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회 달서책사랑 전국주부수필공모전] 대상 수상작 동상이몽 : 빚과 빛

  • 김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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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5-08-05   |  발행일 2015-08-05 제24면   |  수정 2015-08-05

삶이 바닥을 쳤다. 남편과의 술자리에서 안주가 사망보험금이었다. 누가 남았을 때 경제적으로 정신적으로 교육적으로 두 딸에게 더 도움이 될 것인가의 주제는 슬프지만 너무 현실적이어서 오히려 무덤덤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점점 썩어가는 속은 얼굴과 행동에 여과 없이 드러났다. 인생의 목적이 행복이었으나 그 행복은 희망 고문이 되었고, 우리 부부의 노력으로 어찌할 수 없는 현실 앞에서 좌절은 마치 예정된 수순 같았다.

살고 싶었다. 정말 제대로 살고 싶었다. 살길이 없었다. 도저히 현실에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 현실 도피로 선택했던 것이 책이었다. 그해 초, 동네 언니로부터 ‘달서 독서 마라톤 대회’를 완주하면 반짝반짝 빛나는 황금색 메달을 받는다는 얘기를 듣고 신청했던 것이 때마침 계기가 되었다. 이 생소한 이름의 대회는 읽은 쪽수가 미터로 계산이 되는 형식이다. 삼천 쪽은 삼천 미터, 오천 쪽은 오천 미터. 그 중 가장 긴 것이 무한도전으로 무려 이만 쪽 이상을 읽는 것이었다. 딱히 책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냥 아무것도 안 하다간 미쳐버릴 것 같아서 어떻게든 움직이려고 선택했던 것이 책이었을 뿐이다. 오늘 내일을 전전하던 내가 몇 개월 후에나 받을 수 있는 황금메달을 기대했다는 것이 지금 생각해도 우습기만 하다. 그런데 그 땐 그게 또 희망이 되었다. 가족단위로, 게다가 무한도전으로 신청을 했기 때문에 혼자서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어쩔 수 없이 남편까지 동참을 했다. 목표는 하나, 큰딸에게 생애 최초의 금메달을 우리 손으로 달아주자는 것이었다. 그렇게 남편과 둘이서 도서관을 드나들기 시작했다.

첫날 도서관 2층에서의 내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책장 앞에 서서 한참을 서성였다. 지금 이 상황에 책이 뭔가 싶기도 했다가, 그래도 책이라도 읽자는 마음이 심박수보다 빠르게 널뛰기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도무지 무슨 책을 읽어야 할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소설을 읽자니 인생이 너무 태평해 보이는 것 같고, 철학 책을 읽자니 안 그래도 골치 아픈 인생 머리만 더 아플 것 같고, 역사를 읽자니 뭔가 암기를 해야 할 것 같은 고지식한 습관이 나올 것 같고……. 참, 그땐 무엇 하나 시작하기가 힘들었던 것 같다. 그렇게 한참을 책장의 미로를 헤매고 다녔다. 책이 나에게 말을 걸어주기를 바라면서.

처음 내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김수림 작가의 ‘살면서 포기해야 할 것은 없다.’였다. 포기하지 말라는 격려가 아니라 포기할 것이 없다는 단호한 표현에 심장이 더욱 더 요동을 쳤다. 그녀의 이야기는 대다수의 자서전과 마찬가지로 진부했다. 어려웠고 힘들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성공했다. 경제적으로 성공했고, 가정적으로 성공했고, 동시에 명예까지 거머쥐었다. 뻔했다. 그래서 절대 읽지 않는 종류의 책이 자서전이었다. 나랑은 상관없는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책이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무시하고 지나쳐 갔는데, 결국은 얽히고설킨 미로 속에서 나는 제자리로 돌아왔다. 이미 책을 고른 남편은 늑장을 부리는 내게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차피 무슨 책이든 상관이 있냐는 눈빛을 쏘아 보내는 통에 어쩔 수 없이 손을 뻗어 책을 뽑았다.

그날 밤, 나는 안면도 없는 김수림 작가에게 흠씬 두들겨 맞았다. 정신 차리라고, 도대체 뭐가 문제인 거냐고 그녀는 계속해서 질책했다. 부모가 마음에 안 든다고 했더니 그 부모가 너를 버렸냐고 물었다. 경제적인 문제에 답이 없어 힘들다고 했더니 밥을 굶느냐고 물었다. 시력을 잃은 한 쪽 눈으로 일을 하려니 제약이 많다 했더니 청력 없이도 4개 국어를 하는데 도대체 뭐가 문제냐고 했다. 단 한 번이라도 나도 그랬노라고, 그 마음 안다고 공감해주기를 바랐지만 그녀는 냉정했다. 그런 정신 상태라면 살 이유가 없다는 단호한 그녀의 태도에 억지로 눈물을 뚝뚝 흘리며 반성을 해야 했다. 인생이 거지 같다고, 세상에 엿 같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입조차 못 떼게 했다. 그 모든 것은 그저 핑계일 뿐이었다.

밤사이 강제적인 회개를 하고 나니 어이없게도 웃음이 나왔다. 사는 게 뭐라고 그렇게 죽을상을 하고 다녔나 싶었다. 웃는 내 모습을 보니 또 웃겼다. 실성한 사람처럼 웃고 또 웃었다. 그러다가 울고 또 울었다. 애처로운 나를 위해, 이런 상황을 함께 해주는 가족들을 위해 울었던 것 같다. 하룻밤 사이에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었는데 그냥 마음이 편안해졌다. 몸에도 마음에도 멍든 자국 하나 없이 나를 정신 차리게 한 김수림. 그녀는 내 인생 가장 엄한 스승이었다.

한 명 두 명 작가들을 만났다. 작품이 아니라 작가를 만난다는 것은 내겐 참으로 신선한 경험이었다.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그들과 같은 공간을 느껴보고, 그들과 같은 생각을 공유해 본다는 것은 예전에는 미처 해보지 못했던 일이었다. 그러나 혼자 하는 책읽기에는 뭔가 한계가 있었다. 누군가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남편과 책 이야기를 하기에는 현실적으로 무리가 있었다. 각자의 책읽기는 각자의 도피처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그 공간은 서로 건드리지 않으려는 것이 암묵적으로 합의가 되어 있었다.

그즈음, 도서관에서 독서토론을 하는 모임을 알게 되었다. 청소년 문학을 주로 다루는 모임이었지만 토론의 내용은 인생 전반을 두루 다루고 있었다. 책의 내용을 서로 함께 모여 이야기를 하면서 각자가 밑줄 친 부분을 이야기하다 보면, 왜 그 부분이 자신에게 의미가 있었는지를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면 결국은 마음 깊이 있는 곳의 이야기가 밖으로 튀어 나왔다. 책이라는 매개물이 없었다면 결코 쉽게 꺼낼 수 없는 이야기들이 치부가 아닌 공유가 되어 서로에게 전달이 되었다.

나에게 가장 큰 위로가 되고 힘이 되어준 것은 그들도 나와 다르지 않다는 것이었다. 밖에서 보았을 때는 세상에 나만 불쌍한 사람 같았다. 나보다 인생이 꼬인 사람이 없어 보였다. 그러나 안에 들어와 보니 모두가 비슷했다. 작든 크든 각자의 고민 속에서 각자의 어려움 속에서 다들 꿈틀거리며 살아가고 있었다. 함께 웃고, 함께 우는 시간들이 많아질수록 내 삶은 점점 치유되고 있었다. 이제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 줄 수 있는 힘이 있다.

작년 이맘때나 지금이나 나의 경제적 상황은 전혀 나아진 바가 없다. 통장의 잔고도 카드의 한도도 여전히 나를 숨막히게 만든다. 아파트를 담보로 빌린 돈들이 나를 옭아매고, 카드 대출의 유혹에 끌려 적금 붓듯 쌓여있는 빚들 때문에 모든 것을 포기하려 했던 예전의 내가 아직도 있다. 그러나 나에겐 평생을 한도 없이 쓸 수 있는 카드가 생겼다. 그것도 가족 수대로 네 장이나! 도서관 대출 카드. 전국 어디에서나 사용 가능하고, 권 수의 제한은 있지만, 읽고 싶은 만큼 마음껏 빌려도 되며, 연회비도 따로 받지 않는다. 심지어 내가 돈이 없어 읽고 싶은 책을 살 수 없을 때는 도서관에 신청만 하면 된다. 이제 더 이상 돈 때문에 소중한 것을 포기하는 패배자는 아니다. 도서관의 무담보 단박대출, 그 속에서 나는 꿈꾸고, 끊임없이 움직이며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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