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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석의 발견과 되새김] 신록의 꿈과 소통에의 열망
# 꽃 잔치그 많던 꽃들이 자취를 감추고, 새잎들의 그늘이 무성해진다. 신록의 계절이 열리는 것이다. 너무나 화려했지만, 한편 너무 짧았던 지난 꽃 시절을 아쉬워한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지난주 총선 날 오후, 각자 선거를 한 다음 전국의 문인들 수십 명이 영천의 보현산 자락에 모였다. 나도 한자리를 차지했다. 산돌배나무가 거의 만개한 때여서 그 꽃을 보기 위해서였다. 꽃나무 하나를 보려고 서울서 부산에서, 대구에서 그리고 대전과 전북에서까지 문인들이 찾아오다니, 봄 호사의 극치가 이런 게 아닌가 여길 만도 하다. 하지만 참으로 진정이 넘치는 소박한 꽃 잔치였다. 오래된 고목이 한껏 가지를 뻗친 채 꽃핀 장엄한 나무에의 예찬이 잇달아 나왔다. 누군가는 '어르신'이라며 나무에 경배하기도 했다. 이들은 꽃나무 그늘에서 흔쾌한 술자리를 가진 후 이내 뿔뿔이 헤어졌다. 그때가 꽃 시절의 절정기였던 듯하다. 영천시에서 보현산 자락을 찾아가는 길가는 물론 영천 댐 주변의 길은 온통 벚꽃들이 터널을 이루었고, 산록과 들에는 복사꽃이 만개했다. 사과꽃과 자두꽃들 등 봄꽃들이 다투어 피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불과 일주일도 안 되어 꽃들이 지고, 신록이 세상을 덮기 시작한 것이다. 새삼, 꿈을 꾼 듯이 한 계절의 변화를 바라본다. 이런 글이 눈에 띈다."아침이면 새 소리 구르고 언덕은 다시 부풀어 올랐다. 그러므로 어제의 밤이 결코 괴롭고 긴 것만은 아니었다."문학과지성사의 시인선 600번째 기념으로 나온 앤솔러지 '시는 나를 끌고 당신에게로 간다'에 실린 이시영 시인의 글이다. 이 책은 시인선 501번에서 599번째에 걸쳐 나온 시집들의 시인들이 직접 쓴 뒤표지글을 모은 이색적인 앤솔러지다. 이 시인은 시집 '나비가 찾아왔다'의 뒤표지글로 이 짧은 글을 붙였다. 아침에 듣고 보는 자연의 놀라운 변화 앞에서 험난했던 지난밤을 되돌아보는 눈길이 애틋하게 느껴진다. 그것을 나는 혹독했던 겨울을 지나 그 보상처럼 맞이하는 놀라운 꽃 잔치의 풍성함에 이어 새롭게 다독이는 신록에의 기대로 받아들인다. #시단의 경사말이 나온 김에 우리 시단의 경사를 짚고 가야겠다. 이번에 우리 문단의 대표적인 시인선으로 꼽히는 문학과지성의 시인선집과 창작과비평의 시선이 각각 600권째와 500권째를 내놓아 우리 문학의 눈부신 성과를 펼쳐보이고 있다. 문학과지성 시인선의 첫 출간은 민음사의 '오늘의 시인총서'(1974년)나 창비시선(1975년)보다 늦었지만 활발히 시집을 펴내며 한국문학을 대표하는 시인선으로 거듭났다. 1호는 황동규 시인의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로 1978년 출간 이후 46년이 됐다. 창작과비평도 꾸준히 시선을 펴내어 500권이라는 기념비적인 부피를 쌓았다. 창비시선 1호는 신경림의 '농무'다. 이들 시인선들은 우리 문단의 꽃을 활짝 피워 다른 시인선들의 출간을 견인하는 역할을 해왔다. 이에 따라 한국 시단은 더욱 다채로워졌다. 민음사는 '오늘의 시인총서' 외에도 1986년 시작한 '민음의 시' 시인선으로 최근 320호를 펴냈다. 문학동네도 2011년부터 '문학동네시인선'을 출간하며 최근 208호까지 이르렀다. 이들 시인선들의 꾸준한 출간은 우리 문학에의 신뢰와 수준에 대한 자신감이 이룬 업적이라 할 수 있다. 세계적으로 시에 대한 관심이 점점 옅어지는 상황에서도 우리 문단에서 시집들이 꾸준히 발간되는 건 놀라운 일이다. 그야말로 눈부신 꽃의 시절을 거쳐 신록의 푸르름으로 거듭나 새로운 도약의 토대를 마련하고 있는 것이다. 이시영의 말처럼 우리 문학은 어렵던 시절을 견뎌내어 이제 눈부신 아침을 맞이하고 있는 것 같다.#소통의 꿈그래, 다시 말하지만, '아침의 새소리와 부풀어 오른 언덕'은 풍성했던 꽃 시절을 거쳐 맞는 신록의 푸르른 세계로 볼 수도 있다. 그런 아침의 새 기운으로 간밤의 '괴롭고 긴' 시간을 넘어서는 것이다. 이 말을 나는 또 우리가 맞이한 새로운 시간으로 바꾸어 말해보고 싶어진다. 선거가 끝난 것이다. 이번 선거는 엄청난 말의 성찬이었다. 온갖 말들이 강렬한 기세로 피어나 봄꽃처럼 화려하게 전국을 덮었다. 그리고 야당의 압도적인 승리로 막을 내렸다. 특히 불통이라는 현 정부를 겨냥한 야권의 집요한 정권 심판론의 공격이 주효한 듯하다. 이러한 판세 때문에 여러 가지 정국의 전망이 나오지만, 어쨌든 여든 야든 국민의 선택을 받아들여 새롭게 관계를 설정하고 타협하며, 소통해야 한다. 어떤 면에서는 우리 정치도 꽃 시절을 지나 신록의 차분하고도 푸른 시기에 접어든 것이라 말할 수도 있는 것이다. 문득 학창 시절에 읽은 이양하의 수필 '신록 예찬'이 생각난다. 자연의 혜택을 고맙게 여기면서 그 가운데서 "봄과 여름이 혜택이 많고 그 가운데서도 봄, 봄 가운데에서도 만산(萬山)에 녹음이 싹트는 이때"를 제일 혜택이 많은 것으로 꼽는다. 그러면서 "나는 역시 사람 사이에 처하기를 즐거워하고, 사람을 그리워하는 갑남을녀(甲男乙女)의 하나요, 또 사람이란 모든 결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역시 가장 아름다운 존재의 하나라고 생각한다"라고 생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를 신록에 빗대어 관조한다. 서로가 가장 아름다운 꽃이라고 마구 꽃피어대던 시절을 지나 한층 차분해진 녹음의 시기를 맞으면서 서로는 서로를 돌아본다. 그렇게 새롭게 우거지면서 강렬한 여름의 세계로 함께 나아가야 한다. 선거 기간 중의 온갖 막말과 상대에 대한 증오의 기세를 누그러뜨리고 다시 서로는 얼굴을 풀고 소통해야 함을 이번 선거를 통해 국민은 요구하고 있다. 지난주 산돌배나무 아래서 원로 문인이 강조했던 "우리는 꽃도 좋아하지만 사람이 먼저라는 마음으로 이곳에 모였다"는 말처럼 서로 대립했던 마음을 풀어서 어우러지고 상응하는 게 인간의 미덕인 것이다. 꽃 지고 푸르러지는 신록의 계절을 맞아 갖는 바람의 마음이다. 시인이하석 시인
[단체장의 생각:長考] 상주가 '모자'와 '만화'를 주제로 축제를 여는 이유
지역 축제는 지역의 특색과 문화를 홍보해 관광객을 유치하고 지역경제를 활성화하는 수단으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최근에는 지역 축제가 너무 많아지고 경쟁력이 약화되면서, 효과가 반감되는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또한 지역 축제가 지역의 정체성과 연결되지 못하고, 단순한 소비와 유희에 그치는 경우도 많다. 이런 상황에서 지역 축제는 어떻게 변화하고 발전해야 할까.우선, 지역 축제는 지역의 고유한 자원과 역사를 살려 독창적이고 주민이 참여하는 축제로 만들어야 한다. 전북 임실군의 N치즈축제는 임실만의 차별화된 임실N치즈라는 고유 콘텐츠와 치즈 테마파크를 조성해 전국에서 유일한 치즈 축제로 자리매김했다. 볼거리, 먹거리, 살 거리, 체험 거리가 풍성하고, 주민들의 참여도가 높아서 지역경제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반면, 축제의 콘셉트와 상관없이 흥미를 끌 수 있는 요소를 동원하거나 다른 지역과 비슷한 축제를 열면서 정체성을 잃는 경우는 피해야 한다.둘째, 지역 축제는 지역의 생활인구를 늘리고, 지속 가능한 관광으로 이어지는 방향으로 발전해야 한다. 지역 축제는 단기적으로 관광객을 유치하고 소비를 촉진하는 효과가 있지만, 지역의 인구 감소와 쇠퇴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는 없다. 따라서 지역 축제는 지역의 매력을 알리고 관계인구를 확대하고 재방문을 유도하는 전략이 필요하다.셋째, 지역 축제는 지역의 문화와 환경을 보호하고 지속 가능한 발전을 추구해야 한다. 지역 축제는 지역의 문화와 자연을 소개하고 발전시키는 촉매제가 되어야 한다. 전남 함평군의 나비축제는 생태축제로 알려졌지만, 사실은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한 산업축제다. 이 축제는 나비와 관련된 다양한 체험과 전시를 통해 나비의 생태와 문화를 알리고, 나비 산업을 육성하고 있다. 반면, 축제를 통해 동물이나 식물을 대상화하거나 파괴하는 경우는 지양해야 한다. 축제는 단순한 이벤트가 아니라 지역의 문화와 환경을 보존하고 발전시키는 장이 되어야 한다.지역 축제는 지역의 정체성과 자부심을 높이고 지역발전을 이끌어내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하지만 지역 축제가 이대로는 안 된다는 것을 인식하고 변화하고 발전해야 한다. 지역 축제는 지역의 고유한 자원과 역사를 살리고, 지역의 생활인구를 늘리고, 지역의 문화와 환경을 보호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 지역 축제가 지역발전에 기여할 수 있다.상주시라고 다르지 않다. 독창적이고 참여적인 축제와 관계인구를 늘리고 재방문을 유도하는 전략이 필요하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상주세계모자페스티벌과 만화축제다. 지난해 개최한 상주세계모자페스티벌은 대한민국 어디에서도 하지 않은 축제다.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선점하고 '모자'라는 세계인 공통의 소재를 이용하여 축제로서 지역 경제의 동력을 확보하고자 힘써왔다. 처음부터 성공이 보장될 것이라 여기지 않았다. 그저 가능성을 보고 만들어갔다. 상주시는 지난해 그런 가능성을 확인했다.만화축제도 마찬가지다. 지난해 준공한 만화특화 시립도서관을 통해 창의력과 상상력이 발동되고, 그곳에 가야만 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어 외지에서도 찾아오는 공간으로 만들어나갈 것이다. 일본 다케오시는 인구 5만명의 소도시지만, 시립도서관 하나가 연간 100만명의 방문객을 창출했다. 우리도 이와 같다. 일본 고치현의 만화 고시엔 같은 행사를 기획하고, 전국의 청소년과 가족들이 찾아오는 상주를 만들어 가는 게 목표다.강영석 상주시장강영석 상주시장
[단상지대] 삶의 정수에 다가가다
얼마 전 어떤 조직에서 경력변호사를 대거 채용한다는 공고를 보았는데 조건이 좋았다. 신입도 아니고 경력인 데다가 내가 했던 일과 관련이 있어서 나는 관심을 가지고 공고를 읽었다. 지원자의 나이 조건이 40세까지이니 지원 가능 나이도 넉넉하고 적절하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글을 읽던 중 현실타격감이 왔다. 내 나이가 47세인 것을 새삼 깨달은 것이다. '흥, 경력이면 50세까지는 뽑아야지.'며칠 후 나는 문득 오랫동안 미루던 조혈모세포 기증(골수 기증)을 결심했다. 예전에 장기기증 희망등록은 한 적이 있었는데, 조혈모세포 기증의 경우 입원해서 채취하고 회복하는 기간이 필요하다고 해서 하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더 나이가 들기 전에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절차를 알아보기 위해 국립장기조직혈액관리원 홈페이지에 들어갔다. 그곳에는 조혈모세포 기증희망자 등록은 '만 18세 이상 40세 미만의 건강한 사람'이라고 되어 있었다. 해가 바뀌어도 나는 똑같은데 내 나이의 숫자만 관용 없이 더해진다는 것이 억울하게 느껴졌고, 철없는 내가 이쯤 되면 삶의 지혜를 축적했을 것만 같은 나이가 되었다는 것이 받아들이기 힘들었다.나이가 든다는 것이 이렇게 억울한 생각도 들지만, 나이가 든다는 것의 장점도 종종 발견한다. 나이가 들면 유독 꽃 사진을 찍게 되는 것뿐만 아니라 여러 변화가 생기는 것 같다. 아침에 아파트 거실에서 밖을 내려다보면 늘 비슷한 자리에서 운동하시는 어머님 아버님들이 보인다. 나는 주로 스쿼트를 하면서 밖을 보는데, 그분들의 직관적인 맨손체조나 스트레칭을 보면 웃음이 나서 자세가 무너지곤 했다. 하루는 독수리가 날개를 활짝 펴듯 팔을 펴고는 허리를 90도로 구부렸다 폈다 하는 것이다. 퍼득퍼득 거리면서. 날갯짓은 일정하고 엄숙했다. 그런 날갯짓 이외에도 온몸을 일정한 규칙 없이 배배 꼬는 운동도 하셨다.그런데 어느 날 나는 그 족보에도 없는 운동을 따라 해 보았다. 독수리가 날아오르듯 시동을 걸고 큰 날갯짓으로 퍼덕이며 상체를 접었다 폈다 했다. 이 근본 없는 몸짓은 심장을 빠르게 뛰게 하여 유산소 느낌을 줌과 동시에 하체를 강하게 지탱하여 근력운동도 되는 느낌을 주었다. 그리고 새가 나는 듯 명상효과와 마음의 평온까지 느껴졌다. 꽈배기처럼 배배 꼬거나 몸을 꿀렁거리며 예측하기 어려운 동작들을 정적으로 연결하는 이 직관적인 운동은 평소 쓰지 않는 근육을 자극하여 피로를 풀고 스트레칭 효과가 있는 느낌이었다. 예전에는 앞뒤로 손을 손뼉 치거나 뒤로 가는 어르신들, 특이한 동작으로 몸을 푸시는 분들을 보면 '풋' 했는데 지금은 그게 삶의 정수에 다가가 있는 몸짓처럼 느껴진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오로지 내 근육을 푸는 것과 편안함만 추구하는 경지에 이르러야 할 수 있기 때문이다.예전의 나는 놀기로 약속하면 맛있는 것 어떤 것을 먹을지 어디에 갈지 등 계획을 짰다. 무언가를 경험해야 할 것 같고 최대한 신나야 하고 맛있는 것을 먹어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제대로 놀았다고 생각되는 날은 자주 오지 않았고 그렇게 놀고 나면 놀아서 기가 털리는 느낌도 있었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목적적이지 않은, 잔잔하고 무색무취한 그런 시간에도 '놀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날씨가 좋을 때 걷거나 앉아 있는 것, 전통시장을 천천히 걸어 지나갈 때도 놀았다는 생각이 든다. 사소하고 작고 평범한 것들, 다른 사람의 인정보다는 내 마음이 채워지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게 된 것이다.이은미 변호사이은미 변호사
[박재열의 외신 톺아보기] 이스마일 하니예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이 최근 확전 기미를 보이고 있다. 그 전쟁의 종전과 이스라엘 인질석방을 위한 협상은 지지부진하다. 이스마일 하니예(62)는 그 협상의 하마스 측 책임자다. 그는 지난 4월10일 이스라엘의 공습으로 아들 3명을 잃었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입장이나 결의에 흔들림이 없다고 언명했다. 이스라엘은 그 아들들이 하마스 공작원이라고 했으나 그는 아들들을 순교자라고 치켜세웠다. 지금까지 그의 대가족 중 60명이 이스라엘에 의해 목숨을 잃었고 지난 공습에 아들들 외에 손자 셋도 함께 희생당했다고 했다. 그러나 그의 동포는 자유와 존엄성을 쟁취하기 위해 어떤 희생도 감내할 각오가 되어 있다는 말도 했다.하니예는 2006년에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총리가 되었으나 그 이듬해 대통령에 의해 해임되었다. 그는 그 해임을 인정치 않았다. 그때부터 웨스트뱅크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통치하였으나 가자지구는 총리인 그가 통치하였다. 2014년 두 지역의 통합정부가 꾸려지자 그때 총리직을 내려놓았다. 그때부터 2017년까지 가자지구의 실질적 통치기구인 하마스를 이끈 사람도 그였으며 그 이후로도 정치국 의장으로 여전히 그 지역을 책임지고 있다. 2017년부터 그는 카타르 도하에 거주하고 있으나 가자지구의 참혹한 현실을 외면하고 일류호텔에서 생활한다고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고 있다. 그는 이집트에서 땅굴을 통해 들어오는 상품에 20% 세금을 매김으로 많은 돈을 그러모아 가자시 경치 좋은 해변에 엄청난 땅과 여러 채의 주택을 사들였다. 그러나 지난해 12월에 시행한 차기 대통령 적격자 여론조사에서 어느 지역에서든 현 대통령보다 몇 배 높은 인기를 얻고 있다. 경북대 명예교수·시인경북대 명예교수·시인
[송재학의 시와 함께] 복희
복희야,부르는 소리가 들린다차가운 바닥에 앉아주인을 기다리고 있던 개가 일어선다개가 걷고 소녀가 따라 걷는다인기척을 느낀 소녀가 먼저 지나가라고 멈춰 서서개를 가만히 쓸어주고 있다희미한 달이 떠 있다모두 눈이 멀지 않고서는 이렇게 차분할 수 없다 남길순 '복희'개의 이름은 복희, 소녀는 개와 잘 연결되어 있다. 호수 주변의 길을 산책하면서 몸짓이 큰 복희와 어린 소녀는 자주 다른 사람을 위해서 멈추었다. 그때마다 소녀는 복희를 쓸어주고 있다. 복희는 소녀의 손길을 잘 받아주고 있다. "모두 눈이 멀지 않고서는 이렇게 차분할 수 없다"는 장면, 개와 소녀 그리고 호숫가와 달이 정물화처럼 느리게 움직이고 있다. 커다란 개와 소녀는 낯선 풍경이지만 조금도 거슬리지 않으면서 미소를 머금고 있다. 소녀를 따르는 우리의 개 복희는 소녀가 좋아하는 잔잔한 호수와 다르지 않다. 따뜻함이란 이처럼 비범하다. 사족, 희미한 달은 낮달일까 아니면 초저녁의 달을 가리키는 걸까.시인시인
[윤성은의 천일영화] 연상호 감독의 K-크리처 시리즈 '기생수: 더 그레이'
한국 오리지널 시리즈물, '기생수: 더 그레이'가 다시 한번 넷플릭스 비영어권 글로벌 순위 1위에 올랐다. 연상호 감독은 '부산행'(2016)으로 K-좀비물의 부흥을 알렸고, 코로나가 한창이던 시기에 공개된 '지옥'(2021)까지 세계적인 인기를 얻으면서 '오징어 게임'(2021) 이후 K-콘텐츠 신드롬을 이어가는데 큰 몫을 해왔다. 그사이에 개봉한 '염력'(2017)과 OTT 오리지널 영화, '정이'(2022), '기생수: 더 그레이'에 이르기까지 그의 실사 작품들은 모두 비현실적인 캐릭터 및 사건들을 다룬다는 공통점이 있으며, 모두 '판타지'라는 광범위한 단어 안에 포함시킬 수 있다. 그러나 세부 장르는 좀비물, 초능력물, SF 등으로 제각각인데, '기생수: 더 그레이'는 좀비물과는 또 다른 크리처물로 분류해 볼 수 있다. 크리처물에는 사람을 죽이거나 위협하는 괴물이 등장하기 때문에 호러물의 한 장르로 분류되기도 하고, 스릴러적 요소도 많이 가미되는 것이 특징이다. 그간 K-크리처물은 여타의 재난 영화들과 맥을 같이해 왔는데,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들과 유사한 스릴을 선사함은 물론, 재난 상황에서 인간의 이기심을 날것 그대로 드러내는 날카로움도 들어있고, 한때 인간이었던 존재에 대한 애잔함이나 허무함까지 남긴다. 연상호 감독의 이번 시리즈 또한 그러한 특징들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기생수: 더 그레이'는 인간이 인간의 몸속에 기생해야만 살 수 있는 정체불명의 생명체에 대항해 사투를 벌이는 이야기로, 연상호 감독의 새로운 장르적 시도와 성취를 확인할 수 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이제는 고전(古典)이라 불릴만한 인기 일본 만화 '기생수'를 원작으로 하고 있음에도 '인간의 몸을 숙주로 삼는 생물'이 있다는 기본 설정 외에 캐릭터 및 서사를 대부분 변형시켰다는 점이다. 주인공 '수인'(전소니)의 몸에 침투한 기생생물은 수인의 뇌를 반만 잠식하는 바람에 하루에 15분 정도만 괴물('기생수')의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변종이 된다. 그래서 수인은 '지킬 박사와 하이드씨'처럼 두 개의 인격으로 존재하게 되는데, 이런 특수성 때문에 수인을 같은 동족이라며 포섭하려는 기생수들과 기생수들을 박멸하려는 특수 전담반 '더 그레이'팀 모두의 표적이 된다. 원작의 주인공 '신이치'는 한쪽 팔만을 잠식한 기생수와 계속 소통하며 위기를 극복하지만, 수인은 해리성 장애처럼 자신 안에 있는 '하이디'와 동시에 깨어 있을 수 없기에 제 3자가 그들 사이의 소통을 담당해야 한다는 큰 차이가 있다. 우연히 그 역할을 담당하게 된 '강우'(구교환)는 수인과 도움을 주고받으며 우정을 쌓아나간다. 그들의 최종 목표는 시장의 뇌를 노리는 기생수 집단을 처치하는 것이다. 이처럼 '기생수: 더 그레이'는 변주된 세팅에 흥미로운 전사(前史)를 가진 캐릭터들이 더해져 새로운 이야기로 다시 태어났으며, 연상호 감독의 뛰어난 대중적 감수성으로 완성되었다. 심형래 감독의 '디 워'(2007) 흥행이 증명하듯 한국의 영상 기술이 일천하던 시절에는 CG만 매끄러워도 관객들의 호응을 얻을 수 있었지만, 이미 세계 정상급의 영상 기술을 가진 현재에는 신선하고 짜임새 있는 내러티브가 인기의 정확한 바로미터가 되고 있으며, '기생수: 더 그레이'는 그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콘텐츠의 휘발성이 강한 시대에 보다 롱런하기를 빌며, K-크리처물의 진화와 연상호 감독의 다음 도전도 기대해 본다.영화평론가윤성은 영화평론가
[경제와 세상] 동굴의 환영
칠흑 같은 지하 동굴 속에 죄수들이 갇혀 있다. 그들은 태어나면서부터 팔다리가 묶이고 목조차 족쇄가 채워져 움직이지 못하고 그저 동굴 벽만 보고 살고 있다. 죄수들의 등 뒤에는 횃불이 타고 있고, 그 사이에서 사람들은 인형극 놀이를 한다. 나무로 만든 동물과 사람을 가지고 꼭두각시놀이를 하는 것이다. 죄수들은 횃불에 의해 동굴 벽에 투영되는 자신들과 인형들의 그림자를 볼 뿐, 인형들과 이들을 움직이고 대사를 읊는 사람들의 실제 모습은 볼 수도 없고 본적도 없다. 죄수들에게 그림자는 실재이고 들리는 대사는 그림자의 대화로 인식한다. 그림자라는 인식은 아예 없는 것이다. 그러다 한 죄수가 탈출하여 동굴 밖으로 나가면 평생 처음 경험하는 눈부신 햇살 때문에 한참을 헤매다 서서히 보이기 시작하는 자연과 사람들의 모습에 몹시 당황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동굴 속에서 봤던 그림자들의 진짜 모습이라고 아무리 일러줘도 그 사실을 거부하고 오히려 그것들이 환영이라고 우긴다.이 이야기는 플라톤의 '국가론'에 담긴 유명한 동굴 우화다. 동굴은 우리가 사는 세상이고 죄수는 바로 우리 자신이다. 우리는 보이는 세계의 이미지만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이해한다. 진실을 아무리 알려주어도 알려고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이를 인지심리학에서는 '확증편향'이라고 부른다. 사실 여부를 떠나 자신의 판단에 부합하는 정보만 수용하고 그 판단과 반대되는 의견들은 의도적으로 무시해버리는 현상이다. 개미 투자자 김씨는 A 기업의 주가가 오를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이 기업에 몰빵 투자를 했다면, 신제품 출시나 해외 수주 같은 이 기업의 호재에만 귀를 기울이고, 취약한 재무구조나 경쟁기업의 약진 같은 불리한 정보는 배척하거나 사소한 요인으로 애써 무시해 버린다. 갭 투자에 의해 다주택을 보유한 사람은 우리나라 부동산 가격은 장기적으로 언제나 우상향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고, 무주택자들은 현재 집값에는 과거 일본처럼 거품이 잔뜩 끼어있다고 판단을 하고 있다. 그래서 다주택자들은 건축자잿값 인상과 부동산 불경기에 따른 재개발·재건축 부진, 이어지는 주택 공급부족 현상에 주목한다. 반면 무주택자들은 미분양 아파트 양산과 저출산율, MZ세대에서 속출하는 주포자(주택 구입 자포자기) 기사에 몰입한다.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세계와 함께 사이버세계 역시 또 다른 동굴이다. 유튜브에서 주식이나 부동산 투자 관련 영상을 검색하여 보고 나면 내재된 필터버블 알고리듬에 의해 내 입맛에 맞는 내용으로 도배된 또 다른 영상을 보게 된다. 편의성을 높이기 위해 설계된 알고리듬이지만 역설적으로 구독자의 확증편향성을 강화하는 결과를 낳는다. 입맛에 맞는 주장을 선택할 수 있는 SNS와 OTT 플랫폼도 우리가 살고 있는 동굴의 일부이고, 이들은 모두 과잉·과격·과몰입을 부르는 알고리듬을 장착하고 있다. 요즘 선거철에 정치인과 정치 유튜버들이 뻔한 가짜뉴스와 거짓말을 마구 해댈 수 있는 것은 이에 환호하는 대중이 있기 때문이다, 확증편향에 기대 정치인들은 강성 팬을 얻고 유튜버들은 돈을 번다. 여기에 우리 사회를 이어주고 지탱하는 도덕과 윤리는 설 자리가 없다. TV 화면에 비치는 정치토론은 공정성을 내걸지만 사실 여부와 관계없는 확증편향 간의 싸움이라는 것이 전북대 강준만 교수의 말이다. 결과적으로, 우리 사회를 보수와 진보 간 이념적 견해차도 아니고 미래 비전과도 관계없는 감정적으로 극단적인 대립상태로 몰아가고 있다. 한국사회및성격심리학회는 올해 두드러진 심리현상으로 확증편향을 꼽았다.권 업 객원논설위원권 업 객원논설위원
[광장에서] 기후·환경 공약, 구호가 아닌 이행이 중요
2023년 '환경보전에 관한 국민의식조사' 보고서에 의하면, 일반 국민과 전문가 모두 '지구온난화·기후변화'에 가장 높은 관심을 보인 것으로 확인됐다. 이번 제2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기후유권자'라는 신조어가 등장할 정도로 그 어느 때보다 기후변화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이를 고려한 듯 각 정당들은 유권자의 표심을 잡기 위해서 사회·경제 분야 등에 대한 전통적인 공약과 함께 기후·환경 공약을 강조하고 관련 분야의 전문가를 영입하기도 했다. 국내뿐만 아니라 최근 미국 대선에서도 '기후변화' 이슈가 핵심 변수로 작용할 수 있다는 보도가 있기도 했다. 그만큼 기후변화는 더 이상 국내, 환경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고 정치·경제·사회 등 전반에 영향을 끼치는 글로벌한 의제가 되었다. 이에 이번 선거에서 제안된 기후·환경 공약의 주요한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여당인 '국민의힘'의 주요 공약은 첫째로 기후대응기금 확충(2024년 2.4조원→2027년 5조원) 로드맵 마련, 탄소중립녹색성장위원회 기능 강화, 국회 기후위기특별위원회 상설화, '탄소중립녹색장기본법' 개정 등을 통한 기후위기 대응 강화이다. 둘째로, 원전·재생에너지의 균형적 확충, 수소 생태계 구축 및 수소경제 선도국가 도약 등에 더해 감축 목표 상향 및 유상할당 확대를 통한 온실가스 배출권거래제를 혁신하고, 재정지원 및 글로벌 탄소 규제 대응 지원 등을 통한 기업의 저탄소 전환을 촉진하는 것이다. 그 외에 지역 기반의 기후테크산업과 기후테크 유니콘 육성, 민관합동 녹색투자 펀드 조성 및 산업은행 탄소중립 정책금융 확대 등을 통해 기후산업 및 녹색금융 성장을 지원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더불어민주당'의 주요 공약은 첫째로 2035년 국가온실가스감축목표(NDC) 감축(2018년 대비 52%) 추진, 2040년까지 석탄발전소 가동 중단 추진, 기후대응기금 확보(2027년까지 7조원 이상) 및 단계적 확대, 배출권거래제 유상할당 비율 상향 등 탄소 감축으로 국가경쟁력을 확보하는 것이다. 둘째로 2050년 탄소중립 실현을 위해 산업구조 대전환 지속 추진, 탄소중립산업법(한국형 IRA) 제정으로 산업의 글로벌 경쟁력 강화 및 기후위기에 적극 대응, 탄소중립 신산업·신기술 발굴로 탄소중립 역량 강화 등 산업 경쟁력을 높이는 것이다. 그 외에 재생에너지 보급 강화, RE100 활성화를 위한 제도개선, 기후에너지부 신설로 탄소중립과 에너지 전환에 적극 대응 등 친환경 재생에너지 대전환으로 RE100 시대를 여는 것이다. 양당 모두 기후대응기금을 대폭 확대하고 기후산업 및 녹색금융 성장 지원, 탄소중립형 산업전환 추진 등을 통해 기후위기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의지를 보인 것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원전과 재생에너지 등 에너지 전환 외에 큰 차별성이 있다고 보기는 어렵고 일부 공약은 그 구체적인 실현 가능성에 의문이 있기도 하다.결론적으로 기후변화는 단기간의 노력으로 해결될 수 없고, 중장기적인 관점에서 지속적으로 대응해야 하는 이슈이다. 이제 기후변화가 주요한 정치적 의제가 된 만큼 2026년 지방선거, 2027년 대선 등 선거 국면에서 계속해서 이슈가 될 것이다. 이제부터는 선거용 구호가 아닌 기후·환경 공약의 실제적인 이행에 가장 힘써야 할 것이다. 김도형 (법무법인 화우 환경규제대응센터장·한양대 공학대학원 겸임교수)김도형 (법무법인 화우 환경규제대응센터장·한양대 공학대학원 겸임교수)
[더 나은 세상] 삶에 항복할 때 오는 것들
운전을 즐긴다고 느낀 적은 없었다. 20대 초부터 운전을 했음에도. 유학생활 때도 최대한 좋은 위치에 집을 얻어 걷거나 대중교통으로 일상이 이루어지도록 했다. 그러다 새스커툰에 처음 왔을 때, 눈보라 속에서 혹은 빙판길 도로를 캐나다의 긴 겨울 동안 운전해야 하는 건 가장 큰 공포 중의 하나였다. 차에 대한 의존도가 매우 높은 북미 특히 중소도시의 대중교통은 비효율적이라 "여기는 운전 안 하면 못 살아"라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고 또 그렇게 사는 곳. 첫 학기 단과대학 교수회의 때 학장에게 "오늘 회의에 못 갈 것 같아. 이 날씨에 도저히 운전을 못 하겠어"라고 e메일을 보냈을 정도였다. "이해해. 다들 익숙해지는 데 시간이 걸려"라는 답이 왔지만, 그것도 처음 한두 번이지 계속될 순 없는 일. 게다가 수업은 꼭 가야 하니 어깨와 목에 바짝 힘이 들어간 채 죽을 것 같은 무서움을 참고 운전해서 수업 갔다 집에 오면 "휴 오늘은 이제 안 나가도 돼"라고 절로 안도의 숨이 내쉬어졌다. 그리고 정말로 전혀 밖에 나가고 싶지 않았다. 지인이 식사 초대를 해도, 운전이 무서워 못 간다고 했을 정도로. 사람들은 친절해서 태우러 와주기도 했는데 그것도 처음 한두 번이고.코로나 때 한국에서 지내다 연말 복귀하면서 한동안은 운전하지 않고 지내겠다고 결정했다. 상점들 많은 곳에 집을 얻었고, 수업 가야 하는 날은 정 안되면 비싸도 택시나 우버를 이용하리라 마음 먹었다. 그건 10여 년 전의 나에게, 정말 무서워서 죽을 것 같은데 그래도 해내야 한다고, 나를 도와줄 사람은 누구도 없으니 내가 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그때의 나에게,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정말 무섭고 싫으면 안 해도 된다고, 지금의 내가 주는 선물이었다. 삶이란 참 신비로워서, 그러고 나니 우연히 만난 예전 학생이 마침 근처에 사는 대학 교직원이 되어 있어 캠퍼스 가는 날 태워주겠다고 나섰다. 로터리 클럽 모임 때는 멤버들 중 가는 길에 태워주는 사람들이 생겼고, 이곳에 한국 성당은 없으니 좋은 교회나 성당을 찾는다고 했더니 동료가 자기가 다니는 교회에 오면 태워주겠다고 했다. 예전 친척이 이 도시 살 때 10년간 예배가는 길 태워준 적 있다고. 그렇게 그 동료의 남편까지 매주 교회 오가는 길에 만나며 친구가 되었다. 친한 친구들과 공연이나 식사 약속이 있을 때는 이제 당연히 몇 시까지 태우러 갈게 이런 메시지가 온다. 물론 내가 타협해야 하는 부분도 당연히 있다. 교수들은 수업, 회의 외에는 컴퓨터로 대부분 업무가 이루어지니 집에서 일했는데, 교직원들은 출근 시간이 이르니 아침 일찍 가서 퇴근 시간까지 오피스에서 일한다. 집보다 불편한 점이 많지만, 이 또한 덕분에 업무를 되도록 집에 가져오지 않아도 되고 동료들과 더 친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내 삶의 주인으로 살 줄 아는 건 중요하고, 동시에 도움이 필요할 때 내 나약함을 인정하고 도움 청할 줄 아는 건 내면이 강해졌을 때만 할 수 있더라. 그렇게 내 에고를 항복할 때 삶은 내 힘으로 해낼 수 있는 것 이상의 결과를 가져다주고. 지금 지치고 외롭고 힘든데 끝내 해내야 한다고 애쓰는 사람이 있다면, 한 번쯤 놓아보라고, 그때 펼쳐질 새로운 삶에 마음 열어보라고 말해주고 싶다. 찬란히 아름다운 봄이니까.신현정 캐나다 사스카추안대 교수신현정 캐나다 사스카추안대 교수
[박규완 칼럼] 국회의원 특권 없애자
국회의원을 흔히 '신의 직장'이라 한다. 왜일까. 의원 개개인이 독립된 헌법기관이라서? 지역 민의의 대표자라서? 아니다. 당론을 충실히 따르는 '정당 병정'일 뿐이며, 민의를 대변하기보단 정쟁과 명예 탐닉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국회의원이 '신의 직장'인 까닭은 오롯이 그 많은 특권과 특혜 때문이다. 의원 당선이 입신양명의 압축판인 이유이기도 하다. 특권·특혜 및 의전 관련 조항이 무려 186개다. 항공기 비즈니스석, KTX 특실을 공짜로 타고 공항과 역 귀빈실을 이용한다. 의원회관 내 이발소·헬스장·목욕탕과 약국·치과·내과·한의원이 무료다. 수입도 쏠쏠하다. 2023년 기준 국회의원 세비는 연 1억5천426만원이다. 국민소득 대비 OECD 국가 중 3위다. 여기에 1억원가량의 의원실 경비를 별도로 지원받는다. 의원 차량 유류비, 출장비 등이 포함된다. 9명의 보좌진을 거느리는 것도 대한민국 국회의원만의 시그니처다. 4급 보좌관 2명, 5급 비서관 2명, 6·7·8·9급 비서 각 1명, 인턴 1명이다. 보좌진 총급여는 5억2천여만 원. 의원 1인당 연간 7억원의 세금이 들어가는 꼴이다. 2000년 이전까진 보좌진이 5명이었다. 국회의 씀씀이가 더 방만해졌다는 증좌다. 이뿐이랴. 국회의원은 매년 1억5천만원, 선거가 있는 해는 3억원까지 정치후원금을 모금할 수 있다. 출판기념회도 공공연히 의원들의 주머니를 불려준다. 게다가 선거에서 15% 이상 득표하면 선거비용 전액을 국고에서 환급받는다. 임도 보고 뽕도 따고. 출마하고 돈도 받고. '선거 재테크'가 가능한 구조다. 국민세금으로 의원 전용 '화수분'을 만들어주는 격이다. 특권의 백미는 또 있다. 불체포 특권이 방호해주니 웬만한 비리·불법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거짓말해도 면책특권 뒤에 숨으면 그만이다. 유감스럽게도 의회 효용성 평가는 OECD 국가 최하위다. "가성비가 낮다"는 말만으론 우리 국회의 '고비용 저효율' 체계를 온전히 웅변할 수 없을 듯싶다.한데 '신의 직장'치곤 진입 문턱이 낮다. 사기 행각이 드러나거나 막말을 쏟아낸 인물, 성범죄 옹호자, 부동산 투기꾼이 걸러지지 않는다. 특권은 강고하고 구성원은 열화(劣化)하는 형국이다. 구태정치의 야누스다. "국회부의장이 직접 커피를 뽑아 탁자 위에 놓았다. 3선 의원인데도 따로 보좌관이 없고 방은 작았다" 최연혁 스웨덴 린네대 교수가 전한 스웨덴 국회의 단면이다. "온갖 특권을 누리기 위해 국회의원이 되려고 하니 정치가 부패·타락하는 것"이라는 장기표 신문명정책연구원장의 진단은 틀리지 않는다. 이제 특권을 내려놓을 때가 왔다. 계몽주의의 초석을 놓은 영국 정치사상가 존 로크는 "정치인은 국민에게 권한을 위임받은 대리인일 뿐"이라고 했다. 일하는 대리인에 특혜와 특권, 과잉 의전이 왜 필요한가. 특권 폐지는 22대 국회에 부여된 소명이자 국민의 여망이다. 국회의원은 '신의 직장'이 아닌 '3D 업종'이어야 한다. 그래야 상시 '일하는 국회'가 구현된다. 지역패권주의와 양당 독과점 구도를 혁파할 수 있다. 여의도가 바뀌어야 공정과 지방의 가치가 존중되며 대화와 협상의 문화가 작동할 수 있는 '새 정치'가 열린다.세계가치조사에 의하면 스웨덴 국회의 신뢰도는 63.3%인데 비해 한국 국회는 20.7%에 불과했다. 특권의 역설이다. 특권 폐지가 정치 업그레이드의 시작점이다.박규완 논설위원논설위원
[돌직구 핵직구] 대한민국은 지속가능할 것인가?
22대 총선에 투표하면서 걱정과 불안이 앞섰다. 여당도, 야당도 흔쾌히 좋아서 선택한 게 아니다. 나라를 생각해서 투표한 것이다. 정치인들에게 국가의 미래를 맡길 수 있을 것인가 걱정하는 국민이 많다. 막스 베버의 정의대로 "정치란 국가를 운영하는 활동"이다. 이번 총선도 예전과 다름없이 야당의 '정권심판론'과 여당의 '야당심판론' 간판 아래 철 지난 구호들만 난무했다. 미래 지도자가 될 신선한 인물을 발굴하지 못하고, 국민의 생활을 진보시킬 정책도 없고, 국가의 미래를 담보할 공약 하나 없었다. 증오로 가득 찬 독설과 해프닝을 가십화하는 이미지 정치, 구시대적 매너리즘의 반복뿐이었다. 낡은 시대 청산이라는 시대적 요구는 외면한 채 무능한 구악(舊惡)과 부패한 신악(新惡)들만 양산했다. 정치 수준이 갈수록 떨어지고 있다는 우려가 많다. 이들에게 '대한민국 위기론' '지속불가능론' 해결을 기대하는 게 연목구어는 아닐까. 위기론의 핵심은 인구 감소이다. 미국의 한 대학교 연구소에 따르면 2100년 대한민국 인구가 현재의 절반 수준인 2천680만명으로 급감할 것이라고 한다. 통계청도 2021년부터 인구가 줄어들기 시작해서 2070년 3천766만명으로 감소할 것이라고 예측한 바 있다. 지역의 인구 소멸은 더욱 심각하다. 행정안전부와 감사원은 인구 소멸위험 단계에 들어선 기초단체가 83~89곳에 이른다고 밝혔다. 전국 시·군·구의 3분의 1이 넘는다. 2005년 '저출산고령화기본법' 제정 이후 약 380조원에 달하는 예산을 투입했다는데 결과는 참혹하다. 작년 합계출산율이 0.72에 그쳤고 올해는 더 떨어질 전망이다. 국민 없는 국가는 존재할 수 없다. 점증하는 사회적 갈등과 대립은 또 하나의 문제이다. 다른 용어로 국가 통합성, 국민 응집력이 현저히 떨어지고 있다. 지역·세대·계층 간의 갈등이 증폭되고 있다. 우리나라의 갈등지수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에서 3위에 오를 정도로 심각하다. 갈등을 관리하는 정부의 능력은 최저 상황이다. 반대로 사회통합지수와 국민행복지수는 최하위를 기록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자살률, 노인빈곤율과 자살률, 청년자살률, 이혼율 등이 세계 최고 수준이다. 경제 격차도 문제이다. 계층 간 소득의 불균형 정도를 나타내는 지니계수와 소득 상하위 비율도 크지만, 자산의 격차는 더욱 심각해지고 있다. 평생 월급 모아서 집 사기가 불가능해졌다. 갈등의 경제·사회적 비용은 증가하고 종국에는 공동체 붕괴의 위기에 직면한다.국가의 지속성과 통합성을 유지하는 기본 원리는 '자유'와 '공정'이다.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자유를 누릴 수 있고, 땀 흘려 노력하는 사람이 잘사는 게 공정이다. 정치적 자유는 주어졌지만 경제적 자유는 요원하고, 편법과 탈법이 극성이다. 권력과 지위를 이용해 사적인 이익을 추구하고, 정직과 성실은 바보들의 덕목이 되었다. 결과 달성을 위해 수단과 방법 가리지 않는 사회가 되었다. 청년들의 '헬조선' '이생망'이란 말이 그냥 나온 게 아니다. 정치인에게 도덕성과 양심을 포기한 지는 오래되었다. 그렇다고 그들에게 애국심과 정책 능력을 기대하기도 어렵다. 그러나 22대 국회에서는 대한민국의 존립을 위해 대책이라도 세워주길 바란다. 국가대개조 혹은 국정대혁신도 좋다. 그리스 번영을 가져온 솔론의 민주적 개혁이든 페리클레스의 포용과 대통합 정책도 괜찮다. 거기에 미치지 못해도 좋다. 거시적 프로그램이든 미시적인 정책이든 최소한의 노력이라도 있기를 기대해본다.서성교 건국대 특임교수·전 청와대 행정관서성교 건국대 특임교수·전 청와대 행정관
[시선과 창] 투표할 권리, 기권할 권리
필자가 일본에서 유학하던 시절, 주말에 한 일본인 지인과 함께 지역 행정기관 앞을 지난 적이 있었다. 당시 기관 앞에는 긴 줄이 늘어서 있었고, 사람들은 대부분 진지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일본인 지인은 그 광경을 두고 '무료 나눔 행사에 참여하는 것'이라 추측했지만, 알고 보니 그날은 일본의 선거 투표일이었다. 정치에 무관심한 일본인들의 단면을 보여주는 일화라 할 수 있다. 실제로 일본은 개인 투표율이 매우 저조한 국가 중 하나다. '투표는 국민의 의무'라며 투표율 제고를 위한 캠페인이 활발히 전개되는 한국과는 대조적이다. 물론 일본의 낮은 투표율을 결코 바람직한 현상이라 할 수는 없겠지만, 이러한 필자의 경험은 투표를 둘러싼 다양한 의견들을 고민하게 만든다. 민주주의는 일반 시민의 정치 참여를 통해 지탱되는 제도다. 이렇게 시민의 정치 참여를 보장하는 권리를 '참정권'이라 부른다. 우리는 흔히 참정권을 단순히 '투표할 권리'로만 인식하는 경향이 있지만, 사실 참정권의 개념은 이보다 훨씬 광범위하다. 투표권은 물론이고 피선거권, 정치적 의사 표현의 자유, 집회의 자유 등 다양한 권리가 참정권의 범주에 포함된다. 물론 이 중에서도 가장 직접적이고 본질적인 참정권의 행사 방식은 단연 투표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과연 투표가 다른 정치 참여와는 별개로 구분되는 일종의 '의무'라고까지 볼 수 있을까?필자는 투표권과 함께 '기권할 권리' 역시 참정권의 중요한 일부로 인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민주주의는 다수결의 원칙에 기반하지만, 동시에 소수 의견을 포함한 모든 의견을 존중하는 것이 핵심이다. 어떤 유권자가 선호하는 후보를 찾지 못해 기권표를 던진다면, 이는 단순히 투표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뜻을 대변해줄 후보가 없다'는 의사를 표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흔히 '최악보다는 차악을 선택해야 한다'고 이야기하지만, 그렇게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한 선택을 하는 것이야말로 국민의 대의를 왜곡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일부 국가에서는 투표를 법적 의무로 규정하는 강제투표제를 시행하고 있는데, 이러한 의무 투표는 유권자들의 신중한 선택을 방해할 수 있다. 선거 이슈에 관심이 없거나 후보자에 대해 잘 모르는 유권자들까지 무조건 투표장으로 내몰 경우, 충분한 고민 없이 섣부른 선택을 할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언뜻 보기에 투표율을 높이는 것 같지만, 민주주의의 질적 향상과는 거리가 멀어지는 셈이다. 이렇듯 맹목적인 투표 참여보다는 유권자 스스로가 선거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자신의 의견을 신중하게 표현할 수 있는 토양을 마련하는 것이 더욱 긴요하다. 투표는 단순한 동원이 아니라 주권자로서의 자발적이고 능동적인 정치 참여가 되어야 한다. 유권자 개개인이 신중하게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는 것, 그것이 성숙한 민주주의로 나아가는 길이다.물론 우리는 투표의 소중함도 잊지 말아야 한다. 투표는 주권자인 국민이 대의 민주제의 근간을 이루는 선거에 직접 참여하는 행위다. 우리는 한편으로는 기권할 권리를 존중하되, 다른 한편으로는 유권자들의 정치의식을 높이고 자발적 투표 참여를 독려해야 한다. 투표권과 기권할 권리, 이 두 권리가 조화를 이룰 때 비로소 민주주의는 온전해질 수 있다. 4월10일, 오늘은 국회의원 선거 투표일이다. 우리 사회가 참정권의 온전한 가치를 인식하고, 투표의 소중함을 잊지 않으면서도 기권의 의미 또한 존중하는 성숙한 민주주의로 나아가기를 기대한다. 서승완 유메타랩 대표서승완 유메타랩 대표
[정성화의 자연과 환경] 더 이상 무시 못할 미세플라스틱
지금까지 당장 위험하다는 증거는 없지만, 우리 건강에 나쁜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우려되었던 미세플라스틱과 나노플라스틱(크기가 각각 5㎜ 및 1㎛ 이하)이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음이 최근 계속 발표되고 있다. 최근의 한 논문에 의하면, 미세플라스틱 입자는 뇌졸중, 심장병 및 사망위험을 4.5배 높일 수 있다고 한다. 이 연구는 경동맥에 영향을 미치는 '죽상동맥경화증'을 가진 환자 304명의 혈관에서 지방 플라크를 제거한 후 257명의 환자를 평균 34개월 동안 추적·관찰한 결과, 미세플라스틱이 혈관 안쪽에 쌓이면 염증을 유발하여 뇌졸중과 심근경색 위험을 높일 수 있다는 추측을 할 수 있었다. 그 외, 미세플라스틱의 섭취가 장의 누수를 유발하고 염증성 장 질환을 악화시킬 수도 있고, 암세포의 성장·전이를 가속화하고, 위암의 악화, 생식능력에 부정적인 영향을 초래할 수 있음을 시사하는 연구 결과가 계속해서 나오고 있다. 또한, 미세플라스틱은 임산부 탯줄을 통해 아이에게도 전달되는 등, 사람을 포함한 동물, 나아가 식물에서도 미세플라스틱이 대를 이어 전달되는 것이 확인되었다.작은 플라스틱은 우리 주위의 공기, 식품, 물 등에 흔히 존재한다고 한다. 예로, 2022년의 한 연구에 의하면, 100℃의 물을 담았던 일회용 컵에서는 물 ℓ당 5.1조 개의 나노플라스틱이 용출되었고, 90℃에 노출한 식품용 나일론 백에서는 ℓ당 35조 개의 나노플라스틱이 나왔다. 2023년 한 연구에서는 1ℓ 생수에 1600억 개의 나노플라스틱이 존재한다고 하였고, 2019년 한 연구에서는 플라스틱으로 만든 티백 1개를 95℃에서 5분 우려내면 약 116억 개의 미세플라스틱과 31억 개의 나노플라스틱이 용출되었다. 최근 연구에서는 생수 1ℓ에서 약 24만 개의 나노플라스틱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물 1ℓ에 몇십만 내지 몇십조 개의 나노플라스틱이 존재할 수 있다고 하니, 플라스틱 시대에 사는 우리는 사람의 세포 수(약 15조 개)보다 많은 플라스틱 조각을 쉽게 섭취할 수 있는 것이다. 그간 미세플라스틱은 섭취되어도 배출된다고 믿었으므로 크게 신경을 쓰지 않은 측면이 있었지만 미세플라스틱의 다양한 나쁜 영향이 확인되고 있으므로, 관심을 가지고 가능한 한 미세플라스틱을 멀리해야 할 형편이다. 다행히 석회질이 있는 물을 끓이면 90%의 나노플라스틱이 제거될 수 있다고 하며, 한 회사의 정수기는 0.5~1㎛ 크기의 미세입자를 99% 제거한다고 홍보하고 있다. 플라스틱, 특히 일회용 플라스틱의 사용을 줄이고 무단 폐기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경북대 화학과 석좌교수정성화 경북대 화학과 석좌교수
[3040칼럼] 이어달리기의 바통처럼
올해로 4회를 맞이한 '제주북페어 2024 책운동회'에 다녀왔다. 책을 만들고 소개하고 판매하는 일을 하면서 '독자'라는 존재를 생각하면 실체 없는, 혹은 상상 속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싶은 의심을 피워 올리게 될 때가 많다. 공간을 직접 운영하는 것이 아니기에 대체 누가, 언제, 왜 사 가는 건지 알 수 없는 탓이다. 필자는 2016년부터 독립문예지와 단행본을 발간하다가 2022년부터 '시의옷'이라는 출판사를 통해 대구를 기반으로 출판 활동을 해나가고 있다. 대형 출판사처럼 저자 사인회나 북토크, 낭독회 등 여러 행사를 열어 독자와 만나는 자리가 잦지 않은 만큼 지역에서 1인 출판사로 책을 만드는 일은 꽤 외롭고 때론 고립된 느낌마저 들 때가 있다. 독립 출판이 활성화된 요즘, 1인 창작자나 소규모 출판사 그리고 독자에게 북페어 같은 행사는 저자와 독자를 잇는 의미 있고 뜻깊은 자리를 마련한다.주최 측에서 많은 독자가 올 수 있도록 유치에 힘쓰지만 늘 판매가 잘 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시간을 내어 부스를 지키고, 먼 거리를 이동하며, 때로는 금전적 손실까지 감수하면서 페어에 참여하는 이유는 내가 만든 책을 기다려왔던 독자, 이 책을 귀중하게 읽어줄 독자를 만나는 순간이 늘 이런 자리에서 있어 왔기 때문이다. 그런 독자를 만날 때 책을 만들면서 겪은 난관으로 인한 힘듦은 눈 녹듯 사라진다. 나 또한 독자로 그런 작품을 만난 적이 있다. 자신이 만든 제작물을 어떤 과정으로 만들었는지, 왜 만들었는지 애정이 담긴 소개를 들었을 때, 그 책이 나의 삶과 접속하는 지점을 발견했을 때이다. 그럴 때 단순히 책을 한 권 사는 것이 아니라 책에 담긴 보이지 않는 시간과 정성까지 고스란히 받는 기쁨이 있었다. 그런 작업물은 평생에 소중하고 의미 있는 것으로 간직된다.제작자로서 가장 좋은 행사는 아무래도 내가 사는 지역에서 열리는 행사다. 이동에 대한 부담이 적고 숙소를 구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 부담 없이 참여할 수 있다. 현재 대구에서는 해마다 독립 서점 '더폴락'에서 주최하는 북페어인 '아마도 생산적 활동'이 열린다. 제작자 30여 팀과 저자 북토크, 기획전시, 공연 등으로 이루어지는 소규모 행사지만 지역의 창작자와 독자를 만날 수 있다는 점에서 언제나 반갑고 감사한 자리다. 부산과 전주, 구미, 제주 등 지역 곳곳에서 이런 행사가 열린다는 것은 규모를 떠나서 반길 만한 일이다. 대구는 큰 도시다. 좀 더 큰 규모의 행사가 더 생겨나도 좋지 않을까. 계절마다 책을 소개하고 독자를 만날 수 있는 다양한 자리가 마련되면 좋지 않을까 하는 바람도 있다. 주최하는 곳에 따라 성격도, 특징도, 오는 시민들도 다를 것이며 그로 인해 책을 둘러싼 세계는 더 확장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행사가 열릴 때마다 시민들은 문화예술에 대한 관심도 증가와 더불어 지역에 있는 창작자를 기억하고 자신의 삶으로 친숙하게 예술을 끌어들일 수 있을 것이다.앞으로도 책을 소개하는 자리가 있으면 어디든 기쁜 마음으로 나갈 것이다. 가서 내가 만든 책을 만나줄 '한 명'을 기다리며 즐겁게 소개하고 같은 마음일 제작자를 만나 한 명의 독자가 될 것이다. 책이라는 창작물은 혼자서 전력 질주하는 선수가 아니라 계주처럼 창작자와 제작자, 서점과 독자, 지자체와 시민이 함께 달리는 이어달리기의 바통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김정애 전 독립문예지 '영향력' 발행인김정애 전 독립문예지 '영향력' 발행인
[이진우의 시대정신] '차선'인가 '차악'인가
선택과 결정의 시간이 다가왔다. 사람들은 선거를 민주주의의 축제라고 말하지만, 이 축제가 온갖 욕설과 비방이 난무하는 개판이 된 지 꽤 오래되었다. 우리의 미래를 위협하는 문제들이 산적해 있음에도 이 문제에 대한 정치적 담론과 정책 대결은 사라지고, 심판론이 총선판을 휩쓸고 있다. 4년마다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선거에 투표는 하고 싶은데 뽑을 정당이 없다는 아우성이 일어난다. 윤석열도 싫고 이재명도 싫다. 한동훈도 싫고 조국도 싫다. 모두 싫은 데도 우리는 선택할 수밖에 없다. 뽑을 정당이 없는 상태에서 선택을 강요당한 국민은 역설적으로 그토록 싫어하는 양당 제도를 더욱 공고하게 만든다. 왜 이런 일이 반복되는 것인가? 민주주의 제도에 문제가 있는 것인가? 지속 가능한 민주주의의 핵심적 지주인 시민의 민주 의식이 부패하였기 때문인가? 민주주의에 대한 냉소적 통찰로 유명한 윈스턴 처칠의 말이 떠오른다. "지금까지 시도됐던 다른 통치 형태를 모두 제외한다면, 민주주의는 최악의 통치 형태다." 정치권의 진흙탕 싸움을 보면 한국 민주주의는 '최악'이 분명하지만, 민주주의 제도는 그래도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이다.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처칠의 보수당은 1945년 7월 총선에서 압승할 것이라는 예측과는 달리 노동당에 정권을 빼앗기는 역대급 참패를 당했다. 민주주의 제도에서 선거는 종종 예상을 뒤엎는다. 선거 결과가 나오기도 전에 푸틴의 당선을 의심하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모든 것이 사전에 결정된 전체주의 정권의 선거와는 다르다. 왜 당시 영국의 시민들은 처칠의 공적을 인정하면서도 전혀 다른 선택을 한 것일까? 우리의 총선이 어떤 결과를 보여줄지 확실하게 예측할 수 없다는 게 민주주의 제도의 미덕인지도 모른다.국민은 정권을 띄우기도 하고 가라앉게도 한다. 국민은 도덕적으로는 이미 정치 무대에서 사라졌어야 마땅한 사람도 다시 불러와 부활시키기도 한다. 국민은 한마디로 변덕스럽다. 찍을 정당이 없다면, 시민들은 무엇을 기준으로 선택할까? 이래도 저래도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을 무조건 선택하는 찐 보수나 찐 좌파의 성향을 일단 제쳐두기로 하자. 그들의 기준은 어차피 '소속'이기 때문이다. 내가 어떤 정당과 집단에 속해 있느냐에 따라 자신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사람들은 이념과 정책을 별로 중시하지 않는다. 우리의 정치판을 요동치게 만드는 것은 중도이다. 중도는 적어도 우리가 잘살려면 '이런 나라'를 만들어야 하지 않느냐는 상식에 기반하여 정책과 인물을 가늠한다. 그들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합리적으로 판단하는 집단이다. 조국 열풍이 부는 데도 제3지대가 힘을 얻지 못하는 것을 보면, 중도의 합리성도 감정에 침식되어 파열된 것처럼 보인다. 찍을 정당이 없다는 것은 이를 잘 말해준다. 중도의 선택 기준이 '차선'과 '차악'이라는 감정적 기준으로 축소된 것처럼 보인다. 차선은 최선의 다음이고, 차악은 최악보다는 덜 나쁨이다. 우리가 선택할 최선이 없다면, 차선과 차악은 유일한 대안이다. 그런데 '차선의 선택'과 '차악의 선택'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이상적인 후보자가 없어 최선 대신에 차선을 선택할 때, 우리는 가능한 옵션을 평가하고 자신의 가치나 선호도에 부합하는 옵션을 선택한다. 예컨대 사람은 못마땅해도 그가 추구하는 정책이 가장 큰 이점을 제공하거나 가장 적은 피해를 제공한다면, 우리는 차선을 선택하여 긍정적인 결과를 극대화하려고 한다. 반면에 '차악의 선택'은 사용 가능한 옵션을 비교하고 두 옵션이 모두 이상적이지 않더라도 덜 해롭거나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옵션을 선택한다. 윤석열·한동훈이 이기면 나라가 망한다거나 이재명·조국이 득세하면 나라가 끝장이라는 네거티브 유세가 판치는 선거에서는 차선보다는 차악을 선택할 가능성이 크다. 서로를 악이라고 비방하는 상황에서 우리는 덜 사악한 옵션을 선택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문제는 어쩔 수 없이 차악의 옵션을 받아들임으로써 우리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신의 기준을 무심코 낮출 수 있다는 점이다. 덜 나쁜 것을 반복적으로 선택하면 기대치가 점차적으로 낮아진다. 그놈이 그놈이라는 인식은 필연적으로 정치적 냉소와 무관심을 불러온다. 사람들은 두려움, 좌절, 환멸로 인해 인물과 정책에 투표하기보다는 '반대투표'를 할 수 있다. 유권자는 실제 선호도와 일치하지 않더라도 덜 싫어하는 후보자를 전략적으로 지지함으로써 수준 이하의 부정적 선택의 순환을 영속시킬 수 있다.우리는 어떤 나라를 만들고 싶은가? 어떤 정당과 정책이 이런 나라의 실현에 도움이 되는가? '차선의 선택'은 이 물음에 대해 적어도 자신의 기준을 되돌아본다. 내가 원하는 가치와 정책이 무엇인지 검토한다. 그런데 우리가 끊임없이 덜 악한 '차악'을 선택하다 보면, 정치에서 개혁과 혁신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어떤 사람이 당선되더라도 상황은 더 나빠질 것이 분명하다면, 현상을 유지하고 대안의 목소리를 억제하려는 경향이 강화되기 때문이다. 나쁜 정치 문화는 계속 나빠지고, 개선되지 않는다.우리는 '차악'보다는 '차선'을 선택해야 한다. 우리 인간은 본래 긍정적인 것을 추구하는 본능을 갖고 있다. 행동경제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미국의 심리학자 대니얼 카너먼에 의하면 질병에 대한 두 가지 대응이 제시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든 사람을 구할 확률이 1/3이고 아무도 구할 수 없는 확률이 2/3인 좀 더 뻔한 대안보다 확실히 200명을 구할 수 있는 것을 선택한다. 첫 번째 옵션을 선택하면 400명이 확실히 죽는다. 통계의 기만이지만, 우리는 사람을 확실히 구할 수 있다는 옵션을 선호한다. 어느 정당이 우리에게 확실히 긍정적인 미래의 모습을 보여주면, 우리는 차악보다는 차선을 선택할 것이다. 차악의 선택은 감정에 쏠리고, 차선의 선택은 합리적 평가를 추구한다. 우리가 좋은 정치 문화를 만들려면 합리적인 평가와 정서적 반응 사이의 균형을 맞추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단순히 해악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원칙과 가치, 그리고 더 큰 이익을 바탕으로 투표해야 하는 이유이다. 불완전한 옵션 중에서 선택하는 것은 불가피하지만, 차선과 차악의 미묘한 차이를 이해하면 우리는 더 사려 깊은 선택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포스텍 명예교수포스텍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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