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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체장의 생각:長考] 차별화의 힘을 아는 도시 '영주'
지금 우리는 변화의 시대에 살고 있다. 전국의 모든 지자체는 변화의 물결 속에서 이를 따라잡고 한 발짝이라도 앞서가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지만, 변화를 수행하면서 이를 구체적인 정책으로 만드는 일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장기적인 경기침체와 인구와 자본의 수도권 집중이라는 위기에 맞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남들과는 다른, 우리만의 전략이 필요하다. 지난해 영주시는 영주첨단베어링 국가산업단지 지정 승인, 영주댐 준공, SK스페셜티와 5천억원의 투자유치 협약체결, KTX 서울역 연장 운행 등 가히 '역대 최고'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의미 있는 성과를 거뒀다.영주첨단베어링 국가산업단지는 경북 북부권 최초의 국가산업단지로 지난해 8월25일 국토교통부로부터 최종 지정·승인을 얻어냈다. 베어링 및 경량 소재 산업 인프라 확충과 관련 사업 연구·개발 지원, 베어링 관련 기업과 투자유치 등 발로 뛰며 노력한 영주시의 노력이 드디어 빛을 보게 된 것이다. 국가산단은 토지 보상 절차를 시작으로 올해 상반기 착공, 2027년 준공할 계획으로, 사업이 본궤도에 오르면 연간 경제 유발 효과와 인구 증가 효과를 얻어 인구소멸지역 위기 극복은 물론 지역경제 활성화에도 크게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이는 영주시만의 기회가 아니라 경북 북부지역 나아가 대한민국 첨단베어링 산업의 미래에도 커다란 힘을 발휘하게 될 것이다.영주시의 관광산업도 변신을 시작했다. 2016년 본댐이 완공된 후 지금까지 준공 승인이 나지 않아 지역의 최대 현안 가운데 하나로 손꼽혀 온 영주댐이 지난해 준공되어 각종 민원과 댐 주변 개발사업 제약 등 그동안 해결되지 않았던 문제가 한 번에 해결되면서 영주댐의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개발이 가능해졌다. 영주댐을 치수 시설 외에 대규모 관광단지로 개발해 건강과 관광, 스포츠를 아우르는 명품 관광지로 거듭나게 될 것이다.이렇듯 영주시가 전략사업, 미래산업 발전을 위한 발판을 대거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은 지역경제 활성화라는 일념 하나로 행정력을 총동원한 영주시의 노력과 지역의 변화를 열망하는 시민의 힘이 모아진 결과다.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도태되는 곳에는 위기가 찾아오고, 변화에 예민하게 반응하며 노력하면 곧 기회를 맞이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세계의 흐름을 읽고 대비하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착실히 추진해 나간다면 영주가 세계 첨단산업의 중심, 대한민국 대표 명품 관광지가 될 수 있다. 인간과 침팬지의 DNA 구조는 98.7%가 동일하다고 한다. 인간과 침팬지 사이에는 엄청난 간격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두 존재 사이의 DNA 차이는 1.3%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이 차이는 대단히 커서 이 1.3%의 차이로 인간은 시를 쓰고 음악을 작곡하는 만물의 영장이 되었다.이 적은 수치가 인간과 침팬지를 다르게 보이게 하듯, 우리의 삶에 있어서도 작은 차이가 커다란 간극을 가져오는 일들은 수없이 많다. 지난해 거둔 많은 성과로 영주에는 성공의 DNA가 새겨졌다. 영주시는 그동안의 성과에 취하지 않고, 앞으로 이를 활용해 최대한의 가치를 이끌어 내어 다른 지역과 다른 1.3% 차이를 만들어 낼 것이다. 모든 낯선 것들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찾고 변화를 만들어 내기 위한 노력은 영주에 어느 도시와도 견줄 수 없는 커다란 차이를 가져올 것이라 믿는다. 박남서 영주시장박남서 영주시장
[단상지대] 한라산에서 미어캣을 보다
어느 해 4월 사법연수원 동기인 언니들과 한라산에 오르기로 했다. 그 자리에 있었던 6명 중 나를 포함한 나머지 5명은 평소 운동을 하지 않고 그냥 숨만 쉬면서 사는 사람들이었다. 우리는 한라산의 아름다운 경치를 보며 산행을 하고 TV 애국가 화면에서나 보던 백록담을 직접 본다는 것에 들떠 있었다. 다들 등산이라는 것은 다리만 있으면 되는 것으로 생각했다. 우리는 신이 나서 새벽에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로 가서 한라산으로 직행했고, 성판악으로 올랐다가 관음사 쪽으로 하산하는 코스를 선택했다. 봄날의 한라산 초입 숲길은 자연이 주는 색이 사람을 치유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게 했다. 5명은 숲의 아름다움을 느끼면서 즐겁게 떠들며 걷기 시작했다. 그러다 나무계단 길과 현무암 돌길의 무한 반복을 경험하면서 점점 대화가 줄었다. 조금씩 지치면서 각자 가져온 물이 바닥나기 시작했다. 물이 떨어질까 봐 불안해하며 도달한 곳이 정상이 아니라 진달래 대피소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는 생각이 많아졌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고 발도 너무 아팠다. 진달래 대피소에서 이미 세 명의 일행이 정상행을 포기했다. 나도 정상으로 가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하산 채비를 하던 찰나 갑자기 누군가가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을 막습니다. 정상에 가실 분들은 지금 올라가야 합니다!"라고 하는 것이다. 순간 홈쇼핑에서 3만9천900원 하는 상품이 매진 일보 직전이라는 말을 들을 때처럼 마음이 다급해졌다. 진달래 대피소에서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을 막으려던 순간, 나는 마지막 남은 한 개의 물건을 잡기 위해 몸을 던지는 사람처럼 정상으로 가는 길로 들어섰다. 이제 뒤돌아갈 수 없어서 정상으로 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고도가 높아지면서 고사한 나무들이 보이고, 나는 한라산에 왜 오자고 했을까 후회하며 걸었다. 숨이 차고 다리도 아프고 그냥 누워버리고 싶었는데, 뒤에서 등산객들이 계속 올라오니 소 몰 듯이 앞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어느 시점에서는 도저히 걸을 수 없어서 계단에 앉아 있는데, 고사한 나무들 사이에서 미어캣이 튀어나와 내 앞에서 한참을 쳐다보다가 사라졌다. 분명 동물원에서 본 미어캣이었다. 나는 이날 1·4후퇴 하는 사람처럼 터덜터덜, 만신창이가 되어 정상에 올랐고 말라비틀어진 백록담을 보자 억울함이 밀려왔다. 하산 때는 너무 힘들어서 일행과 대화라는 것을 할 수가 없었고, 나의 등산화는 너무 커서 하산길에 발톱이 아팠다. 또 어찌나 화장실에 가고 싶은지. 조금 더 가면 화장실이 있겠지 하고 참고 걸었지만, 끝도 없이 걸어도 화장실은 보이지 않았다. 하산 내내 머릿속엔 화장실 생각이 가득했다. 누군가 한라산 등반의 필수품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강한 콩팥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날 산이 어두워지고 산 아래 있는 일행들이 조난신고를 하려던 때에 겨우 하산했다. 나는 발톱이 두 개나 빠졌고, 검색해보니 미어캣은 아프리카에나 산다고 했다. 헛것을 본 것이다. 다시는 산에 가지 않을 것 같았는데 한라산 등반으로 고통에 대한 역치가 커진 것인지 근심 걱정을 내려놓게 되는 무념무상의 그 시간이 좋았던 것인지 산이 자꾸 생각났다. 이후 산에 가는 재미를 알게 되었다. 산에 가면 내가 돌이 되고 나무가 되고 산이 되는 것 같다. 사람들이 나이가 들면 어째서 그토록 산을 좋아하는지 알 것 같다. 예전에는 혼자 산에 오르면 이상한 사람을 만날까 봐 주저했는데, 지금은 종종 혼자서도 산에 오른다. 이상한 사람은 산이 아니라 회사에 있는 법이다. 이은미 변호사이은미 변호사
[박재열의 외신 톺아보기] 랜섬웨어
사이버공간에도 불법으로 인질을 잡고 몸값을 요구하는 일이 있다. 그때 이용되는 악성 프로그램이 '랜섬웨어'다. 랜섬웨어는 몸값을 뜻하는 '랜섬(ransom)'과 소프트웨어(software)의 '웨어'가 합성된 용어다. 해커는 기업체, 병원, 교육기관 같은 곳의 컴퓨터 네트워크에 침입하여 그것을 불능으로 만든 뒤 돈을 요구한다. 피해자 데이터를 암호화해 놓고 암호를 풀어줄 테니 그 몸값을 내라, 아예 운영체제의 접근을 차단해 놓고 컴퓨터를 열어줄 테니 돈을 내라고 하는 형태다.이런 협박에 못 이겨 억울하게 지불하는 돈이 해마다 늘어났다. 작년에는 최초로 10억달러를 넘어섰다고 전 세계 비밀화폐 유통을 추적한 체이널리시스가 발표하였다. 랜섬웨어 해커들은 해마다 공격의 빈도, 범위, 양 등을 늘려 왔다. 이런 공격을 받아 지불한 몸값 중 75%가 100만달러 이상이었다. 또 꼭 암호화폐로 지불하라고 요구한다. 몸값 지불은 일반적으로 불법이 아니며, 해커의 요구를 거절하는 것보다 억울하지만 몸값을 치러주는 것이 오히려 피해를 줄일 수 있다. 작년에 엠지엠리조트 사는 랜섬웨어의 공격을 받고 몸값 지불을 거부했는데 결국 영업 차질과 손상된 컴퓨터 시스템 대체에 무려 1억달러나 들었다고 한다.이런 강도행각을 성공적으로 막은 사례도 있다. 재작년엔 미 FBI가 '하이브'라는 랜섬웨어에 성공적으로 침투하였다. 그것에 침투해 있는 동안 FBI는 컴퓨터가 불능에 빠진 피해자들에게 암호해독 키를 나누어 주었다. 그것이 1천300건이나 되었고 그 결과 1억3천만달러가 검은 손아귀에 떨어질 것을 막았다. 그러나 랜섬웨어도 버거울 정도로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경북대 명예교수·시인박재열 (경북대 명예교수·시인)
[송재학의 시와 함께] 루이즈 글릭 '고광나무'
달빛이 아니야, 내가 말하노니.뜨락을 밝히는 꽃들이야.난 그 꽃들을 혐오해.난 그 꽃들을 혐오해섹스를 혐오하는 것만큼이나.내 입을 봉하는그 남자의 입.그 남자의 경직된 몸그리고 비명항상 도망치는,그 낮고굴욕적인하나됨의 조건내 마음속에 오늘밤나는 듣네 그 질문과 그리고 재촉하는 대답을하나의 소리에 연결된올라가고 올라가고 난 뒤옛 자아들로 쪼개지는,피곤한 길항작용들. 그대는 보는가?우리는 이렇게 바보가 된 거야.고광나무 향기는 창문을 넘네.어떻게 내가 쉴 수 있지?어떻게 내가 만족할 수 있냐고세상 속에 그 냄새가여전히 있을 때? 루이즈 글릭 '고광나무''절망이 진실'이라고 나지막하게 고백했던 미국 시인 루이즈 글릭의 전집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몇 권을 구매하였다. 시인의 대표작 '야생붓꽃'을 기억하는 독자에게 좋은 소식이다. 고광나무는 작고 무성한 흰 꽃을 피운다. 꽃잎의 아름다운 흰 색조는 기품이 있기에 "달빛이 아니야, 내가 말하노니. 뜨락을 밝히는 꽃들"이라고 시인은 말한다. 하지만 시인에게 고광나무 즉 모크 오렌지는 가짜 오렌지 나무일 뿐이다. 왜 가짜 오렌지 나무라는 이름이 생겼을까. "난 그 꽃들을 혐오해./ 난 그 꽃들을 혐오해"라고 시인은 되풀이한다. 향기와 꽃이 뛰어난 고광나무의 가짜 이미지는 시인에게 환멸의 어떤 생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고광나무의 향기는 창문을 드나들며 신비롭다. 평범한 일상 속에서 드러난 평범하지 않은 언술은 온전히 루이즈 글릭이 다듬어간 시적 여정이다. 시인송재학 (시인)
[윤성은의 천일영화] 황혼의 달콤쌉싸름한 외출, '소풍'
*영화의 내용이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2013년 봄에 개봉한 '고령화 가족'(감독 송해성)은 3대에 걸친 평균 나이 47세의 다섯 식구를 보여준다. 비록 고령화 사회의 논쟁점들을 깊이 있게 다루는 데는 실패했지만, 결혼의 새로운 풍속도나 가족 관계의 변화를 블랙코미디로 버무렸다는 데서 의의를 찾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 영화 제목에 사용된 '고령화'라는 단어는 대담하면서도 시의적절하게 다가왔다. 10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지금, 매체에서는 한국이 인구절벽에 이어 국가소멸의 위기에 직면했다는 말도 심심치 않게 흘러나온다. 이러한 시류를 반영하듯 영화계는 노년층이 마주한 불편한 현실 및 이들에 대한 사회적 시선을 소재로 한 작품들을 점점 더 많이 만들어내고 있다. 지난 2월7일부터 관객들을 만나고 있는 김용균 감독의 '소풍'은 얼핏 명절용 가족영화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전까지 보아왔던 노년층 중심의 영화와 다소 다른 결을 갖고 있다. 그 차이는 먼저, 고향 친구이자 사돈인 '은심'(나문희)과 '금순'(김영옥)의 캐릭터 및 그 관계에서 기인한다. 은심은 10대 때 상경해 자수성가한, 제법 세련된 도시 할머니다. 파킨슨병의 증상으로 손이 자주 떨리고, 독한 약 때문인지 가끔 돌아가신 엄마의 환영을 보기도 하는 등 건강 상태가 좋지 않지만 아들 내외에게는 병을 알리지 않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무능한 사업가인 아들이 또다시 손을 벌리자 은심은 마음을 모질게 먹고 가출을 한다. 그래 봐야 아직 오랜 친구이자 사돈인 금순이 살고 있는 고향으로 내려가는 정도지만 은심에게는 60년 만의 귀향이니 특별한 여행이기는 하다. 누군가는 이런 설정에서 기시감을 느끼고 흥미를 잃어버릴지도 모른다. 실제로 주인공들의 연령대를 고려하면 어느 정도 예측 가능한 일들이 펼쳐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전반적인 분위기는 여느 어르신들 중심의 영화와 달리 사뭇 밝고 경쾌하다. 몸이 불편할 뿐 은심과 금순이 재잘대는 목소리는 여전히 10대 소녀들의 그것처럼 들떠 있고, 고향에서 합류하게 된 동창 '태호'(박근형) 또한 그의 첫사랑 은심에게 60년 전 풋풋했던 감정들이 샘솟게 한다. 꽤 멋지게 노년을 살아가고 있는 듯한 세 사람의 공통점은 모두 경제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자녀들에게 의지하지 않고 자립해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소풍'의 초점은 병든 부모님을 어떻게 모셔야 할 것인가 고민하는 자녀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아직도 미성숙한 자녀들을 어떻게 떠날 것인가 염려하는 부모님들에게 맞춰져 있다. 은심은 하나 남은 자신의 아파트까지 호시탐탐 노리는 아들이 혼자서 뭔가를 이뤄봐야 진짜 어른이 된다고 생각한다. 금순은 날 때부터 몸이 성치 않은 아들에게 미안한 감정도 있는 반면, 언젠가부터 삐딱해진 그의 태도에 신경이 많이 쓰이고, 마을의 리더인 태호는 가족과 이웃들이 나고 자란 땅이 리조트 사업으로 사라질까 걱정이다. 즉, 이들의 관심사는 노년의 병마에 지지 않는 것 외에 자녀들을 고생시키지 않고 그들에게 삶의 유산을 물려주는 것으로 요약된다. 답이 없는 병마와 자녀들 때문에 치열한 나날을 보내던 금순과 은심은 마침내 결정을 내린다. 비록 모든 관객들이 바라던 결말은 아니라 하더라도 온 세대가 각자의 좌표에서 공감할 수 있는 이슈들이 밀도 있게 녹아 있는 작품임에는 분명하다.영화평론가영화평론가
[광장에서] 중대재해, 처벌이 아닌 예방
지난달 27일부터 '중대재해처벌법'이 상시 근로자 5인 이상 50인 미만(5인 미만은 제외)의 모든 사업장 전체로 확대 시행되었다. 이번 시행으로 인해 83만7천여 개 사업장과 그곳에서 일하는 800만 근로자가 동법의 적용범위에 포함되었다. 동법은 2021년에 제정되어 1년의 유예기간을 두고 2022년 1월27일부터 50인 이상 사업장에 대해 먼저 시행되었고, 5인 이상 50인 미만의 사업장에 대해서는 3년간의 유예기간을 두어 금번에 시행된 것이다. 최근까지 동법의 적용유예와 관련하여 찬반이 엇갈렸다. 찬성 측 근거는 처벌 강화 및 책임 범위 확대와 사고율의 저감 사이에 긍정적인 효과가 확인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한 최근 중소기업의 체감경기가 매우 어려운 상황에서 전문 인력 부족, 예산 부족 등으로 인해 기업 경영까지 위축시킨다는 것이다. 반대 측 근거는 고용노동부의 '산업재해 발생 현황'에 따르면 50인 미만 사업장의 요양 재해자, 사망자 수가 60~70% 이상 높은 비중을 차지하므로 필요성이 상당하고, 유예를 하더라도 결국 사업주의 안전·보건에 대한 인식변화가 이루어지지 않는 한 실질적인 조치는 기대하기 어려울 수 있다는 것이다. 어느 주장이 타당한지와는 별개로, 양 측의 주장을 모두 고려하면 중대재해 예방을 위한 시의적절한 해결책이 필요하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그렇다면 동법의 주요 내용은 무엇인가. 법 조문을 체계적으로 살펴보면, 첫째로 사업 또는 사업장을 운영하면서 안전·보건 조치의무를 위반하여 인명피해를 발생하게 한 사업주, 경영책임자 등의 처벌 등을 규정함으로써 중대재해를 예방하는 것이 목적이다. 둘째로, 사업주와 경영책임자 등이 안전보건관리체계의 구축, 재발 방지 대책의 수립 등에 관한 조치를 하도록 안전 및 보건 확보의무를 부과하였다. 셋째로, 제3자에게 도급, 용역, 위탁 등을 행한 경우에도 동일한 수준의 안전 및 보건 확보 의무를 부과하였다. 넷째로, 안전 및 보건 확보의무를 위반하여 중대재해에 이르게 한 사업주 또는 경영책임자 등에 대해 징역 또는 벌금에 처하도록 하고 있고, 이에 더해 고의 또는 중대한 과실로 의무를 위반하여 중대재해를 발생하게 한 경우 피해자에 대하여 손해배상책임까지 지도록 하고 있다.그렇다면 해당 기업은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 안전보건관리체계의 구축 및 그 이행에 관한 조치로서 첫째로, 사업 또는 사업장의 안전·보건에 관한 목표와 경영방침을 설정해야 한다. 둘째로 사업 또는 사업장의 특성에 따른 유해·위험요인을 확인하여 개선하는 업무절차를 마련하고, 주기적인 점검 등 필요한 조치를 해야 한다. 셋째로, 안전보건에 관한 조직·인력, 시설 및 장비 구비 등의 이행을 위한 예산을 편성하고 용도에 맞게 집행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안전보건 확보의무를 제대로 이행하였다면 처벌 등 불이익을 받지 않으므로, 사전에 안전보건관리체계 구축 등 의무를 이행하고 대비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결론적으로 '중대재해처벌법'의 목적은 처벌이 아닌 중대재해의 '예방'임을 명심해야 한다. 동법은 중대재해의 발생 자체로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안전 및 보건 확보의무를 부과하고 이를 위반하는 경우에 한해 처벌하도록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동법이 시행된 이상, 중소기업의 어려운 경영환경을 잘 살피는 동시에 중대재해를 효과적으로 예방하기 위한 해결책을 마련하고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노력이 중요해 보인다. 김도형 (법무법인 화우 환경규제대응센터장)김도형 (법무법인 화우 환경규제대응센터장)
[경제와 세상] 죽은 링컨의 사회
최근 중국의 국가신뢰도가 국제적으로 논란이 되고 있다. 지난 1월 중국 국가통계국이 작년 GDP 성장률을 5.2%로 발표하자 외신들은 즉각 의문을 제기했다. GDP의 25%를 차지하는 부동산 투자가 9.6% 감소했고, 수출입도 0.2% 증가에 그쳤는데 5%대의 성장률은 나올 수 없다는 것이다. 미국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를 비롯한 각국 연구기관들은 알려진 대로 이미 중국의 통계를 믿지 않으며, 심지어 개발도상국이나 러시아, 파키스탄보다 신뢰도가 떨어지는 것으로 본다. 미국 싱크탱크 아시아 소사이어티는 최근 보고서에서 고질적인 신뢰 경시풍토는 "오늘날 중국의 정치 엘리트들, 국가와 사회, 중앙 정부와 지방 정부, 일반 대중 사이의 역학을 재편하고 있고 정치적 불안정, 정책 예측 불가능성, 사회적 분열, 다른 거버넌스의 도전을 초래할 우려가 있으며, 그러한 위험은 중국식 현대화를 함정에 빠지게 한다"고 분석한다.프랜시스 후쿠야마 스탠퍼드대 교수는 그의 명저 '트러스트(Trust)'에서 한 국가의 경쟁력과 미래 발전 잠재력은 그 사회가 가진 신뢰의 수준에 따라 결정된다고 말한다. 사회 구성원이 상호신뢰를 기반으로 경제활동을 할 수 있다면, 거래에서 발생하는 비용이 줄어들고 예상치 못한 손해에 대비해야 할 필요성도 감소한다. 반면 신뢰가 부족한 사회에서는 위험회피 비용이 항상 따른다. 그래서 법과 제도, 계약은 신뢰와 결합할 때 더욱 효율적으로 작동하는 것이다. 우리를 숨 막히게 하는 정부 규제 역시 신뢰부족 사회의 한 단면이다. 이런 이유로 현재 중국의 미래에 대해 긍정적 평가보다는 부정적 전망을 하는 사람들이 점차 많아지고 있다. 시진핑 체제가 주창한 소위 '중국몽'대로 미국과 함께 세계를 주도하는 G2의 야심이 이루어지는가 아니면 인구만 많은 중진국이 되느냐 기로에 서 있다. 다만 낙후된 신용체계를 바로잡고, 중국 사회 내부에 만연한 고질적인 불공정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목적으로 2019년 시작한 '사회 신용체계'가 개인정보보호법이 없는 중국에서 어떻게 작동할지 귀추가 주목된다.2023년 발표한 레가툼 세계 번영지수(Legatum Prosperity Index)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교육, 보건, 개인의 자유 등 사회 여건 전 부문에서 양호한 평가를 받고 있으나 개인과 개인의 신뢰, 국가 제도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 부문에서는 턱없이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다. 사법 시스템 신뢰 지수는 167개국 중 155위에 그쳤고 정치권(114위), 정부(111위)도 경제규모에 어울리지 않게 모두 한심한 수준이다. 대한상공회의소는 북유럽 수준의 신뢰 자본 없이는 4%대의 성장은 불가능하다고 단언한다. 저서 "불공정사회"에서 우리의 이러한 현실을 분석한 이진우 포스텍 석좌교수는 우리 사회는 타인을, 나아가 갈등을 조정하는 법과 제도까지 신뢰하지 못하고 각자의 자기방어 본능만 남아 서로 부딪히는 초저신뢰사회라고 비판한다. 그리고 구성원 모두가 서로를 이겨야 할 경쟁 상대라고만 판단하여 존 롤스가 말하는 '공정한 협력체계'가 존립할 수 없는 민주주의의 위기상황으로 우려하고 있다. 이 교수는 이러한 병적 현상의 가장 큰 원인이 정치세력의 양극화에 있다고 지적한다. 국가번영을 선도해야 할 정치가 오히려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말이다.에이브러햄 링컨 미국 16대 대통령은 중상과 모략이 난무하는 정치판에서 정직이 가장 큰 무기라는 신념으로 평생을 일관하였다. 별명도 '어니스트 에이브(정직한 에이브)'로 정직한 지도자의 표본이 되어 지금까지 모든 정치인의 마음속에 살아있는 전설이 되고 있다. 하지만 불신사회에서 정직과 공정이란 가치는 힘을 잃는다. 지금 우리는 '죽은 링컨의 사회(Dead Lincoln society)'에 살고 있다.권 업 객원논설위원권 업 객원논설위원
[더 나은 세상] 새스커툰 한인회의 설날, 시장님과 댄스를
대학 외부 봉사활동의 하나로, 올해 1월부터 새스커툰 한인회 회장직을 맡게 되었다. 한인사회 내부 소규모 친목모임 성격으로 운영되어 오던 한인회가 그 한계를 벗어나 다양한 커뮤니티 및 현지기관과의 교류 확대를 통해 한 단계 도약하기를 원한다는 내부 요청에 따라 새스커툰시 최초의 한국 설날 행사(Korean New Year Celebration)를 도시 최대규모의 컨벤션 센터에서 외국인과 한국인 모두를 대상으로 열었다. 판매시작 열흘 만에 티켓이 매진되었고, 캐나다 공영방송인 CBC라디오 새스커툰의 아침방송 인터뷰, 새스커툰 시장의 행사 참석, 한인사회 외부 기관들의 스폰서십 등을 이끌어 낸 준비과정은 임원진 외에도 10명이 넘는 봉사자들이 한 달 넘게 함께했고 힘들지만 보람있었다. 고급 한식 뷔페식사와 다양한 공연, 한복 포토존 및 윷놀이, 널뛰기, 제기차기, 투호, 딱지치기 등 한국에서도 보기 힘든 다양한 민속놀이 체험이 포함된 프로그램은 큰 호응을 얻었고, 많은 손님들이 벌써 내년을 기약할 정도로 행사는 성공적이었다. '모두의 가슴 속에 한국을 적시는 순간이었다'는 어느 봉사자의 말처럼 공동체란 참여하는 만큼 보람과 기쁨도 크고 애정도 커지는 것임을 체험한 시간이었다. 인터뷰 때 호스트가 "이 행사가 왜 특별하며 무엇을 가장 기대하느냐"고 물었고, "커뮤니티(공동체)"라고 대답했다. 어려운 경기 속 다양한 커뮤니티의 평범한 개인과 가족들이 편안히 한데 모여 한국 최대의 명절을 기쁘게 보냈으면 하는 마음으로 기획한 행사였다. 한국노래 '설날'을 멋지게 불러준 아프가니스탄 난민 출신의 소녀밴드, 중국 설날 음악에 맞춰 매혹적인 춤을 보여준 중국인 고등학생, K-pop댄스 따라하기로 시장님도 춤추게 만든 비한국인 소녀들의 공연만큼이나 에티오피아 출신의 택시 드라이버, 아프리카 출신의 비영리기구 대표들, 백인 교수 동료들, 한인 2세 대학교수와 학생들, 아시아 출신의 시청 직원, 중국인 신혼부부들, 우크라이나 캐나디안 3세 할머니들 등으로 구성된 관객층도, 1천명이 안 되는 '작은' 한인 커뮤니티가 어떻게 다양한 사람들을 잇는 멋진 연결고리가 될 수 있는지 보여준 시간이었다, 한국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고 춥고 불편한 이 도시에서 10년 넘게 살게 된 이유이기도 한 새스커툰 특유의 매력적인 '커뮤니티' 정서는 찰리 클록 시장에게서도 느껴진다. 사람들로부터 선출직 정치인으로 살며 어떻게 영혼을 유지하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는 이 인기 많은 시장은 3선에 도전하지 않겠다고 지난달 선언했다. 세 자녀와 공인이 아닌 평범한 부모로서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서라고. 당시 기자회견 때, 오늘도 늦게 들어가게 되어 약속을 지키지 못한다는 내용의 아내와 주고받은 문자메시지를 공개하며 눈물을 글썽이기도 했다. 설날 행사 때도 새벽 4시에 아내와 딸을 공항에 데려다주고 왔고, 행사 후에는 아버지 모시러 공항에 간다던 소탈하고 인간적인 매력이 돋보였던 그는 유력 정치인이 많은 집안에서 자라면서 어려서부터 그들의 삶이 행복해 보이지 않았고, 자신은 겸손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더 끌린다고 했다.가족도 공동체도 급속도로 붕괴되어 가는 한국에서 이런 연결감과 유대감의 형성, '지방'만이 할 수 있는 '지방'의 힘이다. 청룡의 새해에는 한국에도 커뮤니티가 무엇인지 알고 가꿀 수 있는 가슴을 가진 리더들이 많이 등장하길.신현정 캐나다 사스카추안대 교수신현정 캐나다 사스카추안대 교수
[정성화의 자연과 환경] 수소와 수소에너지
수소는 가장 가볍고 간단한 원소로 우주 질량의 75%(원소 개수 기준 88%)를 차지할 정도로 우주에서 가장 흔한 원소이다. 수소는 에너지로 활용 시 공기와 함께 연소시킬 수도 있지만, 수소연료전지(수소를 연료로 사용해 에너지를 얻는 장치)를 이용하여 전기·열에너지를 얻을 수 있는데 이때 공해 물질은 물론이고 이산화탄소(CO2) 같은 온실가스가 배출되지 않는다. 특히 연료전지는 매우 깨끗한 공기를 사용해야 하므로 수소를 동력원으로 사용하는 차량은 초미세 먼지를 걸러주어 달리는 공기청정기라고 불릴 정도이다. 따라서 수소는 화석연료를 대체할, 고갈되지 않는 친환경·미래 에너지원이라고 흔히 불린다. 한편, 수소는 에너지로 곧바로 활용할 수 있는 수소 분자(H2)로 존재하기보다는 대부분 다른 원소와 결합하고 있고(예로, 물의 경우 산소와 결합함) 그러한 결합된 화합물 상태에서 활용 가능한 수소 분자를 제조하는 것이 필요하다. 현재 수소는 주로 천연가스로부터 얻는데 1㎏ 수소를 얻을 때 약 10㎏의 CO2가 배출되며(수소 이용의 큰 단점으로 부각) 이렇게 온실가스를 배출하며 얻어진 수소를 그레이 수소라 한다. 그레이 수소 생산 시 얻어지는 CO2 등의 온실가스를 포집·저장하면서 생산되는 수소는 블루 수소라고 하고, 태양 등의 신재생 에너지를 이용해 물을 전기분해하여 얻는 수소는 CO2 문제가 없으므로 그린 수소라고 한다. 현재 생산되는 수소의 약 96%를 차지하는 그레이 수소를 블루 수소, 궁극적으로는 그린 수소로 대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최근 수소 도시 및 수소 시범도시란 말도 자주 듣게 되는데 수소 도시란 생산에서부터 이송·활용까지 시스템을 갖추고 일상생활에서 수소를 도시가스처럼 사용하는 사회와 도시를 말한다. 수소 시범도시는 수소 도시를 미리 경험·대비해 볼 수 있는 개념이며 포항과 울산 등이 수소 시범도시 사업을 추진 중이다. 수소는 폭발 위험성이 상존하며, 너무 가벼워 운송·저장의 어려움이 크다. 예로, 먼 거리 이송을 위하여 액화를 하려면 매우 낮은 온도(-253℃)까지 냉각해야 하고 비용이 크게 든다. 또한 수소연료전지차에 사용되는 수소는 약 700기압으로 충전되는데 상당한 고압으로 인해 안전과 비용의 문제점이 존재한다. 이러한 문제점에도 수소는 궁극적인 미래의 에너지원이며, 피할 수 없는 대세가 될 것으로 예측되므로 착실히 준비하여 언젠가 우리 가까이에 와 있을 수소 시대를 대비해야 할 것이다. 석기 시대가 종말을 고한 것은 돌이 없어서가 아니듯, 석유·석탄이 충분히 남아도 어느덧 수소 시대가 도래할 것이기 때문이다.정성화 경북대 화학과 교수정성화 경북대 화학과 교수
[시선과 창] 경계를 넘는 힘이 필요한 시대
필자는 IT 분야 사업을 경영하며, 동시에 프롬프트 엔지니어(Prompt Engineer)로 활동하고 있다. AI로부터 정교한 답을 이끌어 내고, 그 방법을 연구하는 신생 직업이다. 국내에서는 개념조차 생소하여 모르는 이들이 많은데, 해외에서는 이미 고액 연봉 직군으로 자리 잡아 그 수요가 계속 늘고 있다. 그런데 필자를 만나는 이마다 늘 의아하게 생각하는 점이 있다. 그런 필자의 전공이 바로 컴퓨터 공학이나 인공지능 따위가 아닌 '철학'이라는 사실이다.이는 아직도 우리 사회가 기술과 인문학 사이의 간극을 크게 느끼고 있다는 방증일 것이다. 인공지능과 철학, 기술과 인문학이 표면적으로는 상이하게 보일 수 있으나, 그 지향점이 '인간'에 있다는 점에서 본질은 크게 다르지 않다. 기술은 인간의 편리와 효율을 위해 발전하고, 인문학은 인간의 삶과 가치에 대해 고민한다. 다만 이렇게 기술과 인문학을 다른 범주로 분류하고 엄격히 구획하는 현상은 비교적 최근의 유산에 불과하다. 고대 그리스에서 철학자가 수학자나 기술자의 역할을 겸하였음은 말할 필요도 없고, 심지어 뉴턴의 시대까지도 과학은 '자연 철학'으로 간주되지 않았던가? 본래 인간의 지적 활동이란 이러한 경계를 설정하지 않은 채 이루어지던 것이다.산업혁명이 촉발한 근대의 '전문화'와 '분업화'는 기술과 인문학을 별개의 영역으로 만들어버렸다. 같은 현상을 두고서 이루어지던 수많은 논의가 '사실'과 '경험'에 기반하는 기술과, '가치'와 '의미'에 천착하는 인문학으로 나뉘어 버렸다. 결국 산업과 기술의 영역에서 극대화된 효율성과 이윤 추구는 인간의 삶과 가치에 대한 이해를 뒷전으로 밀어버리는 결과를 낳았다. 그리고 이는 디지털 시대의 도래와 함께 더욱 명확해졌다. 바로 우리 시대가 마주한 병폐다. 물론 여기에 대한 해결책을 '인문학적 가치를 회복하자'는 구호로 갈음하는 것은 너무 안일하고 위험하다. 특정 영역을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은 또 다른 병폐를 낳기 십상이다. 우리가 준비해야 하는 것은 오직 '경계로부터의 탈피'다. 기술과 인문학, 과학과 예술, 경제와 윤리, 이러한 영역들 사이의 경계를 허물어야 한다. 프롬프트 엔지니어로 활동하며, 철학 전공이라는 필자의 배경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지 수도 없이 경험했다. AI 설계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문제 해결력'이다. 여기에는 그 문제가 실제로 무엇인지, 그리고 그 문제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또한, 잠재적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왜'나 '어떻게'와 같은 질문들이 중요한 역할을 할 수밖에 없다. 더 나은 알고리즘을 설계하기 위해 혹은 오류를 찾아내기 위해 또는 새로운 것을 개발하기 위해 필요한 것 역시 '문제의 본질'을 파악하는 것이 아닌가? 모두 인문학적 사고를 요구하는 지점이다. 더 나아가 인공지능은 인간의 언어와 감정, 문화 등 복잡한 요소들을 다루고 있다. 인간의 본성과 사회적 상호작용에 대한 이해 없이 이러한 기술이 발전한다면, 그 결과는 사회에 오히려 해로운 영향을 미칠지도 모른다. 앞서 고연봉을 받는다는 해외 프롬프트 엔지니어들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그들 역시 주로 컴퓨터 공학이나 인공지능을 전공한 사람들이 아니라 철학, 인문학, 심리학 등을 전공한 사람들이다. 필자만의 이야기가 아닌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AI를 다루는 업무를 하고, 개발을 한다는 것도 분명 이상한 일이 아니다. 경계를 허물고, 그 경계를 설정하지 않고 나아가는 지혜야말로 그들의 가장 큰 자산일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우리가 가야 할 시대의 방향이라 믿는다. 서승완 (유메타랩 대표)서승완 (유메타랩 대표)
[돌직구 핵직구] 외교 전략의 대전환이 필요한 시점
2024년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가 심상치 않다. 금세 끝날 것 같았던 두 개의 전쟁(우크라이나와 이스라엘)이 소모전으로 접어들고 있다. 그 여파가 한반도에도 밀어닥치고 있다. 북한이 러시아와 군사적 협력 관계를 구축하면서 대남 전략을 전면 수정했다. 일본과의 물밑 협상에도 적극적이다. 미국은 중국과 대결하는 와중에 두 개의 전쟁에 버거워하고 있다. 국내에서 공화당의 국내 우선주의에 밀려 전쟁 지원 예산도 막혀 있다. 우크라이나와 이스라엘은 당황하고 있다. 남의 나라 일이 아니다. 두 개의 전쟁으로 미국의 전력이 분산된 상황에서 다음 분쟁지역으로 동아시아가 거론되고 있다. 중국의 대만 침공 가능성이 대두하고 있다. 시진핑 주석이 2027년까지 대만 침공 준비를 완료하라고 했다. 미국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이며,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 것인가? 미국 조지타운대 데니스 와일더 교수는 "미국에 두 개 전선은 위험하다. 중국은 많은 미군을 한반도에 묶어두길 원한다"라며 한반도 전쟁 가능성을 언급했다. 'Foreign Affairs' 등 외교 저널들의 주요 주제이다. 우리에게 직접적인 위협은 북한이다. 북한은 이미 50여 개의 핵 탄두를 보유하고 있으며 이를 전개할 전략적·전술적 운반체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작년 9월 김정은 위원장의 러시아 방문 이후 대량살상무기 기술 거래가 활발해지고 있다. 지난 1월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대한민국은 철두철미 제1의 적대국이고, 대한민국 영토를 완전히 점령하겠다"고 도발적 야욕을 드러냈다. 미국의 전문가들도 북한의 도발 가능성을 우려하고 나섰다. 올해 11월 미국 대통령 선거는 복잡한 국제정세를 판가름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바이든 대통령이 재선하면 기존의 외교 네트워크가 유지되겠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복귀하면 전면적인 개편 가능성이 크다. 우리 외교 전략의 대전환(grand transition)이 필요하다. 우선 정부와 민간 차원의 '외교전략검토그룹'(가칭)의 구성이 필요하다. 외교부와 국방부, 국정원을 중심으로 한 정보기관들, 전문 학자들로 구성하여 현 국제정세의 변화를 분석하고 외교전략의 재정립이 필요하다. '예정된 전쟁(Destined for War)'의 저자인 하버드대학교의 그레이엄 앨리슨 교수도 한국의 적극적인 외교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둘째, 한미 동맹을 레버리지로 중국과 러시아와의 외교 관계 복원에 노력해야 한다. 윤석열 정부는 한미 동맹의 복원과 강화, 일본과의 관계 개선에 성공했다. 다만 중국과 러시아와의 관계가 소원해졌다. 국제관계는 절대적 이익(absolute gain)이 아닌 상대적인 이익(relative gain)을 추구하는 비제로섬 게임이다. 정세의 변화에 따라 전략적 유연성을 가져야 한다.셋째, 대북한 정책의 수정이 필요하다. 압박과 제재는 효과가 없다. 외교적 고립과 내부 모순으로 인한 붕괴 등 봉쇄전략도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중국과 러시아가 지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대화와 협상이 필요하다. 어정쩡한 이중전략(double theory)은 혼란을 불러일으킨다. 과거 정부에서 북한과의 물밑 접촉에 실패한 뒤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 사태를 겪은 바 있다. 마지막으로 핵무기 개발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국제정세와 한미 동맹의 변화 범위 내에서 핵 주권을 협상해야 한다. 미국의 안보 전문가들도 그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고, 우리 국민 대다수도 지지하고 있다. 마키아벨리의 금언과 같이 자신의 운명을 다른 사람에게 맡길 수는 없는 법이다. 윤석열 정부의 보다 적극적인 외교 노선의 재정립을 기대해 본다.서성교 건국대 특임교수· 전 청와대 행정관서성교 건국대 특임교수· 전 청와대 행정관
[안도현의 그단새] 겨울 강변을 걸으며
오후가 되면 강바람이 거칠어진다. 장갑을 끼고 강을 거슬러 오르면서 걷는다. 입춘이 지났건만 강물 위에는 살얼음이 둥둥 떠다닌다. 봉화 선달산에서 발원해 낙동강으로 흘러드는 내성천. 나는 내성천 가에서 태어났고 지금도 내성천이 보이는 강변에 산다. 읍내로 나가려면 내성천 강변길을 십리쯤 따라가야 한다.겨울은 모든 식물이 성장을 멈추고 쉬는 계절이지만 겨울에 유난히 눈에 띄는 식물도 있다. 강변길에서 반갑게 만나는 친구 중의 하나가 박주가리 씨방이다. 덩굴식물로 한여름에 하얀 꽃이 피며 줄기를 자르면 우유 같은 액이 나오는 박주가리. 박주가리 열매는 표면이 우둘투둘하며 오동통한 모양으로 열리는데, 여름방학이 끝나갈 무렵 껍질을 까먹으면 제법 달짝지근한 맛이 입안에 감돌곤 했다. 박주가리 씨방은 1월 이후 박처럼 갈라져 그 속에 든 씨앗들을 천천히 세상에 내보낸다. 박주가리가 1년 중 가장 아름다운 때가 바로 이때다. 성냥 알만 한 씨앗을 공중에 띄우기 위해 거기 품위 있게 달라붙어 있는 솜털들은 신비롭고도 고혹적이다. 이들이 허공을 부유하는 모습은 쫓기지도 않고 서두르지도 않는다. 때로는 치솟았다가 때로는 부드럽게 하강했다가 자유자재로 바람을 탄다. 이 박주가리 씨앗의 비행을 두고 자유로운 영혼의 환생이라면 과한 표현일까.마른 나뭇가지를 감고 있는 마 씨방을 발견하는 것도 산책의 즐거움 중 하나다. 엄지손톱만 한 씨방의 껍질이 오종종 맞붙어 있는 텅 빈 마 씨방은 자식들을 대처로 떠나보낸 마을 노인들의 쓸쓸한 방처럼 보인다. 또 가지 끝에 눈송이처럼 매달려 있는 사위질빵 씨앗도 반갑다. 이들이 마지막 씨앗 하나까지 다 날려 보내야 봄이 올 것이다.내성천 모래톱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갯버들이 제법 부풀어 오르고 있다. 갯버들이 연두를 데리고 오려면 아직 한 달은 더 기다려야 한다. 작년 여름 며칠 폭우가 내린 뒤 내성천 중심부의 버드나무들이 상당수 뽑혀 사라졌다. 상류의 영주댐 건설 이후 급성장한 버드나무가 자연의 거대한 위력 앞에 고꾸라진 것이다. 댐 건설로 풀숲으로 변하던 모래톱이 제 모습을 회복하기 시작한 것은 불행 중 다행이라 하겠다.하지만 환경부가 국가하천정비사업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하천 준설사업을 계획하고 있다는 소식은 불길하다. 준설을 통해 수해로부터 국민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지켜나간다고 하지만 누군가는 삽질한 모래를 팔아 이득을 취할 게 뻔하다. 망가질 대로 망가진 내성천에 포클레인과 트럭이 들어와 또 준설작업을 하게 되는 일은 너무나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강의 홍수가 아니라 지휘관의 잘못된 판단이 아까운 청춘을 떠나보냈다는 걸 나는 기억한다. 고(故) 채수근 상병이 속해 있던 해병대 부대는 사고 전날인 작년 7월18일 우리 마을 앞 내성천 강변길을 운동복 차림으로 열을 맞춰 이동했다. 그다음 날 19일 채수근 상병은 실종자 수색을 위해 강에 투입되었다가 실종, 순직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예천 수해 현장을 방문한 지 이틀 지나서였다. 그 이후 내성천으로 나가는 일이 그리 유쾌하지 않다. 강은 말이 없고, 억새는 무심하다. 단국대 문예창작과 교수·시인안도현 (단국대 문예창작과 교수·시인)
[3040칼럼] 공동 주택에서 사는 일
얼마 전 한 지인이 아파트로 이사 오면서 층간소음에 대한 우려를 드러냈다. 지인은 피아노를 배우면서 삶의 여러 영역에서 유의미한 영향을 받고 있었다. 그래서 이웃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사일런트'라는 장치를 부착했다고 한다. 사일런트 장치는 피아노 소리를 이어폰에 가둬 밖에서는 들리지 않게 해준다. 문제는 소리의 성격은 디지털로 변하지만 진짜 디지털이 아니기에 소리가 이상하게 들렸다고 한다. 심지어 사일런트 장치를 끄고 피아노를 치면 건반 몇 개가 소리를 내지 않는다고 했다. '소리가 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소리를 내지 않는다'라고 말한 것이 이상하게 마음에 남았다. 피아노가 하나의 사물이 아니라 인격체를 지닌 존재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건 아마 그가 피아노를 그렇게 대했기 때문일 것이다.공동 주택에 거주하는 이들은 기본적으로 소음에 주의하며 층간소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거주 공간에 따른 사물의 운명이 새삼 새롭게 다가왔다. 피아노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몸에 이상한 장치가 달리고 소리를 제한당하는 것이 얼마나 황당한 일일까. 사일런트 장치를 제거해도 소리가 나지 않는 건반은 제 소리를 잃은 것에 대한 시위이자 침묵으로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것은 자발적인 것이 아닌 인간에 의해 혹은 권력이나 자본에 의해 잠식당한 이들의 잃은 목소리로까지 생각의 흐름이 이어졌다면 비약이 심한 것일까. 피아노뿐 아니라 개 짖는 소리 때문에 반려견에게 성대 수술을 시키거나 아이들이 있는 집이면 조용히 해라, 뛰지 말아라 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아야 한다. 공동 주택에 거주하는 세대수가 늘면서 생활양식에도 큰 변화가 따라왔다. 옳고 그름에 대한 기준은 절대적일 수 없다. 소음 또한 마찬가지다. 사람이 사는 곳이니 무조건 소음을 감수하라고, 공동 주택에 거주한다는 이유로 발생하는 모든 불편함을 감수하라고 말할 수 없다. 그렇다고 이웃에게 피해를 줄 정도로 소음을 일으키는 것 또한 당연히 옳지 못하다. 층간소음에 대한 이슈가 하루가 멀다고 보도되고 있지만 나 중심적인 사고에서만 벗어난다면 소음에 대한 기준도 달라질 수 있다고 본다. 머무는 공간이 아무리 본인의 사유 재산일지라도 말이다. 개인의 루틴과 휴식을 방해할 수 있는 존재가 타인이라면, 역설적으로 우리는 타인의 도움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존재가 아니란 것 또한 잘 알고 있다. 다만, 우리가 들어야 할 소리마저 듣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닌지, 어쩌면 그 소리의 존재를 부정하거나 외면하려고 하는 건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느낀다. 철저히 개인적이고 사적인 공간에서도 제한당하는 소리는 없는지 세심한 주의가 필요한 동시에 내가 침묵하고 있는 일은 없는지, 그것은 자의에 의한 것인지 타의에 의한 것인지 점검해 봐야 한다. 가정 폭력이나 아동 학대가 의심되어도 신고로 쉽게 이어지지 않거나 고독사 등 이웃에 대한 무관심도 여기에서 파생될 수 있는 문제다. 울음으로 의사 표현을 하는 어린 아기나 인간이 아닌 존재에 대한 몰이해 또한 마찬가지다. 타인과 함께 살아가는 우리에게 일상을 방해하는 층간소음에 대한 스트레스나 우려보다 큰 소리에 묻힌 소리는 없는지, 그것을 방관하거나 무감하게 지나치고 있지는 않은지에 대한 성찰 또한 조금 더 비중 있게 고려되면 좋겠다.김정애 전 독립문예지 '영향력' 발행인김정애 전 독립문예지 '영향력' 발행인
[이진우의 시대정신] '가족주의'의 역설
전통적 가족주의가 가족을 해체하고 있다. 도전적으로 들리는 이 말을 들으면 사람들은 대체로 고개를 갸우뚱거릴 게 틀림없다. 우리 문화에서는 모든 게 가족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개인화의 물결이 드세고 개인주의가 이미 오래전부터 우리의 영혼을 잠식하고 있어도 가족주의는 여전히 끈질기게 우리의 삶과 사회를 통제한다. 식당에 가면 '이모'가 있고, 사랑하는 사람은 곧 '오빠'가 된다. 우리는 사람들의 관계를 가족의 관점에서 구성하려는 성향이 있다. 조금만 친해지면 나이의 서열에 따라 형이나 누나 그리고 동생으로 나뉜다. 사회는 이렇게 확대된 가족과 모르는 낯선 사람으로 구분된다. 공익과 공동선을 추구하는 국가마저 '큰 가족'으로 생각하니 정치적 지도자가 가부장처럼 군림하는 게 당연해 보인다. 유교 문화와 역사를 통해 형성된 이러한 성향은 일종의 제2의 본성처럼 원하건 원치 않건 디폴트로 작동한다.설날과 추석 같은 명절은 가족의 가치를 보전함으로써 가족 구성원의 유대와 친밀감을 강화하는 축제였다. 내가 여기서 과거 시제를 사용한 것은 명절 풍속도 많이 변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전히 가족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는가? 한때 우리는 서양의 개인주의를 비난하면서 우리의 고유한 가족주의를 자랑스럽게 내세웠다. 서양인들은 합리적이고 계산적이지만, 우리는 끈끈한 정이 있다고 의기양양하게 뽐내곤 하였다. 문화적으로 몽매한 이 말을 지금은 누구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지만, 우리가 서양인보다 더 가족적이라고 믿는 편견은 여전히 강하다. 이러한 이데올로기는 이미 변화한 현실과 부딪히면 맥을 못 춘다. 가족은 이미 붕괴하고 소멸하기 때문이다. 혹시 이번 설날도 생각과 행동이 따로 논 심리전쟁의 장은 아니었을까? 결혼 얘기는 하지 않으리라는 작심에도 불구하고 속내가 드러나는 질문 같지 않은 질문으로 분위기를 불편하게 만들거나 기분 좋지 않은 싸움으로 끝나지 않았는가. 결혼은 언제 하니? 애는 가질 거니? 이런 질문은 언제부터인지 이미 터부가 되었다. 연애와 결혼, 출산을 포기한 '삼포세대'는 현실이다. 2023년도 여성가족부 통계에 의하면 1인 가구는 2022년도 34.5%에 달하고, 그것도 점점 더 늘어나는 추세에 있다. 결혼과 출산을 하지 않으면 가족이 붕괴하는 것은 당연하다. '가족'이 시나브로 사라지는데도 '가족주의'가 여전히 맹위를 떨치는 것은 쉽게 이해되지 않는 역설이다. 가족의 해체와 붕괴는 현재의 현실이고, 가족주의는 과거의 유산이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의 많은 지역에서는 결혼과 가족에 관한 법률과 사회적 관습이 새로운 현실에 뒤처져 있다. 변화한 현실에 맞게 법률과 제도를 개혁해야 하는데도 정부는 결혼과 출산을 장려하는 재정적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것으로만 대응한다. 전통적인 가족을 되살려 인구 감소를 되돌리려는 핵가족 정책은 실패하였다. 변화된 사회환경에서 아이를 낳고 자녀를 양육하는 것을 어렵게 만드는 장애물을 제거하려면, 우리는 가족에 관한 생각을 바꿔야 한다.전통적인 가족 개념은 역사적으로 결혼한 이성애 부부와 그들의 생물학적 자녀가 한 지붕 아래 함께 사는 핵가족 구조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가족은 부부를 중심으로 한 친족관계에 있는 집단이다. 이성이 아니면 결혼하지 못하고, 결혼하지 않으면 가족을 만들지 못한다. 21세기의 시대정신이라고 할 수 있는 개인화 추세와 개인적 성취에 대한 강조가 높아지면서 가족 구조가 다양해졌다. 주목할 만한 변화 중 하나는 편부모 가구, 자녀가 있는 동성 커플, 재혼을 통한 복합가족과 혼합가족 등 비전통적인 가족 형태의 증가이다. 보조 생식 기술의 발전과 대안적인 가족 형성 방법에 대한 사회적 태도의 변화로 인해 가족 구성의 범위가 더욱 넓어졌다. 입양, 대리모, 공동 양육 방식이 점점 더 널리 받아들여지면서 생물학적 친자 관계에 대한 전통적인 개념도 흔들리고 있다. 서구 선진국에서는 이처럼 다양한 대안적 가족 형태가 출현하고, 정부도 다양한 가족 형태를 수용하여 현대 가족의 변화하는 요구에 부응하는 유연한 정책을 펼치려고 노력한다. 문제는 사회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 가족 개념과 가족 관계의 경직된 구조이다. 동아시아 국가에서도 가족의 다양성은 증대하고 있다. 맞벌이 가구가 늘어나고 이혼과 재혼도 늘어나고 있다. 대만에서는 동성 결혼과 동성 커플의 자녀 입양도 합법화됐다. 부유한 국가들로 구성된 OECD에서는 현재 40% 이상의 자녀가 혼외 출산으로 태어나는데 한국, 일본, 대만에서는 그 비율이 5% 미만이다. 이들 국가에서의 출산율 하락은 주로 결혼 감소의 결과이다. 이런 상황에서 전통적 가족만 고집하는 가족주의는 오히려 가족의 해체를 부추긴다.우리에게 결혼과 가족은 더 이상 필수가 아니라 경제적 여유가 있어야 달성할 수 있는 일이 되어가고 있다. 가족의 해체를 개인주의의 탓으로 돌리는 사람들이 적지 않지만, 사회적 불안과 갈등으로 초래된 가족 관계의 변화는 결코 개인의 승리로 이어지지 않는다. 왜 개인주의가 우리보다 먼저 발전하여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친 서구에서는 합계출산율이 우리보다 훨씬 더 높은 것인가? 가족을 중시하는 것은 어느 문화나 똑같지만, 가족주의가 우리에게는 '가부장제'라는 제도와 동일시된 것이 커다란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우리가 전통적 가족을 강조하면 할수록 결혼과 출산을 어렵게 만드는 사회 구조는 깨지지 않기 때문이다.우리는 결혼과 출산이 이미 개인의 선택 문제가 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결혼을 이성애 커플로 제한한다면, 전통적 성 역할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한국의 낮은 출산율이 페미니즘 탓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것이 전적으로 여성의 책임이라는 전통적인 생각을 고수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아이를 낳도록 하려면 개인이 그런 결정을 쉽게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줘야 한다. 미혼 커플, 한 부모, 심지어 동성 커플도 가족을 꾸릴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될 때까지 여성들은 아내와 어머니라는 전통적 역할에 계속해서 반대할 것이기 때문이다. 현대 가족의 변화하는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는 전통적 가족주의가 오히려 가족 해체의 주범이라는 점을 인식하였으면 좋겠다.포스텍 명예교수이진우 포스텍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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