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가 있는 옛懸板을 찾아서 .25] 순천 송광사 ‘세월각’‘척주당’

  • 김봉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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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3-10-16   |  발행일 2013-10-16 제22면   |  수정 2013-10-16
亡者의 마지막 길, 생전의 業을 씻다
불국토와 속세의 경계지점, 남·여 영혼 구분해 관욕의식 치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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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광사의 척주당과 세월각. 영혼 천도의식을 치르기 전 남·여 망자의 영혼을 씻는 공간으로 사용되던 곳이다.

한국의 옛 산사(山寺)가 중국이나 일본의 사찰과 다른 특징으로, 사찰 입구 숲길을 들 수 있다. 중국·일본과 달리 우리나라 산사의 경우, 그 입구에 긴 숲길이 조성돼 있지 않은 사찰이 거의 없다.

한국의 전통 사찰은 이런 숲길을 거쳐 일주문에 이르도록 돼 있다. 불교적 우주관에서 나온 이 숲길은 불국토(佛國土)인 사찰과 속세의 경계인 셈이다. 이 길을 통과해 불국토에 이르게 하는 구조로 돼 있다. 이 숲길을 통과하면서 청정한 마음을 갖도록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산사는 대부분 이처럼 사찰에 이르는 아름다운 숲길이 있어, 사찰을 찾는 이로 하여금 그 길을 걸으며 세속에 찌든 마음을 씻도록 하고 있다. 그 좋은 숲길들이 요즘은 대부분 차량들이 분주히 다니는 ‘세속의 길’로 바뀌어 마음을 청정하게 만드는 분위기를 해치고 있는 것은 아쉬운 점이다. 최근 들어 보행전용 숲길을 복원하는 사찰이 생겨나고 있는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이런 숲길과 함께 사찰 입구, 주로 선종 사찰의 일주문 등에 ‘입차문래 막존지해(入此門來 莫存知解)’라는 주련을 걸거나 표석을 세운 곳도 적지 않다. 사찰을 찾는 이는 누구든지 알음알이를 다 버리고 불국토의 문을 들어서라는 의미다. 사람들은 이처럼 숲길을 지나며, 그리고 표석을 보며 세속의 번뇌와 지식을 버리고 마음을 비우게 되는데 죽은 사람의 영혼은 사찰 경내에 들어가려면 어떤 정화 장치를 거쳐야 할까. 순천 송광사에 가면 이에 대한 해답을 알 수 있는 건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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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각’(위) ‘척주당’ 편액.


◆망자들 영혼 씻는 공간 ‘세월각(洗月閣)’ ‘척주당(滌珠堂)’

송광사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계곡 옆으로 난 송광사 입구 숲길을 따라 한참 올라가면 숲길이 끝나는 곳에 일주문이 나온다. ‘조계산 대승선종 송광사(曺溪山 大乘禪宗 松廣寺)’란 세로 편액이 걸린 일주문을 들어서면, 왼쪽으로 계곡 하천을 건너는 능허교와 그 위에 지은 우화각이 보인다. 그 다리 누각을 건너기 전 우측에 작은 한옥 두 개가 있다. 단청도 없는, 소박하고 작은 건물이어서 그냥 지나치기 십상이다. 하지만 이 건물은 다른 사찰에서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특별한 공간이다.

‘세월각(洗月閣)’ ‘척주당(滌珠堂)’이라는 편액이 걸린 건물로, 망자들이 우화각을 지나 사찰 안 법당(지장전)으로 가기 전에 관욕 의식을 치르는 곳이다. 관욕(灌浴)은 불교의 영혼천도의식 때 행해지는 영혼에 대한 목욕 의례로, 세속의 인연과 더러움을 씻어 영가(靈駕)의 번뇌를 없앰으로써 청정한 본래의 마음을 회복시키는 절차이다. 영가를 모시는 가족들이 이곳에서 깨끗한 제복으로 갈아입는 곳이기도 하다.

두 개 공간을 별도로 마련한 것은 남성과 여성의 영혼이 정화하는 공간을 각각 따로 구분하기 위한 것이다. 세월각이 여성 영가의 위패를 모시고 관욕하는 것이고, 척주당이 남자의 위패를 모시고 영혼을 씻는 곳이다. ‘세월’은 달을 씻는다는 의미이고 ‘척주’는 구슬을 씻는다는 뜻이다. 달은 여자의 성을, 구슬은 남자의 성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세속의 때를 씻는다는 의미의 중심은 남녀의 성욕을 정화한다는 뜻을 나타내는 것인지 모르겠다.

흥미로운 것은 세월각의 방향이다. 세월각과 척주당이 ‘ㄱ’자 모양으로 자리잡고 있는데, 척주당은 대웅보전과 마주하는 방향인 반면, 세월각은 대웅보전을 마주하지 않고 일주문 쪽을 향해 있다. 여성의 영가는 부처를 모신 대웅보전을 마주보지 않게 만들어놓은 것이다.

한 칸 짜리 기와집인 이 두 건물은 고려 때부터 있었다고 하는데 ‘세월각’‘척주당’ 편액 글씨는 누가 썼는지는 알 수 없다. 송광사 성보박물관 관계자는 오래 전부터 걸려 있었던 편액이라고 했다.

세월각과 척주당에서 관욕을 마친 영가는 우화각을 지나 사찰의 본 영역으로 들어가 지장전에 모셔지게 된다. 지장전에서 본격적인 영가 천도 의식이 치러지기 때문이다. 세월각과 척주당은 현재는 관욕공간으로 사용되지 않고 있다고 한다. 세태가 변하면서 이 공간에서의 관욕의식은 점차 사라지게 된 것이다.

◆여섯 감각기관의 작용을 비추어 보는 ‘육감정(六鑑亭)’

송광사에는 이와 함께 이색적인 이름의 전각이 또 있다. ‘육감정(六鑑亭)’과 ‘삼청선각(三淸仙閣)’이라는 편액이 붙은 건물이다. 세월각과 척주당 건너편, 계곡 가에 있는 정자다. 이 육감정은 계곡 하천을 다듬어 만든 계담(溪潭)과 어울려 아름다운 풍광을 선사하는 곳으로, 송광사 경치 중 으뜸으로 꼽힌다.

계담을 가로질러 무지개 돌다리 능허교를 놓고 그 위에다 우화각을 지어, 무지개 다리를 건너가면 피안(彼岸)의 세계로 들어가는 구도로 만들었다. 우화각(羽化閣)이라는 것도 피안의 세계로 들어가 날개가 돋아 신선의 세계로 오르는(羽化而登仙) 것임을 상징하고 있다.

우화각을 지나 신선이 된 신선들이 머무는 곳으로 지은 것이 삼청선각이다. 이 건물은 일부가 계담 쪽으로 튀어나와 두 기둥이 계곡 물에 드리워져 있다. 삼청은 도교 신선이 사는 곳을 표현하는 명칭으로, 최고의 이상향을 의미한다. 옥청(玉淸)·상청(上淸)·태청(太淸)을 지칭한다. 또한 수청(水淸)·월청(月淸)·풍청(風淸)을 삼청이라고도 한다. 이 삼청선각에 오르면 육신뿐만 아니라 정신까지도 밝은 거울처럼 깨끗하게 비출 수 있다고 하여, 이곳을 육감정이라고도 했다.

육감정은 육근(六根: 眼, 耳, 鼻, 舌, 身, 意)을 고요히 하여 육진(六塵: 色, 聲, 香, 味, 觸, 法)의 경계를 거울처럼 집착 없이 밝고 지혜롭게 비춰보는 정자라는 의미라고 한다. ‘육감정’ 편액은 동국진체를 이은 호남의 명필 창암(蒼巖) 이삼만(1770~1845)의 글씨다. 1837년(道光 17년) 4월에 쓴 것이다. ‘삼청선각’ 글씨도 좋은데 누구 글씨인지는 알 수 없다.

육감정 기둥에 걸리 주련 글귀는 조계총림 송광사 초대 방장을 지낸 구산(九山) 스님(1910~1983)의 게송이다.

‘대지가 황금인들 보배가 아니고(大地眞金未是珍)/ 성현이 존귀해도 내가 알 바 아니네(聖賢尊貴非我親)/ 눈에 비친 온누리에 풀 하나 없는데(滿目乾坤無寸草)/ 조계산 밝은 달빛 간담까지 시리구나(曺溪山月照膽寒)’

 

글·사진=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고종 임금의 魂 깃든…
송광사 관음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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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음전 실내 벽화 중 하나인 문신의 모습.
송광사에는 세월각과 척주당 말고도 이색적인 전각이 하나 있다. 관음전이다. 종전에는 ‘성수전(聖壽殿)’으로 불리던 전각으로 내·외부 벽화가 다른 사찰 전각과 달리 화조도나 산수화, 문신 그림, 일월도 등이 그려져 있어 눈길을 끈다.

이 건물은 1903년 고종 황제의 성수망육(聖壽望六·51세)을 맞아 건립, 고종이 직접 이름을 지어서 ‘성수전(聖壽殿)’이란 편액을 내린 황실기도처였다. 51세 생일을 맞아 황실과 나라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한 원당의 필요성을 기로소(耆老所)에서 제기하면서 건립이 추진된 것이다. 준공 후 위패를 봉안한 1904년부터 1908년까지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조례의식이 이곳에서 거행되었다.

성수전은 1957년 송광사 경내의 옛 관음전을 해체하면서 황실 위패를 봉안했던 이곳에 목조 관세음보살상을 옮겨 봉안하게 되고, 관음전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이런 역사를 가진 관음전이기에 건물의 구조나 구성, 벽화 등이 일반 사찰 전각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관음전 처마 끝에는 ‘해(海)’자와 ‘수(水)’자가 교대로 쓰여 있다. 이는 풍수적으로 송광사의 불 기운으로부터 전각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내부 천장에는 연화문 반자를 중심으로 물고기, 용 등의 형상이 단청으로 장식돼 있다. 또한 전각 중앙의 석축 앞에 있는 계단의 계단석이 거북 모양을 하고 있는데, 이는 성수전이 용궁을 상징했다고 볼 수 있다.

벽화도 물론 일반적 사찰 벽화와는 내용이 완전히 다르다. 외벽에는 괴석, 파초, 소나무, 매화, 모란, 석류나무, 오리, 백로 등이 그려져 있다. 부귀, 번영, 장수, 자손번창, 부부화합 등을 상징하는 것들이다. 내벽에도 비슷한 의미를 지닌 화훼도와 화조도가 그려져 있다. 내벽에는 이와 함께 중앙 감실을 향해 좌우에 관복을 입고 공손히 몸을 숙이고 있는 신하들이 그려져 있다. 신하마다 품계를 표시하고 있는데, 정1품·종1품·정2품의 신하로 구분돼 있다. ‘정2품 이상의 문관 가운데 70세 이상’이라는 기로소 입소 규정에 따른 신하들로, 1902년 고종과 함께 기로소에 들어갔던 기로신(耆老臣) 14명을 재현한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중앙 감실 벽에는 해와 달이 그려져 있는데, 이는 고종과 명성황후를 상징한다. 김봉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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