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석은 ‘ing’… 멈추지 않는 ‘김광석 신드롬’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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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4-02-07   |  발행일 2014-02-07 제33면   |  수정 2014-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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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시작된 ‘김광석 다시그리기길’ 프로젝트에 참여한 지역 미술인들이 350m 방천시장 둑길 옹벽을 김광석의 체취가 어린 다양한 인물 벽화로 꾸며 나갔다. 몇몇 인물화는 워낙 생동감이 있어 멋진 포토존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죽었던 김광석이 벽을 박차고 나올 것 같다. 그래픽=최은지기자 jji1224@yeongnam.com

세상은 온통 디지털음원공화국.

걸그룹과 아이돌 스타의 K-pop 스타일 노래만 득세한다. 서른이 넘으면 우리 가요시장에서는 퇴물이다. 이젠 CD도 팔리지 않는다. 웬만큼 인지도가 없는 가수는 음반을 내지 못한다. 콘서트도 유명하지 않으면 엄두를 못낸다. 우리 직업 사전에서 가수란 단어가 사라질 지 모르겠다.

그런데 희한한 뮤지션이 한 명 있다. 바로 ‘김광석(金光石)’이다. 1964년 1월22일 태어나 96년 1월6일 세상을 떴다. 죽은 제갈공명이 살아 있는 사마중달을 쥐락펴락하듯 김광석이 남긴 64곡의 노래는 최근 봉화처럼 더 맹렬하게 타오르고 있다. 김광석 길이 생기고, 팬클럽이 몇 개나 가동되고, 추모사업회까지 형성되고, 세편의 뮤지컬이 동시에 제작된 건 참으로 이례적이다. 하지만 어쿠스틱 음악의 부활로 착각해선 안 된다. 김광석이었기에 가능했다는 분석이다. 그의 애조어리면서도 섬뜩한 음색과 풍자적이고 유목민적인 생각이 먹고 살기 힘든 이 시대의 ‘누선(淚腺)’을 건드린 건지도 모른다. 그의 노래는 전혀 올드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노래는 ‘현재 진행형(ING)’이다.

하지만 김광석 붐의 본질을 제대로 음미할 수 있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다. 통기타 가수의 목숨이 갈수록 절벽으로 내몰리고 있는 걸 김광석이 좋아할 리 없다. 사람들은 김광석 흐름만 단물처럼 빼먹고 사라질지 모른다. 김광석 캐릭터 사업이 반짝 특수를 누릴 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뿐이라면. 이 땅의 음악밖에 할 줄 모르는 뮤지션은 무슨 밥벌이로 연명할 것인가. 어쩌면 김광석 팬은 그걸 더 고민해야 될 것이다. 김광석 노래만 똑같게 부르는 걸 자랑으로 여겨선 안 된다. 김광석도 기립박수를 쳐줄 만한 자기만의 포크뮤직을 탄생시켜야 할 것이다. 라이브소극장도 띄워야 한다.

그 출발은 ‘김광석 바로알기’부터다.

지금 우린 김광석이 태어난 곳을 대구 중구 대봉동으로 알고 있다. 어떤 이는 방천시장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방천시장에 그를 위한 벽화길이 있어서 그렇게 엮고 싶었을 것이다. 관련 평전 등도 대구에서의 김광석 발자취는 좀 등한시한 것 같다.

지난 5일 세무공무원인 김광석의 친형 광복씨(57)와 전화 통화를 했다. 그는 “어릴 때 대봉초등학교에 다녔지만 집은 옛 남도극장 근처, 봉덕동에 살고 있었다. 바로 근처에 봉덕시장이 있었다”고 언급했다. 그날 봉덕1동주민센터의 한 관계자도 “최근 봉덕시장 돼지국밥집에서 한 손님이 자신있게 김광석이 어릴 때 대봉동이 아니라 봉덕동에 살았다는 얘기를 했다”고 말했다. 현재 기자의 요청으로 김광석이 태어난 봉덕동 번개전업사의 정확한 위치를 찾고 있다.

김광석의 서울 대광고 학생증에는 그의 본적이 대구시 동구 범어동 268번지다. 3대가 살고 있었다. 집 앞에 개천이 흘렀고 범어교회가 있었다. 광석은 5남매(광나·광동·광복·광득·광석) 중 막내. 광동형이 군에서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김광석은 훗날 대구에서 사병생활 6개월로 끝났다. 4남매는 범어동 집에서 태어났다. 63년 분가한 아버지 김수영씨(2004년 작고)는 봉덕동으로 이사와 번개전업사를 차리고 거기서 막내인 광석을 낳는다. 광석은 아버지의 반골 기질을 닮는다. 아버지는 60년 5월7일 지역 초·중·고 교원노조를 결성하는 데 동참했다가 해직 당한다. 호구지책으로 시작한 게 전업사였다.

흥미로운 사실은 김광석은 자기 옆집에 있던 모란 양장점에 가수 박학기가 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지낸다. 김광석의 어머니 이달지씨(85)는 모란 양장점 집 여주인과 친한 사이.

67년쯤 가족은 서울 장충단공원 근처로 이사간다. 나중에 종로구 창신동으로 옮긴다. 아버지는 전업사 사장에서 관급 전기공사 사업가로 변신한다. 하지만 할머니 병환이 위중하자 광석과 누나 한 명만 데리고 대구로 내려온다. 72년 겨울, 광석은 대구 범어동 동도초등학교 4학년에 입학했다가 이내 서울로 간다. 광석이 통기타를 들고 대구에 나타난 건 87년 10월 효성여대(현 대구가톨릭대) 가을 축제 때다. 하얀색 프라이드를 몰고 왔다.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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