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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은 세상] 리퀴드 골드, 금비
5월1일. 춥고 비가 내렸다. 이웃도시 캘거리는 눈이 온다고 했다. 그래도 캘거리보단 낫네. 다음날, 이곳에도 눈이 내렸다. 5월이란 말이다, 5월. 한국은 이미 봄꽃들이 지고 더워지기도 한다는, 봄의 절정을 지나 여름이 시작되려는 시기. 반년 가까운 긴 캐나다의 겨울을 보내고 이제야 봄 내음 겨우 느끼기 시작하는 우리에게 너무하지 않은가.프레리(prairie), 대평원이라는 영어 단어는 한국에서 태어나 자란 내게 체감하기 어려운 단어였다. 본 적이 없으니까. 지평선이란 단어처럼. 이곳에 와서 지형이 flat 평평하다는 게 뭔지, 산이라고 할 것이 보이지 않는 풍경이 낯설고 어딘가 오르막을 걷고 싶은 마음이 한 번씩 불쑥 일어날 때마다 제대로 느끼는데, 우리 주 남부는 중부인 우리 도시보다 더 flat하다고 했다. 정말 아무것도 없다고. 도대체 어떤 거지? 어디에도 눈 둘 곳 없는 평평한 지형은 내게 편안함보다는 불안함을 일으켰다, 마치 아무것도 손에 잡고 의지할 데 없이 광활한 길을 걸어가야 하는 느낌이랄까.4월 중순, 그랜드 캐니언을 다녀왔다. LA에 도착해 지인의 차를 타고 달리며 palm tree(야자수)와 초록빛 나무가 있는 산을 보며, 노스탤직하다고 말했다. 처음 유학생활을 하와이에서 시작한 내게 북미라는 대륙은 녹색 나무와 산이 있는 따뜻한 날씨로 세포 속에 기억되었나 보다. 익숙하고 반갑고 안정감을 느꼈다. 사막지역에서 북미생활을 시작한 지인은 그 주에 출장갈 때마다 고향에 온 듯 편안함을 느낀다고 했다. 며칠 전 단과대 직원과 이야기하다 이 지역 출신인 그녀가 말했다. 남부에서 자란 그녀는, 한국인 기준에는 여전히 너무 평평한 주 북부지역만 가도 불안감을 느낀다고 했다. 나무와 산은 마치 감옥에 갇힌 것 같은 느낌을 준다나. 시야에 아무것도 걸릴 것 없이 탁 트인 드넓은 대지가 안정감을 준다고. 그리고 캐나다 중서부의 대평원지대에서 자란 사람들이 좋은 선원이 된다고도 했다. 지평선과 수평선이 비슷하게 작용해서 멀미를 덜 한다나. 그리고 자신은 겨울이 더 좋다고 했다. 물론 영하 40℃ 같은 극한의 추위는 싫지만 겨울이 훨씬 더 quiet 조용하다고. 인적없는 겨울밤, 밖에 나가 걸어보면 들리는 자연의 소리들이 많다고. 그리고 농부들에게 봄비는 씨앗들이 잘 자랄 수 있게 도와주는 귀한 존재라고 했다. 지난 일요일, 또 하루종일 비가 왔다. 모임에서 누군가 내게 물었다. 봄에 비오는 거 싫냐고. 좋진 않지만 농사에는 좋다고 들었다고 했다. 반색하며 그게 서스캐처원주에 사는 태도 right attitude 라고, 농부들한테 좋으면 무조건 좋은 거라고 했다. 농부들에게 이 시기 비는 너무나 반갑고 귀해서 리퀴드 골드(금비)라고 부른다고. 삶의 얼마나 많은 것들이 이러할까? 나의 불안은 누군가에겐 안정감이기도 하고 그 반대이기도 한데, 우리는 얼마나 자주 내 불안과 불편함 때문에 제대로 보고 듣지도 않고 놓치는 경험들이 많을까? 내가 가진 고정관념을 내려놓고 지금 눈앞의 현실을 몸으로 체험해 나갈 때, 감각은 더 섬세해지고 나의 약점과 불안은 금비가 될 수도 있다.신현정 캐나다 사스카추안대 교수신현정 캐나다 사스카추안대 교수
[시선과 창] 챗GPT가 지식과 교육을 무너뜨릴까?
최근 한 대학 교수와 차담을 하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다. 요즘 학생들 대부분이 과제물 작성은 물론 공부에까지 챗GPT를 적극 활용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교수는 학생들이 인공지능(AI)에 지나치게 의존하다 보면 사고력이 떨어지는 게 아닐지 걱정이 된다 했지만, 필자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그런 걱정이 기우에 불과할지 모른다는 생각이었다.사실 이는 대학생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조사에 따르면 국내 중·고등학생들은 '대통령과 정치인보다 유튜버를 더 신뢰한다'고 한다. 최근 한 방송사에서 진행한 토론 프로그램에서도 '청년들은 박사학위를 보유한 사람보다 인플루언서에게 더 배우고 싶어 한다'는 주장이 등장했다. 이는 우리 사회 전반의 지식 체계와 권위에 대한 인식이 변화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여기에 AI라는 기술 혁신까지 가세하면서, 사회 전반에 걸친 패러다임의 대전환이 예고되고 있다.전통적인 지식의 권위가 약화되는 대신, 보다 개방적이고 수평적인 지식 생태계가 조성될 수 있다. AI계의 대모 페이페이 리(Fei-Fei Li)는 CES2024에서 AI를 '심화된 수평 기술(deepened horizontal technology)'이라 칭했는데, AI가 사회 전반에 걸쳐 광범위한 영향을 미치면서 지식의 위계가 약화되고, 다양한 주체들이 자유롭게 지식을 공유하고 토론하는 장이 열릴 것이라는 의미다. 이는 우리 사회를 보다 역동적이고 혁신적으로 변모시키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또한 AI 기술의 발전은 인간을 단순 작업에서 해방시키고, 보다 창의적이고 가치 있는 일에 매진할 수 있게 해줄 것이다. 학생들이 챗GPT를 활용하여 단순 암기나 작문에 할애하는 시간과 에너지를 절약하고, 더 높은 차원의 사고력과 문제 해결 능력을 함양하는 데 집중할 수 있게 된다면 오히려 바람직한 변화가 아닐까?변화는 언제나 두려움을 동반하지만, 동시에 새로운 기회의 싹을 품고 있기도 하다. AI 시대가 가져올 변화를 두려워하기보다는 희망의 눈으로 바라보기를 권한다. 우리가 함께 지혜를 모아 나간다면 이 거대한 변화의 물결을 따라 더 나은 미래를 향해 힘차게 전진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인류는 그런 과정을 수백 번도 넘게 반복해왔다.플라톤의 대화편 '파이드로스'에는 소크라테스가 책과 같은 텍스트를 두고 '진정한 지혜가 아닌 피상적 지식만 줄 것'이라 경계하는 장면이 나온다. 하지만 역사는 책이 인류 지성사에 끼친 기여를 증명해 왔다. 그런 소크라테스의 주장마저 플라톤의 텍스트를 통해 유통되었다는 아이러니도 재미있다. AI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우리가 어떻게 활용하고 발전시켜 나가느냐의 문제다.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러한 변화를 능동적으로 수용하고, 적극적으로 준비해 나가는 자세다. 교육계와 학계는 새로운 시대에 부합하는 인재 양성을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고, 정부와 기업은 변화에 선제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정책과 전략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우리 개개인 모두가 평생 학습자의 자세로 끊임없이 배우고 성장하려는 열정을 가져야 한다.결론적으로 챗GPT를 비롯한 AI 기술의 발전이 전통적인 지식 체계와 교육 현장에 큰 변화를 가져올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를 지식과 교육의 붕괴로 볼 필요는 없다. 우리 모두가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고 긍정적인 자세로 미래를 준비한다면, AI 시대에도 지식과 교육은 여전히 우리 사회의 희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서승완 (유메타랩 대표)서승완 (유메타랩 대표)
[정성화의 자연과 환경] 골프와 건강, 환경 및 생태계
최근 골프는 꽤 대중적인 스포츠가 되었고 당분간은 더욱 더 큰 인기를 끌 것으로 예상된다. 따라서 새로운 골프장의 건설은 물론이고 기존 골프장도 활용이 늘어날 것이므로 건강, 환경 및 생태계에의 영향을 고려할 필요성이 크다. 골프장에는 많은 양의 농약이 뿌려지고 있으며(2021년 기준 한국 213t), 최근까지도 그 양은 꾸준히 늘어나고 있다. 사용된 농약은 주변 농경지와 계곡수를 오염시키는 등 여러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 요즘 들어 가장 많이 사용되는 농약은 클로로탈로닐이며(2021년 기준 18.1t), 이것은 생태계에 미치는 영향이 크고 독성이 강하여 EU에서는 2020년부터 사용할 수 없다. 이 농약은 꿀벌 개체 수도 감소시키고 발암물질 2B군(발암 가능성 있는 물질)으로 분류된다. 최근 '신경과학저널'에 실린 연구결과에 따르면, 골프를 치는 남성은 그렇지 않은 남성에 비해 5년 후 루게릭병에 걸릴 위험이 약 3.8배 더 높은데 이는 골프장의 농약 때문인 것으로 추정되었다. 골퍼 톰 왓슨의 캐디 브루스 에드워즈는 2004년 루게릭병으로 숨졌고 그의 이름을 딴 루게릭병 치료 재단 '브루스 에드워즈 파운데이션'이 있다고 한다. 에드워즈의 루게릭병은 우연의 일치이겠지만, 골프장의 농약은 건강에 나쁜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점도 늘 신경을 써야 한다.2020년 기준으로 전국의 골프장은 하루에 평균 약 45만t의 물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하루 300t의 물을 쓴다고 비판을 받은 싸이의 흠뻑쑈를 약 1천500일간 할 수 있는 물을 하루에 뿌리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잔디밭에 물을 주기 위해 많은 지하수도 사용함으로써 주변의 농경지는 목마를 수 있다. 골프장 건설에는 축구장의 최소 100배의 매우 넓은 땅이 필요하고, 건설 시 기존 흙 대신에 모래, 마사토, 인공 흙 등을 채운 후 잔디를 심는다. 비옥한 기존 토양에는 풀과 나무가 쉽게 자라, 심은 잔디는 잘 크지 못하기 때문이다. 결국, 나무와 화초는 물론이고, 1천여 종의 생물들도 서식지를 잃게 된다. 잔디는 나무에 비해 수분 보유 능력이 1/4 정도이므로 골프장 건설 후 숲이 가지고 있는 저수지 역할이 크게 감소되어 홍수와 토양 침식도 늘어날 수 있다. 골프장에 의한 생태계 파괴가 심각하여 골프장은 '녹색사막'이라고 불릴 정도이다. 큰 의미는 없지만 지난 4월29일은 '세계 골프 없는 날'이었는데, 골프의 다양한 악영향을 고려, 하루만이라도 골프를 치지 말자는 개념에서 생겨난 기념일이다. 상당수의 현대인들이 골프를 멀리하긴 어렵겠지만 건강, 환경, 생태계를 고려한 골프, 골프장 운영 및 건설이 요구된다. 경북대 화학과 석좌교수정성화 경북대 화학과 석좌교수
[돌직구 핵직구] 다시 읽는 박정희 대통령 리더십의 요체
4·10 총선 전 우려가 총선 후에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최고 정치지도자들의 회동은 빈손으로 끝났다. 정치 안정과 협치를 바라는 국민의 바람은 외면당했다. 국민의 심판을 받은 대통령이나 반대급부로 승리를 거둔 야당도 마찬가지다. 입법부를 장악한 야당의 입법 독주는 21대 국회 마지막까지 지속되고 있다. 차기 국회에서도 여야 간의 격돌, 입법부와 행정부의 대립은 불을 보듯 뻔하다. 국정의 구석구석이 마비되고 있다. 더구나 온갖 범법자들의 등장으로 여의도는 복수와 분노의 정치가 판을 칠 것이고, 도의는 땅에 떨어지고 있다. 여야 지도자 모두 법률가 출신이지만 법치주의는 무색해지고 국정은 혼란을 거듭할 것으로 보인다. 말로만 민생을 떠들지 진작 국민의 삶은 무시당하고 있다. 윤석열 정부 출범 2주년을 맞는다. 그간의 성과와 과제를 냉엄하게 성찰하고, 다시 옷깃을 여미어야 할 때이다. 이달 말이면 22대 국회가 출발한다. 기대보다 걱정이 앞서긴 하지만 개선되기를 염원해 본다. 7·8월 여야의 새로운 지도부 선출도 앞두고 있다. 새로운 정치 재편기를 맞아 박정희 대통령의 리더십론을 다시 한번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박 대통령은 네 권의 저서를 직접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 민족의 나갈 길' '국가와 혁명과 나' '민족의 저력' '민족중흥의 길'이 그것이다. 하지만 널리 알려지지 않은 소책자 '지도자도(指導者道)'도 있다. 요즘 말로 하면 '리더십론'이다. 5·16혁명 한 달 뒤인 1961년 6월16일 발행한 책으로 최초의 저서이다. 리더십 본질에 대한 통찰과 혜안, 문제의 인식과 해결을 위한 과감한 결단과 의지, 국가와 국민을 위한 책임감이 깊이 새겨져 있다. 리더가 갖추어야 할 열 가지 자격을 제시하고 있다.첫째, 국민에 대한 동지의식이다. 권력의 원천은 국민이고, 지도자는 국민과 유리되어 존재할 수 없다. 국민에게 겸손하고 솔선수범하며 멸사봉공의 정신으로 희생해야 한다. 둘째, 건전한 판단력과 해결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지도자는 국가와 국민이 원하는 바를 파악하고,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충분한 지식과 열정적 의지가 필요하고, 우선순위에 따라 방법의 유연성이 필요하다. 셋째, 선견지명을 갖추어야 한다. 지도자는 현재의 문제를 해결할 뿐만 아니라 장래의 일을 예견하고 적절한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 먼 미래를 예상하는 것은 쉽지 않지만, 그럼에도 기본 방향과 접근 방법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태도를 가져야 한다. 넷째, 원칙에 충실한 양심적인 인물이어야 한다. 정치가로서 의무는 목표를 향하여 원칙을 세우고 관철하는 것이다. 자신에게 정직하고, 정의와 양심을 지켜야 한다. 다섯째, 민주주의를 향한 신념을 가져야 한다. 5·16혁명은 자유민주주의 기틀을 세우기 위한 목적으로 단행되었다. 국민들에게 진정한 자유와 민주 정신을 불어넣고, 국민 경제의 향상이 목표다. 이외에 여타의 리더십 덕목으로 목표에 대한 확신, 용단, 지도자 그룹의 단결, 성실과 정열, 신뢰감을 들고 있다. 60여 년 전 박 대통령이 설파한 리더십을 지금 읽어봐도 가슴 뭉클하다. 동서고금 시대와 환경에 따라 리더십 덕목의 우선 순위는 변할 수는 있어도 그 핵심은 변함이 없다. 박 대통령이 존경했던 나폴레옹의 리더십, 링컨과 간디의 리더십에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다. 정치가 혼란과 무질서로 점철되고, 공공의 윤리가 무너지고, 정치혐오증과 무관심이 난무할수록 박 대통령의 리더십론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서성교 건국대 특임교수· 전 청와대 행정관서성교 건국대 특임교수·전 청와대 행정관
[이진우의 시대정신] '능력주의'라는 이름의 불공정
사회적 갈등이 극단적으로 표출될 때 종종 사회의 치부와 모순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것이 가족이든 집단이든 국가이든 갈등이 합리적으로 조정되는 곳에서는 문제점이 분명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우리의 심장이 늘 뛰고 있음에도 건강할 때는 그 소리를 듣지 못한다면,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의 심장 소리가 들리는 건 뭔가 잘못되었다는 병적 증후일 수 있다. 의대 정원 증원을 둘러싼 정부와 의료계의 대치로 해결될 기미 없이 계속되는 의료사태는 우리 사회의 병리적 증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의사들의 집단 휴직과 사직으로 의료 현장이 심각하게 훼손되어 환자들의 생명과 건강이 위태로워지고 있음에도 이해관계의 갈등은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작금의 의료사태는 어떤 식으로든 해결될 것이다. 근본적 원인은 해결하지 않은 채 봉합의 수준으로 해결될 수도 있고, 곪아 터진 문제를 해결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이 걸릴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중요하고 긴박한 문제가 있다. 우리 사회는 지금 도덕의 총체적 붕괴에 직면해 있다. 이제까지 사회를 떠받쳤던 전통적 규범이 해체된 자리에는 적나라한 '이기주의' '생존주의'와 '능력주의'의 잡풀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모든 사람이 지켜야 할 최소한의 도덕 규범인 상식은 통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이 생존과 자기 이익의 증대를 위해 싸우면서도, 그들은 자신의 이기주의를 종종 공정과 공평이라는 이름으로 치장한다. 지난 몇 년간 폭발적으로 증가한 공정 담론에도 공정에 대한 사회적 의식이 높아지지 않은 이유이다.내가 의료사태를 바라보면서 가장 우려하는 것은 바로 도덕 자체를 경시하고 소홀히 하는 태도이다. 도덕이 밥 먹여 주나. 자신의 밥그릇은 스스로 챙겨야 한다. 이런 물질주의적 이기주의가 우리 사회를 관통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공정한 것처럼 보이는 '능력주의'는 이러한 정서를 교묘하게 부추긴다. 좋은 수저를 얻기 위해 경쟁해야 할 대상이 많아질수록 사회는 더 분열되고 더 폐쇄적으로 변한다. '따로, 그렇지만 함께'라는 구호가 공허하게 들릴수록 상호 간 책임을 실천하고 공통의 희생을 감수하며 나아가는 공동체의 모습은 사라진다.이러한 병리적 증상은 뉴진스 창시자 민희진 어도어 대표를 겨냥한 전 대한의사협회 회장의 발언에서 엿볼 수 있다. 막말과 비속어를 사용하는 "저런 사람들이 노력을 통해 돈을 버는 것은 괜찮은가?"라는 질문에는 능력주의의 핵심이 들어 있다. "뭐, 그건 괜찮다. 성공에 이르는 길은 다양하니까"라는 말이 다양성의 인정과 존중으로 들리지 않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의 속내는 다음의 말에 그대로 들어 있다. "남보다 많은 노력을 했을 때, 사람들의 존경 또는 존중을 받고 경제적으로도 좋은 대우를 받는 소위 '좋은 직업'이라는 것이 존재해야 그런 직업인이 되기 위해 사람들이 노력하는 세상이 유지된다." 의사는 좋은 직업이기 때문에 인생의 황금기를 공부하느라 바치고 평생을 공부하며 가족과 놀아줄 시간까지 바쳐가며 희생하였다는 것이다.의사가 좋은 직업이기는 하다는 이 말에는 다른 직업에 대한 상대적 평가가 들어 있으며, "의사가 돈을 벌어야 한다는 주장은 아니라는" 말은 능력에 따라 적어도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벌어야 한다는 천박한 능력주의를 솔직하게 보여준다. 의사와 법률 전문가가 현대사회에 남아 있는 유일한 귀족 신분이라는 분석처럼, 의사는 물질적 보상과 사회적 존중 그리고 명예를 마땅히 받아야 하는 좋은 직업인가 보다. 능력이 있고 노력만 하면 좋은 직업을 얻을 수 있고, 좋은 직업은 물질적 부를 보장한다. 능력만 있으면 누구나 자기 운명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천박한 능력주의는 공정과 공평을 파괴하고, 공동체를 훼손한다.어처구니없는, 그렇지만 속내를 드러낸 전 대한의사협회 회장의 말은 '개미와 베짱이'라는 이솝 우화를 떠올리게 만든다. 겨울을 대비해 음식을 모으는 개미와 따뜻한 계절 동안 노래를 부르며 시간을 보낸 베짱이에 관한 이야기는 미래를 위해 계획하고 열심히 일하라는 교훈을 담고 있다. 겨울이 오자 베짱이는 굶주림에 시달리다 개미를 찾아가 도움을 청하지만, 개미는 베짱이의 게으름을 비난하며 도움을 거절한다. "더운 여름 동안에는 뭘 했니?"라는 물음에 "밤낮으로 노래만 불렀지"라고 베짱이가 대답하자, 개미는 베짱이를 비웃으며 이렇게 말한다. "여름에 노래를 불렀으니 겨울에는 춤을 추면 되겠구나!" 이 말에는 약자와 가난한 자에 대한 일말의 동정도 들어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능력주의의 오만함이 짙게 묻어난다.사회는 능력과 재능이 다양한 사람들로 구성된다. 개미로만 구성된 사회를 상상해 보라. 일과 노동이 본성처럼 굳어져 죽어라 일하는 개미들은 노예의 삶이다. 그곳에는 오직 무자비한 생존의 법칙이 지배한다. 태어나자마자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하는 건 오직 자기 자신과 가족의 생존 때문이다. 과다한 노동과 성과는 이들을 자기 착취로까지 내몬다. 스스로 열심히 일하는 것은 착취가 아니라 오히려 자유라는 착각 때문에 이들은 더 열심히 일한다. 착취를 하는 사람도 자신이고 착취를 당하는 사람도 자신이면, 착취는 자유로 둔갑한다. 내가 열심히 일했으니 내가 누리는 부와 지위, 자유는 마땅히 받아야 할 사회적 보상이기 때문이다. 베짱이에 대한 개미의 주장은 정말 공정한가? 베짱이가 담당하는 음악과 예술은 정말 사회적으로 쓸모없는 무용하고 무의미한 활동인가? 베짱이의 아름다운 음악이 없었다면 이들의 노동은 더 견딜 수 없지 않았을까? 우리는 연예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딴따라로 낮잡아 부르는 경향이 있지만, 노래와 춤이 개미가 생각하는 것처럼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좋은 베짱이가 되려면 타고난 재능이 있어야 하고, 피나는 노력이 뒤따라야 하고, 행운도 도와줘야 한다. 베짱이가 연예계에 진출하여 자신이 작곡하고 노래한 음반이 초대박을 맞아 엄청난 부를 얻을 수도 있지만, 재능과 노력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사실 경쟁이 일상화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나만 재능이 있고 열심히 일한다고 주장할 수 있는 분야는 한 곳도 없다. 우리 사회를 구성하는 다양한 분야에서 종사하는 사람들의 다양한 활동이 합리적으로 조화를 이룰 때 우리는 비로소 '공정 사회'를 말할 수 있다.포스텍 명예교수포스텍 명예교수
[3040칼럼] 나의 작은 거인에게
어린이들이 올바르고 슬기로우며 씩씩하게 자라도록 하고, 어린이에 대한 애호사상을 앙양하기 위해 제정한 날이 어린이날이다. 여기에 어린 자녀를 키우는 부모라든가, 어린이와 관련한 일을 하는 사람만 해당한다는 내용은 없다. 어린이날이 법정공휴일로 지정된 것에는 누구나 어린이날의 뜻을 기리고 그 의미를 기억하며 노력하자는 의미가 담긴 것일 테다.지난 5월5일, 주변의 어린이와 시간을 보낸 사람도 있을 것이고 여느 휴일처럼 보낸 사람도 있을 것이다. 다시 어린 시절로 되돌아갈 수는 없지만 열린 감각으로 온 세계를 수용했던, 어른과는 다른 시선과 상상의 폭을 지닌 감수성을 일깨우는 방법이 있다면 바로 아동문학을 읽는 것이 될 수 있다. 동시를 읽고 공부하며 깨진 편견 중 하나는 동시는 쉽고 단순하며 주로 의성어와 의태어로 이루어진, 언어에 대한 감각을 깨우치는 정도로만 생각했다는 것이다. 물론 어린이도 읽을 수 있을 만큼 어렵지 않은 단어 사용과 단순한 구조는 동시라는 장르가 지닌 하나의 장점이다. 하지만 성인이 되어 새롭게 만난 동시들은 어린이도 읽을 수 있는 시, 내면을 건드리고 몰랐던 곳을 가보게 하는, 멀리 그리고 깊은 곳까지 나아가게 하는 시였다. 웹진이나 메일링 서비스 등 문학이 독자에게 다양한 플랫폼을 통해 다가가는 시대인 만큼 카카오톡 채널을 통해 매주 미발표 신작 동시를 배달하는 레터링 서비스가 있다. 바로 동시전문잡지 '동시마중'을 만들어가는 편집인 이안 시인이 2023년 1월 창간한 '블랙'이다. 독자들의 후원금으로 만들어가는 '블랙'은 카카오톡 채널을 구독하면 누구나 무료로 받아볼 수 있다.5월5일 기준 75호까지 발행된 '블랙'은 동시를 소개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작품을 발표한 시인들 중 12인의 동시 60편을 모아 동시 선집 '나의 작은 거인에게'를 출판사 상상에서 출간했다. 현재 동시단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열두 명의 시인은 대부분 아직 첫 시집을 출간하지 않은 신인으로, 시인에게도 독자에게도 귀한 지면이다. 각자가 가진 고유성과 더불어 그들이 접속하는 어린이들과 현장이 담긴 동시들을 다채롭게 만날 수 있다. "동그라미/ 동그으라미/ 크기가 달라도// (중략) 시작은 언제나/ 한 발로/ 땅을 찔러 딛는 일// 다른 발을 뻗을 때/ 쓰러지지 않도록// 기우뚱 서 있는/ 한 발을/ 믿어 주는 일" 동시 선집에 수록된 김기은 시인의 '컴퍼스'는 미숙했던 처음의 시간을 떠올리게 한다. 위태롭고 기우뚱한 한 발은 어른이 된 지금까지도 종종 맞닥뜨린다. 그러나 자신 있게 발을 뻗을 수 있는 이유는 딛고 설 수 있도록 어른의 자리에서 마련해 놓은 '땅'이 선행되어 있기 때문이며 한 발이 한 발을, 서로가 지탱해주는 믿음 때문이다.자라면서 잊거나 사라져간 시절과 이야기가 복원될 때 편협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어린이의 세계가 넓고 깊게 확장되면서 나와 세계를 새롭게 인식할 수 있다. 주변의 어린이와 내 안의 어린이는 너무나 작은 존재지만 거인처럼 존재감이 크다. 나의 작은 거인에게 말 걸며 귀를 기울인다면 우리는 나날이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제각기 다른 열매를 맺어갈 씨앗을. 그 작은 씨앗이 제 몸집보다 큰 열매를 맺는 놀라운 경이를.김정애 전 독립문예지 '영향력' 발행인김정애 전 독립문예지 '영향력' 발행인
[안도현의 그단새] 흰목물떼새 부부의 봄
나는 내성천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산다. 내성천에는 작년 여름 몇 차례 큰물이 지나갔다. 강바닥을 뒤덮고 있던 버드나무들이 뿌리째 뽑혀 쓰러진 모습이 곳곳에 보인다. 영주댐 건설 이후 처참하게 변한 강의 생태계를 하늘이 안타깝게 여긴 것일까. 내성천의 모래톱 일부가 작년 여름 이후 눈에 띄게 살아나고 있는 건 불행 중 다행이다. 사람이 망가뜨린 강을 회복시키려고 보다 못해 자연이 팔 걷고 나선 듯하다.내가 산책하는 내성천 물길을 따라 고(故) 채수근 상병이 떠내려갔다. 작년 7월17일 윤석열 대통령이 예천 수해 현장을 방문했고, 18일 해병대 1사단은 실종 주민 수색을 위해 장병들을 예천 내성천에 투입했다. 아내는 빨간색 상의에다 전투복 하의를 입은 해병대 병사들이 강둑으로 걸어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19일 보문교 아래에서 안타깝게 목숨을 잃은 채 상병도 거기에 있었을 것이다. 그 이후 내성천 산책길은 채 상병의 죽음을 생각하는 길이 되었다.4월 중순, 멀리 전주에서 온 후배들과 물가를 걷다가 네 개의 새알을 발견했다. 모래톱 강바닥 일부에 자갈이 깔린 곳이었다. 자갈 틈에 튼 둥지라 하마터면 밟고 지나갈 뻔했다. 푸른 기운이 감도는 회색빛 알은 점점이 자잘한 점무늬가 찍혀 있었다. 말로만 듣던 흰목물떼새의 알이었다. 흰목물떼새는 멸종위기 2급 보호종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내성천의 깃대종이다. 깃대종이란 특정한 지역의 생태계를 상징적으로 대표하는 동식물을 말한다, 어미새 몸의 길이는 20㎝가 조금 넘는다.아닌 게 아니라 우리가 둥지를 바라보는 동안 허공에서 어미가 허공 10m쯤의 높이에서 원을 그리며 다급하게 울었다. 강변에 불현듯 나타난 우리 일행을 경계하는 소리였다. 그것을 알 속의 새끼들에게 엄마가 여기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신호이기도 할 것이다. 알을 낳은 후 28일 동안 포란을 한다는 흰목물떼새, 사촌 동생이 어릴 적에 강변을 돌아다니며 줍기도 했다는 흰목물떼새, 목에 가늘디가는 흰색 머플러를 두른 흰목물떼새.흰목물떼새와 꼬마물떼새 알은 구별이 어렵다고 한다. 내성천 생태사진가 박용훈 선생에게 물었다. "꼬마물떼새는 무늬가 볼펜 똥 무늬와 비슷한데 사진으로 봐서는 흰목물떼새 같습니다. 비가 올 때 모래톱에 사람이 들어가면 어미들이 둥지를 떠날 수도 있어요. 알이 비에 젖으면 부화에 성공할 확률이 낮아집니다. 한번 보셨으면 가급적 들어가지 말고 떨어져서 스코프 등으로 관찰하는 것이 좋습니다. 둥지를 자꾸 찾으면 천적들에게 노출될 가능성이 높아서 새끼가 나온 후 천적에게 공격당할 수도 있습니다."나는 박 선생의 경고를 듣지 않고 몇 번 더 알을 보러 갔다.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원래의 둥지에서 멀지 않은 곳에 또 하나의 둥지를 발견했다. 이번에는 자갈밭이 아니라 모래톱 위였다. 아, 4월에는 강바닥으로 들어가지 않는 게 흰목물떼새를 돕는 일이구나. 그때 새끼에게 위험이 닥쳤다는 걸 감지한 새 한 마리가 종종걸음으로 둥지와는 엉뚱한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내가 그 걸음을 따라가다 멈추면 새도 걸음을 멈추고, 내가 둥지에서부터 70m쯤 밖으로 벗어났을 때쯤 재빨리 방향을 바꾸어 알 쪽으로 날아가는 것이었다. 흰목물떼새 수컷인지도 몰랐다.그단새 5월이다. 흰목물떼새 부부가 부화에 성공할 때까지 나는 내성천에 가지 않고 멀리서 바라보기만 해야겠다.단국대 문예창작과 교수·시인단국대 문예창작과 교수·시인
[단체장의 생각:長考] 지역은 무엇으로 사는가?
세계적 대문호 톨스토이는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명작을 내놓았다. 때는 1885년, 약육강식의 논리로 제국주의가 발전하던 시기에 던진 질문이었다. 그로부터 139년이 지난 오늘날 대한민국은 또 다른 의미의 약육강식이 지배하고 있다. 정치·경제·문화가 집중된 수도권은 강력한 흡입력으로 인구와 재원을 빨아들이고, 지역은 인구감소와 고령화로 큰 위기를 맞고 있다. 인구는 자치단체의 골격을 유지하며 정책을 펼치는 최소 기반이다. 적정 수의 사람이 살아야 대중교통 시스템이 작동하고 학교와 병원이 운영되며, 고장 난 공간도 수리할 수 있다. 지역의 입장에선 인구감소야말로 하늘이 무너지는 일이다. 하지만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을 만들어야 하기에, 이 질문의 답을 찾아야 한다. "지역은 무엇으로 사는가?"지역을 살리는 힘은, 한계를 설정하지 않은 도전에서 나온다. 영천시는 인구 유출의 원인으로 꼽히는 일자리 문제를 획기적으로 개선하고자 거침없이 도전해 왔다. 그 결과 지난해 금융시장의 악재와 불안정한 투자환경 속에서도 경제자유구역인 하이테크파크지구에 2천여억 원의 투자유치를 이끌어냈다. 글로벌 자동차부품 전문 생산기업 ㈜화신이 800억원의 투자와 120여 명의 신규 고용을 약속했고 국내 굴지의 물류회사 로젠㈜은 1천259억원을 투입해 영남권 물류단지를 조성, 900여 개의 일자리를 창출하기로 했다. 앞으로 금호·도남·대창·고경 등에도 일반산업단지를 조성해 하이테크파크지구와 함께 영천의 신(新)산업지도를 완성해 나갈 것이다.불가능한 도전도 영천이 하면 현실이 된다. 영천시민들이 염원해온 대구도시철도 1호선 영천 연장사업이 예비타당성 조사 대상이 된 지 1년 만에 그리고 타당성 조사 용역에 착수한 지는 5년 만에 예타를 통과했다. 이는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했던 일을 영천시가 기필코 이뤄낸 '기적' 같은 것이었다. 대구도시철도 1호선이 연장되면 대구 근교 근로자들의 출·퇴근이 가능하게 돼 지역 기업의 인력난 해소와 일자리 창출, 정주여건 개선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또 올해 개통할 금호·대창 하이패스IC, 2026년 개장 예정인 국내 최대 규모의 영천경마공원 등 기존 역점사업과도 연계해 시너지를 낼 것이다. 영천의 도전은 네버엔딩이다. 영천시는 2년 전 대구 군부대 유치전에 뛰어들었다. 영천호국원, 육군3사관학교 등 다수의 호국시설이 위치하고 임란 영천성 수복전투, 6·25 영천대첩 등 국난극복 DNA가 내재된 '호국의 도시'로서 당연한 도전이다. 시민 중심으로 결성된 대구 군부대 유치 추진위원회는 팔공산 기원법회, 호국학술심포지엄, 10만 서명운동 등 다양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이러한 시민들의 강력한 염원으로 대구 군부대 영천 유치를 반드시 이뤄낼 것이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자문에 톨스토이가 찾은 답은 '사랑'이었다. '지역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고민 속에 무수한 도전을 이어오며 우리가 찾은 답은 '사람'이다. 지방소멸을 막으려고 지자체마다 경쟁적으로 인구 늘리기에 몰두하고 있다. 하지만 인구문제를 숫자의 관점으로 푼다면 해법은 없다. 인구문제는 사람과 삶의 관점에서 매달려야 한다. '인구 늘리기'는 목표가 아니라 결과가 되어야 한다. 영천시의 지칠 줄 모르는 도전들이 영천 사람들의 삶을 더욱 풍요롭고 여유롭게 만든다면 그 결과로 '인구감소'도 '지역소멸'도 해법을 찾을 것이라고 믿는다. 작지만 행복한 도시, 영천시가 전국 시구 단위 합계출산율 최상위권을 기록하고 있는 것처럼! 최기문 영천시장최기문 영천시장
[단상지대] 22대 국회에 바란다
한국YWCA는 지난 4월30일 정의, 평화, 생명의 가치를 담은 정책으로 국민의 뜻에 부합하는 정치를 실현하기를 촉구하는 목소리를 내었는데 여기에 간략하게 소개하고자 한다.제22대 국회가 새로운 출발을 앞두고 있다. 선거는 현 정치에 대한 평가인 동시에 새 시대를 향한 요구다. 향후 4년의 임기를 부여받은 국회는 국민의 뜻에 따라 정의로운 화해와 협력, 그리고 상생하는 개혁과 통섭의 정치를 해나가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이번 선거 과정을 통해 오랜 시간 동안 쌓여온 우리 사회의 차별과 배제, 혐오와 분열, 그리고 민주주의 퇴행의 편린들을 뼈아프게 경험하였다. 분노와 절망, 갈등과 적대가 사회 곳곳에 깊이 배어 있지만 해결을 위한 대책은 미약하고, 선거조차도 정책과 공약에 기반하기보다는 비방과 폭로, 인신공격 위주의 선거가 당연시되어왔다. 오는 5월30일 새롭게 시작하는 22대 국회는 정의·평화·생명의 가치를 담은 정책으로, 여성과 약자를 위한 정치, 사회적 정의가 우선되는 정치, 지속 가능한 사회를 위해 실효성 있는 정책이 구현되는 정치를 실행해야 할 것이다.우리는 성평등 관점의 기후 대응과 탈핵·에너지 전환 체계의 구축을 촉구한다. 이번 총선에 등장한 '기후정치'는 한국 사회가 국제사회에 공표한 2030 온실가스 감축목표 성과 달성에 박차를 가해야 하는 중요한 시기임을 일깨워줬다. 탈석탄법 제정과 태양광 보급 확대 정책, 영농형 태양광 특별법 제정, 그리고 에너지 복지정책 확대를 통해 정의로운 에너지 전환에 힘써야 한다. 우리는 성평등 정책의 실효성을 제고할 것을 촉구한다. 22대 여성 국회의원 비율은 지역구 36명, 비례대표 24명 총 60명으로 20%에 불과하며, 후보자 비율에서는 여성과 청년 등이 지난 21대 국회에 비해 오히려 축소되었다. 공직 및 모든 정부 정책에 여성의 동등 참여, 공직선거와 정당 공천의 특정 성 60% 초과 금지 등 여성 대표성 확대를 위한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모두가 일하기 좋은 사회를 위해 성평등 한 노동 환경을 조성하고 일자리를 개선해야 한다. 무엇보다 여성이 안전한 사회를 위해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 지원 정책을 확대하고 성범죄 예방과 대응 교육을 강화하는 등 관련 법 개정에 힘써야 하며, 성평등 의식과 문화 확산을 위한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 아울러 22대 국회의원들의 성인지 감수성을 높이고 이 사회에 만연한 여성혐오 극복을 위해 필요한 정책과 법안을 구체적으로 다룰 것을 요구한다.우리는 평화문화 확산과 한반도 평화 체제의 구축을 촉구한다. 남북 핫라인 개설을 통해 관계 회복을 모색하고, 공격적 무기 개발과 도입에 집중되어 있는 국방예산을 민생 복지와 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비용으로 전환해야 한다. 또한 평화 통일 정책 기구를 비롯한 평화 구축 과정에 여성의 보호와 참여를 확대하고, 일본군 성노예 및 강제동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평화 문화 확산을 위해 청소년과 청년 세대, 공직자들의 평화교육, 일반 시민들의 평화적 담론의 장 등 사회 각 분야에서 인권과 평등, 민주주의 관점을 통합한 평화교육이 필수적이다. 더불어 북향 여성들을 위한 통합적인 지원과 요구를 반영한 지원 시스템이 확충되어야 한다.전국 50개 지역의 YWCA는 이러한 정책들이 구체적으로 실행되어 국민들의 삶과 사회의 변화가 이루어지는 날까지 YWCA는 함께 행동하며 나아갈 것이다. 최윤정 (대구YWCA 사무총장)최윤정 (대구YWCA 사무총장)
[아침을 열며] 잘 아는 사람의 낯선 행동을 마주하게 되면
평소에 잘 알고 지내던 사람의 낯선 행동을 마주하는 순간이 있다. 조금 전까지 편하게 대해주던 사람이 사나운 모습으로 나오면 당혹스럽다. 사람 그렇게 안 봤는데 의외라는 생각이 든다. 낮과 밤이 다른 사람도 드물지 않다. 사적인 자리에서 하는 말과 행동이 공적인 자리에서 하는 말이나 행동과 크게 달라서 술자리라도 마주하게 되면 주변 사람들을 바짝 긴장하게 만든다. 벼락출세하거나 큰 부를 쌓은 사람이 뽐내거나 잘난 척이 지나쳐 친구나 동료를 대하는 태도가 종래와 달라지면 손가락질과 눈총을 받는다.사람들은 저마다 나름대로 통합된 개성과 일관성을 가진 존재이다. 사람들이 누군가를 만날 때는 가능하면 상대방의 겉모습과 인상을 살피고 그 사람의 말과 행동을 지켜보며 성격을 파악하려고도 한다. 이러한 일련의 상호작용 과정을 통해 사람들은 상대방에 대해 일정한 이미지를 형성한다. 남들이 나를 보는 이미지나 남이 나를 보는 이미지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만들고 지속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서로 당연시하고 기대하는 행동이 있다. 사람들은 시간과 장소가 달라져도 일관성 있게 행동할 것으로 기대된다.착한 사람은 시간과 장소가 달라지고 상황이 변해도 응당 착하게 행동할 것으로 기대한다. 착하던 사람이 어쩌다 실수로라도 나쁜 행동을 하면 사람들이 당황하게 되고 선뜻 이해하지도 용납하지도 않으려 한다. 반면 나쁜 사람이 나쁜 행동을 할라치면 그냥 그러거니 하며 쉽게 받아들인다. 나쁜 사람은 나쁜 행동을 하는 것이 자연스럽고 어쩌다 하는 착한 행동이 오히려 이상하게 여겨진다. 학창 시절 불량 학생이 간혹 반듯한 자세로 공부하는 각오라도 다질라치면 다들 왜 그러느냐 묻거나 무슨 꿍꿍이가 있다고 의심한다.우리는 누구든 사회 내에서 다양한 지위를 가지고 살아간다. 가정에서는 남편과 아버지로, 학교에서는 학생이나 선생님으로, 회사에서는 과장이나 부장으로, 친구들과는 친구로서 살아간다. 사회적 위치와 저마다의 상황에 따라 기대되는 모습과 행동이 있다. 얼핏 생각하면 이런 지위에 따라 기대되는 역할을 하면 될 듯하다. 하지만 다양한 지위와 역할이 좀처럼 통일성을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합리적이고 냉정한 직장인이 가정에서는 자상하고 너그러운 부모이기도 하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일관성을 유지하지 못할 수도 있다.우리 사회가 100년이 안 되는 짧은 동안 성큼 선진국으로 발전하였다. 지금처럼 고도로 분업화된 사회에서 사람들이 수행하는 역할은 예전에 비해 비교할 수 없이 복잡하고 다양하다. 사람들이 수행하는 복잡한 지위와 역할에서 일관성과 통일성을 유지하기 한층 어렵게 되었다. 개인적으로도 나이가 들고 연륜이 쌓이며 사회적 성취가 축적되면 저마다 감당할 지위와 역할이 다양하고 복잡해진다. 사람들이 일정한 성취를 이루고 나면 새로운 지위와 역할이 생겨난다. 전과 후의 행동이 달라지는 것은 한편으로 불가피한 일이다.동서양을 막론하고 신화 속에는 머리가 여럿 달린 존재가 등장한다. 생각해보면 우리네의 말과 행동은 이런 다면적인 모습에 더 가깝다. 머리가 여럿 달린 모습이 더 자연스러운 인간의 본성일 수 있다. 사회 지도층이 사적인 일로 비난받고 공적인 지위에서 물러나는 일이 잦다. 한 번쯤은 깊이 생각해볼 일이다. 공인이라고 공적인 지위와 역할만 하는 것은 아니다. 사적인 일을 공적인 일과 분리하여 이해하고 사적 영역에서의 일은 엄격히 사적인 일로 받아들이며 너그럽게 포용하는 한층 열린 사회를 기대해본다.박순진 대구대 총장박순진 대구대 총장
[박재열의 외신 톺아보기] 청정수소
세계는 화석연료를 대체할, 즉 탄소배출 없는 연료를 찾아왔다. 수소를 연소시켜 에너지를 얻으면 연소시킬 땐 탄소배출은 없다. 그러나 수소를 생산할 때 탄소가 배출된다. 대부분의 수소는 석유화학공정이나 제철과정, 또는 천연가스 분해 때 나온 것으로 많은 탄소를 배출한 뒤 얻은 것이다. 그러면 물을 전기분해하여 수소를 얻으면 되지 않을까? 그러나 전기분해에 쓴 전기가 탄소 배출하여 만든 것이라면 그것 또한 청정한 연료가 될 수 없다. 오직 바람이나 태양광에서 나온 전기로 물을 분해한 것만 청정수소라 할 수 있다. 문제는 이렇게 만든 수소의 가격이 킬로그램 당 4~6달러여서 천연가스로 만든 것보다 2~3배 비싼 점이다. 따라서 이 수소는 전체 수소 생산량의 5%밖에 되지 않는다. 바이든 정부가 이 청정수소를 생산하면 세금감면으로 그 가격 차를 좁혀주겠다고 했다.수소로 차량은 물론이고 철강공장 같은 중공업까지 돌릴 수 있다. 지난 10년간 많은 회사가 경쟁적으로 물을 전기분해하는 기계 즉 '수전해조' 개발에 나섰다. 그 선두에 독일의 '티센크루프 누세라'가 있는데 유럽 최대 철강회사 티센크루프의 자회사다. 이 회사 뒤에는 든든한 독일정부가 있어 그 정부로부터 140억 달러의 투자를 약속받아 놓은 상태다. 독일은 2045년까지 탄소중립을 목표로 한 터라 이런 투자에 돈을 아끼지 않는다. 셸이나 사우디 정부가 이 회사에서 기존의 것보다 더 큰 수전해조를 사 갔다. 사우디의 경우 '네옴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세계에서 가장 큰 전기분해 공장을 지었다. 사막의 태양광에서 얻은 깨끗한 전기로 물을 분해한 그 청정수소는 장차 수출할 계획이다. 경북대 명예교수·시인박재열 (경북대 명예교수·시인)
[성현 생각] 온기장이
차디찬 세상에도 기꺼이 자신의 온기를 나누는 사람들이 있다. 많은 비가 내리던 날, 한 여성이 자그마한 우산을 폐지 줍던 어느 노인의 머리 위로 씌워주던 장면이 인터넷에 공개되며 크게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자신의 어깨가 비에 젖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대부분의 사람들이 외면했을 노인에게 전해진 그의 온기는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울림을 주었다. 온전한 기쁨을 나누는 온기장이가 우리가 사는 세상을 따뜻하게 만든다. 도성현〈blog.naver.com/superdos〉
[주진오의 한국현재사] 청년 이승만, 어떻게 지도자로 성장했나
최근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에 대한 논란이 다시 일어나고 있습니다. 서울에 기념관을 건립하겠다고 하며, 그를 다룬 다큐 영화가 상영되었지요. 물론 민주주의 사회에서 얼마든지 인물에 대한 평가는 다양할 수 있지만, 반드시 역사적 사실에 입각해야만 하겠지요. 우선 몰락양반 가문의 청년이 어떻게 민족 지도자로 부각되었는지부터 살펴보겠습니다. 미국인 선교사가 세운 배재학당의 학생이었던 이승만은 1898년 3월 독립협회가 그를 만민공동회의 연사로 내세움으로써 급속하게 청년 지도자로 부각되었습니다. 곧 중추원 의관에 임명되었으나, 1899년 1월 박영효 역모사건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체포되었어요. 그러나 증거는 불충분했고 미국공사의 석방 요청도 있어 풀려나올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무모하게도 동료들을 따라 탈옥을 시도했다가 실패했습니다. 재판을 받고 종신징역형을 받았는데, 죄목은 역모죄가 아니라 탈옥미수죄였어요. 하지만 그해 말에 10년으로 감형되었고, 결국 5년 7개월이라는 기간을 죄수로 갇혀 있었어요. 그는 미국인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파격적인 대우를 받으며 감옥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도서관과 학교를 운영하였으며 '제국신문'을 비롯한 언론매체에 기고를 했어요. 원고 집필과 번역서 발간도 가능하여 그의 대표저작으로 손꼽히는 '독립정신'도 이때 작성한 것입니다. 감옥은 오히려 그에게 활동공간을 넓히는 역할을 했어요.이승만은 출옥한 지 몇 달 지난 1904년 8월에 미국으로 떠났습니다. 민영환과 한규설에 의해, 미국 정부에 거중조정을 요청하는 밀사의 자격으로 파견된 것이었지요. 그는 조선주재 미국공사을 지낸 딘스모어 의원의 주선으로 존 헤이 국무장관을 면담했습니다. 하지만 어떠한 구체적인 답변도 듣지 못한 채 밀사의 임무를 끝냈어요. 그리고 미국에 남아 유학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윤병구 목사와 함께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나서 대한제국 문제에 개입해 달라는 청원서를 내밀었어요. 루스벨트는 주미 공사관을 통해 공식적으로 제출하라고 했지만, 이는 외교적 제스처에 불과했습니다. 그는 이미 일본의 조선 지배를 묵인하는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승인한 상태였지요. 결과와 관계없이 미국의 대통령을 직접 면담했다는 것은, 그의 명성을 높이는데 크게 기여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뉴욕 타임스에도 두 차례나 보도되었고, 당시 미국에서 활동하던 박장현은 이 사실을 '황성신문'에 기고하여, 이승만을 "한국 인민의 대표자요 독립주권의 보존자요 애국열성의 의기남자요 청년지사"라고 높이 평가하였어요. 그런데 1908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장인환과 전명운 의사가 대한제국의 외교고문이었던 친일파 미국인 스티븐스를 처단하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이때 교민사회는 대대적으로 모금을 하여 유학생이던 그에게 법정 통역을 요청했어요. 그러나 이승만은 "예수교인의 신분으로 살인재판의 통역을 원하지 않는다"고 거절했습니다. 이승만이 생각한 것은 기독교와 미국에 의지한 외교를 통한 독립이었습니다. 그에게 의병항쟁과 의열투쟁은 부질없는 행동이었습니다. 하지만 미국에서 박사까지 했다는 학력과 미국의 고위층과도 소통했다는 경력은 높이 평가되었지요. 3·1운동 이후 여러 지역에서 발표된 임시정부 수립안에 집정관 총재 또는 국무총리로 이름을 올릴 수 있었던 이유였습니다. 상명대 역사콘텐츠 학과 명예교수상명대 역사콘텐츠 학과 명예교수
[하재근의 시대공감] 중국몽, 이런 식으로 가능할까
최근 걸그룹 아이브의 신곡 '해야' 뮤직비디오에 대해 논란이 터졌다. 중국의 일부 누리꾼들이 비난하고 나섰다는 것이다. '해야' 뮤직비디오를 공개하면서 멤버 안유진은 "저희가 한국풍으로 뮤비도 찍고 의상도 준비했다"고 설명했다. 영상 속 그림을 그린 박지은 작가는 "'해야'의 공식 콘셉트는 한국의 아름다움과 해를 사랑한 호랑이"라며 "한지 위에 전통재료로 그린 그림"이라고 했다.뮤직비디오 속에선 곰방대, 저고리, 부채, 노리개 매듭, 동양화 이미지 등이 전통적인 동양 느낌을 전달한다. 이에 대해 중국의 일부 누리꾼들은 그 이미지들이 중국의 문화라며 아이브 SNS에 "뮤직비디오 전체가 중국 문화로 가득 차 있다" "중국의 의존국가가 되고 싶나" "동양화가 아니라 중국화" "문화를 도둑질했다" 등 비난을 퍼부었다. 심지어 뮤직비디오에 그림을 제공한 작가 SNS에도 "부끄러운 줄 알아라" 등 악성댓글이 쏟아졌다고 한다.한국 측에서 중국 전통과 조금이라도 비슷한 표현을 했을 때 중국 누리꾼들이 공분하는 현상이 반복되고 있다. 2022년엔 아이브의 장원영이 파리 패션위크에 봉황 비녀를 꽂고 참석했는데, 그때도 중국 일부 누리꾼이 봉황 비녀가 중국 양식이라며 '한국의 문화 도둑질'을 비난했었다.이런 식이면 한국 전통문화의 상당 부분이 그들에게 문화 도둑질로 규정될 수밖에 없다. 중국 문화는 단순히 한 나라의 고립된 문화가 아니라 전통시대의 동아시아 국제문화였다. 그래서 중국을 제국이라고 하는 것이다. 특히 한국은 중국과 매우 밀접했다. 당연히 한국 전통문화 중에서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이 많고, 같은 문화권이다 보니 비슷해 보이는 것도 많다. 이 모든 전통문화가 다 중국만의 것이다?중국의 영향을 받았거나 비슷하다는 이유로 중국만의 것이라고 규정하는 건 억지다. 그 나라의 역사에 실제로 있었던 문화는 모두 그 나라의 전통문화라고 할 수 있다. 전통문화인데 형성과정에서 어느 나라의 영향을 받았다고는 할 수 있어도, 전통문화가 아니라고 할 수는 없다. 중국의 일부 누리꾼들이 김치나 조선식 한복을 중국 것이라고 하는 게 잘못된 주장인 건, 김치나 조선식 한복이 중국 역사에 아예 없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동양화, 부채, 곰방대 등은 한국 역사에 엄연히 존재했던 우리네 문화였다.로마, 피렌체 르네상스 문화를 차용했다고 해서 이탈리아인들이 타국인을 문화 도둑이라고 하지 않는다. 한국 가수가 록, R&B, 힙합, 포크송을 부른다고 미국인들이 한국인을 문화 도둑이라고 하지 않는다. 미국 문화 중에 유럽에서 기원한 것들이 있는데, 그렇다고 유럽 각국인들이 미국을 문화 도둑이라고 하지도 않는다. 반면에 일부 중국 누리꾼은 문화적으로 놀라울 만큼 편협하고 우악스러운 태도를 보이는 것이다. 중국은 중화제국의 영광을 재현한다는 '중국몽'을 염원한다. 제국이 되려면 물리적 힘과 함께 문화적 매력과 관용, 개방성도 중요하다. 지금과 같은 자국 중심주의 편협한 태도로 중국몽이 가능할까? 중국은 여론을 국가가 통제하는 나라다. 설사 인터넷 여론을 완전히 바꾸진 못한다 하더라도 최소한 언론을 통해 시정하려는 노력이라도 보여야 한다. 하지만 지금은 빗나간 애국주의 누리꾼들의 목소리를 그냥 방치하는 듯한 느낌이다. 그 속에서 일부 중국 누리꾼들의 '한국은 문화 도둑' 주장이 커져 가고, 심지어 김치 같은 한국 고유문화까지 중국 문화로 탈취하려는 움직임이 계속된다면 중국이 문화적으로 존중받기는 점점 더 어려워질 것이다.문화평론가문화평론가
[더 나은 세상] 헌재 발(發) '구하라법'
될 듯 될 듯 싶다 끝내 안 되는 사건이 있는가 하면, 안 되는가 싶어 실망과 좌절에 빠져 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예상치도 못한 곳에서 물꼬가 트여 풀리는 사건이 있다. 사건도 사람 인생을 닮았나 싶었는데, 이제 보니 법도 그런 것 같다. '구하라법' 이야기다. 양육의무를 다하지 않은 부모의 상속 자격을 제한해야 한다는 취지로 2020년에 제안된 민법 개정안 '구하라법'은 여론의 광범위한 지지에도 불구하고 20대 국회의 임기 만료와 함께 결국 폐기되었다. 21대 국회에서는 논의가 더 진척되었고 지난해 하반기에는 상임위인 법제사법위원회를 통과할 것 같은 희망이 보이기도 했는데 아쉽게도 국회는 끝내 결론을 내지 못했다. 이대로라면 오는 5월 말 21대 국회 임기 만료와 함께 다시 한번 폐기될 상황이었다. 그런데 국회가 아니라 헌법재판소에서 '구하라법'을 다시 살려냈다. 지난 목요일 헌재가, 피상속인을 장기간 유기하거나 정신적·신체적으로 학대하는 등의 패륜적인 행위를 일삼은 상속인의 유류분을 인정하는 것은 일반 국민의 법감정과 상식에 반하므로 유류분 상실사유를 두지 않은 민법 규정에 대해 헌법에 맞지 않다고 선언한 것이 도화선이 됐다. '구하라법'과 직접 관련은 없는 47건의 유류분 관련 사건에서다. 한 치 앞의 인생을 모르는 것처럼, 여론의 지지를 받는 법안의 운명도 그랬다. 소(小)가 대(大)를 살리다니, 이 점이야말로 '신의 한 수' 같다. 구하라법은 '부양의무를 다하지 않은 부모가 상속인이 될 자격이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상속 제도 자체(大)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한다. 반면 헌법재판소는 상속 제도 중 일부(小)인 유류분 제도에 한해 판단하였지만, 피상속인에 대해 패륜행위를 한 상속인은 상속인 자격이 없다는 판시 내용 자체는 '구하라법' 취지와 똑같다. 헌재는 국회에 대해 유류분 상실사유를 규정하지 않은 민법 규정을 개정하라고 2025년 12월31일까지 시간을 주었다. 국회가 유류분 상실사유를 도입하려면 그 전제로 상속 상실사유를 같이 손보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헌재의 결정문 중 유류분 상실사유 입법 미비 부분에 관한 내용은 고(故) 구하라의 오빠 구호인씨가 한 말의 취지와 정확하게 일치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가지 않는 거죠. 자식 버린 부모가 자식의 죽음으로 되레 큰 이익을 얻는 걸 법이 그냥 두고만 본다는 게. 무슨 법이 이런 법이 있나 싶고." 필자가 '구하라법'을 포함하여 사람 이름을 딴 법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대한 글을 쓰면서 취재할 때 들었던 그의 울분 섞인 목소리가 헌재 결정문 속에 그대로 녹아있어 더 반가웠다.(필자의 글은 2021년 '이름이 법이 될 때'라는 제목의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21대 국회는 오는 5월 말로 임기를 마감한다. 그전까지 임시국회를 열어 '구하라법'을 통과시키는 건 시간상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곧 출범할 22대 국회에서는 헌재가 준 시한을 맞추기 위해 법을 마련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현실에 맞지 않는 민법 상속 제도를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전반적으로 개정하는 것이니 21대 국회에서 급하게 처리하기보다는 22대 국회에서 차분하게 심도 있는 논의를 충분히 한 뒤 만드는 게 더 좋겠다 싶다.정혜진 변호사정혜진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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