에 중독돼 혈혈단신으로 쓸
쓸하게 삶을 마감한 프랑스 국민가수 에디트 피아프와 너무나도 흡사했다.
박녹주는 젊어 한때 대구 달성권번, 서울 한남권번의 명기(名妓)로 이름을
날렸고, 훗날엔 동편제의 거목으로 판소리(춘향가, 흥보가) 분야 인간문화재
로 예우를 받았지만 삶 자체는 판소리 서편제처럼 너무나도 서글펐다.
조상현(박녹주의 양아들), 박송희, 신영희 등 그의 뜻을 기리려는 후학
들은 매년 그녀가 타계한 5월26일, 비석 앞에서 판소리 한마당으로 기제사
를 올린다. 박녹주가 세상을 뜬지 24년째. 구미문화연구회 등이 주축이 돼
추모사업회가 구성되었고, 그의 뜻을 기리기 위한 전국국악대회도 2001년부
터 매년 10월 열리고 있다.
흔히 판소리는 호남의 산물이라 하지만 일제때만은 그렇지 않았다. 1920
∼40년대 영남은 판소리의 고장이었다. 박녹주는 영남 출신의 선배 김추월(
金秋月:1896∼1933), 김녹주(金綠珠:1897∼1932), 이화중선(李花中仙:1898∼1943),
김초향(金楚香:1900∼1983), 권금주(權錦珠:1903∼1971), 후배였던 이소향(李素
香:1905∼1989), 신금홍(申錦紅:1906∼1942), 신숙(愼淑:1916∼1982), 오비취(吳
翡翠:1918∼1982), 임소향(林素香), 박귀희(朴貴嬉:1921∼1993), 박초향(朴楚香:1
923∼1964) 등과 함께 달구벌을 판소리 고장으로 만든 주역이었다.
선산군 고아면 관심리 437에서 태어난 박녹주. 그녀는 아버지가 박수무
당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판소리를 접할 수 있었다. 선산군 해평면 도리사
부근에 머물고 있던 판소리 동편제의 대가였던 가선(歌善) 박기홍(朴基洪)을
만나 12세때부터 본격적으로 소리 공부를 했다. 아버지로부터 녹주(綠珠)란
예명을 받은 그녀는 선산, 김천, 왜관, 상주 등 이웃 고을의 잔칫집에
초청돼 영남의 귀명창들로부터 폭발적인 인기를 얻는다. 14세때 대구로 내려
와 현재 앞산공원 내 몇몇 절을 돌면서 명창 강창호로부터 심청가를 배웠
고, 만경관 근처 달성권번에 입번해 경상감영 관기 출신 행수기생(으뜸 기
생) 앵무(鸚鵡)한테 춤과 시조를, 김점룡·임준옥·조진영한테서 남도민요 육
자배기, 화초사거리 등을 습득한다. 소리에 미쳐버린 그녀는 닭이 울면 자
리에서 일어나 달성공원, 영선못 등지에서 하루 20시간 목숨을 건 독공(독
공(獨功:스승에게 배운 소리를 자기 혼자서 공부하는 것)에 몰입한다. 달성
권번에서의 생활을 뒤로하고 서울로 올라와 한남권번에 기적(妓籍)을 두고
본격적인 판소리 다섯마당 공부를 하는 틈틈이 제1회 팔도명창대회 등 각종
무대에 선다.
1933년 그녀한테 운명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서울 동양극장에서 열린 조
선성악연구회 창립공연에서 창극 춘향전에서 춘향역을 맡은 그녀의 소리한테
반해버린 ‘동백꽃’ ‘봄봄’의 작가 김유정이 애정공세를 펴기 시작한
것이다. 연희전문에 다녔던 김유정은 매일 한 통의 연애편지를 보냈고 그것
이 별 효력이 없자 혈서를, 나중에는 박녹주한테 살의(殺意)를 품은 협박
편지까지 보냈다. “엊저녁에는 네가 요리집 천향원으로 간 것을 보고 문
앞에서 기다렸으나 나오지 않았어. 만일 그때 너를 만났다면 나는 너를 죽
였을 것이다.”
너무나 놀란 박녹주는 원산으로 피신을 했고, 그곳에서 22세 연상의 원
산 부호 남백우를 만나 부부의 연을 맺는다. 30세때는 두번째 남편인 순천
갑부 김종익을 만났지만 그녀의 ‘사랑의 행로’는 너무나 울퉁불퉁했다.
25세때는 조선극장 지배인이었던 신모씨와 애정문제로 1931년 5월2일 자살소
동까지 벌였고, 이 사건이 대한매일신보에 대서특필되기도 한다. 사랑을 잃
은 김유정은 낙심한 몸을 이끌고 고향인 춘천으로 갔고, 1937년 29세로 요
절한다. 훗날 박녹주는 김유정 문학비 제막식에 참석, 테이프를 끊으면서
당시를 회고하며 쓴 웃음을 지었다고 한다.
그녀는 일제때 일동축음기<주>, 일본 콜럼비아<주>, 일본 빅타축음기<주>
를 통해 100여장의 유성기 음반을 제작, 전국에 판소리 붐을 일으켰지만
그럴수록 자신의 삶은 더욱 황량해져만 갔다. 48세때는 눈병 때문에 한쪽
눈을 잃었고 그때부터 검은 안경을 끼고 다녔는데 공교롭게도 박정희 대통
령이 자주 애용했던 미제 선글라스 라이방과 비슷해, 화제가 된 적도 있다
. 그녀는 56세때 급성폐렴으로 경찰병원에 입원했고, 퇴원 후에는 박귀희에
게 흥보가를 가르치면서 유랑극단 생활을 마감한다. 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고
했던가? 74세의 병든 몸을 이끌고 고별무대를 위해 고향으로 내려온 박녹주
. 생각하면 징그럽기도 한 자신의 삶을 회상하면서 단가 백발가를 목놓아
부르자 객석은 순식간에 눈물바다로 변해버렸다. 1979년 5월26일 오후 1시,
혈육한 점 없이 영면에 든 박녹주. 그녀의 삶의 모토는 지금 기념비 뒷
면 ‘인생백년’이란 글 속에 담겨져있다.
“인생백년이 어찌 이리 허망하냐, 엊그제 청춘홍안이 오늘 백발이로다.
인생 백년 벗은 많지만 가는 길엔 벗이 없어라. 그러나 설워마라 우리
가는 길은 그지없으매, 인생무상을 탓하지 않으려니.”
/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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